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출처 : 뉴스앤조이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1)"


"기독교의 신 관념은 나에게는 악마의 관념입니다. … 천사나 인간을 창조하여 밤낮으로 영구히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이란 대체 어떤 유형의 신일까요?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그리고 야만적인 허영심을 가진 전제 군주자의 모습이지요."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 관념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기존의 신 이해에서 새로운 신 이해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때 새로운 신 개념에 대한 가장 큰 알레르기 반응은 절대적 초월자, 전지전능한 하나님, 초자연적인 신이라는 고정 관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예컨대, 악과 고통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그걸 해결 못하시는 게 아니라 그러한 해결 능력이 있으심에도 단지 미천한 우리에게 당신의 더 크신 뜻을 알게 해 주고 싶어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신은 자비하지 않은 존재다. 적어도 세계 안에는 의로운 사람들도 그냥 죽고 마는 현실이 있잖은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되어야만 했던 어린아이와 여자들도 무수히 죽어 갔던 현실은 부지기수다. 인류사의 비극에 속하는 전쟁 및 인종 대학살이나 최근의 아이티 참사 같은 고통과 비극의 사건들은 지구 역사 이래로 그렇게 드물었던 사건도 아니다. 전쟁과 폭력과 재해로 인한 삶의 고통과 비극들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부터 국가 사회와 전 세계 지구 역사 도처에 널려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존재라면 세계 안에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꼭 그런 식으로 해결했어야만 했는가? 결국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미천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죄다 알 수 있겠는가'라는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돌려 버리기 일쑤다. 즉, 마침내 설명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는 압박이 가해지는 실정인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지(不可知)라고 해도 끊임없이 모색해 보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탐구 자체마저 봉쇄시켜선 안 될 것이다. 어차피 보수 근본주의자들이든, 온건 복음주의자들이든, 진보 기독교인들이든 간에 모두 다 저마다의 한계 인식들 가운데서 제각기 모색해 나가는 현실인 것이다. 흔히 말하길, 하나님한테 사람의 잣대를 적용시켜선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교인들 역시 그 같은 명제의 적용에서 결코 예외일 순 없다고 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오직 하나님만 홀로 영광 받으소서"의 실체가 결국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지만, 현실에서 정작 영광 받고 있는 분들은 알고 보면 교회 계급 종사자들일 따름이다).

찰스 하츠온 및 그의 종교 철학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과정 신학자들은 말하길, 현실 세계 안의 악과 고통의 문제와, 신은 전지전능하고 자비하다는 관념은 애초부터가 서로 양립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 참조, 혹은 데이빗 그리핀의 <과정신정론>[이문출판사, 2007] 참조) 이미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논제를 놓고서 이에 대해 억지스럽게 집착해 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길, 신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은 신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식의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독교 신앙의 체계로는 합리적 이성으로서의 소통과 기능을 아예 무시하는 점들이 매우 많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쓰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표현하는 성서 구절도, 실은 그 시대적 상황의 한계가 반영된 것과 더불어 사실의 차원보다는 고백의 의미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도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다. 물론 그 옛날에는 고백의 차원도 그 자신한테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그 옛날의 고대인들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너무나 자명한 이치인지라, 이제 우리는 신에 대해서도 또다시 새롭게 말해야 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무신론자의 주장들

얼마 전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이 세간의 베스트셀러가 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무신론적 상황에 공감하고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입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존의 유신론이 너무나 낡아 보이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기존 유신론자들의 신 관념은 전적으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완전자로서의 신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실정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에 대해 <만들어진 신>에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도킨슨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은 무신론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자신들을 거리낌 없이 무신론자로서 소개한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가 저지르고 있는 살육과 폐단과 미신적 행위들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들을 해 대고 있다. 인류사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 부정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다.

이에 대해 온건한 보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반론이랍시고 <도킨스의 망상>이라는 짧은 반론서를 펴냈지만, 내가 볼 땐 제대로 반박했다고 보기엔 너무 많이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맥그라스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유신론적 신관이 어떤 유형의 것인지, 그리고 도킨스가 공격한 기존 유신론이 어떤 유형의 유신론이었는지를 제대로 분석해 내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무신론자인 도킨스의 글이야말로 훨씬 더 훌륭했을뿐더러 솔직한 만큼이나 매우 힘 있는 명문들로 즐비했다고 본다.

나는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서 미리 말한다면, '전(前) 이성'의 차원에 있는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는 좀 더 이성적인 무신론 진영이야말로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적어도 비교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기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신은 있다'와 '신은 없다'라는 점에 대해 논증적으로 직면할 수 있고 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신학자든, 목사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비껴가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이 뭔가? 바로 기존의 기독교 유신론을 폐기 처분하면 그만인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어려운가!

2,000년 동안 전통화한 습관은 무섭도록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가족들과 교회 환경 및 사회 문화까지 지배함으로써 여전히 기존 기독교의 유신론 사상에 미련을 두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제발 원컨대 미련 없이 폐기 처분해 버려라!

기존의 유신론, 신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폐기 처분하라!

기존 유신론의 신 관념에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정복적이고도 조잡스런 신 관념 사상이 함께 깃들어 있다. 이는 성서 안에도 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에 의해 여자와 아이와 유아들까지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들을 깡그리 말살하라는 성경 구절들(신 2:31-35 ; 수 6:16-21, 10:39-40, 11:11-15 ; 삼상 15:1-3 등등)에 대해 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고 제대로 솔직하게 설교할 수 있는 목사는 거의 없다. 성경에 그토록 나오는데도 그 같은 구절들은 차마 피하고 싶은 껄끄러운 구절들일 따름이다. 어차피 성경 구절들도 자기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잖은가.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저 할 수 있는 구차한 얘기라곤 결과적으로는 천국의 보상을 위한 시련과 연단의 의미일 뿐이라는 식의 별로 현실성 없는 자조적 위안으로써만 얘기해 줄 따름이다. (물론 그런 식의 자위도 어떨 땐 필요하다곤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입에서나 정당화할 수 있을 뿐, 지구 역사 이래로 이 땅에 무수히 그리고 무참히 죽어 갔던 수많은 여자와 아이들의 생명들 앞에선 한낱 기만적이고 사치스런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말한다. 신이 전능하다고 보는 건 분명한 '망상(delusion)'이다. 혹은 신은 자비하다는 쪽이 망상이거나.

고대로부터 형성된 신 관념은 다신론, 유일신론 등등 이러한 유형으로도 나뉠 수 있긴 하지만 이른바 '신(God)'이라는 개념 자체를 그 어떤 절대자, 완전자, 초월자로 이해하는 관념 역시 서구 기독교 사상사 안에 깃들어 왔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고대 히브리 역사의 이해에서 출발하였으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그 보편적 해석의 체계를 쌓아 가면서 그리스 철학의 이론을 통한 해석학적 토대와 그 기준들을 마련해 갔다.

이러한 신론 확립의 과정에서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노스의 '일자(the One)' 개념을 나름대로 받아들여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개념을 세웠다. 이를 기독교의 신 관념에 적용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직 신학적 신론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를 체계화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신학적 작업에 속했다. 신이라는 존재는 모든 시간적인 현실 존재들의 창조자이자 가장 궁극적인 원인자이면서 그 자신만큼은 완전무결하여 현실 세계의 인과적 영향들에 대해선 초월적이고 독립적인 자존자로서 정식화한 것이다. 무례하게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잖은가.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이 표현에 대한 다른 히브리어 해석을 참조하려면 김이곤, <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pp.52~56을 보라)

이미 오래 전부터 기독교 변증가들이나 교부들 및 중세 철학자들은 그러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성서의 내용들을 해석하였고 서구 교회의 신앙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같은 조직 신학적 신 관념들은 루터와 칼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서구 교회와 한국교회 현장에까지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에 대한 지배적인 고정 관념으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다. 적어도 기독교 주류는 이 같은 조직 신학적 신론의 하나님 이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성경 공부 교재를 통해 배우고 있는 하나님 이해는 바로 이러한 신 관념들에 맞춰져 있다.

종교 철학자 찰스 하츠온은 전지전능으로서의 신, 절대적 군주자로서의 신, 완전 불변의 신 개념들은 오류가 있는 개념이기에 폐기되어야 할 신 관념으로 꼽고 있다. 마찬가지로 과정 신학 진영의 경우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결정하는 유일무이한 심판의 주제자이자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신 개념 및 가부장적 유형으로서의 남성적 신 개념을 거부한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들은 하나같이 신에 대한 구멍 뚫린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특히 종교의 경우에 있어선 이론적 오류라는 사태가 결국은 폭력의 자행이라는 실천적 사태로 손쉽게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종교라는 것이 우리네 삶의 전반을 가장 강력하고 뿌리 깊게 지배하고 있는 기제이기 때문에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즉, 종교의 경우 신앙을 지배하는 이론적 신념들이 그저 이론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은 나의 생활 전반에 깊게 영향을 미치는 핵심에 속한다. 게다가 종교라는 분야는 초창기 성립된 이론이나 정식화한 교리에 대해선 웬만해선 이론적 수정을 하지 못하는 점들이 있다. 그리하여 이론적 반성과 수정이 안 될 경우 그로 인한 비극적인 폭력 사건들은 반복적으로 되풀이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사상사는 기독교 폭력사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러한지 어디 한번 살펴보자. (다음에 계속됩니다.)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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