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한 이유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1]예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에스겔 34장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연상시킨다.[2]에스겔 34장은 백성들을 향한 의무를 무책임하게 등져버리고 개인의 탐욕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3]즉 에스겔 34장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이 에스겔 34장과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한다.[4]하지만 에스겔 34장은 새출애굽 모티프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5]특히 ‘찾다’라는 의미의 דרשׁ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목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을 나타낸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 34),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통해 이 약속을 이루신다.[7]또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비유도 연상시킨다(4, 6).[8] 이 비유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15:4).[9]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더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10]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15:5).[11]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15:6).[12]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셔서 하늘의 관점과 기쁨의 강도를 강조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13]이 구절에서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가 드러난다.[14]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중요한 주제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3:3, 8; 13:1-5; 15:7, 10; 16:30; 17:3-4; 24:47).[15] 그리고 회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닌 구원자에 의해 이뤄지는 경험이다.[16]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의 사명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17] 결국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에서 그의 자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나, 모든 결과는 예수의 사역에 달려있다.[18]예수의 사명과 죄인의 회개에 대한 말씀은 5:31-32를 떠오르게 한다.[19]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5:32).[20] 이 비유에서 건강한 자는 의인과 병든 자는 죄인과 연결된다(5:31-32).[21] 비록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의인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22]오히려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다(특히, 11:37-52).[23]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죄인’ 혹은 ‘악인’과 동의어”로 사용된다.[24]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을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으로 이해했다.[25]따라서 이 비유는 모든 사람들이 치료의 필요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26]물론 여기서 치료는 육체적인 질병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치료이다.[27]삭개오와 그의 집은 ‘잃어버린 것’에 해당한다.[28] 이 비유에서처럼 삭개오와 그의 집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으나, 예수로 인해 회복되었다.[29] 이 이야기는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30]삭개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수군거렸던 무리들과 같은 경향의 집단에게는 예수의 사명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도전하게 된다.[31]부자들에게는 자발적으로 회심한 부자의 사례를 제공한다.[32] 삭개오 이전에도 부자가 예수께로 나온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33]특히, 부자 관원이 그렇다(18:18-30).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로 약속했고 구원을 받는다. 삭개오를 통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 Bock, Luke 9:51-24:53, 1523; Tannehill, Luke, 27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2]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8.

[3] Walther Zimmerli, Ezekiel 2: A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Ezekiel Chapters 25:48,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22.

[4] Tannehill,Luke, 278.

[5] Leslie C. Allen, Ezekiel 20-4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29 (Dallas: Word, 1990) 162.

[6] Allen, Ezekiel 20-48, 162.

[7] Allen, Ezekiel 20-48, 165; Bock, Luke 9:51-24:53, 1523.

[8]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Tannehill, Luke, 278; OHanlon,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9] Bock, Luke 9:51-24:53, 1300.

[10] Bock, Luke 9:51-24:53, 1300.

[11] Bock, Luke 9:51-24:53, 1301.

[12] Bock, Luke 9:51-24:53, 1301.

[13] Bock, Luke 9:51-24:53, 1302; Tannehill, Luke, 238.

[14] Tannehill,Luke, 238.

[15] Bock, Luke 1:1-9:50, 499.

[16] Tannehill,Luke, 238.

[17] Tannehill,Luke, 239.

[18] Tannehill,Luke, 278.

[19] Bock, Luke 9:51-24:53, 1302.

[20] Bock, Luke 1:1-9:50, 498; Bock, Luke 9:51-24:53, 1523.

[21] Bock, Luke 1:1-9:50, 498.

[22] Bock, Luke 1:1-9:50, 498; Tannehill, Luke, 238.

[23] Bock, Luke 1:1-9:50, 499; Tannehill, Luke, 238.

[24] Evans, Saint Luke, 664.

[25] Bock, Luke 1:1-9:50, 499.

[26] Bock, Luke 1:1-9:50, 499.

[27] Bock, Luke 1:1-9:50, 498.

[2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29]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30] Tannehill,Luke, 278.

[31] Tannehill,Luke, 278.

[32] Tannehill,Luke, 278-279.

[33] Bock, Luke 9:51-24:5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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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다짐을 들은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신다.[1]하지만 예수께서는 삭개오와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2]삭개오가 사람들의 불평을 의식하고 있다면(7-8),[3]예수께서도 이들을 의식하고 계셨을 터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무리들의 반응(7)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4]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시고, 그 이유가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5]누가복음에서 σωτηρία는 총 3번 사용되었으며(1:69, 71, 77), 이 구절들은 모두 예수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고하는 사가랴의 예언과 관련이 있다.[6]사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맹세에 따라 구원을 베푸신다(1:68-73).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3:8). 그에게 회개는 신학이나 종교의식의 변화가 아닌 삶의 변화이다.[7]그래서 요한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묻는 세리들에게 부과된 세금만 걷으라고 답한다(3:13).[8]결코 직업을 변경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9] 그렇다면 세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정한 세금 징수이다(3:12-13).[10] 따라서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기록이 없어도, 그에 상응하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볼 수 있다(8절 주해).[11] 더 중요한 점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죄와 회개를 연관 짓지만(5:32; 13:2-3; 15:7, 10; 17:3-4), 회개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죄를 용서하신다(5:20-24; 7:47-49).[12] 또한 누가복음은 세리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5:27-30; 7:29, 34; 15:1; 18:9-14).[13]실제로 세리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했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3:12). 그리고 결국에는 요한의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다(7:29).[14]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 역시 의롭게 여겨졌다(8:14). 구원의 대상은 삭개오와 그의 집 전체를 포함하며, 이와 같은 사건은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10:2; 11:14; 16:15, 31; 18:8).[15]


[1] Bock, Luke 9:51-24:53, 1522.

[2] Bock, Luke 9:51-24:53, 1522.

[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4] Robert C. Tannehill, Luke, Abingdon New Testament Commentarie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278.

[5] Evans, Luke, 280.

[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7] Evans, Luke, 48..

[8] Bock, Luke 1:1-9:50, 312.

[9] Bock, Luke 1:1-9:50, 312.

[10] Bock, Luke 1:1-9:50, 312; Double, The Paradox of Salvation, 116.

[11]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12]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삭개오가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9-14)를 근거로 삭개오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도가 있다(Evans, Luke, 280).

[13] Bock, Luke 1:1-9:50, 310;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4]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5] Bock, Luke 9:51-24:53, 152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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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체험에 "도취"되어 열광주의에 이른 사람들은 현실감각을 잃어 우리가 아직도 죄와 죽음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곧 순간마다 사탄이 종용하는 죄악의 길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주의 영이 종용하는 의의 길을 택할 것이냐의 절실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충동적으로 살게 됩니다. 그들은 죄악의 세력에 대한 심각한 경각심과 건전한 신학적 분별력 없이 충동적으로 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쉽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데, 그리하여 짓게 되는 여러 부도덕적 행위들을 성령에 대한 호소(빙자)로 정당화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순종하도록 하는 영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항상 우리를 사랑과 진리와 의와 화평과 고결의 길로만 인도하시지, 탐욕과 거짓과 불의와 갈등과 음행과 방탕의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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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가 서서 말하는 상황이 분명하지 않다.[1]예수께서 이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는지, 무리들과 떨어져 계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2]다만, 9절의 예수의 말씀을 통해 무리와 떨어져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건 추측할 수 있다.[3]또한, 이러한 반응이 무리들의 수군거림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분명하다.[4]삭개오는 예수를 “주”(κύριος)라 부른다.[5] 소경 역시“주”라 불렀다(18:41). 그리고 소경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18:38, 39). 소경은 예수를 “주”라 부름으로써, 다윗의 자손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6]즉 소경에게 예수는 메시아였다.[7]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는 1:27, 31-33에 언급되어 있다.[8]그렇다고 해서 소경이 예수를 문자 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여겼다고 볼 수는 없다.[9]당시에는 “다윗의 자손”은 회복과 치유를 가져온다고 믿었다.[10] 실제로, 예수께서는 4:17-18에서 이사야 61:1을 인용하시며, 자신의 사역을 밝히신다.[11]그렇지만, 소경의 경우에는 누가가 마가복음 10:51ῥαββουνίκύριε로 수정한 결과이다(참조. 20:33).[12] 누가는 셈어적 표현인 ῥαββουνί를 피하고,[13] 19:8과 통일성을 주기 위해 κύριε를 사용하였다.[14] 누가복음에서 소경이 예수를 주라 부른 대가는 구원(18:42)과 병 고침이었다(18:43).삭개오 역시 예수를 주라 불렀으니, 소경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ἰδοὺ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집중해서 듣도록 유도한다.[15]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습관적 현재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적 현재로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전체적인 해석과 주제가 달라진다.[16]습관적 현재로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으며,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고 있습니다.”로 번역하여 해석해야 하고, 미래적 현재라면 “제 재산의 절반을 주고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로 번역하여 해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두 동사를 미래적 현재로 보고, 삭개오의 회심에 따른 서역으로 해석한다. , 세리장으로서 지금껏 행해온 불법적인 행위들을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올바로 사용하겠다는 다짐으로 해석한다. 이와 달리 동사의 형태가 현재형이므로 습관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7]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고 토색했을 경우 네 배로 갚아 주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재산의 절반(τὰ ἡμίσιά μου τῶν ὑπαρχόντων)은 아마도 일 년 수입의 절반을 의미할 것이다.[18]그렇지 않고 실제로 재산의 절반을 구제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는 부자로 남을 수 없다(2절에서 누가는 삭개오를 부자로 소개한다). ‘만일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εἴ τινός τι ἐσυκοφάντησα)은 세금을 징수하다가 실수가 발생했을 경우로 해석해야 한다. 토색과 네 배 보상의 공존은 어불성설이다. 네 배로 보상하는 삭개오가 의도적으로 토색할 리 없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다른 세리들과 달리 토색 없이 정당한 수입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삭개오는 재산을 아끼지 않고 구제에 힘쓰고 있으며, 직업을 악용하지 않는 윤리적인 사람이다. 삭개오라는 이름대로 의로운 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의로운 행실은 그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게 된다(9).[19]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7). 바리새인들이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0]그들은 삭개오의 의로운 행실을 보지 않고, 오직 세리장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취급하였다.[21]바리새인들은 삭개오가 “세리라는 이유로 거부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회복을 도우신다.[22] 따라서 삭개오의 구원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이자, 누구나 지위에 상관없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23] 이렇듯 이 동사 해석의 두 가지 경향은 본문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누가는 습관적 현재와 미래적 현재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문맥으로 해석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미래적 현재가 더 적합하다.[24]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겼다(7).세리 요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세리들이 죄인으로 취급받지는 않았으며, 카피토처럼 정당하게 부자가 된 세리도 존재한다(7절 주해). 따라서 세리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기준은 그들의 직업이 아닌 편법행위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삭개오를 소개할 때 느끼게 되는 청중/독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2절 주해).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말한다.[25]삭개오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발언 자체가 다소 충격적이다(토비트 10:10에서 라구엘은 토비아에게 자신의 신부 사라와 재산의 절반을 넘겨준다).[26]삭개오의 자발적인 반응은 부자 관원과 대비된다(18:23).[27] 그리고 토색에 대해서는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보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위기 6:4-5과 민수기5:6-7은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라고 명한다.[28] 미쉬나에 의하면 2배로 보상해주도록 되어 있다(m. Ketub.3:9).[29]양의 경우에는 특별히 네 배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m. B. Qam. 7:1).[30]그럼에도 토색에 대한 네 배 보상은 율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출애굽기 22:1에 따르면 양 한 마리를 훔쳐 죽이거나 팔면 네 마리로 갚아야 한다. 사무엘하 12:6에서 다윗은 양 새끼를 빼앗아 손님에게 대접한 자는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헤롯은 절도에 관한 처벌을 강화하여 도둑은 네 배로 갚도록 했다.[31]그러므로 삭개오의 보상은 적절하다. 더욱이 삭개오는 자신의 지난 잘못을 청산하고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1] Bock, Luke 9:51-24:53, 1519.

[2] Bock, Luke 9:51-24:53, 1519.

[3]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5.

[4]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5]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5.

[6] Bock, Luke 9:51-24:53, 1510.

[7] Bock, Luke 9:51-24:53, 1507-1508; Evans, Luke, 28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3.

[8] Evans, Luke, 282.

[9] Evans, Luke, 282.

[10] Bock, Luke 9:51-24:53, 1508.

[11] Bock, Luke 9:51-24:53, 1508.

[12] Evans, Luke, 28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3] Bock, Luke 9:51-24:53, 1510;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4]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16]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는 학자로는 Alfred A. Plummer, Craig A. Evans, Frederick L. Godet, Joseph A. Fitzmyer, Luke T. Johnson이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며, Darrell L. Bock, Robert H. Stein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17] Evans, Luke, 280

[18]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8.

[19] Evans, Luke, 280;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Defense," 162.

[20] Evans, Luke, 281.

[21] Richard C. White, "A Good Word For Zacchaeus? Exegetical Comment on Luke 19:1-10," Lexington Theological Quarterly 14 (1979): 89.

[22]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942.

[23]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Defense," 162-163.

[24] di,dwmi의 용례 분석과 미래적 현재의 해석적 적합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신현우, “부자 삭개오의 구원,프로에클레시아 17 (2010): 122-123를 참고하라.

[25] Bock, Luke 9:51-24:53, 1521.

[26] Bock, Luke 9:51-24:53, 1521.

[27] Bock, Luke 9:51-24:53, 1521.

[28] Stein, Luke, 468.

[29] tr. Dandy,Mishnah, 249.

[30] tr. Dandy,Mishnah, 340.

[31] Josephus, Jewish Anitiquities Books ⅩⅤ-ⅩⅦ, Ⅹ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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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5절 주해  (0) 2011.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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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시자 모든 사람이 불평한다.[1]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무시려고 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실제로 불평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πάντες)이 아닌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3]그렇다면, 이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 불평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기 때문이다(5:30; 15:2).[4] 실제로, 동사 διαγογγύζω의 주체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다(15:2).[5]동사 γογγύζω의 주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다(5:30). 그 중에서도 특별히 바리새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실질적인 적대세력은 바리새인이기 때문이다.[6]사실, 누가복음에서 율법학자(γραμματεῖς)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νομοδιδάσκαλος)을 가리킨다.[7]이러한 사실은, 5:17 5:21의 평행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누가는 자신의 독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다.[8]또한, 사도행전 5:34(ΦαρισαῖοςὀνόματιΓαμαλιήλ νομοδιδάσκαλος)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활동했다는 정보를 준다. 비록 율법을 가르치던 자들이 모두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두 집단이 바리새인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9] 더군다나,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동일하게 여겼다(18:11).[10]바리새인들의 전승을 이어받은 랍비 역시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랍비들은 세리를 도둑과 동일하게 여겼고(m. B. Qam. 10:2),[11] 급기야 살인자와 동등하게 여기기도 했다(m. Nedarim 3.4).[12] 이렇듯 세리는 부정한 존재로 여겨져서, 그들이 들어간 집은 물론 내부에 있는 물건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길 정도였다(m. Ohar. 7:6).[13]이러한 증거에 따르면, 세리를 죄인으로 여긴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14]그러므로, πάντες는 과장법이다.[15] 더구나, 모든 세리들이 죄인 취급 당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가이사랴의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 간의 토지 분쟁이 생겼을 때 유대 유명들과 세리 요한이 함께 플로루스(Florus)에게 중재를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다.[16]또한, 8 달란트를 제공하고 중재에 대한 약속을 받아두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지도자들과 요한이 앞장서서 플로루스에게 호소하다가 옥에 갇혔다는 기록도 있다.[17]이 기록에 의하며, 요한은 세리였음에도 지도자들과 함께 분쟁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유대사회에서 부정한 자로 취급 받고 배척 당하는 세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전체가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견해[18]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더구나 누가는 세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3:12; 5:27; 7:29; 15:1; 18:10).[19]그렇다면 세리들은 모두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부자가 되었을까? 유대 지역 세리였던 카피토(Capito)는 세금 행정관(administrator of taxes)으로서, 가난했지만 부자가 되었다.[20]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 역시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리고 지역은 무역 중심지이다.[21] 더구나 그는 세리장이다. 삭개오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은 세리는 토색으로 부자가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준수할수록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유대사회에서 존경을 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세리장이라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22] 이 구절에서는παρὰ ἁμαρτωλῷ가 강조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세리들과 그들의 편법 행위에 대한 감정이 반영되었을 것이다.[23] 동사καταλύω는 문자적으로 “짐 싣는 동물의 장구를 풀어주다”(to unhitch pack animals)라는 의미이다.[24] 9:12에서는“유숙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문맥상 식사교제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의 집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의 죄를 나눈다는 의미이므로, 예수께서 죄인인 삭개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된다.[25] 그러므로 예수의 상식에 어긋난 행동은 이들이 불평하는 원인이 된다.[26] 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의 식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념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죄인들을 환영하신다(참조 7:34).[27]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군의 무리들이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오직 예수만이 죄인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28]


[1] Bock, Luke 9:51-24:53, 1518.

[2] 참조.Bock, Luke 9:51-24:53, 1519.

[3] Bock, Luke 9:51-24:53, 1519.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Johnson이 언급한 7:34, 39는 동사 γογγύζω 혹은 διαγογγύζω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제외되어야 한다.

[5] BockEvans는 별다른 설명 없이 바리새인으로 단정 짓지만(Bock, Luke 9:51-24:53, 1519; Evans, Luke, 283), 본문은 분명히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6] Evans, Luke, 91, 97.

[7] 참조.Bock, Luke 1:1-9:50, 479; Bovon, Luke 1, 17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212.

[8] Bock, Luke 1:1-9:50, 479. Bovon의 지적대로, νομοδιδάσκαλος5:17에서 한 번 사용되고, 이후로는 줄곧 γραμματεῖς로 사용된다(Luke 1, 178).

[9] Bock, Luke 1:1-9:50, 479.

[10] Evans, Luke, 282.

[11] H. Danby e.d. & tr., The Mishna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346.

[12] tr. Danby,Mishnah, 267.

[13] tr. Danby,Mishnah, 726.

[14] Evans, Luke, 91.

[15] Nolland, Luke 18:35-24:53, 905; Stein, Luke, 467.

[16] Flavius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 Vol. ,trans. H. St. J. Thackera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 285-288.

[17]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 .292.

[1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19] Bock, Luke 9:51-24:53, 1513 n.2; D.A.S.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JSNT41(1991): 22.

[20] Philo, On Embassy to Gaius, Vol. , trans. F. H. Col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199.

[21] Evans, Saint Luke, 662.

[22]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7.

[23] Bock, Luke 9:51-24:53, 1519.

[24] Bock, Luke 9:51-24:53, 1518;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4;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940.

[2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26]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434.

[27] Evans, Luke, 120.

[28] David A. Neale, None But The Sinners: Religious Categories in the Gospel of Luke,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Supplement Series 58 (Sheffield: JSOT Press, 1991),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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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는 예수의 명령대로 서둘러 내려왔다.[1]삭개오의 행동은 예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음을 보여준다.[2] 사실 누가는 예수의 명령과 삭개오의 반응에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했는데,[3] 그 의도는 삭개오의 순종을 부각시키는데 있다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 삭개오가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에서 그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4]이와 반대로 부자 관원은 예수의 말씀에 근심하였다(18:23).[5] 또한, 삭개오는 예수를 즐겁게 맞아들인다. 삭개오의 기쁨은 한 개인의 감정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2:10)고 했던 언약이 성취되는 순간임을 드러내주는 표현이다.[6]그러므로, χαίρων은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한다.[7]이러한 삭개오의 반응은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동일하다(καὶ εὑρὼν ἐπιτίθησιν ἐπὶ τοὺς ὤμους αὐτοῦ χαίρων, 15:5).[8]



[1] Bock, Luke 9:51-24:53, 1518.

[2]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5.

[3] Bock, Luke 9:51-24:53, 1518.

[4] Bock, Luke 9:51-24:53, 1518; Stein, Luke, 467.

[5] Evans, Luke, 283.

[6]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5.

[7]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5.

[8] Alan C.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a Defense,Biblica 71 (1990):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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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1] 본문에는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예수에 대한 소문이 삭개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2] 다시 말해, 당시 유명 인사였던 예수에 대해서는 소식들을 통해 익숙히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으므로,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3] 다만, 동사 ζητέω 10(ἦλθεν γὰρ ὁ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ζητῆσαι καὶ σῶσαι τὸ ἀπολωλός)에도 사용되었으므로, 누가가 예수의 사역과 관련지어 생각하도록 의도했다고 짐작할 따름이다.[4] 하지만 삭개오는 두 가지 장애물에 부딪힌다: 한 가지는 예수를 둘러싼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작은 키이다.[5] 삭개오는 몰려든 사람들이 자신의 앞을 가리는 바람에 도저히 예수를 볼 수 없었고, 더 큰 장벽은 그의 키가 보통 사람들 보다 작았다는 것이다.[6]여기서 ἡλικία는 실제적인 키를 의미하지만(참조 눅 2:52),[7]죄인 취급을 받았으므로(7), 삭개오는 “부와 직위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을 지나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작은 자(littleness)[8]였다고 볼 수 있다. 삭개오의 왜소한 체구와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그를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작은 자로 여기도록 작용했다.[9] 삭개오는 예수와의 거리적 간격만큼이나 소외당했던 인물이었다.[10] 그렇다고, 여기에 모인 무리가 예수를 보려는 삭개오의 시도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11]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므로(5:1, 15, 19; 6:17, 19; 7:9, 11; 8:4, 19, 40, 42, 45; 9:11, 37; 11:14, 27, 29; 12:1; 14:25; 18:36; 19:39; 23:48),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유난히 키가 작았던 삭개오의 시야를 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의 집에 머무르시려는 예수님께 불평까지 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7).



[1] Bock, Luke 9:51-24:53, 1517.

[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Stein, Luke, 467.

[3] Bock, Luke 9:51-24:53, 1517.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5] Bock, Luke 9:51-24:53, 1517.

[6] Stein, Luke, 467; Norval Geldenhuy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9), 470.

[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8] Nolland, Luke 18:35-24:53, 907.

[9] Green, The Gospel of Luke, 670; Nolland, Luke 18:35-24:53, 907.

[10] Bock, Luke 9:51-24:53, 1517.

[11] Green은 의도적이라고 본다(The Gospel of Luke,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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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요한의 제자들은 2:18에서 언급되는데, 이 구절에서는 금식규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발단이 된다.[각주:1] 분명 이들은 요한이 구속 된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각주:2] 그러나 요한의 구속(1:14)은 죽음으로 끝난다.[각주:3] 그러므로 요한의 시체매장은 그의 사역이 종결을 의미한다.[각주:4] 하지만 예수의 매장(15:42-46)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이 끝은 아니다.[각주:5]

사실 세례 요한의 순교 이야기는 다소 어색하게 마무리되는데
, 그 이유는 이 이야기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각주:6] 본문에서 요한은 대부분 헤롯과 헤로디아, 살로메, 심지어 시위병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18절에서만 주체로 등장할 정도로 배역의 비중이 매우 낮다.[각주:7] 무엇보다 다른 순교자들의 기록과는 다르게 요한에게는 박해자들과의 대면과 심판예언에 대한 언급이 없다(18).[각주:8] 요한은 무대 뒤에서 살해 당하고 제자들에 의해 매장된다.[각주:9]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전쟁에 패배한 이유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살해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Josephus, Ant. 18.5.***).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요한의 모욕적인 죽음에 독자들은 당황스러울 터이다.[각주:10]

세례 요한은 사역의 대가로 보복을 당한다
.[각주:11] 요한의 가르침은 간과되고 잔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개는 예수의 죽음과 평행이 된다.[각주:12] 우선, 청중들은 두 사람의 가르침을 열심히 들었고(20; 12:37) 그 영향력은 지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정도였다(6:12; cf. 15:9-10, 14-15).[각주:13] 하지만 이 지도자들은 이들을 구해주지 못한다(6:20; cf. 15:4, 9-14).[각주:14] 대적들의 살해모의는 실패로 돌아가지만(6:19; cf. 3:6; 14:1 ), 체포되어(6:17; cf. 14:46; 15:1) 죽음 당하고 매장된다(6:27-29; cf. 15:16-47).[각주:15] 여기서 마가의 의도가 드러난다.[각주:16]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머릿돌로 삼으셨다(12:10).[각주:17] 그러므로 요한의 죽음 역시 헛되지 않다. 실제로 제자들의 매장은 요한이 사람들의 존경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15:42-46).[각주:18] 사울과 요나단을 매장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삼상 31:11-13)과 예수의 시체를 매장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15:42-47)과 마찬가지로, 요한의 제자들은 적대자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만큼 스승 요한을 존경했다.[각주:19]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요한을 함부로 대했다고 가르치셨다(9:12-13).[각주:20] 이러한 경향은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요구에도 반영되어 있다(특히, 27).


결국 이 이야기는 헤롯이 세례 요한과 예수의 유사성을 인식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6:14-16), 예수의 최후를 암시하는 요한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각주:21]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 요한의 구속은 예수의 사역과 연결하여(1:14), 요한의 순교는 예수의 메시야 사역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한다.[각주:22]
  1. Collins, Mark, 314; Donahue and Harrington, The Gospel of Mark, 200 [본문으로]
  2. France, The Gospel of Mark, 259 [본문으로]
  3. Collins, Mark, 314 [본문으로]
  4. France, The Gospel of Mark, 259 [본문으로]
  5. France, The Gospel of Mark, 259 [본문으로]
  6. Marcus, Mark 1-8, 403 [본문으로]
  7. Marcus, Mark 1-8, 403-404 [본문으로]
  8.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9.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0.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1.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2. Marcus, Mark 1-8, 404. 11:32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진정한 선지자로 인정한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13.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4.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5.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6. 참조.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7.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18.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189; Donahue and Harrington, The Gospel of Mark, 200 [본문으로]
  19.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189 [본문으로]
  20. Guelich, Mark 1-8:26, 333 [본문으로]
  21. Marcus, Mark 1-8, 404 [본문으로]
  22. France, The Gospel of Mark, 35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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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약학계는 N. T. Wright의 '신선한 조망'(a fresh perspective) 운동의 영향으로 바울복음을 반제국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근래에 출간된 주석 역시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데, 김세윤 교수는 이를 전면으로 거부한다. 단순히 거부를 표명하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적인 성서학자답게 치밀한 성경연구를 바탕으로 반제국주의적 해석을 반박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치밀한 논증으로 자신의 의견을 이끌어 가는 능력이 실로 탁월하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성서학적 접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세윤 교수가 한국 신학자로는 최초로 WUNT 시리즈로 두 권의 책을 출판한 걸출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이 책만으로도 왜 그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라 불리는지 알게 될 정도로 뛰어난 책이다.

이 책은 왜 반제국주의적 해석을 거부해야 하는지 알게 될뿐 아니라 누가와 바울의 세계관을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역시 김세윤 교수는 성서신학자를 꿈꾸는 이들의 모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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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가 쓴 '그리스도와 가이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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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 폭력과 저항 폭력의 악순환을 넘어 정의와 자비의 길로 -


 지난 7월 6일 밤에 방영된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2부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는 이슬람에 관해 소개하며,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화해와 소통의 길을 모색한다. 이슬람의 경전이 예수를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선지자라고 기록하며 또한 무슬림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을 유일신으로 믿는다는 것이 화해의 접촉점으로 제시된다.

 또한 이 방영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화해과 소통을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이 극복해야 하는 차이점들도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을 믿되 이슬람은 예수를 신으로 믿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비폭력과 사랑이 강조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고 불신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연 이슬람과의 화해를 위하여 더 이상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않고 그저 위대한 선지자로 믿어야 하는가? 이러한 교리적 문제만 극복하면 이슬람이 기독교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 때문이기보다는 십자군 전쟁이나 이라크 침공 등의 군사적 폭력에 지지를 표한 실천적 행동 때문이다.

 이슬람이 폭력의 사용을 중단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하면 기독교와의 화해가 이루어지는가? 이슬람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한다면 미국이 아랍 지역에서 가진 석유에 대한 이권을 포기하고 더 이상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 세력의 무력 사용이 계속 되고 경제적 착취가 계속되는 한 이슬람 세력의 대응 폭력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사용하는 폭력은 서방 세계의 폭력에 의해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기독교 세계의 권력자들은 중세 시대 때부터 아랍 지역을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침공하기를 즐겨왔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부터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돈에 눈이 먼 서방 세계의 권력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지원 아래 무슬림의 피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슬림의 저항 폭력이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말고 그저 선지자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이것은 무슬림에게 기독교와 화해하기 위하여 그들의 경전과 무함마드를 버리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강요이다. 화해와 소통은 자신의 본질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반성하고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는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정된 죄명으로서의 신성모독과 관련된다. 대제사장이 “네가 메시아냐?”고 질문하자, 예수는 “그렇다. 내가 권능자(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4:62). 여기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아니다. 메시아는 순교자 저스틴(Dial. Trypho 49)이 후에 인정하였듯이 단지 “사람들 중에 하나”일 수 있다. 신성 모독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때에 발생한다. 자신의 정체를 단지 메시아일 뿐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고 밝힌 예수의 주장을 인간들이 부정한 것이 예수의 죽음이었고, 이러한 예수의 주장을 하나님께서 긍정한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때 그를 신적인 존재로 믿게 되었다.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한 예수의 주장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결론 내렸지만 돌로 치는 종교형에 처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 정치형인 십자가형을 받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수를 나무 형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신명기 21:23)에 따라 예수를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선언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저주 선언을 무효화시키는 사건(부활)이 없이는 예수가 율법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믿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부활로 인해 율법의 저주 선언이 무효화되고 예수가 메시아로 믿어지게 될 때에는 예수의 주장대로 신적인 메시아로 믿어지게 되었다.

 이 기획물의 제 2 부는 이슬람의 문제점이 그들의 경전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잘 지적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제점도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 세계 속에는 사랑과 용서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흐름이 있어 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자들이 있어 왔다. 기독교 속에 들어온 이 암세포는 오늘날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암세포는 속으로 기독교를 부패시킬 뿐 아니라 밖으로는 타종교와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든다. 이슬람 세계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된 데에는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거짓 기독교인들의 공로가 크다. 그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실상을 기독교라는 가면으로 가리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기독교의 이미지마저도 실추시키고 기독교 복음의 전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어 놓는다.

 십자군 전쟁은 아랍 지역의 선교를 힘들게 만들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이슬람 세계가 미국과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통치의 경우에도 인도네시아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도네시아가 무슬림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권력을 추구하는 사이비 모슬림이 이슬람 세계에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먼저 명분을 준 것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 준다는 핑계 아래 세속 정권이 하는 사악한 일을 지지한 사이비 기독교 세력이었다.

 광우병의 원인은 사람이 소에게 제공한 동물성 사료이듯이 이슬람의 폭력성의 원인은 서구 세계가 아랍 세계에 제공한 폭력과 착취이다. 이러한 폭력과 착취를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을 본다면 이슬람 세계는 말로는 예수를 전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 비일관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눈앞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비성경적인 국정운영에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정의는 가난한 자들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을 요구하며,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불신자들에게마저도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단체들은 결코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지 말고 자신을 비워 아낌없이 세상을 비추는 촛불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만이 참으로 예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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