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교회와 한국교회 과제물. 소감과 의문, 두 부분만 올린다. 제목은 <개혁 & 개혁>으로, 지금은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로 출판되고 있다.
소감
점차 높아지는 교회개혁에 대한 목소리. 도대체 교회개혁을 목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교회의 개혁을 말해야 합니까? 가장 첫 번째로 꼽아야 할 원인은 아마도 이 지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완벽한 교회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성경이 제시하는 완전한 교회의 기준을 따라 계속 개혁되어야 합니다.(p.9-10)
지금은 교회내부뿐 아니라 교회외부에서도 교회개혁을 원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외부의 압력이 더욱 강한 듯싶은데, 그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비난을 통한 개신교 정체성에 대한 공격인지, 아니면 참된 교회의 정체성 회복을 장려하기 위한 경고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외부압력의 본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언론과 여론에서 맹공격을 받고 있는 현실은 분명 한국교회가 자성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예전보다 더 활발해져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목소리에 힘주며 문제의 심각성을 들춰내고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런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많은 기독교인들과 문제의식을 향유하고 더욱 강도 높은 비판을 통해, 문제해결을 위해 힘써야 하지 않을까? 교회개혁을 위한 운동이 예전보다 활발하게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행해온 죄악들을 반성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살겠다는 고백이 회개라면,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야말로 회개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어야 할 시점인데, 그런 기미를 감지하지 못하겠으니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듯싶다. 더 심각한 점은 문제요인 당사자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조차 모른다는데 있다. 추악한 짓을 하면서도 반성은커녕 “그까짓 게 뭐가 대수냐?”고 반문하고 있고, 이런 자들이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종교개혁의 후계자로서 ‘종교개혁의 정신’대로 살아가지 않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정신’대로 살아가라고 요구한다면 그야말로 모순이 되겠지. 그렇다고, 개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개혁운동의 물결이 격렬하게 몰아칠까? 도저히 개혁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교회가 타락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시대의 루터를 기다려야 하는가?
암흑시대라 일컬어지는 중세기와 같은 현실이 도래하기 전에 참된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건 가망 없는 희망사항일까...
그렇진 않다. 드물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 회복을 꿈꾸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여전히 희망을 품어본다.
의문
이 책은 각 장 별로 중세 말기 로마 교회의 상황 →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 한국 교회에 대한 적용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을 중세 말기 로마 교회의 상황과 비교하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적용하도록 되어있지만, 개혁을 위한 우선순위를 잘못 매기는 실수를 저질렀다.
21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개혁과 부흥을 이루고자 한다면, 개혁자들의 복음적 교회일치 정신이 반드시 회복되고, 강조되며, 재적용되어야 한다. 분열된 교회는 세상을 향한 복음전도와 선교와 진리 변증의 작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 분열과 분리를 일삼는 교회가 어떻게 복음의 기본 정신인 화해, 일치, 관용 등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시키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색케 하는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128-129)
물론 교회 일치 운동이 지금보다 활발하게 일어나야겠지만, 그렇다고 개혁과 부흥을 선행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한 때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그 시기를 제외하면 가톨릭교회는 언제나 하나의 조직이었다. 분파주의에 젖은 한국교회와 비교했을 때, 내부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무리들이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조직으로 단결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중세 말기에는 큰 문제로 작용했다. 그 당시에도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진행되는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존재했지만,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단했다. 하나의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만, 그 어떤 조직이라도 언젠가는 정체하기 마련이다. 중세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인 물에는 이끼가 끼는 법이고 결국엔 썩고 말듯이, 그들도 부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교회가 일치한다고 해서 개혁과 부흥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때문에 무엇이 근본적인지 살펴보아야 보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또한 저자는 현상과 근원을 가려내지 않았다. 줄곧 현상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 그 근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현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행위 없는 믿음’이요, ‘이신칭의에 대한 맹신’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후일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칭의 문제에 비한다면 면죄부에 관한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면죄부에 관한 논제들의 게시가 종교개혁의 시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틴 루터가 그 운동의 주도적 인물이라고 널리 인정받고 있는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운동의 시작이 이러한 논제들을 게시한 그 여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1
여기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실질적으로 ‘이신칭의’ 교리에서 비롯된다. <95개조 논제>가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의 원동력은 ‘십자가신학’에 있다고 봐야 한다. 논제들의 각 항목은 사실상 ‘십자가신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터의 신학적 변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루터는 수도사 시절에 오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적으로 ‘십자가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신학의 전환’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신의 신학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고 ‘십자가신학’을 발전시키면서, 그 당시의 문제들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었고, 진리를 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의 정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신학의 전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신학적 전환이 필요한가?
마태복음의 구원론은 우리의 행위가 구언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 관건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분명 ‘행위구원’의 교리에 가깝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 행위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응답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의 응답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2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와 ‘십자가신학’이 중세교회의 ‘행위구원’에서 탈피하도록 지대한 기여를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병패가 만연하다. 오랫동안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고 믿어왔기에, 자신의 행실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상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행위 없는 믿음’이요, ‘이신칭의에 대한 맹신’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강조했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만연해 있는 ‘이신칭의에 대한 맹신’에서 ‘행위가 동반되는 믿음’으로 신학적 전환의 필요성을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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