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개혁적 Sola Scriptura
2. 종교개혁적 이신칭의
종교개혁적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이며, 종교개혁 신학의 유명한 구호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것”이라는 말은 칭의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칭의론은 우리가 가진 “교리 중 가장 중심적인 교리”, “해, 낮, 교회의 빛”이라고 루터는 표현한다. 1537년 논쟁에서 “칭의에 관한 조항은 선생이요, 영주요, 주요, 인도자요, 모든 교회 교리가 증명하고, 유도하며, 우리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지향하는 모든 종류의 교리를 판단하는 심판자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에 대한 언급 앞에 놓인 지평이 바로 임박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루터에게는 어떻게 인간이 심판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칭의에 관한 조항은 옳게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칭의 조항이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과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전개하는 것만이 칭의론을 바르게 다루는 것이다.
신앙은 오히려 모든 자신의 행위와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파하는 것이며, 은총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에 대해 응답할 때 가능하다. 즉 칭의는 신앙으로, 다시 말해서 신앙의 형태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현존하시고 신앙은 그 보물을 가지고 있기에 신앙이 의롭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에서 그리스도는 현존한다. 이것이 칭의를 결정짓는 내용이요 인간의 중생의 근거이다.
루터는 칭의가 죄로부터의 무죄 선고이며 동시에 갱신이라는 이 둘의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특별히, 빌프리트 요에스트는 루터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진술들은 있는 그대로를 서로 불가분리의 연관성 속에서 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전체적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부분적인 면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죄인이요, 동시에 의인이라는 사실과 또한 마찬가지로 신적인 칭의와 의롭게 함을 얻었다 할지라도 부분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죄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의인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에게 행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함을 언제나 주장했다. 여기서는 ‘오직 믿음’만이 칭의를 얻기에 타당한 것이다.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루터는 행위의 ‘필연성’을 확신했다. 행위는 구원에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루터에게는 행위의 의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는 사실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칭의와 연관된다면 행위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
사실 루터는 행위가 없다는 것은 곧 신앙이 죽은 것임을 말한다고 가끔 설명한다. “믿음에 대하여”라는 논쟁에서 그는 “만약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으며, 단지 죽은 믿음임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칭의론”에서는 “참된 신응은 게으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와 뒤따르는 것으로부터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확인하고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가끔 루터는 두 가지 칭의를 구분하고 있다. 즉 팔라디우스와 틸레만의 박사학위 논쟁에서 “성경은 두 가지 칭의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요, 다른 하나는 행위를 통한 세상 앞에서의 칭의이다.”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루터는 전적으로 바울 그리고 바울적인 의미로 해석된 복음서를 인용하여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이라는 칭의를 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여기서 제쳐두고 있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위들은 신앙 또는 불신양의 표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우위가 확보되고 있다. 루터가 칭의론에서 목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외식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이며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다. “우리 신학은 우리를 우리 밖에 세우기 때문에 확실하다. 나는 나의 양심을 의지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과 속일 수 없는 진리를 의지해야만 한다.”
루터의 말대로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비추는 거룩한 태양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학은 칭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고, 십자가 신학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만큼 칭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행위에 대한 논쟁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그의 전적인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해야 마땅하다.
3. 칼빈의 율법 이해
4. 칼빈의 교회론
5. 종교개혁적 교회와 사회/국가의 관계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자손과 모든 인류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룹이며, 둘째는 세상 나라에 속한 그룹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참된 신자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주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정부도 법도 필요치 않다. 만약 세상 전체가 참된 그리스도인 즉, 참된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영주, 왕, 통치자, 정부, 혹은 법으로부터 받을 아무런 도움이 없다.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은 세상 나라와 세속법 아래 있다. 그곳에는 참된 신자란 거의 없으며, 악에 저항하고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동떨어진 다른 하나의 정부를 주셨고, 인간이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연약한 점을 대처할 수 없기에 인간을 그 아래 살게 하셨다”라고 루터는 말했다. 루터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나누어 생각했는데, 이는 칼 바르트에 의해 두 왕국론이라 불려지기 시작했다. 루터는 두 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두 정부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의를 만들어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평화를 가져오며 악을 막기 위한 것이다. 둘 중 그 어느 것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이 세상에서 충분치 않다.” 어떤 정부도 독자적으로 수행 될 수 없는데, 세속적인 정부만 있을 경우엔, 사람을 경건케 하는 성령이 마음 속에 없을 것이며, 영적인 정부만 있다면 사회질서가 유지되지 않아 악이 횡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속 정부에 통치권과 권력을 부여하셨으며, 영적 정부에는 봉사와 직임이 있다. 두 왕국과 두 정부를 구분하는 의미는 하나님 앞과 세상 앞에 있는 인간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며, 그들의 상호간계와 차이점에서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명백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부 또는 국가만이 세상 나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삶을 보존하고 계속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모든 것이 거기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해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구분과 일치한다.
칼빈은 두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와 시민적 질서는 완전히 상이하다고 했다. 이 상이성은 두 영역의 서로 다른 임무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이 생각하기로 ‘마지스트라(magistrat)’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초대하시고 그리스도와 하나로 있도록 보존하시기 위하여 쓰시는 외적인 수단이요, 보조 기관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통치 질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한 봉사자요, 중계자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는 보편적인 교회을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이다. 참된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성령의 새로 지으시는 권능이 확장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가 자체의 목적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릇된 교회임에 틀림 없다. 참된 교회는 자체의 말을 하거나 자체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며, 또한 세상의 어떠한 지배자에게 복종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라는 성경을 띤 기구이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이 말씀을 중심하는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말씀은 또한 직분자를 통하여 선포된다. 두 영역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근거에 두고 있으며, 각 자의 역할을 유지하는데 힘써야 한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한다든가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칼빈은 정부가 하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이와 반대로 정부가 교회에 간섭하려 할 때에는 망설임 없이 저항하였다.
6. 종교개혁적 신학이 초교파신학의 기초하는 주장에 대해
서병용 교수는 초교파신학 강의에서 종교개혁적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파주의는 핵심적인 공통성보다 부차적인 차이성에 강조를 두고 있으며, 개 교파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문제다. 성경적 사고방식은 탈중심적이며, 초교파를 지향한다고 해서 교파를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학행위의 주체자는 초교파적 교회의 공동체 가운데 서 있으며, 초교파란 종말론적인 존재로서의 교회의 기본 관심이요 삶의 지평이다.
종교개혁적 신학은 복음주의적 신학의 초점과 결정적인 표준으로서 복음적 초교파신학의 출발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발견하고 이를 성경적 기초 위에 두고 조직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칼빈은 이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는 게 곧 종교개혁적 신학을 이해하는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종교개혁적 신학이야 말로 개신교의 밑바탕을 이루는 신학이라고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칼빈신학이 정통교리라고 믿는다. 흔히 그리스도교 3대 신학자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꼽는데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의 전통교리의 기틀을 다진 신학자이며,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종교개혁적 신학의 기초를 다졌고,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루터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 루터, 칼빈 신학은 그리스도교 정통교리로 인정해야 함과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받아 들여야 할 신학이다. 정리하자면, 어거스틴은 루터와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 둘은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서병용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의 신학이 곧 종교개혁적 신학이며 복음주의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이다. 더 나아간다면 그리스도교 정통교리이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학부시절에 웨슬리안 · 알미니안주의를 교리로 받아들이는 성결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나름대로 얻어낸 결론이므로 종교개혁적 신학이 복음주의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라는데 적극 동의한다. 더 나아가 모든 교파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자신의 교파의 핵심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개혁적 신학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었던 온갖 논쟁을 통해 정립되어 온 교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근본이라 해도 무방하며, 점차적으로 더욱 큰 모순에 빠져가고 있는 카톨릭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참된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학부시절을 보낸 성결대학교만 하더라도 칼빈신학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전통교리로 검증되지도 않은 웨슬리안 · 알미니안주의를 교리로 삼으면서도 자신들이 정통이며 복음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종교개혁적 신학이 복음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라는 주장이 당위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동의를 얻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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