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필론은 목자-양 은유를 여러 작품에서 사용한다. 내 분석에 의하면, 11 작품이 그 범위에 해당한다.

1. Agr. De Agricultura (On Husbandry)
2. Fug. De Fuga et Inventione (On Flight and Finding)
3. Jos. De Josepho (On Joseph)
4. Legat. Legatio ad Gaium (Embassy to Gaius)
5. Mut. De Mutatione Nominum (On the Change of Names)
6. Opif. De Opficio Mundi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7. Post. De Posteritate Caini (On the Posterity of Cain and His Exile)
8. Prob. Quod Omnis Probus Liber Sit (Every Good Man is Free)
9. Sacr. De Sacrificiis Abelis et Caini (On the Sacrifices of Abel and Cain)
10. Somn. De Somniis (On Dreams)
11. Virt. De Virtutibus (On the Virtues)

라틴어 축약어 순서대로, 가장 먼저 『De Agricultura』를 분석하고 있다. 목자-양 은유는 총 여섯 단락에 나타난다 (6, 10–14). 이 작품에서 저자는 창세기 9:20에서 자신의 진술을 펼쳐 나간다.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저자는 노아의 농사직에서 출발하여, 농사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농부(husbandman)와 농인(soil-worker)를 구분한다. 농부는 단순히 작농하는 자가 아니라 영적 유익을 추구하는 자이며, 농인은 문자 그대로 근로자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 개념을 목자(a shepherd)와 사육사(a cattle-rearer)에 적용하고 (6) 그 실례를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10–14).

필로에게는 목자와 소양육사의 구별은 단순히 직무 수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다 (6).

저자는 왕에게 목자의 직무에 빗대어 "백성의 목자"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관례가 타당하다고 진술한다. 저자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왕권 사상과 연결하는 관행에 동조한다. 저자는 야곱과 모세를 목자직을 합당하게 수행한 인물로 거론한다 (10). 여기서 저자가 목자-양 은유와 왕권 사상 간 연관성을 전제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통치자와 인도자로부터 방치된 양떼의 위험을 법을 무자비하게 무시하는 지도자에 비유한다. 법을 무시하는 무리는 소들이며, 그 주징은 사육사이다. 반면 목자는 자신의 양떼를 유익한 길로 인도하듯이, 참된 지도자는 백성을 위해 유익한 선택을 한다 (11). 여기서 저자는 지도자와 그 집단의 행실을 통해 참과 거짓 지도자를 구별한다.

저자는 목자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을 돌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 23:1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만물 통치와 그의 대리인의 통치를 선하다고 평가한다 (12). 여기서 관행적인 신적 목자와 인간 통치자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저자는 다시 시편 23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부르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저항이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는 자들은 충만함을 누린다. 저자는 부요의 개념을 참된 부요와 헛된 부요로 나누며, 두 개념을 목자와 양떼에 적용한다. 요셉과 재회한 가족을 바로에게 소개하는 장면을 그 예시로 제시한다 (13).

저자는 요셉이 자신의 가족을 바로에게 목자로 소개하는 장면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집트에서 목자는 하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어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을 목자라고 소개하길 꺼리지만, 요셉은 그들의 요청과 달리 목자라고 소개한다. 저자는 요셉의 대처가 목자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한 자부심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는 야곱의 자녀들이 이집트에 정착하지 않는 이유를 목자-양 은유를 통해 설명하고, 목자와 사육사 사이를 구별한다 (14). 마지막 두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이스라엘 족장들의 목자직을 연결한다는 특징이 보인다. 야곱과 그 자녀가 목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을 수용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참된 부요의 길이며, 반면 이집트는 거짓된 부요의 길이다. 따라서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을 목자로 소개한 것은 바람직하며, 탐욕의 땅인 이집트는 야곱의 자녀들이 정착할 곳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스라엘은 참된 부요를 추구하는 목자로, 이집트는 거짓된 부요을 추구하는 사육사로 비유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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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양 은유 역사에서 다루어야 할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 of Alexandria) 작품 목록이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용례 연구가 쏟아진다.

|목차 번호| 약어 | 라틴어 제목 | 영어 제목
2.2.6.1. Agr. De Agricultura (On Husbandry)
2.2.6.2. Fug. De Fuga et Inventione (On Flight and Finding)
2.2.6.3. Jos. De Josepho (On Joseph)
2.2.6.4. Legat. Legatio ad Gaium (Embassy to Gaius)
2.2.6.5. Mut. De Mutatione Nominum (On the Change of Names)
2.2.6.6. Opif. De Opficio Mundi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2.2.6.7. Post. De Posteritate Caini (On the Posterity of Cain and His Exile)
2.2.6.8. Prob. Quod Omnis Probus Liber Sit (Every Good Man is Free)
2.2.6.9. Sacr. De Sacrificiis Abelis et Caini (On the Sacrifices of Abel and Cain)
2.2.6.10. Somn. De Somniis (On Dreams)
2.2.6.11. Virt. De Virtutibus (On the Virt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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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5장은 "포도원의 노래"로 불릴 만큼 포도원 심상을 중점적으로 사용한다. 이사야 시대에 예루살렘은 포도원 경작이 보편적이었거나, 그의 청중이 포도주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은 이스라엘(=포도원)의 정의 실현(=좋은 포도)을 바라셨으나, 그들은 악행(=들포도)을 행하였다 (1-2절). 

이사야가 직접 설명하듯이, 포도원 비유는 이스라엘의 행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지도층의 쾌락 향유와 직무에 대한 무관심은 백성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11-13절).

다만, 이들을 향한 심판과 백성을 향한 위로(14-17절)는 두 가지 이유로 다소 의아스럽다. 첫 번째는, 심판과 위로로 전환되는 주제가 갑작스럽다. 5장 전체가 심판을 일관적으로 선포하는데, 유독 이 단락에서 위로(16-17절)가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는, 심판과 위로라는 주제에 적용한 언어의 전환이 갑작스럽다. 5장 전체가 포도원 비유를 사용하는데, 심판을 위한 스올(14-15절)과 야웨-목자의 정의(16-17절)는 이질적인 언어 전환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질감은 14-17절이 후대 삽입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내 관심은 포도원 비유가 적실한 시대 상황에도 목자-양 비유를 회복 선언으로 사용할 만큼 목양 심상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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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 이후 진행할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신약의 목자 기독론"이다. 근래 이와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며 관찰한 일부를 적어본다.

사복음서에서 대표적인(혹은 내가 발견한) 목자-양 은유 본문은 마태복음 9:36–38; 15:21–28; 마가복음 6:30–34; 요한복음 10:1–21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복음서를 공관복음서와 네 번째 복음서로 나누는데, 공관복음서 사이에는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그와 반대로 네 번째 복음서의 독특성이 두드러진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자-양 은유도 둘 사이의 차별성이 나타난다.

1. 마태복음 9:36–38과 마가복음 6:30–34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먼저, 두 목자-양 은유를 살펴보자.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각 본문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마태와 마가의 목자-양 은유는 "목자 없는 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예수의 불쌍히 여기심"이 저자의 관심사이다. 독자가 간과하지 말하야 할 또 다른 저자의 강조점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마태와 마가는 목자-양 은유와 예수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1.1. 마태복음 15:21–28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마태의 다른 용례는 15:24에 나타난다.

마태복음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는 "이스라엘 집의 읽어버린 양"이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앞서 9:36의 "목자 없는 양"과 동일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2. 요한복음 10:1–21
요한의 목자-양 은유는 마태와 마가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의 전형적인 용례에 따라 양 떼를 보호하는 목자의 직무를 강조한다. 하지만 요한은 전통을 벗어나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을 선포한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를 통해 성도의 영생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라 선한 목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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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ltimate and incomparable sovereignty of God is the starting point, the working principle, and the ending point of Micah’s entire theology.” - Kevin C. Peacock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비교할 수 없는 주권은 미가 신학 전체의 출발점이요, 작동 원리이며, 종착점이다.”

내 관찰에 의하면 미가서에서 목자-양 은유는 총 네 군데에서 나타난다(2:12–13; 4:6–8; 5:2–9; 7:14–17). 이 중 세 번(2:12–13; 4:6–8; 7:14–17)은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하는 용례(divine shepherd)이며, 나머지 한 번(5:2–9)은 다윗 계열의 통치자를 지칭한다.

미가는 신적 목자(divine shepherd)의 의지와 그를 향한 기대에서(4:11–5:1[4:14]) 인간 목자, 새로운 다윗의 등장으로 전환한다(5:2ff). 새로운 다윗의 통치는 평강으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킬 정도로 번영한다. 미가는 다윗 목자의 등장을 예고하지만, 그의 역할과 비중은 새로운 다윗에 대한 기대(흔히 Davidic Messianism이라고도 하는)에 미치지 못한다. 목자-양 은유라는 특정 관점으로 미가서를 읽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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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3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양의 흩어짐을 야기한 목자의 악행은 심판의 주요 원인이며, 반대로 새 목자는 양을 한데 모은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리의 습격에 삯꾼은 달아나지만,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12절).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과 구약 성경의 대조 기법은 참 목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참 목자의 등장을 고대하도록 한다. 하지만 청중이나 독자가 간과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절)는 말씀이 유례 없는 용례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어서, 예수의 죽음 예고를 당연시할 수 있지만, 목자와 죽음은 동일 선상에 위치하지 않는 단어 군이다. 더구나 예수는 당신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선한 목자의 죽음 예고 (14-15절)는 유대 사상이나 그리스-로마 문화로 설명할 수 없는 선언이다.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 선언은 하나님의 계명 (18절), 신학적 용어로 ‘구속사’로 해석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계명)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권세)으로 실현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예고하시려고 전통적인 목자 은유를 도입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고대 근동,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 등에서 유례 없는 용례를 목자-양 은유에 구속사를 결합하여 착안하셨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목자-양 유비와 구속사를 분별하여 읽어야 한다. 더하여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언약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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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은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권력 구조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고 있다고 진술한다. 그중에서도 왕과 선지자를 향한 강렬한 비판을 표출한다.

예레미야가 목자 은유를 네 집단에, 양 은유는 두 집단에 적용한다. 정리가 쉬운 양 은유부터 설명하면, 예레미야는 이 은유를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에게 적용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로부터 방치되어 고초를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다. 두 번째 적용은 예레미야 자신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엄습하는 죽음의 위협을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11:19)에 비유한다.

목자 은유는 네 집단에 적용되는데, 하나님, 이스라엘 지도자, 이방 지도자, 그리고 예레미야 자신이다. 첫 두 집단은 구약성경에 전통적으로 적용되는 관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 이스라엘 지도자는 하나님을 대신해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로서 통치한다. 이방 지도자에게 적용되는 목자 은유는 드물지만, 예루살람 멸망 심판 신탁과 관련해 적용된다. 이방 지도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지만, 결국 그 이방 국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는 자신을 목자로 비유한다. 이스라엘과 열국을 향한 대언자로 자신의 역할을 목자로 비유하는데, 이 용례는 거짓 선지자와 대비되는 역할을 한다.

예레미야의 목자-양 은유에서 가장 독특한 용례는 바로 두 은유를 모두 자신에게 적용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구약성경에서 목자-양 은유를 가장 잘 활용한 이가 바로 예레미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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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Q504에 관한 첫 글이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미래 지향적 해석"이었는데, 후속 글이 견해를 뒤집는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과거 지향적 해석이다.

4Q504 1-2 frag. Col.Ⅳ를 읽으면, 다소 우세한 입장대로 다윗 언약을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볼 수 있지만, 뒷부분인 Col.Ⅴ를 읽으면 다윗 언약은 과거 사실의 역사적 진술이 된다. Col.Ⅴ는 생명수 샘 (Source of living water)의 파괴를 말하는데, 이곳은 Col.Ⅳ에서는 시온이다.

Col.Ⅳ에서 다윗 언약과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을 다루었다면, Col.Ⅴ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기를 다룬다. 다윗 언약은 역사적 진술의 일부에 해당하며, 따라서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 관점에서 생명수 샘은 목자 은유와 깊은 연관성이 있어서 이 부분을 유심히 읽었는데, 덕분에 다윗 언약에 관한 해석의 기조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참고 자료는 앞뒤로 잘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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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이 아닌 파편으로 남아 있는 쿰란 문서 해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은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4Q504는 기도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혹자는 4Q504가 기원전 2세기 작품으로는 드물게 패턴화된 기도문이라고 한다. 기도라는 장르는 본문 해석의 방향성에 영향을 준다. 즉 본문은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해석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은 단순히 과거 사실의 반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의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 목자, 백성의 왕자가 되어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통치한다고 진술한다. 또한 열방은 그의 영광을 본다.

이 진술만 보면 역사 진술(과거)로 해석할 수 있지만, 기도라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다윗 목자의 도래를 간구하는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다윗 목자를 왕자라는 단서와 함께 고려하여 에스겔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다수인데, 차후에 특이점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대세를 따라도 무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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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미가의 기도(8-20절)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미가의 네 번째 목자 은유(14-17절)가 나타난다.

미가의 기도는 대적을 향한 심판으로 시작한다 (8-13절).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논쟁과 심판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광명에 이르는 길이요 공의의 실현이다 (11절).

성벽 건축은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볼 수 있다 (11절).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될 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온다 (12절).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머물렀던 타지는 심판으로 인해 황폐하다 (13절).

이제 미가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목자 은유가 시작된다.

14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주의 백성은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와 같다. 

갈멜은 풍요로운 지역의 상징으로, 목자들에게는 최상의 목초지로 여겨졌다. 이 사실은 갈멜에서 목축을 생업으로 했던 한 사람의 예에서 명백해진다.

삼상 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심판 선포에서 갈멜이 등장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훔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암 1: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사 33: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반대로 회복 선포에 갈멜이 등장하는 이유 역시 그 지역이 갖는 풍요로움이라는 상징성 때문으로 보인다.

사 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또한 양 떼가 홀로 갈멜에 있는 이유는 그 지역이 안전지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암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미가의 기도에서 갈멜이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예레미야의 선포를 인용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렘 50:19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갈멜은 양 떼에게 최상의 목초지이자 안전지대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삼림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즉 양 떼에게는 목자가 없다. 그래서 미가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라고 간청한다.

미가는 이 양 떼를 "주의 기업의 양 떼"라고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시시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이다. "옛날 같이"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미가는 목자 은유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을 간청하고 있다.

미가의 네 번째 목자 은유의 또 다른 특징은 출애굽 모티프와 결합에 있다.

15 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

목자 은유와 출애굽 모티프의 결합은 목자의 '인도'와 '보호'라는 역할과 출애굽의 '구원'이라는 상징이 잘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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