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안식일 논쟁이 촉발된 베데스다 연못 치유 사건(5장)에서 예수의 변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7절)라는 말씀에서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치유 사역의 정당성을 위한 근거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구속 사역을 선포하려는 의도로 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the Father-Son relationship) 혹은 '하나됨'(oneness)으로 묘사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자발적인 순종으로 실현하신다. 아버지의 계획과 아들의 실행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큼이나 하나를 이룬다. 따라서 예수는 아들로서 구속자와 심판자로서 권한을 갖는다.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예수를 정죄하지만, 도리어 예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유대인들의 불신을 지적하신다 (45-47절). 예수의 베데스다 연못 치유 사건에서 촉발된 안식일 논쟁은 이후 초막절 기간에 유대인을 마주하며 재점화된다. 안식일 예외 규정 중 하나가 할례이다 (7:22-23). 예수는 모세를 초월하는 존재이며, 안식일의 의도에 따라 예수의 치유 사역은 정당성을 갖는다 (23절).

결국 안식일 논쟁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그의 구속 사역을 선포하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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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박해가 시작된 계기는 베데스다 치유 사건이고, 그 이유는 안식일 위반이다 (5:16). 안식일은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출 20:8~11)이며, 위반은 투석형에 처했다 (민 15:32~36).

예수께서는 안식일 위반이라는 유대인들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시는데 그의 주장은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고 박해를 넘어 살해 위협으로 바뀌게 된다(17~18절).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유대 절기를 성실히 준수하시지만, 유독 안식일은 유대인의 관습에 위반하는 일을 하신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하신 말씀도 정황상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신 이유는 그가 안식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식을 취하셨던 안식일에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예수의 답변은 어폐가 있다.

안식일은 본래 휴식을 위해 제정되었고, 후대에 예배로 변화 혹은 확장되었다고 판단된다. 가령 이사야와 에스겔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한다.

이사야 66: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에스겔 46:3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이 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이며 

모세 시대에는 사람의 안식에 중점이 있었으나, 성소에 관심은 유지되어야 했다.

레위기 19:30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4: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안식일에 모든 일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예수께서 그 예로 할례를 언급하셨다.

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안식일 베데스다 치유 사건에서 유대인을 향한 예수의 답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통해 생명과 심판을 말씀하신다. 예수의 변론이 안식일 전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만약 안식일과 구원/심판을 연결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이 그것이 될 수 있다 (신 5:12~15).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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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자가 선한 목자 담론(10:1-21)의 배경이 초막절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은 담론의 배경을 언급하지 않거나 7장(2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에 한정한다.

요한 고유의 절기 사용 방식을 고려하면, 7-10장은 초막절 내러티브로 볼 수 있으며, 10장 내러티브의 흐름을 봐도 초막절을 배경으로 설정할 수 있다.

10:22-59는 수전절 내러티브이다(22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앞서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자기의 자발적인 죽음을 예고하셨다. 선한 목자 담론에서 촉발된 예수의 정체에 관한 유대인 내부 논쟁(19~21절)은 그리스도론(24절)으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다시 목자-양 유비를 사용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을 주장하신다(25~30절). 

선한 목자 담론과 수전절 내러티브는 동일하게 목자-양 유비를 통한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 선포와 그의 권위를 다룬다. 초막절이 성전 봉헌, 수전절이 성전 회복이라는 핵심 사상으로 연속성을 갖고 있듯이, 선한 목자 담론은 선포, 수전절 내러티브는 해설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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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이름을 적시하지 않은 절기는 '유대인의 명절'(5:1)이 유일하다. 난 부림절의 유래와 요한의 절기 사용이 동떨어져 있으므로, 요한이 의도적으로 절기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관련 글: 요한복음 5장의 유대인의 명절과 안식일의 유기적 관계)

그러나 유대인의 정체에 관한 Ruben Zimmermann의 “The Jews”: Unreliable Figures or Unreliable Narration?을 읽으면서, '유대인의 명절'이 '부림절'이라는 해석이 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림절은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서 벗어난 기쁨을 기념한 잔치에서 유래한다 (에 9:17-22).

그러나 요한복음 5장은 예수와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갈등의 시작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이유이며 유대인들은 박해로 반응한다 (5:16). 이후 유대인은 예수의 대적자로 묘사되고, 둘 사이의 갈등은 심화하며, 결국 예수의 죽음까지 이르게 된다.

부림절이 유대 민족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예수의 구속사와 맞닿아 있지만, 에스더 시대의 유대인이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났던 것과 달리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했던 유대인들은 영생을 베푸시는 예수를 대적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4)

요한이 부림절을 적시하지 않은 이유는 익명성으로 청중과 독자의 호기심을 북돋우고, 절기의 기원과 예수의 사역에 대적한 유대인의 역설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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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을 에스겔 환상의 네 동물 중 독수리로 규정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인 복음서라는 특징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 심오하다. 예수를 태초의 하나님과 존재했던 로고스로 규정하고 그의 성육신을 선포한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은 고기독론(the high christology)으로 분류되는 남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혹자는 요한의 고기독론에 최상급 the highest를 사용하기도 한다.

요한복음 기독론은 독특하다. 내 연구 주제인 선한 목자 담론만 하더라도, 예수는 제 죽음과 부활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죽음을 수동적으로 그린다면, 요한복음은 그것을 예수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묘사한다.

요한의 고기독론은 요한 공동체를 구별하는 신학이기도 하다. 혹자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유대인이 요한의 고기독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해석은 반셈족주의(=반유대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극단적인 반항으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요한의 고기독론이 요한 공동체와 유대인을 가르는 지표로서,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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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장에 앞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대속죄일의 과업을 성취하셨다는 주장과 그 근거를 일부 인용한다(인용 표기는 *). 글의 출처는 Gerald O’ Collins and Michael Keenan Jones, Jesus Out Priest: A Christian Approach to the Priesthood of Chris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24–26이다.

*요한복음에서 성전과 제사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대체한다. 요한은 성전 청결 사건(2:13-22)을 초반에 배치하고,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를 통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선포하신다(4:21-24).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주요 절기의 의의를 성취하신다. 그중에서도 유월절은 예수를 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 서두의 세례 요한을 통한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 선포는 예수께서 제사장의 중재직을 감당한다는 진술이다.

역설적으로, 예수의 제사장직과 대속죄일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요한이 예수를 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시인한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예수, 전문용어로 기독론을 이해하려면 로고스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간파해야 한다. 요한은 서두부터 예수를 태초의 말씀,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 하나님과 동등한 분, 창조 사역, 생명, 사람들의 빛(1:1-5)으로 묘사한다. 이어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1:34)로 선포한다.

요한복음 기자에게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한에게 예수를 묘사하는 칭호로 "하나님의 아들"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것도 자발적인 순종으로 성취된다고 기술한다.

요한복음의 절기는 매우 독특한 기능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월절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유월절이 예수를 제사장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을 연상하도록 의도하지만, 동시에 유월절과 일치시키지 않도록 유도한다. 만약 예수의 죽음과 유월절과 일치시킨다면, 내 판단에 의하면 그것은 요한의 의도를 오독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은 유대 절기 중 대속죄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 칭호는 중재자로서 제사장을 연상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이 칭호는 예수의 사역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드러내는 장치이지 예수의 제사장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칭호는 예수의 왕권과 관련이 있다.

결론은, 요한복음은 예수를 제사장으로 묘사하지도, 대속죄일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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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 이후 진행할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신약의 목자 기독론"이다. 근래 이와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며 관찰한 일부를 적어본다.

사복음서에서 대표적인(혹은 내가 발견한) 목자-양 은유 본문은 마태복음 9:36–38; 15:21–28; 마가복음 6:30–34; 요한복음 10:1–21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복음서를 공관복음서와 네 번째 복음서로 나누는데, 공관복음서 사이에는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그와 반대로 네 번째 복음서의 독특성이 두드러진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자-양 은유도 둘 사이의 차별성이 나타난다.

1. 마태복음 9:36–38과 마가복음 6:30–34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먼저, 두 목자-양 은유를 살펴보자.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각 본문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마태와 마가의 목자-양 은유는 "목자 없는 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예수의 불쌍히 여기심"이 저자의 관심사이다. 독자가 간과하지 말하야 할 또 다른 저자의 강조점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마태와 마가는 목자-양 은유와 예수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1.1. 마태복음 15:21–28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마태의 다른 용례는 15:24에 나타난다.

마태복음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는 "이스라엘 집의 읽어버린 양"이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앞서 9:36의 "목자 없는 양"과 동일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2. 요한복음 10:1–21
요한의 목자-양 은유는 마태와 마가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의 전형적인 용례에 따라 양 떼를 보호하는 목자의 직무를 강조한다. 하지만 요한은 전통을 벗어나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을 선포한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를 통해 성도의 영생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라 선한 목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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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초막절은 추수를 완료하고, 모든 백성이 모여 하나님께 한 해 수확을 감사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축제이다. 요한의 예수는 초막절을 대체 혹은 성취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의 사역에서 무엇이 더 이상 초막절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지 궁금하다.

초막절 내러티브(7:1-10:21)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단어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생명'이다. 예수의 죽음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 이 두 주제가 초막절 내러티브에서 맞물려 있다. 예수의 죽음과 신자의 생명은 성령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초막절 내러티브 초반에 성령이 강조된다.

예수의 죽음과 초막절을 연결 짓는다면, 예수의 죽음은 곧 영혼 추수의 완성에 비견된 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증명해야 할 과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한 목자 담론이 예수의 죽음 선포의 절정이라고 보고 있다. 선한 목자 담론을 끝으로 초막절 내러티브가 매듭 지어지고, 수전절 내러티브로 이어지고, 11장에 나사로의 부활이 배치된 이유는 요한의 의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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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3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양의 흩어짐을 야기한 목자의 악행은 심판의 주요 원인이며, 반대로 새 목자는 양을 한데 모은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리의 습격에 삯꾼은 달아나지만,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12절).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과 구약 성경의 대조 기법은 참 목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참 목자의 등장을 고대하도록 한다. 하지만 청중이나 독자가 간과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절)는 말씀이 유례 없는 용례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어서, 예수의 죽음 예고를 당연시할 수 있지만, 목자와 죽음은 동일 선상에 위치하지 않는 단어 군이다. 더구나 예수는 당신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선한 목자의 죽음 예고 (14-15절)는 유대 사상이나 그리스-로마 문화로 설명할 수 없는 선언이다.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 선언은 하나님의 계명 (18절), 신학적 용어로 ‘구속사’로 해석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계명)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권세)으로 실현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예고하시려고 전통적인 목자 은유를 도입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고대 근동,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 등에서 유례 없는 용례를 목자-양 은유에 구속사를 결합하여 착안하셨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목자-양 유비와 구속사를 분별하여 읽어야 한다. 더하여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언약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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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헬라인의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 용어 헬라인은 두 구절에 등장합니다. 첫 구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지 못할 장소로 헬라인들이 흩어져 사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짐작합니다 (7:35). 두 번째 구절은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 헬라인 몇 명에 주목합니다 (12:20).

요한복음의 주요 청중은 헬라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특히 10장에서 예수의 선한 목자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에 반응하는 무리는 유대인입니다. 먼저 분쟁은 유대인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19절).예수를 향한 질문은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24절). 다시 말해 선한 목자 담론에 대한 분쟁은 유대인들의 목자-양 은유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는 암시입니다. 다른 기회에 다루겠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목자-양 은유는 대체로 왕권 사상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정체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지만, 여기에서는 청중의 구성원을 파악하기 위해 헬라인과 유대인를 살펴보는 선에서 머물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이 헬라인을 간과하지는 않습니다. 헬라인은 단 두 구절에 등장하지만,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흩어져 사는 헬라인들에게 전도하려는가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뒤이어 예수의 죽음과 성령의 임재를 예고하는 7:37-39과 연결해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의 기원으로 여러 구절이 언급되지만, 저는 스가랴서 14장을 배경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가 이뤄지는 시대에 헬라인도 함께 성전에서 예배합니다.

두 번째 구절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다가올 때 헬라인 몇 명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가 예수를 만나고자 청합니다. 이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인도 예수의 영광을 누릴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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