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Verses 1–8 are a microcosm of chapters 41—48, with their use of the image of the highway and new exodus; whereas vv. 9–11 correspond to chapters 49:14ff., with the themes of the return of Yahweh as ruler in Zion, the voice of the messengers, and the victory of Yahweh’s arm.
- Childs, Isaiah, 302.

"아름다운 소식"이란 문구로 시작하는 40:9-11은 이사야의 이스라엘 회복 선포의 절정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를 양 떼를 돌보는 목자로 비유한다. 또한 목자의 보호는 49:14 이후에서 야웨의 귀환으로 선포된다.

이 같은 구조는 스가랴 9-14에도 나타난다. 9-13장이 악한 목자를 향한 심판과 선한 목자의 등장을 그린다면, 14장은 야웨께서 천하의 왕으로 등극한다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자와 왕 심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오랜 세월 동안 향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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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연구자가 스가랴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내 연구에서는 스가랴 14장의 초막절 준수 명령과 에스겔 45장의 초막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중요하다. 이 부분에서 나는 두 가지 기여를 가정했는데, 첫 번째는 에스겔 45장 25절의 초막절에 대한 강조이고, 두 번째는 초막절을 중심으로 에스겔과 스가랴의 관계를 비교하는 작업이다.

초막절 연구에서 에스겔 45장 25절은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 초막절 연구에 귀중한 업적을 남긴 Jeffery L. Rubenstein은 『The History of Sukkot in the Second Temple and Rabbinic Periods』(Brown Judaic Studies 302; Atlanta: Scholars Press, 2020)에서 에스겔 45장 25절에 등장하는 '명절'이 초막절이라고 밝혔으나 그에 관한 연구는 개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 구절에 대한 관찰로 기여를 할 수 있어 보인다.

스가랴가 에스겔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초막절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껏 두 구절을 비교한 연구는 보지 못했다. 비교가 내 주요 관심사는 아니지만, 에스겔이 스가랴에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기여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오늘 에스겔 45장 25절을 다룬 주석을 살펴보고 있다. 그 주석은 에스겔 45장 25절의 '명절'을 초막절로 보고, 그 구절에 관한 상세한 해석을 남겨두었다. 아래 내용은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에스겔 45장 17절은 군주의 본분을 말한다.

17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여기에서 군주는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고 선포한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족속의 속죄를 강조하고 있다. 바벨론 유수를 겪고 있는 예언자는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후에도 속죄를 지속해야 한다고 여겼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모든 명절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언급한 명절은 유월절(12절)과 초막절(25절)이다.

21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유월절을 칠 일 동안 명절로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25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칠 일 동안 명절을 지켜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지니라

유월절과 초막절은 모두 출애굽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절기이다. 예언자가 이스라엘 귀환을 출애굽과 동일시했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스가랴 14장은 초막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스가랴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초막절이 이방 나라들도 지켜야 할 명절로 규정한다. 또한 초막절 준수와 비를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초막절은 추수 이후 감사제 성격이 뚜렷하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그 해 추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로 비 내림은 여호와의 열방 통치의 증거이며, 초막절은 그의 통치에 대한 인정을 뜻한다.

스가랴는 유월절을 말하지 않는다. 성전 재건 역시 말하지 않는다. 스가랴는 에스겔과 이런 두 가지 차이가 있다.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초막절에 있어서 스가랴는 에스겔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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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겔 40-48장은 재건될 성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성전 신학의 정수는 스가랴 14장에 나타난다고 봐야 한다.
2. 요한복음은 예수를 성전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자의식을 스가랴 14장이 아닌 에스겔 40-48장으로 연결짓는 해석이 압도적으로 많다.
3. 스가랴와 요한복음을 성전으로 연결하는 시도가 가능하다는 근거는 피터 R. 아크로이드, 이스라엘의 포로와 회복, 321-322에서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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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법 많다. 내 연구 범위에 한정해도, 에스겔의 예언을 스가랴가 발전시킨 흔적들이 발견된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면 제법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스가랴 1-8장이 에스겔 40-48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9-14장의 묵시적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스가랴 9-14장이 에스겔 34-37장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스가라가 에스겔 전통을 계승한 이유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모두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는데,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이 은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외에 여러 면에서 이사야의 독자적인 위치가 눈에 뛴다.

현재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이사야의 역할이다. 분명 요한은 이사야를 잘 알았고 그의 복음서에 이사야를 연상시키는 본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가르침이 이사야 53장에서 유래했다는 기존 견해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목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나 역시 연구제안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이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다른 대안은 이사야 53장이 아닌 스가랴 9-14장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를 처음 접했을 당시에 나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다. 내 분석에 의하면 스가랴 9-14장 자체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자기 희생과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와 마태의 사례를 통해 그 같은 주장을 개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차후 이 부분에 집중할 계획이다.

쉽게 말하자면 요한복음 10장이 어느 본문의 영향을 받았는지 밝히려면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를 다루면서 세 선지서 중에서 누가 요한복음과 가장 밀접한지 추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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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e, F.F. “The Book of Zechariah and the Passion Narrative.”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Library
(March 1961): 336-353. 

https://biblicalstudies.org.uk/pdf/bjrl/zechariah_bruc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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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마가복음과 스가랴의 목자 은유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책을 읽고 있다. 저자는 "마가복음 13장은 스가랴 13:7과 14:5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난 이 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는 크게 네 가지이다.

1. 내 관심사는 요한복음이다.
박사 논문에서 목자-왕 전승의 발전사를 다루겠지만, 마가복음에 대해서는 다룰 생각이 없다. 신약 부분은 요한복음의 목자 은유로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2. 마가복음은 목자 은유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
저자와 달리 나는 마가복음을 목자 은유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단어의 유사성'으로 '주제적 일치성'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나는 단어와 주제의 일대일 대응을 넘어 성경 저자의 이야기 전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저자 역시 이야기의 흐름을 중요한 기준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마가복음에서 '목자 은유'의 비중은 지극히 낮다. 내가 볼 때 마가복음의 목자 은유는 6:34이 유일하다. 앞으로 내 견해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마가복음 13장을 '목자 은유'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3. 이 책의 스가랴의 목자 은유 연구가 미흡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스가랴의 목자 은유를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았다. 일단 수많은 학자들이 스가랴에서 제일 많이 언급하는 11장을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논쟁이 되는 14장은 선뜻 목자 본문으로 다루고 있다.

비록 C.H. Dodd, Barnabas Lindars, F.F. Bruce, Douglas Moo, Joel Marcus, Craig A. Evans 등을 언급하며 스가랴 9-14와 마가복음의 관계 연구에 대한 타당성을 주장하지만, 가장 먼저 다뤘어야 할 스가랴 9-14의 목자 은유에 대한 연구 자체가 미흡하다.

4. 내가 A 학교에 합격하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내가 이 책을 일고 있는 이유는 B 학교에 지원하기 위해서다. 그 학교에 박사지도를 해주겠다는 교수가 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연구제안서를 수정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 순위었던 A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으니, 2 순위인 B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다행이라면 몇 일 동안 읽기가 지루했었는데, 오늘부터 흥미로워지고 있다. 내 차후 연구를 위해서 몇 번 더 언급하고자 한다.

최근 마가복음과 스가랴의 목자 은유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책을 읽고 있다. 저자는 "마가복음 13장은 스가랴 13:7과 14:5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난 이 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는 크게 네 가지이다. 

1. 내 관심사는 요한복음이다. 
박사 논문에서 목자-왕 전승의 발전사를 다루겠지만, 마가복음에 대해서는 다룰 생각이 없다. 신약 부분은 요한복음의 목자 은유로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2. 마가복음은 목자 은유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 
저자와 달리 나는 마가복음을 목자 은유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단어의 유사성'으로 '주제적 일치성'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나는 단어와 주제의 일대일 대응을 넘어 성경 저자의 이야기 전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저자 역시 이야기의 흐름을 중요한 기준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마가복음에서 '목자 은유'의 비중은 지극히 낮다. 내가 볼 때 마가복음의 목자 은유는 6:34이 유일하다. 앞으로 내 견해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마가복음 13장을 '목자 은유'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3. 이 책의 스가랴의 목자 은유 연구가 미흡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스가랴의 목자 은유를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았다. 일단 수많은 학자들이 스가랴에서 제일 많이 언급하는 11장을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논쟁이 되는 14장은 선뜻 목자 본문으로 다루고 있다. 

비록 C.H. Dodd, Barnabas Lindars, F.F. Bruce, Douglas Moo, Joel Marcus, Craig A. Evans 등을 언급하며 스가랴 9-14와 마가복음의 관계 연구에 대한 타당성을 주장하지만, 가장 먼저 다뤘어야 할 스가랴 9-14의 목자 은유에 대한 연구 자체가 미흡하다. 

4. 내가 A 학교에 합격하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내가 이 책을 일고 있는 이유는 B 학교에 지원하기 위해서다. 그 학교에 박사지도를 해주겠다는 교수가 있는데, 이 책을 읽은 후 연구제안서를 수정해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 순위었던 A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으니, 2 순위인 B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다행이라면 몇 일 동안 읽기가 지루했었는데, 오늘부터 흥미로워지고 있다. 내 차후 연구를 위해서 몇 번 더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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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3장

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라갸 13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vv.1–6; 7–9). 각 단락의 주제는 서로 달라 보인다. 1–6절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에 대해 말하고, 7–9절은 목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두 단락 사이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공통적인 주제가 담겨 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심판(vv. 1–6), 그리고 목자들을 향한 심판(vv. 7–9).


1–6절은 이스라엘의 정결에 대해서 다룬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v. 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실 죄와 더러움은 우상의 이름과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 (v. 2)이다. 샘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언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게 된다 (vv. 3–6).


7–9절은 목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자를 치라" (v. 7). 검을 통한 심판은 11장 17절의 주제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관심은 목자들을 향한 심판이 아니라 흩어진 양에게 있다. 목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v. 8).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같이 연단하여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v. 9). 이곳에서는 고통받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나타나지 않는다. 처절한 심판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그 음성을 들으시고 언약을 갱신하신다.


스가랴 13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룬다. 본문에서 심판의 대상은 우상숭배, 거짓선지자, 더러운 귀신 (vv.1–6), 그리고 목자 (vv. 7–9)이다. 특히. 1–6절에서 거짓 선지자를 향한 심판 예언과 그 이후의 백성들의 예언에 대한 반응, 그리고 선지자들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넘쳐나며, 더러운 귀신들이 득실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국 교회를 위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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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미가서 4장 1-6절을 읽으면서, 스가랴서와 연관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주석을 발견했다. 내 구상에서 미가서의 위치와 가치가 어느 정도나 될지 애매했었는데, 뭔가 기여점을 찾은 느낌이다.


* 미국 미시간 주 기준 11월 6일 오후 4시 50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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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미가는 주전 722년 사마리아의 멸망 전 앗수르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스가랴 9-14장의 저자는 아마 주전 500년 전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두 본문은 국가의 멸망 이전의 위기와 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스가랴 9-14장은 묵시적 언어가 사용되어 있는데, 당시 묵시주의자들은 현재 악한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읽어버렸다. 그들은 우주적인 전쟁, 즉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 랄프 스미스, 미가-말라기, 13-4.


미가 2-5장과 스가랴 9-14장은 모두 목자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처참한 상황에서 목자 은유가 사용된 목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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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지역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이 있다. 


"After the fall of the city Jerusalem is never again mentioned by name. The oracles of salvation and restoration scrupulously avoid mention of Jerusalem, and marital and sexual imagery is entirely absent from the descriptions of Israel’s future.” " - Julie Galambush, Jerusalem in the Book of Ezekiel: The City as Yahweh’s wife, SBL Dissertation Series 130 (Atlanta, GA: Scholars Press, 1992), 145.

"도시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 다시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회복의 신탁은 철저히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결혼과 성적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묘사에서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스가랴도 자신의 예언에서 "성전"을 언급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표현이 "하나님의 집"(the LORD's house, 14:20, 21)이다.


에스겔과 스가랴는 자신들이 꿈꾸었던 성전의 재건이 실현되기 전까지, 각자의 방식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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