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와 선지자의 관계 / 박영진 / Canon & Culture 5권 2호 2011-가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59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었으나, 요한복음 내에서 초막절의 기능과 다윗 기독론의 의미를 놓친 사례로 남는다. 아래 글을 읽으면, 내 주장과 앞으로 연구 활동을 유추할 수 있다.

 

1. 요한복음 4장과 7장에 나타난 생수 모티프의 목적

2.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

3. 요한복음의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으로 유추해보는 청중

,

요한복음 서막에 나타난 로고스의 선재와 성육 / 서형석 / Canon & Culture 4권 1호 2010-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20

,

Andrea Taschl-Erber 박사는 요한복음 4장과 7장의 "생수" 모티프(living water motif)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the prophet like Moses)의 등장을 고대하는 유대 전승이 요한의 기독론으로 변형된 본문이라 주장한다.

먼저 그녀는 선지자 모세와 Water symbolism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의 핵심 주제 두 가지,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지혜의 역할", 즉 "토라", 그리고 두 번째는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진정한 예배"라는 주제를 강조하고, 7장에서는 "초막절"(Sukkot)과 "생수의 강"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지막으로 지혜 전승 1Ench 48-49의 메시아사상이 요한복음의 water symbolism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로서는 몇년전 요한복음 7장의 생수 모티프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어서, 그녀의 주장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내 글 "Reading John 7:37-39 in light of Zechariah 14"는 아카데미아에 공개되어 있다.

https://www.academia.edu/40255799/Reading_John7_37_39_in_light_of_Zechariah_14

졸고에서 스가랴 14장의 생수와 초막절의 의미를 다루고 요한복음 7:37-39과 연결 지어 해석하는 시도를 했다. 나는 스가랴 14장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7:37-39은 그 성취라고 주장한다. 7장에 관한 내 해석은 Taschl-Erber 박사와의 주장과 궤를 같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내 과제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들여다봐야 한다. 현재로서는 순간적인 발상을 정리하는 게 최선이겠다.

4장에서 중요한 주제는 "구원", "성령", "예배"이다. 이 주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의 죽음은 영생을 주며, 구원받은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된다. 여기서 나는 '7장처럼 이방인의 구원과 예배라는 주제가 스가랴 14장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관점에서 7장은 스가랴 14장과 연결된다. 4장과 7장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4장 역시 스가랴 14장과 연결된 가능성은...? 앞으로 연구해볼 과제이다. 하지만 4장이 스가랴 14장과 연결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스가랴 9-14장에서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이 아주 중요하다. 사마리아라는 배경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보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갈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4장과 7장 모두 선지자와 그리스도 칭호를 다룬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만약 4장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갈망하는 메시아사상을 가진 청중을 향한 메시지이고, 7장이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을 가진 청중을 향한 메시지라면, 요한은 예수를 모세와 다윗을 능가하는 메시아로 그리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면서 며칠 동안 고민하는 주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전개이지만, 이 방향이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아랫글을 읽어보면 내 사고 과정을 유추할 수 있을 듯싶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

요한복음의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으로 유추해보는 청중

 

Taschl-Erber, Andrea. "Chrstological Transformation of the Motif of "Living Water"(John 4; 7):Prophetic Messiah Expectations and Wisdom Tradition," In Reading the Gospel of John’s Christology as Jewish Messianism: Royal, Prophetic, and Divine Messiahs.  Edited by Benjamin Reynolds and Gabriele Boccaccini. Leiden: Brill, 2018.

,

신약학계에서는 E. P. 샌더스의 영향인지, 역사적 예수 연구 영향인지, 바울의 새 관점 파급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유대주의를 율법적 공로주의로 단정 짓지 않고 다양한 노선이 존재했다는 전제하에 연구를 진행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요한복음에 국한하면, 이 복음서는 오랫동안 헬레니즘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전제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유대주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추세 가운데, 헬레니즘의 영향보다 유대주의의 영향이 더 크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근래에는 요한복음을 유대주의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사설이 길었는데, 나 자신부터가 요한복음을 읽으면 읽을수록 헬레니즘의 그늘보다는 유대주의의 웅장한 배경이 보인다. 요한복음의 사상적 모태가 헬레니즘이냐 유대주의냐를 밝혀야 하는 이유는 청중을 가늠하는 주요 척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한복음이 유대주의의 웅장한 배경 아래 있다고 생각하므로, 청중 역시 유대인이나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상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은 요한복음의 청중이 이스라엘 역사에 해박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며칠 전에 작성한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록론"에서 더 나아가, 나는 요한의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세 기독론은 교회 내부에서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을 향해 예수가 모세보다 위대한 메시아(the better than Moses Christology)로 가르치고, 다윗 기독론에서는 다윗 계통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을 추종하는 유대인이나 유대계 기독교인이 많았을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역으로 다윗을 강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요한의 다윗 기독론에 대한 태도는 이스라엘 회복을 열망했던 열광주의자로 인해 성전 파괴가 이루어진 후 분위기를 반영했을지도 모른다.

,

* 이 글의 목적은 차후 연구를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례나 근거 제시는 빈약하다.

Joel Willits 박사는 요한복음에서 다윗 기독론(Davidic Christology)이 모세 기독론(Mosaic Christology)을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모세와 다윗 사이의 유사성을 인정하지만, 역대기 사가는 다윗이 모세보다 나은 인물로 묘사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를 다윗 계열의 메시아로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예수는 모세보다 나은 메시아(the better than Moses Christology)이자 다윗을 능가하는 메시아(the better than David Christology)이시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청중이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에 익숙하긴 했지만, 모세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집단(9:28-29)도 존재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오직 예수만이 진정한 메시아이시다"(20:31)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 예수는 모세와 같은 메시아도 아니고 다윗과 같은 메시아도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가르치는데 모세와 다윗을 모두 사용하신다. 예를 들어,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에서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라고 말씀하셨고, 나중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 cf. vv.15, 17)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누차 강조하듯이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가 사용한 목자-왕 전승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가 모세를 능가하는 메시아라는 가르침은 만나와 생명의 떡(특히, 6:22-25)에 잘 나타나 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이적을 경험했지만, 지도자 모세가 그 만나를 준 것이 아니다. 반면 예수는 생명의 떡이시다.

요한복음에서 모세와 예수 사이의 대조는 두드러지지만(최소한 1-7장), 다윗과 예수에 관한 대조는 명백하지 않다. 엄밀히 말해 대조는커녕 다윗 기독론 자체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몇몇 본문에서 예수 생애 당시 유대인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를 고대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7:42; 12:12-15). 목자의 죽음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인에게 익숙한 전승이 아니라는 증거이다(참조. 10:19). 예수의 죽음은 영생을 주기 위해서이다(10:28). 차후에 완성될 목자-왕 전승과 선한 목자 담론 사이의 비교 연구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과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 리라 기대한다. 이 정도로도 우리는 선언할 수 있다. 예수는 다윗을 능가하는 메시아이시다.

,

Beth M. Stovell 박사는 언어학적 방법론을 사용해서 요한복음 1장에 다윗 기독론(Davidic Christology)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이 옳다면, 1장과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을 연결 짓는데 수월해진다.

나는 1:29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을 예고하는 세례 요한의 선언 이전에 요한의 목자 기독론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하고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목자-왕 전승을 연결 짓기란 쉽지 않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Stovell 박사의 주장대로 1장에 목자 전승이 암시되어 있다면, 내가 시도하려는 대안 제시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모른다.

나로서는 긍정적인 단서이지만 검증을 해보지 않아서 조심스럽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박사 지도 교수가 Stanley E. Porter 박사와 Mark J. Boda라는 사실에 내심 기대가 되기도 한다.

,

내 박사 과정 연구 제안서에서 두 번째 질문은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본문은 "내어줌"으로 표현)에 관한 가르침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냐고 묻는다. 본문에 나타나 있듯이 유대인 청중에게 메시아의 죽음은 생소한 개념이다. 더구나 목자-왕 전승에서 목자의 죽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에 익숙한 유대인에게 승리의 구원자라는 개념은 익숙하지만, 메시아의 죽음을 통한 구원이란 개념은 생소하다. 다니엘 보야린은 『유대배경으로 읽는 복음서』에서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해가 이미 통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특히, 212-214쪽), 내가 볼 때 그의 주장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에서나 예수의 죽음이, 더 정확히는 부활 이후에나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없었다면 그의 가르침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의 실제 지시 대상이 역사적 특정 인물이었다는 견해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의 학자가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을 기원으로 본다. 이사야 53장의 빛이 얼마나 강력한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에 관한 해석부터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10장과 12장까지 줄곧 이사야 53장으로 결부된다.

다른 본문이지만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는 이런 경향을 반대한다(상상력의 전환, 68-69). 근거 자료는 모로나 후커(Morna Hooker)의 글을 제시한다. 요한복음 연구 내에서도 다른 견해는 존재하는데 극히 소수이다. 이 부분은 아직 연구가 진행되지 않아서 딱히 말할 내용이 없고, 혹 있어도 보안 사항이다. 지금은 대안 본문이 스가랴 13장 7절이며, 앞으로 나는 이 대안을 두고 씨름할 예정이라는 정도만 밝힐 수 있다.

사실 내가 박사 과정 지원을 위해 여러 교수에게 연구 제안서를 보낼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은 이사야 53장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 제안서의 무게가 이 논의에 실려 있지 않아서 별 고민이 없었고 내가 기여할 논의는 딱히 없어 보였다. 반면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신학부 소속 신약학 교수들은 다른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공관복음, 특히 마가복음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샤이블리(Elizabeth E. Shively) 박사는 '요한이 이사야 53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짐으로써 이 부분에 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열어주었다. 내 지도 교수로 내정된 데이비드 모핏(David M. Moffitt) 박사는 자신이 지도한 제자의 책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책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시 기존 견해와 다른 대안에 더 관심을 두고 밑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참고로 그의 박사 지도교수가 바로 리처드 헤이스이다.  이번 기회에 밝히지만,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교수진만큼 내 제안서를 두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교수는 없었다. 내가 이 학교를 최종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오늘 이 논쟁을 풀수 있는 방안을 발견한 기분이 든 탓이다. 내가 목자-왕 전승의 기원에 관한 논쟁을 다룬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거나 기존 견해를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간에, 나는 다양한 해석적 시도를 해볼 수 있는 분위기에서 공부할 예정이고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흥미와 도전 의식을 느낀다.

,

내가 요한복음 10장에서 다루는 질문을 12장에서 다룬 글을 읽었다.

예수의 죽음에 관한 기원.

흥미롭게도 저자는 나와 다른 본문을 선택했지만, 내가 의문을 제기한 기존 연구와 동일한 방식으로 논의를 다루었다. 그래서 나는 내 연구를 자연스럽게 12장으로 확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저자는 왜 요한복음 10장이 아닌 12장에 주목했을까?' 
저자는 논의해야 할 소주제는 다 언급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저자는 10장의 논의를 생각해보지 않고, 12장에 주목한 탓에 요한의 의도에 따른 거대담론의 흐름을 놓쳤다고 보인다. 

아니면 학계의 논의에 따라 해당 주제를 다루다 보니 새로운 논쟁점이나 새로운 기여점을 발견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

리처드 헤이스의 사도 바울과 이사야 53장에 대한 관찰은 나에게 유익한 참고자료를 하나 알려준다.

신약성경의 기독교 해석자들은 때때로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묘사를 바울 기독론을 이해하는 실마리로 보고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비록 이러한 접근 방식이 40여 년 전 후커[Morna Hooker]의 논문, Jesus and the Servant에 의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말입니다).각주4 바울이 이사야 53장을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읽었을 수 있지만, 이런 주장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울이 이사야서를 명시적으로 사용한 것이 그가 더 일반적으로 구약을 사용한 것처럼 이론의 여지없이 "교회 중심적(ecclesiocentric)"이라고 믿습니다. 그의 이사야서 읽기는 본질적으로 이방인들이 포함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사야서에서 이방인을 향한 그의 사도적 사역에 관한 근거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것에 대한 선지자적 예언을 찾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쿰란의 서약자들(Qumran covenanters)이 성경 본문을 그들 자신의 공동체 생활과 소명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각주4.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이 쓴 저서에서, 우리는 예수와 그 종의 동일시가 사도 바울, 사도 요한, 또는 히브리서 저자의 사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거의 찾을 수 없고, 그들에게 이것이 알려졌다는 증거도 전혀 찾을 수 없다"(M. Hooker, Jesus and the Servant: The Influence of the Servant Concept of Deutero-Isaiah in the New Testament [London: SPCK, 1959], 127). 

[출처] 리처드 B. 헤이스, 상상력의 전환, 68-69.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내어줌'(lay down)의 가르침이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나는 박사 과정에서 이 주장을 검토할 예정으로, 내 연구 제안서의 두 번째 과제로 선정되어 있다. 현재 내 예상으로는 이사야 53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사실 대안을 갖고 있지만 차후 연구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 현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지도교수가 동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모나 후커의 책을 읽어보면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헤이스가 인용한 후커의 글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

대선지서에서 다니엘서를 제외하고, 이사야서는 후대에 등장하는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와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다윗의 자손들 특히, 왕 같은 메시야가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왕으로 묘사되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여 다스리시는 온 열방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그가 친히 창조하신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출처] 이승현, 성령, 50-51. 


이 진술에서 이사야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 구원자의 성격. 두 번째, 구원의 대상.

첫 번째, 구원자의 성격.
이사야가 내다본 메시야는 다윗 계열의 왕이 아닌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다. 여러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한다. 회복 이후 이스라엘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서인지, 새 다윗 왕조를 재건한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사야는 이러한 흐름과 달리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라는 전례 없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두 번째, 구원의 대상.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야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신다. 구약은 민족주의적 성경이 강하다. 예언서에 반복되는 '심판'과 '회복'이란 주제는 대부분 이스라엘(북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는 남유다를 중점으로)을 대상으로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을 향해 있어서인지, 구원 역시 온 이스라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은 새로운 다윗 왕조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식과 달리 이사야의 새 창조에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했던 히브리인들에게 열방 구원이라는 개념은 낯설기만 하다.

이러한 독특성은 내게 큰 과제를 안겨준다.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내어줌'(lay down)이란 가르침을 이사야의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연결 짓는 견해가 많은 탓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요한이 이사야를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을 목자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 역시 유의해야 한다. 다윗 계열의 메시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새로운 왕국을 통치한다는 오랜 믿음과 달리 다윗의 후손이 열방을 구원하신다는 개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혀야 한다. 예수의 구원 대상이 유대인으로 한정되지 않고 이방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유의 깊게 관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관련글:
[연구주제/요한복음의 목자 은유] -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그리고 요한복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