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목자-양 비유에서 다윗을 이상적인 왕으로,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즉 종말론적 구원을 실현할 지도자로 등장한다. 또한 다윗의 후손은 그의 종말론적 사명으로 인해 메시아로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이 같은 묘사는 일률적이지 않으며 변형들이 나타난다.

왕이란 칭호는 이스라엘과 이방 모두에게 적용된다 (12:20; 13:40; 15:16, 20, 33). 칭호 자체는 중립적이다. 저자는 목자나 다윗에게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목자-양 비유는 다윗과 연결되지 않는다. 저자는 목자-양 비유를 통해 목자를 양 떼를 늑대 무리에 넘겼다고 표현하여, 이스라엘의 부패한 왕 혹은 지도자의 실상을 폭로한다 (5:18). 그러나 본서에서 목자와 왕을 동일 선상에서 다루는 구절은 없다.

아들의 등장과 행동에 관한 묘사는 그를 초월적 존재처럼 남다른 면모를 부각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13:32, 37, 52; 14:9; '그 사람'에 관해서는 13:1-13을 참조하라). 그는 하나님의 열국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수행하는 기간에만 지상에 존재한다. 그의 과업은 마치 다윗의 후손을 연상시킨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된다 (7:28, 29). 본서에서 메시아는 목자-양 비유나 왕, 다윗(의 후손)과 연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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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4서에서 '아들'은 총 네 번(13:32, 37, 52; 14:9) 사용된다. 이 글에서 아들에 관해 다루기 전에, '인자'(the Son of Man)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본서에서 인자는 단 한 번(6:1) 등장한다. 

6:1 And HE said to me, "At the beginning of the circle of the earth, at first by the Son of Man, and afterwards I MYSELF. For the earth and the lands were created, and before the portals of the world were in place, and before the assembled winds blew,

이 구절에서 인자는 지상 창조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인자는 지상적 존재가 아닌 천상적 존재로 창조 사역에 개입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이다. 이로써 인자는 아들과 다른 존재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아들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장면은 세 번째 환상이며, 그는 메시아로 묘사된다 (7:28, 29).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여하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인간이다. 아들과 다윗이 가진 공통점이라면, 그 둘 다 열국 심판이라는 동일한 과업을 시행한다.

7:28 For MY Son the MessiYah shall be revealed with those that be with Him, and they that remain shall rejoice within four hundred years.
7:29 After these years shall MY son MessiYah die, and all men that have life.

아들이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여섯 번째 환상이며, 그곳에서 세 번(13:32, 37, 52) 발생한다. 첫 번째 구절에서 아들은 앞서 본 '한 남자'(a Man)와 연결하고 있다.

13:32 And the time shall be when these things shall come to pass, and the signs shall happen which I showed you before, and then shall MY Son be revealed, whom you saw as a Man ascending.

일단 여기에서 두 존재를 동일 인물로 가정하고,  그 남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사람과 같은 형상'(the figure of a Man)을 하고 있으며, 바다의 중심에서 등장한다 (13:2). 그는 등장 이후 줄곧 '그 사람'(the Man)으로 지칭된다 (13:3, 5, 12).

13:2 And I looked, and behold, this wind made something like the figure of a Man come up out of the heart of the sea.

그는 수많은 무리(a multitude of men)와 전쟁을 치르는데, 그의 무기는 일반적인 전쟁 도구가 아닌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이다 (13:5~11). 대결 이후 수 많은 사람이 그에게로 나오는데 그 모습은 제각각이다 (13:13).

13:13 And there came many people to Him, whereof some joyful, some sorry, and some of them bound, and some were bringing others as offerings.

새로운 존재의 등장은 마치 그를 인자와 같은 천상적 존재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담긴 듯하다. 만약 이 단락이 묵시적 표현이라면, '그 사람'과 '인자'는 다른 존재이며, 다만 그 사람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그의 업적은 수많은 무리와 전쟁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환상에서 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시 아들로 화제로 돌아가자. 여섯 번째 환상에 나오는 아들의 두 번째 언급은 사악한 열국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다.

13:37 And He, MY Son shall rebuke the wicked inventions of those nations, which for their wicked checedlessness life which have fallen into the tempest; (this was symbolized by the storm)

마지막 사례는 그 사람이 어떻게 바다 가운데서 등장할 수 있냐는 에스라의 질문(13:52)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에서 아들이 언급된다.

13:52 And HE said to me, Like as you can neither seek out nor know the things that are in the deep of the sea: even so can no man upon earth see MY Son, or those that are with Him, except in the time of His day.

이 구절에서 '그 사람'과 '아들'은 동일한 존재를 가리킨다.

아들이 등장하는 세 번째 장면은 일곱 번째 환상이며, 그곳에서 한 번(14:9) 나타난다.

14:9 For you shall be taken away from all, and from henceforth you shall remain with MY Son, and with those such as be like you, until the times are ended.

이 구절에서 아들은 남은 자들과 함께한다. 다만 그 기간은 시간이 끝날 때까지이다.

이제 도달한 결론적으로 아들은 메시아이며, 죽음을 경험하는 지상적 존재이다. 그의 사역은 다윗과 동일하다. 본서에서 아들과 다윗을 연결하지 않지만, 둘 사이의 유사성은 둘이 동일 인물이라고 짐작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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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4서에서 '메시아'란 단어는 두 번 사용된다(7:28, 29). 이 메시아 본문에서 저자의 독특한 사상들이 발견된다. 

첫 번째는 메시아의 통치와 죽음이다.

7:28 For MY Son the MessiYah shall be revealed with those that be with Him, and they that remain shall rejoice within four hundred years.
7:29 After these years shall MY son MessiYah die, and all men that have life.

저자는 '메시아'를 '나의 아들'이란 용어와 같이 사용한다. 메시아의 정체는 실제로 야웨의 아들일 수도 있고, 역할에 따른 관계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대 메시아사상과 비교하면, 에스라 4서의 메시아는 종말론적 구원 사역의 주역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야웨의 백성을 백 년 동안 통치하며 그 동안 백성은 메시아를 통해 야웨의 선하심을 보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죽음을 맞이하며, 백성은 생명을 유지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메시아의 죽음 이후 피조세계가 창조의 시작으로 돌아간다고 서술한다.

7:30 And the world shall be turned back to primeval silence the seventh day, as it was at the first beginnings: so that no one shall remain.

저자는 메시아의 통치 이후 참된 평화가 가득한 세상이 도래하며, 창조 세계의 원형을 회복한다는 종말론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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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견해와 달리, 나는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이 갖고 있던 전형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조하라.

가나의 혼례가 갖는 의미

요한복음 1-2장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믿음과 예수의 사역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 또 등장한다. 그는 바로 니고데모이다.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는데, 그 이유를 본인이 직접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밝힌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거듭남"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다시 말해, 유대 메시아 사상을 걷어내지 않으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2:11)과 나다니엘이 예수를 선생으로 보는 이유(3:2) 모두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라는 관념에 기인한다. '어머니'라는 관계 때문에 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리아의 요청에 대한 직각적인 대답에 예수의 태도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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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landsson, Seth. "Isaiah 52:13-53:12: The Messiah's Suffering and His Vicarious Atonement." Wisconsin Lutheran Quarterly, 113 no. 2 (2016): 83-95.
http://essays.wisluthsem.org:8080/handle/123456789/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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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에 예수의 첫 표적으로 기록된 가나의 혼례를 유대 메시아 사상에 입각하여 '종말론적 신랑되시는 예수'를 주장하는 해석자들이 있다. 예수는 혼례의 주인공인 신랑이 아니라 참석자이므로, '종말론적 신랑'이라는 주장은 해석자의 신학적 틀을 과도하게 주입한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본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예수의 첫 표적이 갖는 의미에 달려 있다.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와 동행했던 제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본문의 흐름을 따르면, 혼례 이전까지 5명의 제자가 있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제자(1:37). 이 둘 중 하나는 안드레로 밝혀지며,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가 추가된다(1:40-42). 후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더해진다(1:43-51). 여기까지 최소 5명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표적으로 인해 그를 믿었다. 즉 이들은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다.
 
또한, 이 무대에서 잊혀질 수 있는 예수의 어머니를 기억해야 한다(2:1-5).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잉태를 다루지 않았다. 전문 용어로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어머니를 부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구절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를 특별한 존재로 믿고 있었다는 단서로 작용한다.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를 어떤 존재로 믿었는지 명백히 밝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예수가 떨어진 포도주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녀 역시 예수를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로 바라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유대 메시아 사상을 전복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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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주제(=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의 영향 탓인지, 요한복음을 분석할 수록 이 복음서가 구전되고 기록되었을 당시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고 그려진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과 '하나님의 아들'(1:34)이라는 모순적 표현이 중첩된다. 특히 요한복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라는 문구를 통해 예수의 죽음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문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저작 연대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본다. 성전 중심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파괴는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하는 중요한 의도가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유대인들은 오랫 동안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 1세기는 헤스모니아 왕조 이후 메시아 사상이 고취되어가던 시기였다. 이때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가르쳤고 실제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메시아 사상의 정점에 닿아 있는 다윗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의 기대를 자극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나는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이 그 정점에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특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21:15-17)고 명령하신 부분이 인상 깊게 남는다. 또한 예수께서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살아남는다. 그는 사도들의 순교에도 살아남아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한다(21:24-25).

예수의 부활을 붙들지 않는다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암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어쩌면 예수의 생애를 공유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와 동일한 좌절감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이런 총체적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설득해야했다. 요한복음 1장이 로고스 기독론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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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께서는 일관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셨으나, 청중들은 도무지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도리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이적을 베푸는 메시아에 대한 환상이 커져만 간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구절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된 다윗의 후손, 즉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로 간주했다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사건을 해석하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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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선한 목자 담론'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10:1-21에 이어 10:22-42에도 목자-양 은유가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앞서 강도와 목자의 구분, 목자의 희생 등을 가르치셨고 (1-18절),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분쟁(19-21절)이 벌어졌다. 이 분쟁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확답을 얻고자 질문을 던지고 예수께서 대답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22-42절).

유대인의 질문은 "당신이 ...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요한복음은 모세와 율법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Davidic messianism)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사상을 통해 군중이 기대하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상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크다. 아마도 이 '그리스도'라는 언급은 오랫 동안 예언되어 온 다윗의 후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해도 종교 심판을 받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신다(25절). 더나아가 목자-양 은유를 사용해 그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26-27절).

그리고 다시한번 목자-양 인유를 통해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신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시며, 우리는 그를 따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어긋한 대화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 즉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독립을 이룰 군사적 메시아(24절)와 예수의 긍극적인 사역, 즉 영생을 주는 것(28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이 관계로 예수께서 답을 마치신다(28-30절).

여기서 배경으로서 '수전절'(22절)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절기는 문맥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수전절에 관해서는 구약과 중간기 문헌을 살펴봐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짥막한 인용으로 대신한다.

"수전절의 제정은 제1마카비서 4:59에서 묘사된다. ... 그런데 그것의 목적은 이제 안디옥으로부터의 구출과 성전 예배의 갱신을 기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383).

유대인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사이에 수전절의 기능이 드러난다. 즉 영적 죽음에 놓인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더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지상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10:22-42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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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the Messiah? The Historical Background to Isaiah 45:1.
https://www.academia.edu/2450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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