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 폭력과 저항 폭력의 악순환을 넘어 정의와 자비의 길로 -


 지난 7월 6일 밤에 방영된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2부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는 이슬람에 관해 소개하며,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화해와 소통의 길을 모색한다. 이슬람의 경전이 예수를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선지자라고 기록하며 또한 무슬림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을 유일신으로 믿는다는 것이 화해의 접촉점으로 제시된다.

 또한 이 방영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화해과 소통을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이 극복해야 하는 차이점들도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을 믿되 이슬람은 예수를 신으로 믿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비폭력과 사랑이 강조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고 불신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연 이슬람과의 화해를 위하여 더 이상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않고 그저 위대한 선지자로 믿어야 하는가? 이러한 교리적 문제만 극복하면 이슬람이 기독교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 때문이기보다는 십자군 전쟁이나 이라크 침공 등의 군사적 폭력에 지지를 표한 실천적 행동 때문이다.

 이슬람이 폭력의 사용을 중단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하면 기독교와의 화해가 이루어지는가? 이슬람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한다면 미국이 아랍 지역에서 가진 석유에 대한 이권을 포기하고 더 이상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 세력의 무력 사용이 계속 되고 경제적 착취가 계속되는 한 이슬람 세력의 대응 폭력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사용하는 폭력은 서방 세계의 폭력에 의해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기독교 세계의 권력자들은 중세 시대 때부터 아랍 지역을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침공하기를 즐겨왔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부터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돈에 눈이 먼 서방 세계의 권력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지원 아래 무슬림의 피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슬림의 저항 폭력이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말고 그저 선지자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이것은 무슬림에게 기독교와 화해하기 위하여 그들의 경전과 무함마드를 버리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강요이다. 화해와 소통은 자신의 본질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반성하고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는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정된 죄명으로서의 신성모독과 관련된다. 대제사장이 “네가 메시아냐?”고 질문하자, 예수는 “그렇다. 내가 권능자(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4:62). 여기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아니다. 메시아는 순교자 저스틴(Dial. Trypho 49)이 후에 인정하였듯이 단지 “사람들 중에 하나”일 수 있다. 신성 모독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때에 발생한다. 자신의 정체를 단지 메시아일 뿐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고 밝힌 예수의 주장을 인간들이 부정한 것이 예수의 죽음이었고, 이러한 예수의 주장을 하나님께서 긍정한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때 그를 신적인 존재로 믿게 되었다.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한 예수의 주장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결론 내렸지만 돌로 치는 종교형에 처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 정치형인 십자가형을 받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수를 나무 형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신명기 21:23)에 따라 예수를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선언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저주 선언을 무효화시키는 사건(부활)이 없이는 예수가 율법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믿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부활로 인해 율법의 저주 선언이 무효화되고 예수가 메시아로 믿어지게 될 때에는 예수의 주장대로 신적인 메시아로 믿어지게 되었다.

 이 기획물의 제 2 부는 이슬람의 문제점이 그들의 경전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잘 지적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제점도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 세계 속에는 사랑과 용서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흐름이 있어 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자들이 있어 왔다. 기독교 속에 들어온 이 암세포는 오늘날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암세포는 속으로 기독교를 부패시킬 뿐 아니라 밖으로는 타종교와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든다. 이슬람 세계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된 데에는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거짓 기독교인들의 공로가 크다. 그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실상을 기독교라는 가면으로 가리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기독교의 이미지마저도 실추시키고 기독교 복음의 전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어 놓는다.

 십자군 전쟁은 아랍 지역의 선교를 힘들게 만들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이슬람 세계가 미국과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통치의 경우에도 인도네시아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도네시아가 무슬림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권력을 추구하는 사이비 모슬림이 이슬람 세계에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먼저 명분을 준 것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 준다는 핑계 아래 세속 정권이 하는 사악한 일을 지지한 사이비 기독교 세력이었다.

 광우병의 원인은 사람이 소에게 제공한 동물성 사료이듯이 이슬람의 폭력성의 원인은 서구 세계가 아랍 세계에 제공한 폭력과 착취이다. 이러한 폭력과 착취를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을 본다면 이슬람 세계는 말로는 예수를 전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 비일관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눈앞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비성경적인 국정운영에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정의는 가난한 자들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을 요구하며,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불신자들에게마저도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단체들은 결코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지 말고 자신을 비워 아낌없이 세상을 비추는 촛불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만이 참으로 예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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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평론"


 SBS가 기획하여 지난 6월 29일에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 제1부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키며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한다. 이 기획물은 버미스(G. Vermes), 크로산(J. D. Crossan) 등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비교적 무게 있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였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비교적 여과 없이 소개하고자 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물은 모든 편집물이 그러하듯이 보이지 않는 주관성을 담고 있다. 그 주관성은 인터뷰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드러난다. 인터뷰 대상자 중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 전문가는 크로산이 유일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크로산은 비중 있는 학자이긴 하지만 그의 입장은 학계 다양한 스펙트럼 중에 하나를 대변할 뿐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미국의 마이어(J. P. Meir)와 샌더스(E. P. Sanders), 독일의 타이센(G. Theissen), 영국의 라이트(N. T. Wright) 등이 중요한데, 이들이 제외되고 크로산의 입장이 마치 정설인 양 소개되는 인상을 주며 방영물이 결론 내려진 것은 유감이다.

 크로산의 주요 방법론은 다중 증언(multiple attestation)에 의존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지만, 타이센, 샌더스, 라이트 등이 사용하는 “설명가능성 원리”를 무시할 수 없고,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비유사성 원리”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 방영물에서 크로산은 요세푸스, 타키투스 등의 다중 증언에 입각하여 예수의 존재의 역사성을 변호한다. 이것은 이교도 신화에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는 허구라는 가설을 논박하는 중요한 논증이다. 그의 논증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유사성은 영향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유사한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미쳐서 발생하였을 필연성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가 그 이전에 존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예수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 없이 단지 이야기 차원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사성에서 인과관계를 끌어내는 논리적 비약이다.

 저자들은 어떤 사건을 서술할 때 유사한 평행구절들에 관한 독자들의 지식을 활용한다. 즉 저자들은 의사소통을 위하여 독자들의 선이해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많은 내용들이 함축적으로 전달되어진다. 그리하여 여러 본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는 현상이 발생하며, 이러한 유사성의 면밀한 관찰이 본문 해석에 도움을 준다. 이러한 현상을 간본문성(intertextuality)라고 부른다. 복음서 본문의 해석에는 구약성서, 중간기 문헌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는 구약성서과 중간기 문헌의 세계 속에 사는 저자들이 그러한 세계 속에 사는 독자들에 그들이 공유하는 언어 세계를 토대로 의사소통을 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본문성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본문 뒤에 놓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과 유사한 옷을 입은 사람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궤변이다.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인 “설명가능성 원리”를 도입한다면 한 가지 비판을 더할 수 있다. 예수가 실재하지 않았고 그 이야기가 과연 허구라면 그렇게 창작된 이야기를 믿고 기독교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허구 이야기를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꾸고 죽음을 무릅쓸 수 있었을까? 예수의 실재를 부정하는 가설은 기독교의 발생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타당성이 없다.

 이 기획물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신의 아들,’ ‘천국’의 개념을 진지하게 다룬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개념에 관하여 꼭 언급하여야 하지만 빠뜨린 것이 있다. ‘신의 아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칭호이다. 4 Ezra 7:28(“나의 아들 메시아”)뿐 아니라, 쿰란문헌(4Q246 2:1)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인 ‘메시아’라는 칭호에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개념을 담아 사용하며 고대하였으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할 때, 이러한 개념에 따라 예수를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지적은 옳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적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대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문장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 그 시대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시작되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주)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후(마가 14:25) 십자가상에서 포도주를 마심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마가 15:36).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취임하시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획물의 의도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소통을 위한 것인데, 이러한 소통은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미 유대교와 이슬람과의 소통을 위하여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파괴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간 예수를 메시아(즉 하나님의 아들)라고 선언한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결코 발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따라(신명기 21:23)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발생은 예수의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부활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 간 예수 자신의 주장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받아들어지게 하였다.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를 묻는 이 기획물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건드렸으나 ‘신의 아들’의 개념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게 된 배경인 십자가와 부활을 간과하였다. 예수를 정치적 이념을 가졌던 한 독특한 유대인에 불과했다면 기독교는 그러한 인물로부터 결코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획물은 피상적으로 보면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파괴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이러한 도전 앞에 반응하며 수천년을 지내왔으며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도 언제든지 다루어지며 응전되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학에는 많은 항체들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획물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항체가 없는 일부 기독교 단체들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참으로 해악을 주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부패이다. 어느새 기득권층이 되어버리고 기득권층과 타협하고 그들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에는 미래가 없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힘으로 선교를 하려는 승리주의에는 십자가도 예수도 없다. 이처럼 예수 없는 교회는 대통령을 배출하거나 정권을 창출해도 그것은 자멸의 길일뿐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이러한 기획물을 두고 분노할 때가 아니라 복음을 말로 왜곡하는 목회자들과 행함으로 왜곡하는 기독교 위정자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또한 이기적 기복주의에 빠져 복음을 왜곡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본질을 잃은 기독교는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으며, 변질된 복음은 더 이상 전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정권에 결탁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잘못된 대제사장의 교권세력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신 예수의 모습을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세상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잘못된 정권과 교권이 결탁하여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여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의 뒤를 따라 이러한 부정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음성이 있는가? 교회가 정권을 배출하였을 때에는 교회가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교회에 돌을 던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교회를 버리실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가장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권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이다. 교회는 돈과 권력을 택하기보다 하나님을 택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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