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Verses 1–8 are a microcosm of chapters 41—48, with their use of the image of the highway and new exodus; whereas vv. 9–11 correspond to chapters 49:14ff., with the themes of the return of Yahweh as ruler in Zion, the voice of the messengers, and the victory of Yahweh’s arm.
- Childs, Isaiah, 302.

"아름다운 소식"이란 문구로 시작하는 40:9-11은 이사야의 이스라엘 회복 선포의 절정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를 양 떼를 돌보는 목자로 비유한다. 또한 목자의 보호는 49:14 이후에서 야웨의 귀환으로 선포된다.

이 같은 구조는 스가랴 9-14에도 나타난다. 9-13장이 악한 목자를 향한 심판과 선한 목자의 등장을 그린다면, 14장은 야웨께서 천하의 왕으로 등극한다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자와 왕 심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오랜 세월 동안 향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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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또한 우상숭배는 공의의 부재를 낳는다. 역설적이지만 우상숭배가 팽배하고 부정이 만연한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제사와 절기, 기도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행위를 역겨워하셨다 (1:11–15).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정의라고 외친다 (1:16–17).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정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에서 출발하며 의로운 행실을 가져오며 사회의 정의를 실현한다.

에스겔은 이사야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는 악인과 의인의 대가가 생명/영혼과 관련이 있다고 선포한다 (2:18–21 등). 또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해야 한다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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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서 심판과 축복의 도구로 (강, 비 등 관련 어휘를 포함하여) '물'이 동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판의 도구로서 '물'은 애굽을 향한 예언(19장)이 대표적이다.

5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7 나일 가까운 곳 나일 언덕의 초장과 나일 강 가까운 곡식 밭이 다 말라서 날려가 없어질 것이며
8 어부들은 탄식하며 나일 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마다 슬퍼하며 물 위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이며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문명을 꽃피웠으며 오랜 시간 동안 주변 국가에 영향을 끼친 패권 국가였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외교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곳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집트를 향한 심판은 물, 특히 나일강을 중심으로 선포된다.

축복의 도구로서 '물'은 심판 이후 회복될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35:6; 41:17, 18; 43:19, 20; 49:10; 58:11).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41:17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41:18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43: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스라엘은 물 공급의 영향이 지대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생명과 직결되는 '물'의 공급자로 선포한다. 동일한 이유로 이스라엘에서는 '비'가 매우 중요하다.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축복이 '비'와 연관되는 이유와 초막절이 주요 절기로 자리 잡은 이유 모두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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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다윗 왕권 사상을 옹호하는 선지자이다. 그는 다윗 왕권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동시에 후대에 나타날 통치자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37:35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에 반해 이스라엘을 심판할 고레스의 등장에 관한 예언은 상당히 이색적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왕/지도자에게 사용했던 '목자'와 '종'이란 칭호를 이방 왕 고레스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이런 사례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정당하며, 그 수단으로 고레스가 쓰임 받았다는 깨우침을 통해서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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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서 목자-양 은유는 총 다섯 번 사용되었다 (5:17; 13:14; 38:12; 40:11; 44:28).

5: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
13:14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각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38:12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의 용례는 네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목양의 상태에 따라 다른 상황에 놓인 양 떼의 상황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그린다 (5:17; 13:14). 두 번째는 목자의 장막 이동을 통해 하나님의 거처, 즉 성전 파괴를 예고하고 있다 (38:12).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약속이다 (40:11). 네 번째는 이례적인 이방 목자의 등장을 다루고 있다 (44:28).

이 같은 용례는 이사야가 목자를 하나님과 왕/지도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데 활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목자-양 은유 혹은 목자-왕 전승의 전형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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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 나타난 절기는 총 3번 사용되었다(1:14; 29:1; 33:20).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특히 1:11-15,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를 비교적 성실히 이행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들에게는 진정성이 없었다.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분노하시는 이유는 정의의 부재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서 자행되는 악의 근원을 정의의 부재로 정의한다.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성일(holy day)는 안식일이다(56:6; 58:13[x2]; 66:23).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즐거운 날, 존귀한 날로 구별하셨다 (58:13). 참고로 스가랴에서는 초막절을 명령한다(14:16-19). 또한 이사야는 월삭/초하루(New Moon)에 대해서도 말한다(1:14; 66:23).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66: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정리하자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절기, 안식일, 초하루를 지켜야 한다. 이사야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모세의 율법이 정한 모든 성일을 지키는 이상을 그렸으리라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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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에 관한 가르침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킨다. 이 진술은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인들 사이의 기대가 어긋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고대 문헌에 "목자-왕 전승"(Shepherd-King Tradition)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고대 근동에서 왕을 목자로 표현하는 관례가 있었다는 증거가 존재하고(대표적으로 함무라비 법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같은 전승이 오랫 동안 공유되었다는 증거가 곳곳에 나타난다. 

왕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둑과 같은 신으로부터 신적 권위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목자와 양 사이의 유비를 통해 왕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기도 한다. 목자가 양을 돌보고 양은 목자를 따르듯이, 왕은 백성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은 왕을 따라야 한다. 즉 목자-왕 전승은 왕권 사상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목자-왕 전승에서 목자가 양을 위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내용은 있어도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놓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례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목자의 "내어놓음"을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Craig S. Keener는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에서 그리스 문헌에 나타난 타인을 위한 고귀한 희생을 말한다. 엄밀히 말해 그는 목자-왕 전승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왕권 사상에서 자기 희생을 말하는 문헌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목자-왕 전승 사이의 차별성은 요한복음 내부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수많은 연구자들은 1:29, 36과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제시한다. 요한의 논리를 따르면 1:29, 36을 살펴봐야 하는데, 대다수 학자들이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양과 연결하고, 이사야 53장을 언급한다. 목자-왕 전승을 통한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려면, '어린 양'의 정체가 유월절 양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그의 죽음이 고난받는 종을 연상시키려는 목적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의 구조는 더 복잡하다. 기존 논의에 더하여 유대 절기(Jewish Festivals)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유대 달력을 비틀면서까지 유월절(Passover) 주기를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서술한 목적을 파악해야만 한다. 선행 연구의 대세적 견해가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는 듯 하지만, 세부적인 면모를 따져보면 이질성들이 발견되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적잖이 있다. 그 모든 원인은 요한이 기존 관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기독론적으로 비틀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에 대해서 말하자면, 대세적인 흐름과 달리  53장의 영향을 부정하는 견해 역시 존재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학자로는 Morna D. Hooker와 Richard B. Hays가 있으며 둘다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이다. Hays의 제자이자 내 지도 교수인 David M. Moffitt는 이사야 53장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흐름에 서있으며, 더 나아가 히브리서에는 '고난받는 종'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Moffitt의 동료인 Elizath E. Shively도 이사야 53장의 영향력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Shively는 이사야 53장의 논쟁에 관해 다루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Michael A. Lyons and Jacob Stromberg, Isaiah’s Servants in Early Judaism and Christianity: The Isaian Servant and the Exegetical Formation of Community Identity, WUNT 2 554 (Tübingen: Mohr Siebeck, 2021)에 실린 "The Servant(s) in the Gospel of Mark"을 보라. 

내년 초부터 논문을 쓰게 되면 내 입장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예상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사야 53장의 영향을 인정하되 기회가 된다면 이질성에 초점을 둔 글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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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들은 이방의 압제 아래 있다 (52:4). 이방 통치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켰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 (52:5). 수치스러운 상황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고자 한다 (52:6).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며 돌아다니는 집단이 있다 (52:7). 그들의 정체는 선지자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파수꾼"이라고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미리 내다보고 선포하는 역할을 적의 침입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파수꾼에 빗대고 있다 (52:8).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은 제사장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표현한다. 제사장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정결"이다 (52:11). 이스라엘 백성의 이동은 마치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상시킨다 (52:12).

하나님의 "종"이 등장한다. 그는 형통하고 받을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된다 (52:13). 하지만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의 모양과 모습은 사람의 기대와 다르다 (52:14). 그런데도 그는 이방 나라와 군주들을 놀라게 만든다 (52:15).

이스라엘 백성은 선포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본문에서는 "여호와의 팔")은 예상 밖의 인물을 통해 나타났다 (53:1). 종의 성장 과정은 보잘 것 없었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했으며, 고통을 받아도 마땅하다 여겨졌다 (53:2-4). 그러나 이사야는 그의 고통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며, 지금의 평화와 치유는 그가 감당한 형벌 덕이라고 말한다 (53:5). "종"의 가치에 대하여 청중과 선지자 사이에 크나큰 인식의 간극이 존재한다. 

선지자는 종의 고난이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와 죄악 때문이라고 다시 말한다 (53:6). 그 종은 곤욕을 당해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53:7). 어쩌면 그의 죄목은 군사적 반란을 위한 정치 선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종의 입장에서는 모든 근원이 하나님이시기에 항변할 수 없다. 종은 곤욕과 심문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 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53:8). 

그러나 선지자는 종이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의 무덤은 악인들과 함께 있다 (53:9). 이방 통치자들의 고문 사유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의 형벌과 죽음이 그의 범죄 때문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종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받으시고 자신의 뜻을 성취하실 예정이다 (53:10).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라는 문구에서 선지자의 이원론적 사고가 드러난다. 종의 육체는 상함을 받았으므로 율법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속건제물로 가치가 없다. 더구나 사람의 죽음을 통한 속죄라는 개념이 당시에 일반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이러한 전제를 뒤집어 엎는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종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이원론적 사고가 나타나고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의로운 종"이라 일컬어진다. 그가 한 일은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였다.  그는 선지자적 사역을 감당했고, 이방 통치자로부터 선동으로 오해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나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대속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3:11).

그는 나중에 보상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에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해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53:12).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종은 이방의 압제 아래 굴복하며 살아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한 선지자로 볼 수 있다. 유대 포로민들은 그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방 통치자들은 정치 선동으로 받아들여 그를 심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의 사역과 가치를 뒤집어 놓는다. 이사야의 눈에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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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은 세례 요한의 발화를 통해 처음 예고된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문구는 속죄와 관련해 이사야 53장의 "야웨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세를 이룬다. 53장에서 속죄의 역할과 "어린 양"이란 문구는 이러한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53: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더구나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구절에 의해 해석자들은 이런 경향을 강화한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사야 53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러한 유사성은 예수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사이의 연결에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는 현재 이사야 53장에 언급되는 야웨의 종을 메시아와 연결 짓지 않으며, 속죄는 이사야가 덧붙인 개념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 종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사야조차도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는 종의 고난이 갖는 의미를 깨닫고 난 후 유대인들의 '고난'이라는 관념을 뒤집는다. 1절의 표현은 하나님의 역사, 그의 의지가 군중들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통해 나타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구절에서 중요한 관점은 '예외성'이다.

요한복음 12장도 마찬가지이다. 유대 메시아사상의 스펙트럼이 넓었다고 해도, 예수의 가르침은 절대다수가 신봉했던 사상(들)과 결을 달리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여기서 큰 무리가 모인 이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왕은 다윗과 같은/다윗 계열의 왕(Davidic King)을 가리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다른 행보를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예외성'을 말씀하신다. 선지자 이사야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했던 무리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의 제자들만이 예수의 부활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한복음 12장 38절에 예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하신 이유는 '예외성'이라는 공통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과 자신의 사역을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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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야웨의 종’이라 칭하는 인물을 밝히려는 시도가 끊임 없이 지속되고 있다. 유력한 학자들에 의해 모세나 스룹바벨 등 여러 인물들이 언급되었지만, 그들의 역사적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강하지 못하다. 나는 이사야의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모세부터 제2성전기 시대를 통틀어 저자의 진술에 부합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해석적 난맥에 의해, 역사적 인물을 밝히려는 시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으로 해석하는 추세로 전향되지 않았나 싶다. 현재로서는 ‘야웨의 종’을 ‘이스라엘’로, 화자를 ‘열국’으로 구분하는 입장이 제법 영향력이 있어보인다. 이러한 입장의 변형(?)으로는 ‘야웨의 종’을 ‘이스라엘’로 보지만, 화자를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국가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해 있고, 역사적으로 그들이 번영한 시기는 손에 꼽을 정도로 희박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열국을 위해 희생당했다는 해석은 무리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고난과 분열, 멸망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열국을 의존하는 외교 정책 등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열국에 대한 평화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열국을 향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이 있는데, 변혁의 시대에 따른 사고 전환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사야조차 이런 선포를 했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현 추세는 집단적 해석이 더 강세로 보이는데, 연구자는 해석적 다양성을 염두해야겠고, 나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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