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여전히 요한복음이 예수의 승천 기사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예수의 죽음이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공존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로서 승천 기사를 기록해야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으로서 깔끔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지상적 실체이고(1:1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조만간 떠난다고 예고하신다(16장). 예수께서는 자신의 천상 복귀를 말씀하시기 전에 보혜사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14:16ff). 또한 "보냄"에 대해서도 자주 말씀하신다(12:25ff).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빈 무덤 방문(20:1-18), 도마 사건(vv.24-29), 베드로를 향한 명령(21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와 도마를 통해 부활의 역사성을 설파하고, 베드로를 향한 질문과 명령에서는 제자도를 재차 강조하신다.

저자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을 공유한 집단이 성령강림 이후(post-Easter period) 형성된 공동체라는 증거가 곳곳에 배어 있다. 요한이 자신의 증언과 공동체의 현실 사이에 간극을 둔 이유가 무엇일까?

현 단계에서는 추정에 그치는데,
첫 번째, 공동체가 현재 상황을 공통으로 인지하고 있다면, 요한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학계에서는 요한 공동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요한이 소속된 공동체 구성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부터 현재 직면한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요한이 공동체의 우선순위에 집중해 자신의 복음서를 설파했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 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가르침은 제자도와 선교에 있다. 요한 공동체는 성찬을 비롯해 초대 교회에서 발견되는 예전을 향유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강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죄와 심판, 그와 반대되는 영생에 대해 자주 가르침을 주셨는데,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공동체에 요구되는 믿음은 제자도이며, 그 제자도는 선교라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요한이 베드로를 향한 세 번의 질문과 명령은 이를 확증한다(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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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읽고 있는 요한복음의 예수의 죽음에 관한 소논문에서 17:18-19를 10:36과 연결해서 관찰하는 부분이 있다.

17:18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저자는 "보냄"이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예수의 죽음을 조망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여겨진다. 글 자체에서 저자는 "hour"라는 열쇠로 해설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여기에 "관계"라는 주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예수와 제자"라는 두 관계를 바탕으로 설명해야 두 구절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생긴다.

나는 10장에 나타난 "목자 은유"와 "제자도"가 21장에도 나타난다고 보는데, 여기에서도 "보냄"이라는 주제가 나타난다.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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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으로 저작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두 기록이 동일한 저자에 의해 작성되었다 하더라도 내부 논리의 통일성을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둘을 별개로 두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 요한서신, 특히 요한일서를 인용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서 이에 관한 글을 남겨둔다. 나는 과연 얼마나 요한복음 내에서 논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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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örg Frey는 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에서,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은 수동적인 순종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택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요한의 십자가 신학이 바울과 루터처럼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고난과 영광이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예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수난의 복음(a Gospel of the Passion)이라고 할 만하다고 진술한다. 또한 그는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의 조명 아래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재해석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예수의 승천에 관한 의문이 해결된다. 왜 요한은 예수의 승천을 다루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천상적 기원과 복귀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16:28).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의 승천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앞서 "요한복음 1장과 21장: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라는 글에서 “요한복음의 처음과 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같은 관찰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Frey의 주장대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공존한다면, 우리가 흔히 예수의 영광을 상징하는 장면인 승천 기사를 다룰 이유가 사라진다. 이미 십자가 사건으로 충분하다.

요한복음에는 승천 기사만이 아니라 그 이후를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Frey의 주장대로, 요한 공동체가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그 해석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개연성이 높아진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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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y는 요한복음의 예수의 수난사화(Passion narrative)에서 예수는 공관복음과 달리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지적한다(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173-174).

이러한 관찰은 내 연구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에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다"(τίθημι; lays down, vv. 11, 15, 17, 18).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빼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린다고 강조하신다 (18절).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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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stament of Jesus: A Study of the Gospel of John in the Light of Chapter 17 / Ernst Kasemann / Wipf and Stock
https://www.amazon.com/dp/1498288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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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chen Flebbe는 “Feasts in John”에서 헬라어 ἑορτή의 용례를 근거로, 가나 혼인 잔치를 요한의 절기에 포함시킨다(자세한 용례는 109쪽의 표를 보라). 그는 가나 혼인 잔치가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으로서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한다(특히, 115쪽).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무엇보다,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와 묶어서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견고하지 못하다. 그가 제시한 표를 보면 가나 혼인 잔치와 다른 절기에 ἑορτή가 획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다는 근거도 없다. 그 다음으로, 요한이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와 함께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으로 묶었다면, 그 의미는 종말론적 구원과 거리가 멀다. 나는 그 사건의 의미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무리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본다.

가나의 혼례가 갖는 의미

앞서 요한은 예수의 존재와 사역을 대중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1:4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실제로 세례 요한의 선포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체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다(1:35-51).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로 작용한다.

요한은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고, 예수의 사역과 유대 절기를 통해 그의 정체성과 사역의 의미를 정밀하게 선포한다.

Flebbe, Jochen. “Feasts in John.” Pages 107–24. in Feasts and Festivals. CBET 53. ed. Christopher Tuckett. Leuven: Peeter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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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n Knochen soll gebrochen werden": Studien zu Bedeutung und Funktion des Pesachfests in Texten des frühen Judentums und im Johannesevangelium / Christine Schlund / Neukirchener Verlag


"Kein Knochen soll gebrochen werden": Studien zu Bedeutung und Funktion des Pesachfests in Texten des frühen Judentums und im Johannesevange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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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를 적대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유대 전통을 어길 뿐 아니라 신성모독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반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유대 메시아 사상이라는 렌즈를 통해 예수를 모세와 같은 기적의 선지자, 다윗과 같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 등으로 믿기도 했다. 오늘날 사도로 불리는 예수의 제자들 역시 예수의 십자가 도상과 부활, 승천 이후에야 스승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동시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관례가 아니었고, 그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예수의 공생애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요한은 예수의 구속사를 설파하기 위해 유대 절기와 안식일와 같은 유대 규례와 전통을 사용했다. 유대인들의 선지식을 사용해 각각의 의미를 떠오르게 하고, 예수의 구속사를 통해 의미의 재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흔히 '로고스 기독론'이라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예수의 선재성와 정체를 선포하며 시작한다. 예수의 구속사적 사역은 유대 관습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의 사역의 핵심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입을 빌어 그의 사역을 세상에 드러낸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유대 메시아 사상 가운데 메시아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은 전무하다. 그러나 예수의 사역이 그러했기 때문에 요한은 유대 절기 가운데 유월절을 밀착시킨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여섯 번의 절기 가운데 세 번이 유월절(2:13; 6:4; 11:55)이다. 나머지 세 번은 익명의 절기(5:1), 초막절 (7:2), 수전절 (10:22)이다.

요한은 유대 달력과 달리 자신의 의도대로 유월절을 세 번 배치하고 있으며, 특히 절기 시작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가르침과 연결하고 있고, 세 번째 유월절은 수난 사화와 연결하고 있다.

'어린 양' (1:29)의 정체에 관해서는 유월절과 연결하는 게 가장 타당해 보인다. 여러 근거 중에서 19:31–36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 19: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유월절 규례와 관련된 구절들이 떠오르게 된다.

출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민 9:12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특히, 민 9:11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1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어쩌면 세례 요한이 선포한 '하나님의 어린 양'은 유월절 어린 양과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수와 유월절 어린 양 사이에 존재하는 변형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어린 양' (1:29)과 이사야의 네 번째 노래에 등장하는 '고난받는 종'(52:13-53:12)을 연결하는 해석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선 나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고난받는 종'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고난받는 종'과 유월절 희생양과 연결짓는 해석에는 반대한다.

Paul M. Hoskins는 “Deliverance from Death by the True Passover Lamb: A Significant Aspect of the Fulfillment of the Passover in the Gospel of John”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1:29)과 유월절을 연결짓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요한복음에서 유월절과 초막절이 긴밀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이같은 접근은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그는 유대 절기의 기능에 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유월절과 초막절이 긴말하게 연결되는 이유는 당연히 예수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 유대 전통에서 유월절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구별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11:5–7; 12:1–15). 초막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므로, 초막절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후대에 초막절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기념하는 절기가 된다 (특히, 슥 14:16–21).

이러한 유대 전통이 예수에게 새로운 의미로 적용된다.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1:29). 이러한 선포에서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 양과 갖는 공통점과 차별점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다. 요한은 유월절을 통해 예수의 대속 사역을 강조한다. 또한 초막절, 특히 스가랴 14장과 연결해 종말론적 회복을 선포한다. 유대 메시아 사상은 이스라엘의 영토 회복 이후 왕이 등장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 도상과 부활을 통해 세상 죄를 무르시고 인류에게 종말론적 회복을 가져오신다. 유대 전통에서 유월절과 초막절이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듯이 요한복음에서도 대속을 통해 두 절기가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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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유대인의 명절’(5:1)을 부림절로 보는 해석자들이 대세라고 한다. John Bowman의 “Identity and Date of Unnamed Feast”는 그 중 하나이다. 영역본에 따라 이 절기를 ‘익명의 절기’라고 하는데, 저자가 특정 절기를 밝히지 않으므로 갖는 효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중/독자로 하여금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못하는 효과가 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총 여섯 차례나 절기를 언급하는데, 예외적으로 이 명절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청중/독자가 그 절기를 추적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에는 개연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절기의 특성을 연상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면, 요한이 절기를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요한은 굳이 절기를 언급한다. 그 이유는 요한이 의도하는 두 번째 효과라고 불수 있다. 요한은 청중/독자이 어떤 절기인지 바로 알 수 없어도, 절기라는 시기를 염두케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명절의 특성과 동떨어진, 그러나 요한이 반드시 서술하고 싶은 사건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대다수의 견해대로 저 절기가 부림절이라고 한다면, 요한에게 부림절이라는 다른 절기에 비해 큰 비중을 갖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절기 중에 일어난 베네스다 사건은 꼭 전하고 싶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은 절기와 그에 맞닿은 사건이 아주 중요한 해석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요한은 절기의 의미를 살려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유월절, 초막절, 수전절), 반대로 절기의 의미를 퇴색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도 한다(유대인의 명절). 현재 이 부분을 틈틈이 살펴보고 있고, 일부 내 박사 학위 논문에 포함되겠지만, 세부 사항은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난 이후 진행될 연구 과제로 넘길 예정이다.

부림절은 하만의 유대인 말살 정책로부터 구제된 민족적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만약 요한이 이 절기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면, 5장은 민족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5장은 베네스다의 행각 중 한 곳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볼 때 요한의 절기 사용 중 절기의 유래와 의미와 동떨어진 사건 진술은 이 곳이 유일하다. 그래서 나는 요한이 부림절이란 절기를 명시하지 않았다고 본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은 그 자체로 은혜롭다. 주변에 도와주는 이가 없어 서른여덟 해 동안 고통받은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의 긍휼하심은 분명 기억될 만하지만, 요한의 절기 사용과는 이질감이 있다.

오히려 요한은 이 치유 사건을 안식일과 연결시킨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강조하신다. 예수는 안식일을 초월하는 존재이시다. 그러나 예수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접하는 청중/독자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에 요한은 예수께서 절기를 준수하시며, 그때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유대 절기를 준수하는 분이시다. 또한 요한은 안식일이라는 규범은 그에게 족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Craig S. Keener는 자신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5-10장이 재판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는데(634-662쪽),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과 안식일 논쟁은 연속되는 이야기이며, 각각 베네스 치유사건은 유대인의 명절,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이라는 유대인들의 규범과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절기 사용과 예수의 정체성이라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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