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구약성서에 나타난 간음죄와 그 배경

박종수

강남대학교, 구약학 교수

Ⅰ. 문제 제기

현대인에게 성(性)은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이 아닌 것 같다. 여기저기 "아우성"(아름다운 우리의 성을 위하여) 소리가 들리면서 성에 대한 공개적 토론이 활발해지고 있다. 사실 진작 그랬어야 했다. 학교에서의 성교육이 거의 부재한 탓에 어린 학생들이 성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 적이 너무도 많았다. 가정에서 역시 부모와 자녀간에 성에 대한 대화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점을 볼 때, 한국인에게 성은 여전히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오늘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성문화가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문화는 음지로 들어가면서 남성 중심으로 되었고, 그 결과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 여러 제도 (예를 들면 축첩 제도 등)를 발생케 했다. 서방 세계의 개방된 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성문화도 개방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성문화는 여전히 비개방적이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전래는 한국의 성문화를 더욱 음성적으로 만들었다. 타락한 성행위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성서의 가르침은 교회에서 감히 성에 대한 개방적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타락한 성행위를 용인할 것인가? 혹은 용인할 수 없는 것인가?"에 달려 있지 않다.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다원화된 현대인에게 더 이상 매력을 끌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교조적인 당위성 혹은 양자택일의 획일화된 사고에서 벗어나서 "왜"를 먼저 물어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 "간음하지 말라"(출 20:14; 신 5:18)는 제 7계명은 왜 생겼는가? 더 나아가, 그렇다면 간음죄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간음죄를 지은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든지(신 22:21, 24), 혹은 화형시키라(창 38:24; 레 21:9)는 성서의 규정은 실제로 얼마나 지켜졌는가? 만약 간음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형벌이 내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다면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롯의 딸들은 아버지인 롯을 술 취하게 한 다음 성행위를 통해 자녀를 낳지 않았는가?(창 19:30-38) 롯이 술 취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간음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모압과 암몬족의 유래를 설명하는 원인론적 이야기로 일단락 할 것인가? 우리는 그 사건 속에서 성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이해를 어떤 관점에서 엿볼 수 있는가?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가장하여(?) 이방의 왕에게 내어준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창 12:10-20; 20; 26:1-11). 이스라엘에서 남편의 허락을 얻은 (공공연한?) 간음은 부정한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는가? 다른 고대 근동의 법들은 이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정작 간음죄를 지은 이집트의 왕은 이방인이란 이유로 죽음의 형벌을 면할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창세기 38장에 소개된 유다와 다말의 경우를 보자.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와의 성관계를 통해 아이를 잉태함으로써 화형에 처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다행히 유다가 남긴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 결국 다윗의 조상이 된다는 내용이다. 간음죄를 지은 사람은 남녀 모두를 반드시 죽이라는 성서의 규정(레 20:10)은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유다와 다말 사건은 출애굽기나 레위기의 법규가 아직 정립되기 이전의 사건이기 때문일까? 창세기의 족장사는 시대적 한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한 대답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

다윗 역시 밧세바와의 간통을 통해 솔로몬을 낳지 않았는가?(삼하 11) 물론 다윗은 그로 인해 말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왕가의 복수결혼이나 부정한 성행위는 일상적인 간음 규정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인가? 다말을 겁탈한 암논의 경우 역시 간음죄로 법정에 서지 않았다(삼하 13:1-22). 암논은 정당한 법절차를 통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말의 오라비인 압살롬에 의해 살해된다(삼하 13:23-29).

이상에서 열거한 몇 가지 사건들은 간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규정(율법)이 다양한 차원에서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민 5:11-31을 취급하게 된 동기가 있다. 민 5:11-31은 간음혐의를 받고 있는 아내가 남편에 의해 법정에 고발당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었으나 남편이 그것을 보지 못했고, 증인도 없는 경우에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 와서 판결을 듣는다. 과연 재판은 어떻게 진행될까? 현대의 법 체계를 볼 때 이와 같은 경우에는 증거불충분으로 재판에 호소할 수 없다. 따라서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배우자의 비행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남편의 의심만으로도 심리가 개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처음부터 인간의 판단에 무리가 있다. 심증이 가더라도 물증이 없으면 비행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결혼 생활을 어떻게 정상적으로 영위할 수 있을까?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판결이 나야 한다. 이스라엘의 판결은 주술적 재판 의식(ordeal)에 의해 이루어진다. 쓴 물을 여자에게 먹여 그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떨어지면(생식기가 늘어나면) 간음한 것으로 간주한다(5:22, 27). 그렇지 않고 여인이 정결하면 해를 입지 않고 임신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여인이 간음죄인으로 판명이 나더라도 다른 율법에서 규정한대로 돌에 맞아 죽는다든지 화형 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법 체계는 어떻게 운용되었을까? 본 논문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시도되었다. 특별히 나는 민 5:11-31을 분석하면서 성(性)과 관련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연구방법론

"간음하지 말라"(출 20:14)라고 하는 대명제는 이스라엘 율법의 이상을 보여준다. 생명의 산실인 성(性)이 타락할 때 공동체 전체의 부패를 가져온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간음 규정을 엄격하게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은 소위 "법대로"만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법과 현실의 괴리"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아무리 고대 사회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실존적 정황은 법의 무조건적인 집행보다는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집행을 요구한다. 또한 법은 인간의 다양한 삶을 모두 규제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국가는 거의 예외 없이 하위법을 제정하고 있다. 국가의 이상은 헌법을 통해 명시되고, 헌법의 이상은 구체적인 법률로 드러난다. 결국 하위법은 상위법의 이상을 삶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외형적으로 똑같은 유형의 범죄라도 상황이 다를 때 재판의 결과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도피성 제도를 들 수 있다. 비록 살인을 했을지라도 그것이 고의적이 아닌 우발적인 사고라면 도피성으로 피신하여 죽음을 모면할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은 생명으로 갚으라"는 보복법에 대한 수정법이자 하위법이라고 볼 수 있다.

간음에 대한 규정 역시 대체로 모법(헌법; constitution)과 하위법(statute), 그리고 삶의 현장(case)에서의 적용이라는 삼 단계 구조를 지닌다. 이미 가정을 이룬 사람의 성범죄는 가정의 질서 유지와 부부간의 건전한 생활과 행복 추구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와 국민의 이상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하위법인 민법과 형법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삼 단계 구조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 1 단계: 헌법 제 36조

혼인과 가족 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제 2 단계: 형법 제 241조

①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

② 전항의 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논한다. 단, 배우자가 간통을 종용 또는 유서한 때에는 고소할 수 없다.

제 3 단계: 민법 제 840조(재판상 이혼 원인)

부부의 일방은 다음 각 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 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①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민법 제 841조(부정으로 인한 이혼 청구권의 소멸)

전조 제 1호의 사유는 다른 일방이 사전동의나 사후용서를 한 때 또는 이를 안 날로부터 6월, 그 사유 있은 날로부터 2년을 경과한 때에는 이혼을 청구하지 못한다.

제 1 단계인 헌법 제 36조는 간음에 대한 구체적인 형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가족 생활은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국가는 건전한 가정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건전한 가정 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발생할 때 국가는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준다. 그러나 헌법에서 세부적인 항목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다. 단지 법 제정 취지와 목적을 언급하면 된다.

제 2 단계와 제 3 단계에서 형법과 민법이 간음(간통)죄를 취급하고 있다. 형법 241조는 배우자가 있는 자가 간통한 경우에 간통 당사자 모두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간통죄가 성립된다. 민법 840조는 배우자에게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이혼을 청구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혼을 청구하기 전에 배우자는 간통을 저지른 쪽에 대한 형사 고발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혼을 전제로 할 때 배우자를 형사 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법의 규정은 형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쌍방간의 합의를 존중하는 민법보다 전단계(前段階)로 여겨진다.

이러한 현대의 법 체계는 구약 성서의 법 체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논문은 법 체계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토대로 고대 이스라엘의 간음 규정을 고찰할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법과 고대의 법을 단순히 비교하는 작업에서 멈추지 않는다.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인간 공동체가 안고 있는 삶의 실존을 근거로 보편 타당한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에 차별적으로 적용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주시할 것이다. 보편으로부터 특수성을 살피는 작업을 통해 이스라엘의 간음 규정에 나타난 인간 이해와 성 이해가 본 논문의 과제이다.

본 논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민 5:11-31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지식을 요구한다. 특별한 방식으로 범인을 색출하는 것이 종교적 의식과 맞물려 있다. 제사장은 간음 혐의로 법정에서 나온 여인에게 다양한 방식의 주술적 행위를 연출한다.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박 바닥의 티끌을 물에 섞는다든지(17절), 여인에게 무엇인가 맹세하게 한다든지(18-19절), 저주가 되는 말(spell)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것을 쓴 물에 넣고 여인에게 먹인다든지(23-24) 하는 이 모든 행위는 주술(magic)이라고 하는 종교 행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하등에 가치 없는 이상한 미신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생사를 가름하는 중요한 재판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소위 "주술적 재판 의식"(ordeal)에 의존하고 있는 간음 혐의에 대한 재판은 이 논문으로 하여금 문화인류학적 연구방법론을 적용하도록 유도한다. 한국이나 아프리카 등지의 미분화된 사회에서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 주술적 종교 행위는 초월적인 방식으로 인간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할 때 종종 행해지고 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러한 주술 행위를 전통적인 종교 전승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이방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이 능동적으로 수용한 다양한 종교 전승으로 간주해야 한다. 제사장들이 행했던 각종 주술적 의식은 주술이 공동체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그 동안 논의된 본문의 구조를 주술적 행위에 근거를 둔 종교 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재구성하면서 원래의 삶의 자리를 추적하고자 한다.

Ⅲ. 고대 이스라엘의 간음 규정

고대 이스라엘의 법 체계 역시 크게 보면 삼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 1 단계: 간음하지 말라( ; 제 7 계명; 출 20:14[신 5:18])

제 2 단계:

1) 기혼자의 간통: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신 22:22)

2) 약혼자의 간통: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 만나 통간하면( )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3-24).

3) 처녀와의 간음: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통간하난( ) 중 그 두 사람이 발견되거든, 그 통간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로 아내를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신 22:28-29).

4) 근친상간: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10:11);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4);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무자히 죽으리라(레 20:20);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하리라(레 20:21).

5) 동성연애: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 남자와 교합하면( )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6) 수간(獸姦):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거든( )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5-16).

제 3 단계:

1) 무릇 아직 속량도 되지 못하고 해방도 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그들이 죽임을 당치 아니할 것은 그 여인은 아직 해방되지 못하였음이라(레 19:20)

2) 남편에 의해 간음의 의심을 받는 경우: 임신하지 못함(민 5:12-31).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구약 성서의 율법 체계는 모법(母法)에 해당하는 십계명이 있고, 그 정신을 구체적으로 구현할 세부 법률이 있다. 그 다음에 법률에서 정하지 못한 내용이나 예외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유사 법률이 있다.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대명제만 제시했을 뿐, 간음했을 경우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헌법 체계와 동일하다. 두 번째 단계인 각 법률은 다양한 간음 행위를 규정하고 있다. 약혼했거나 기혼자 신분이 간통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죽음의 형벌이 내려진다. 그러나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대가 간음 행위를 했을 때에는 그 둘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신 22:28-29). 이 규정은 구약의 율법에서 제시한 간음행위(adultery)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간음은 우선 결혼한 사람뿐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성 관계는 일반적인 간음보다는 일종의 "바람직하지 못한 성행위" 정도에 머무른 것 같다. 현대 사회는 결혼하지 않은 총각 처녀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성 관계를 가졌다면 간음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지라도 비합법적인 성 관계, 즉 결혼하기 전에 약혼도 하지 않고 행해진 성행위는 모두 간음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간음 규정이 일부일처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 된다. 이스라엘은 일부일처제를 이상적인 부부 관계로 희망했지만(창 2:18-24), 실제에 있어서 일부다처제가 혼용되었다. 아브라함은 아내 외에 첩을 거느렸으며,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정식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다윗과 솔로몬 역시 수명의 아내를 두지 않았던가?

그밖에도 이스라엘의 성 관련 법률은 다양한 종류의 간음 행위와 그에 따른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근친상간(近親相姦) 역시 대체로 죽음의 형벌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장모를 범한 사람은 불살라야 하며(레 20:14), 백숙모를 범한 사람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게 된다(레 20:20). 그러나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 것은 더러운 일(니다; )이기 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한다(레 20:21).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의 아내를 취한 사람은 죽음의 형벌 대신에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형제의 아내를 취한 것은 간음이 아니라,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 형제가 사망했거나 아내와 이혼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시형제결혼법(혹은 형사취수법: levirate law)을 염두에 두고 제정된 것으로 보인다. 형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게 되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자녀를 낳고, 그 자녀는 형의 자녀로 귀속되는 시형제결혼법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신 25:5-10). 따라서 레 20:21의 규정은 시형제결혼법으로도 인정되지 않는 경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혼은 죽음의 형벌에 이르는 간음죄로 취급되지 않는 점을 볼 때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닌다. 동성 연애와 짐승과 교접하는 행위 역시 가증한 죄로 여겨 사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대체적으로 볼 때 간음죄는 일단 사형에 처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간음죄는 그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있거나 명백한 증거가 있을 때 법정에서 취급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간음죄를 입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서에는 간음죄로 사형을 당한 경우가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간음죄에 대한 규정이 적용되는 세 번째 단계는 법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준다. 분명히 간음죄의 범위에 속하더라도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현대의 법체계는 판례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 판례에 해당된 성서구정이 있다. 아직 해방되지 않은 정혼한 노예(종)와 성관계를 갖는 경우, 그 두 사람은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 성서는 그 이유는 밝히고 있다. 정혼한 노예라고 할지라도 아직 속량 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주인의 재산에 속한다. 따라서 주인의 재산에 손상을 입히는 성적 행위에 대한 배상을 하거나 그에 상응한 형벌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이스라엘의 간음죄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법적인 보호를 받는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적용한 법률이다. 법의 보호를 차별적으로 적용받는 노예들은 속량되기 전까지는 간음죄의 규정에서 제외된 집단이었다. 이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현대법과는 달리 사회계층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불평등체계였다. 그러나 간음규정에서 성별의 차별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참조. 레 20:10; 신 5:18; 22:23-24).

간음행위와 관련된 어휘 역시 대체로 포괄적인 법규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 간음과 관련된 히브리 동사는 "나아프"( )와 "자나"( )가 있다. "나아프"는 주로 남성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반면에, "자나"는 여성이 행위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발견된다. 레위기 20:10은 간부( )와 음부( ) 모두에게 "나아프"동사의 어근이 사용되고 있다. 그 밖에 많이 사용되는 동사는 "샤카브"( ; 눕다)로서 "동침하다"는 뜻을 지닌다. 남녀간의 비합법적인 동침을 표기할 때, 이 동사는 "간음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사 "라카흐"( ; 취하다) 역시 간혹 남녀간의 비합적인 동침을 의미할 때도 있다(창 12:15). 또한 일반적인 성행위를 암시하는 동사 "야다"( ;알다, 성관계를 맺다)가 강간을 의미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삿 19:25). 동사 "카라브"( )는 전치사 과 함께 "∼와 동침하다"(문자적으로는, "∼에게 가까이 가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레 20:16). 이처럼 다양한 용어가 비합법적 성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하지만 이상에서 열거한 동사는 일정한 의미론적 영역(semantic fields)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나아프"( )는 제7계명과 성결법전에 규정된 포괄적 모법에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며, 그 밖의 동사는 대체로 하위법이나 예외적 상황을 언급할 때 사용된다. 그런데 이 논문의 주요 본문인 민 5:12-31에서 간음행위와 관련되어 "샤카브"(동침하다)라는 히브리 동사가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민5:13). 그것은 본문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실례를 보여준 것이다.

Ⅳ. 민 5:12b-28에 나타난 간음죄의 심리과정

이스라엘의 간음규정이 실제적 상황에서 매우 난해한 문제였다는 사실이 민 5:12b-31에 소개되고 있다. 본문은 재판절차와 종교적 의식이 혼합되어 있다. 게다가 본문 안에 내재된 문헌자료가 오랜 구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단계 형성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 있는 반복된 구절들은 본문의 구조를 분석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원래적 삶의 자리가 재판과정보다는 종교적 의식에 무게가 실려있다면,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다.

A. 본문의 구조에 대한 이해

민 5:11-12a는 "야웨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라"는 서두로서 편집자의 가필에 해당한다. 오경이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narratives)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민수기의 편집자 역시 본문을 모세가 전한 이야기로 소개한다. 오경 안에 소개된 개개의 율법은 모세가 들려주는 이야기 안에 있는 단편들로 이해된다. 따라서 재판과 관련하여 본문이 채택한 원래의 자료는 서두와 부가어를 제외한 민 5:12b-28이 한 단위를 이루고 있다.

피쉬밴(M. Fishbane)은 본문의 내용이 조화를 이루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선 심증은 있지만 증거가 없는 아내의 간음죄를 언급하고 있는 12b-13절은 남편의 의심을 서술하는 14절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13절은 15절로 이어질 때 보다 자연스럽다. 또한 본문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인상을 주는 곳이 세 군데나 있다(12b-13, 14, 29-30). 14절을 거의 반복하고 있는 30절은 후대 편집자의 가필로 여겨진다. 이런 점을 들어 피쉬밴은 본문(민5:11-31)의 서두와 종결부분은 철저히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와 대조적으로 밀그롬은 본문이 통일된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교한 대칭구조로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의 견해를 따라 편집자의 보충설명인 서두(11절)와 종결부분(31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A. 사건발생(The Case; 12-14)

1. 외부적 의심(outside suspicion; 12-13)

2. 남편의 의심(husband's suspicion; 14)

B. 주술적 재판의식 (Preparing of Ritual-Ordeal; 15-18)

C. 맹세규정(Oath-Interpretation; 19-24)

B' 주술적 재판의식의 실행

(Execution of the Ritual-Ordeal; 25-28)

A' 사건발생(The Case; 29-30)

밀그룸은 12-13절의 경우와 14절의 경우를 별개의 사건으로 간주하여 본문이 두 유형의 사건을 취급하고 있다고 본다. 12-13절을 공동체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증거를 포착하지 못한 경우로 간주하며, 14절을 남편이 아내를 의심한 경우로 취급한다. 그 근거로 함무라비(1792-1750 B.C) 법전을 예로 든다. 함무라비 법전 제131항은 귀족의 아내가 남편의 고발을 받았으나 간음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을 때 신의 판결을 받아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동 법전 제132항은 간음한 여인에 대한 고발자가 있으나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을 때, 피고는 남편의 입장을 고려하여(for the sake of husband)강물에 뛰어들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밀그롬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성서의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별개로 취급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그 처리과정3도 일원화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131, 132항) 역시 별개의 사건이지만 둘 모두 남편의 입장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형태로 고정된 본문에 대한 문헌적 구조분석이 원래의 삶의 자리에 얼마나 재건할 수 있겠는가? 본문의 구조가 구전단계의 종교의식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서두(11-12a)와 종결(29-31)부분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과정에서 정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본문의 삶의 자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현장에서 불필요한 부분(11-12a, 29-31)은 일단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오늘날의 상황과는 달리 재판심리와 종교적 의식이 분화되지 않는 고대 사회에서는 이 둘을 함께 고찰 할 때 원래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본문은 일단 아내의 부정행위를 의심하는 남편의 고발과 그 심리과정이 종교적 의식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주술적 재판의식(ordeal)을 담고 있는 본문을 제의적(ritualistic)측면에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A. 원인발생(12a-14): 아내의 간음혐의 내용과 정황서술

B. 재판심리(15-26)

1. 남편이 소제물을 가지고 아내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감(15)

2. 제사장의 심리(16-26)

1) 제사장이 여인을 야웨 앞(제단)에 세운다(16, 18a)

2) 토기에 거룩한 물을 넣고 성막바닥의 티끌을 그 물에 섞는다.(17)

3) 여인이 머리를 풀고 소제물을 손에 든다.(18b)

4) 제사장이 저주의 쓴 물을 손에 들고 여인에게 맹세(서약)를 하게 한 다음 죄인으로 드러나는 징후를 알린다.(19-22a)

5) 여인은 "아멘 아멘"으로 맹세한다.(22b)

6)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빤 물을 저주의 물에 빨아 넣고 저주의 쓴 물을 여인에게 먹임(23-24)

7) 제사장이 여인의 손에서 소제물을 취하여(야웨 앞에서 흔든 다음) 제단을 가지고 간다.

8) 제사장은 소제물 일부를 제단 위에서 불태운 후에, 여인에게 저주의 쓴 물을 마시게 한다(26).

C. 재판결과(27-28):

1. 여인에게 죄가 있으면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떨어져 사람들에게 저주거리가 됨

2. 여인에게 죄가 없으면 해를 받지 않고 임신이 가능함

B. 사건의 발생(12b-14)

민 5:12b-14는 제사장에게 와서 재판을 받아야 할 두 가지 경우(사건)를 상정하고 있다.

1)첫 번째 경우는 아내가 실제로 다른 남자와 부정한 관계를 가졌으나 현장에서 잡히지 않고 그 증인도 없지만 남편이 여전히 아내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지 못한 경우이다. 이 경우는 아내의 부정에 대한 증거는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아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공동체 안에서 떠도는 소문이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의심하게 할 수 있다. 2) 두 번째 경우는 아내가 부정한 관계를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아내를 계속 의심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남편이 아내를 아무런 이유 없이 의심한다든지, 아내를 시기하여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고의로 고발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상의 두 경우 모두 아내의 간음행위를 가려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아내의 불륜을 입증할 아무런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심증만 가지고 아내를 계속 의심할 수는 없다. 또한 아내가 부당하게 고발당했을 때 자신의 결백을 입증받을 합법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이런 절차를 거치고 나야만 건전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부부간의 화목을 위한 법 규정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법체계는 이런 경우에 간통죄로 고발할 수 없다. 그러나 부부간의 화목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의심을 해소해야 한다. 증거제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현대의 법체계가 반드시 이상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는 대목이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함무라비 법전(131, 132항)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의심만으로도 아내를 법정에 세울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아내의 불륜사실을 가려내어 그에 따른 형벌을 내리는데 그 목적이 있기보다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 부부간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절차로 보여진다. 이렇게 본다면 이 규정은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유익하다. 남편은 남편대로 심리적인 부담감을 해소할 수 있고, 아내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증인이나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내의 불륜을 입증할 것인가?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神明裁判]에 맡겨야 한다. 그 하나님의 판단을 특별하고도 초월적인 방식에 의존한다. 이것이 바로 주술적인 재판의식(ordeal)이다. 대부분의 현대국가는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법정에서의 종교적 의식은 일반적으로 금지된다. 그러나 고대사회의 장점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마련해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적용된 주술적 재판의식이다. 여기에 본문에 대한 종교현상학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정당성이 있다. 이것을 단순히 미신적 행위라든지, 거짓 주술(black magic)에 의한 현혹된 종교행위로 본다면 본문의 의미는 가려지고 말 것이다.

C. 재판심리(15-26)

민 5:15-26은 재판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재판과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의식에 해당된다. 그것은 또한 죄인의 행위를 밝혀내서 처벌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부부간의 화해와 공동체의 질서확립을 의도하는 거룩한(?) 종교적 의식이다. 왜냐하면 재판관인 제사장은 간음혐의로 불려나온 여인에게 부정행위를 하게 된 동기나 과정을 심문하는 대신, 주술적인 방식을 통해 문제해결을 시도한다. 물론 그 결과는 재판현장에서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주술적 효력이 즉각 나타난다면), 대개는 추후의 임신여부로 가려진다.(28절)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일반법정에서의 심리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재판을 위한 종교의식은 불확실한 간음죄를 섣불리 처벌하는 대신, 그것을 신(神)의 심판에 맡김으로써 부부간의 화해를 유도하고 심리적 안정을 도모한다.

그렇게 본다면 법정에 나온 남편이 원고가 될 것이다. 아내에게 혐의가 없다면, 아내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불명예스러운 재판에 임했다는 수치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부정한 아내와 같이 산다"고 하는 근거 없는 소문으로부터 심리적 부담감을 느껴왔다고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남편이 아내를 법정으로 끌고 온 것은 부부 모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는 근거가 15절에 나타나 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보리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예물로 준비하고 제사장에게 와야 한다. 레위기의 제사법은 속죄하는 주체가 야웨께 제물을 가지고 오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4:2-3). 그러나 여기서는 남편이 아내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서의 편집자는 그 소제를 "의심의 소제"(민하트 케나오트; )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민하트 지카론; )라고 명명한다. 남편이 가져온 제물에 두 개의 명칭이 붙은 것이다. 그 첫 번째 명칭은 남편을 향한 것이요, 두 번째 명칭은 의심받고 있는 아내를 향한 것이다. 남편은 의심의 소제물을 바치고, 아내는 자신의 일을 기억하게 하는 소제를 바친 것이다. 결국 남편이 가져온 소제물은 자신과 아내를 위한 제물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제물의 이중적 성격은 본문의 재판이 의심받는 여인의 죄를 들추어내려는 것보다는 부부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16-26절은 제사장과 의심받는 아내 사이에서 행해진 일련의 종교의식을 소개한다. 여인을 제단 앞에 세우고(16절), 제사장은 각종 주술적 행위로 여인의 심리를 자극한다. 토기에 성수(聖水)를 넣고 그 안에 성막 바닥의 흙을 넣는다(17절). 종교인들은 신이 현존하는 제단에서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여인에게 죄가 있다면 그는 이미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얼굴색이 달라질 것이다. 여인은 머리를 풀고 남편이 가져온 소제를 두 손에 들고 제사장 앞에 선다(18절). 여인이 머리를 푸는 것은 죽음과 관련한 애곡 의식(비교. 레 10:6; 21:10), 혹은 나병환자들이 머리를 풀고 "부정하다"고 외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레 13:45). 법정에 나온 여인은 일단 죄인으로 간주되어 참담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손에 들고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하게 한다: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더럽혀서 네 남편 아닌 사람과 동침하였으면 (제사장이 그 여인으로 저주의 맹세를 하게 하고 그 여인에게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부어서 너로 네 백성 중에 저주거리, 맹세거리가 되게 하실지라.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19b-22a).

노트는 19절에 언급된 여인의 맹세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여인의 맹세가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맹세코 부인하는 말"이거나, 혹은 사제의 말에 여인이 "아멘 아멘( )"하는 것에 그 맹세(22b)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견해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노트의 견해는 우리가 주목할 만 하다. 본문의 의식은 현대교회에서 세례식을 거행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세례의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 개회사(Introduction to the Service): 회중을 향한 집례자의 말

B. 수세자의 등장(Presentation of Candidates)

C. 죄에 대한 거부와 신앙의 확인

(Renunciation of Sin and Profession of Faith)

D. 성수에 대한 감사(Thanksgiving over Water)

E. 세례(Baptism with Laying on the Hands)

F. 신앙의 확인(Confirmation of Reaffirmation of Faith)

G. 등록 교인임을 선포

(Profession or Renewal of Membership in the United Methodist Church)

H. 환영(Commendation and Welcome)

현대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례식은 교파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대동소이하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수세자의 신앙을 확인하는 서약에서, 수세자는 집례자(목사)의 말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I do)라는 말로 응답할 뿐이다. 집례자는 신앙공동체에서 요구하는 내용들을 받아드리겠다는 확인을 받아낼 뿐이다. 이것은 법정에서 원고나 피고가 위증을 할 경우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서약과도 같다. 물론 그 서약 당사자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집례자가 그 내용을 말하면, 대상자는 가부를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현대교회의 예식과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의식이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조는 상당히 유사하다: 1) 사건이 발생하여 사건 당사자가 제사장에게 나오는 것(AB; 민 5:12b-15), 2) 집례자가 죄를 거부하는 맹세를 시키는 것(C; 민 5:19-22), 3)일반 물을 성수화(sanctification of the water)하는 것(D; 민5:17), 4) 세례의식을 베푸는 것(E; 민 5:23-26), 그리고 5) 교인(공동체의 일원)으로 선포하고 환영하는 것(F-H; 민 5:27-28). 이 두 유형의 의식이 대체적으로 유사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지 않다. 종교적 의식은 대개 이와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그것은 종교의식이 개인의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항상 공동체의 이상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 의식에 참여한 당사자나 증인 모두가 동일한 결과에 참여함으로써 신과 연대하는 공동체의 일체성(integrity)을 확인하게 된다. 이점에서 볼 때, 여인이 맹세한 내용은 일단 제사장이 선창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여인의 서약을 받은 제사장은 저주의 말이 담긴 내용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빤 물을 저주의 물에 넣고 여인에게 그 물을 먹인다(23-24절). 제사장이 쓴 글자는 아마 자신이 선창한 맹세의 내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맹세한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종교적 심성이 반영된 행위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렘 51:59-64에 발견된다.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바벨론이 멸망하는 내용이 담긴 글을 두루마리에 기록한 다음에, 그것을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지면서, "그러므로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가라앉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멸망할 것이다"라고 외치게 한다. 이와 같은 주술적 행위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아프리카 등지의 미분화된 사회에서 발견되는 "목에 전갈 물리기"나 "독약 마시기" 등은 일종의 주술적 범인색출방식이다(참조, Gray, 44-45; 비교. 시 109:18; 잠 6:27-29). 의심이 가는 사람 혹은 공동체의 일원을 모아 놓고 전갈을 목에 기어가게 한다. 그때 전갈은 범인의 목을 문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주술행위가 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범죄혐의자들을 화로 주변에 모아 놓고 계란을 굽게하여 그 계란이 튀는 곳에 범인이 있다는 속성도 전해진다.

민 5:11-31에 소개된 주술적 재판의식은 고대 근동의 법률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함무라비 법전(CH) 제132항은 간음죄로 의심받은 아내는 자신의 결백을 보이기 위해 강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왜 강물에 뛰어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혐의가 없다면 강물에 빠져 죽지 않을 것이고, 혐의가 있다면 죽을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ANET, 171; 비교. LU 제10-11항). 그러나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그처럼 가혹하지 않다. 여인에게 먹이는 쓴 물은 결코 독약이 아니다. 거룩하게 된 쓴 물(혹은 성막바닥의 흙이 들어간 성수)을 먹임으로써, 그 쓴 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범죄행위를 가려낸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간음죄에 대한 이스라엘의 율법조항은 고대 근동의 법률보다 한 차원 진보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D. 재판의 결과(27-28)

쓴 물을 마신 여인에게 어떤 결과(징후)가 나타날까? 초월적인 주술의 효과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그 효과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난다고 믿었다. 본문은 그들의 믿음체계(belief system)를 보여준다. 그 여인에게 죄가 있으면 배가 붓고 성기로 상징되는 넓적다리가 늘어나( ) 임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죄가 없다면 집으로 돌아가 무사히(?) 아이를 가질 수 있다(27-28절).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하고도 주의 깊은 주술적 재판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증거가 분명한 사건이라면 그 처리는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처럼 확실한 증인(혹은 증거)이 없거나 현장을 입증할 아무런 대안이 없을 경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심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일단 재판의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설사 여인에게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술적 효과는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인의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늘어나거나 떨어져도 그것을 확인할 길이 거의 없다. 그 결과는 "여인이 임신할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달려있다. 결국 재판의 결과는 즉석에서 확인되기보다는 미래의 사건으로 미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미래의 사건은 언제 확인되며, 만약 법정에 섰던 여인이 임신하지 못하게 되면 그 여인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될 것인가? 민 5:11-31은 여인에게 그러한 일이 두 번 일어날 것을 예고하지 않는다. 여인에게는 단 한번이라도 간음죄로 법정에 서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맛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여인은 혐의가 있든 없든 간에 이미 고통의 쓴맛을 맛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여인에게 두 번의 고통을 안겨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여기에 본문의 핵심적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민 5:11-31에 규정된 재판절차는 간음죄를 사형에 처한다는 일반적(강제적) 법률로부터 선량한(?) 아내와 남편 모두를 보호하려는 법적 안전장치라고 보아야 한다.

Ⅴ. 결어: 고대 이스라엘의 간음규정에 나타난 성 이해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간음규정을 일반적인 법체계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이스라엘의 율법체계도 모법(constitution)-하위법(statute)-판례(case) 등의 삼 단계로 구성되어 있는 현대의 법률체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간음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는 제7계명은 간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고한 이상을 보여준다. 부정한 성행위는 일단 부부생활의 혼란을 초래한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공존공생의 짜임새)에 어긋나는 생명계(인간관계)의 혼란은 결국 인간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간음규정은 창조기사에 나타난 일부일처제의 이상을 염두에 두고 제정된 것은 아니다. 부정한 성관계에 해당하는 간음은 일단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인정되지 않은 비합적 성행위를 말한다. 비합적 성관계란 공동체에서 인정한 남편(혹은 아내)이외의 다른 사람과 갖는 성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비합적인 성행위는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인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간음죄를 돌이나 불로 죽이는 이스라엘의 율법은 간음죄를 살인죄와 함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큰 죄"로 간주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 두 유형의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졌다. 그러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스라엘의 보복법에 따르면, 간음은 간음으로 갚아야 한다. 하지만 부부간의 성과 관련된 문제는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아내가 다른 사람과 간통했다고 해서, 남편이 간부의 아내를 겁탈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신 19:21에 규정한 "생명은 생명으로" 갚는 보복법의 정신이 간음죄에 적용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性)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는 "생명의 존엄성"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생명을 해치는 간음행위는 죽음으로 그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간음행위는 죽음으로 그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성행위는 다른 방식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성행위는 다른 방식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 실존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보복이나 일방적인 법 집행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민 5:11-31은 간음죄를 밝혀내어 죽음의 형벌을 내리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획일화된 법 집행으로 말미암아 무고한 생명이 다치게 되지 않게 하려는 인간존중의 사상이 배태되어 있는 법이다.

이렇게 주장할 때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고한 아내를 법정에 고발한 남편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한계를 안고 있는 주술적 재판의식은 진짜 범인을 용납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겠는가? 여인에게 죄가 있다면 피해 당사자인 남편에게 돌아 갈 보상은 무엇인가? 만약 피해가 무고하게 고발된 아내라면, 그 수치감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본문은 이 모든 질문에 모두 응답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을 추론할 수 있다.

우선 아내를 고발한 남편의 입장을 검토해 보자. 힛타이트 법률은 아내의 간음현장을 목격한 남편은 아내와 간부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제129항) 역시 아내의 간음죄에 대한 남편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면 그 둘은 강물에 던져진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의 부정한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청원하면 왕이 그것을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율법은 간음죄에 관한 한 남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다. 그런데 근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스라엘의 법체계가 아내의 간음에 관한 남편의 권한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재고해야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 중 27절은 아내의 간음행위를 남편에 대한 범죄행위(마알; )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내의 간음행위는 일단 남편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이것은 처녀와 부정한 성행위를 했을 때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라는 신 22:29과, 속량되지 않은 정혼한 여종과 간통했을 때 죽임을 면할 수 있는 규정(레 19:20)과 유사하다. 그것은 처녀(여종)이 아직 아버지(주인)의 재산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내의 부정한 행위는 일단 남편에 대한 범죄로 간주되며 남편은 다른 고대 근동의 법률처럼 어느 정도 아니의 행위에 관여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렘 3:8은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 해준다. "내게(하나님께)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했으므로, 내가(하나님이) 그를 내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부도덕이 하나님께 대한 간음행위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남편이 간음한 아내를 법정에 끌고 가는 대신 내쫓고 이혼서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얼마나 지켜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간음규정에 대한 다양한 적용은 충분히 그러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만약 남편이 아내의 간음에 대한 의심을 갖고 있을 경우 증거도 없이 내쫓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아내는 어디에 억울함을 호소할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밀그롬은 최근에 발표한 짤막한 글에서, 민 5:11-31은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으로 해석한다. 설혹 아내가 주술적 재판의식을 통해 죄인으로 판명난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죽음의 형벌은 받지 않는다. 그 형벌은 임신할 수 없는 것에서 그친다. 그것도 오직 하나님의 판결(神判; divine judgment)로 인식되는 초월적 종교의식을 통해 가능하다. 이러한 신판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유용하다. 아내의 부정행위에 대한 소문을 들었거나 심증만으로 여성의 인권을 침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의심가는 아내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계속 영위할 수는 없다. 그것을 지켜본 공동체 역시 부담을 안고 있다. 만약 간음한 아내와 계속해서 살고 있는 남편이 이웃에 있다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내적으로 몸살을 앓게된다. 부부간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여 재판에 회부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방치하자니 범죄를 용인함으로써 공동체의 타락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 5:11-31의 재판과정은 넓게 본다면 아내와 남편, 그리고 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 모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가정의 평화와 건전한 공동체의 수립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해결하게 된다.

문제는 여인이 무죄로 판명나더라도 남편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민 5:31). 오늘날의 사고방식에 비추어보면 무고한 아내를 고발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율법은 무고한 아내를 고발한 남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민 5:31은 남편의 무죄를 선언하고 있다. 노트가 주장한 대로 그러한 남편은 과연 무죄일까? 이 문제는 남편이 유죄냐 혹은 무죄냐로 귀결되지 않는다. 본문에 드러나는 종교적 재판의식은 처음부터 죄인을 가려내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소원해진 부부 사이를 원만하게 해주는 제도적 장치라고 봄이 타당하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간음사건에 대한 재판의 결과보다는 판결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하고 있다. 여기에 주술적(magical) 혹은 (religious) 재판의식의 필요성이 있다. 남편과 아내, 혹은 공동체의 어떤 사람이 재판의 결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하나님의 판결을 거부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신탁에도 여실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제비를 뽑아 사울을 왕으로 뽑았을 때 부분적인 반대가 있었을 지라도 아무도 공개적으로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삼상 10:27). 신적인 판결은 이처럼 초월적이며 동시에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다. 또한 남편에게 아내를 심판할 권리를 주지 않고 제단에서의 심리를 통해 판단한 것은 예상되는 남편의 횡포로부터 아내를 보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배려라고 여겨진다.

결국 본문(민 5:11-31)이 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의 간음규정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획일화된 율법이 아니라 실존적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인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둘째, 부정한 성행위는 개인적인 차원보다는 공동체적인 문제로 인식되었으며, 그것은 종교적 의식(ordeal)을 통해 공동체 일원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처리되었다.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여인은 임신할 수 있다"(민 5:28)는 언급은 성이 종족보존 차원에서 이해된 것이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은 성(性)을 공동체의 중요한 관심사로 취급하였다.

셋째, 간음규정에 나타난 인간이해는 비록 사회계층간에 차별이 있었지만,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차원에서 다루어졌다(참조. 레 19:20).

넷째, 이스라엘의 간음규정은 양성의 차별을 두지 않고 있으며, 가부장적 사회체계 아래에서도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다섯째, 민 5:11-31은 증거 없는 간음죄를 초월적 방식의 종교의식(ordeal)통해 취급함으로써, 생명과 관련되 간음죄를 신중하게(divinely) 취급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간음죄와 관련된 이 모든 규정들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건전한 존속을 위한 성(性)의 적극적 역할, 하나님과 거룩한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성 보존 차원에서 이해되고 유지되었다. 따라서 간음죄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해당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은 패망했으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패망을 하나님에 대한 성적 타락이라는 메타포(metaphor)를 통해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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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질의, 응답

왕대일 교수의 논평 : 박종수 박사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저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구약 성서의 법, 민수기 5:11이하의 본문을 포함한, 이 법의 자리, 법의 유형, 법의 기능을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법 체계, 즉 헌법, 법률, 판례라는 틀 속에서 민수기 5:11-31의 '재판심리'나 '주술적 재판의식'이 가난한 여인을 처벌한다기보다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생명 보호 장치로 주어진 법적 장치라는 점에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박 박사님은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측면에서 본문을 재해석하고 계십니다. 간음 규정을 획일적인 율법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인 상황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려는 점으로 제시하려는 가르침에서 박사님이 제기하는 박 박사님의 통찰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점들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학문은 방법론에 근거해서 서로 다른 통찰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전제 속에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 발제물이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은 사건에 대한 처리, 재판의식이든, 주술적 재판의식과정이든, 헌법, 법률, 판례라는 틀 속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의도를 과연 그렇게 보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의심이 생깁니다. 만약에, 이 강연이 다루고 있는 민수기 본문이 헌법, 법률, 판례 중 판례에 속한 규정으로 본다면, 일곱 번째 규정, '간음하지 말라' 라는 계명의 판례로 생각하기보다는 열번째 계명,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의 판례로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시각에서 민수기 5장이 무슨 규정에 대한 판례인지가 다시 재해석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박사님과는 달리 헌법에서 판례로 나아가는 흐름 자체를 달리 생각할 수 도 있다는 점을 재기하고 싶습니다.

박종수 박사님은 헌법-법률-판례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법의 형성을 이해하고 있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로, 십계명이 헌법인지 아닌지, 윤리 규정인지 아닌지 부터 따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구약의 법이 어떻게 형성되게 되었는지도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식으로 말하자면 박 박사님이 판례라고 규정한 것은 관습일 수 있습니다. 그 관습이 깨지는 상황에 대한 제어장치로 법률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 박사님께서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구약 본문에 대한 해석학적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박종수 박사님은 이 페이퍼의 서두에 논제 제기를 하는 상황에서, 십계명의 일곱번 째 계명을 헌법으로 생각하시고, 민수기 5:11ff.를 그것에 따른 판례로 생각하시며, 중간 단계의 법률로 레위기 20장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법에 대한 양식 비평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레위기 20장의 법은 소위 "모트, 유 마트"(You shall be put to death), 즉 사형으로 처리되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레위기 20:10-17은 열 개의 계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론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모트, 유 마트"법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그것이 포로 후기의 정황에서 시도되었던 계명으로 볼 수 있다는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 박사님께서는 구약성서에서 어떤 것에 대해 지적을 해 가면서도 실제 그것에 대한 처벌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에 대해서 스스로 문제제기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생략되어 있는 부분에 대한 풀이가 법률에서 판례로 가는 차원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어떤 관습이 지켜지지 못하는 위기 상황에 대한 처방의 형태로 본문을 규정하다보니, 다시 말해 장래에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다라고 말하다 보니, 이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처벌 규정이 생략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민수기 5:11-31의 간음규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선량한 아내와 남편 모두를 보호하려는 생명보호장치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체에도 몇 가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주제가 "종교와 성"이고, 오늘의 이 발제문의 주제가 '구약성서와 간음'인데, 이와 같은 본문 속에서 '간음'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박사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인정되지 않은 비합법적 성행위"라고 규정하고 계시는데, 저는 이 간음에 대한 규정이 좀더 분명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단순히 비합법적 성행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편과 아내라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질서 또는 규정이라고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여인의 생명, 남편의 생명을 모두 지키기 위한 생명보호의 장치라는 대전제 하에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을 보호한다는 그 차원 이전에, 어떤 의미에서 여인이라는 사회적 지위, 남편,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제도 속에서의 지위를 보호하려고 하는 그러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는 볼 수 없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더 나아가서 민수기 5장의 본문 속에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의심의 법을 다루고 있지만, 본문의 앞과 뒤를 보게 되면, 부정함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키려는 의도로 기록된 본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간음을 uncleanness, 또는 impurity로 규정하려고 하는 신학적 의도가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호세아서에서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부정의 문제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깨끗지 못함의 문제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답변 : 저는 성(性)에 대한 주제로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많이 못했고, 구약의 율법 체계에 대해서는 글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율법을 교조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윤리학자들은 성서 윤리를 말할 때, 반드시 당위성만을 언급할 뿐이지, 마음에 와 닫는 실존적인 언급은 하지 않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성(性)의 문제에 있어서 간음에 대한 규정을 통해서 율법 체계를 정리해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방법론의 문제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왕 박사님의 지적은 어떤 사실에 대한 논쟁보다는 저의 논문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형식을 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달리 볼 수 있는 대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 박사님의 논평은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방법론의 문제에 있어서, 판례가 먼저냐, 법이 먼저냐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이것은 양쪽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이러한 사건이 있었는지, 아니면 타락할 것에 대한 예방적 차원에서 이러한 법이 생겼느냐하는 점은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율법이 종교적인 의미를 약간 축소시켜서 실증법이라면, 대개의 실증법은 그러한 사건이 있거나 거의 확실시되는 경우에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법도 대부분 성문화될 때, 먼저 사건이 일어난 후 법으로서 제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법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하나님과 맺어진 계약의 차원이기 때문에, 예방적 차원, 신앙적인 차원으로 제정될 수 있기 때문에, 판례와 법에 대해서 무엇이 먼저라는 것에 대해서는 규정짓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단 삶의 차원에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있고, 또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을 때 규정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민수기 5장이 단순한 보호장치나, 비합법적인 성행위를 규정하기보다는 남편과 아내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칠 계명보다는 십계명에 대해서 저 역시 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간음'만 생각하다가 그 뒷부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헌법에 보면, 가정의 화목과 존엄성을 언급하지, 간음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열번 째 계명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간음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 때, 제7계명의 체계를 염두에 둘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순한 생명 보호 장치라기 보다는 여인의 사회적인 지위, 즉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불쌍한 남편들을 보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가 그러한 구설수에 있다고 한다는 것은 남편으로서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 자신도 어떻게 해서라도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즉 그러한 문제는 여성에게도 큰 문제이지만 남편에게도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차가 없으면, 누명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떄문에, 그러한 절차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보호장치'라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 신학적인 입장에서 파악했을 때, 저는 그것을 생명을 지키는 절차라고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정한 것에서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 대해서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일 뒤에서 제게 조금 언급을 했지만, 왕 박사님께서 확대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실은 간음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키는, 즉 부정하게 만드는 것을 풀어주는, 그래서 제가 살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부정은 남녀간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확대해서 볼 때,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와 하나님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정한 관계는 계약관계를 무효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질문1 : 오늘 다루는 본문은 첫 번째 공동체의 의심이 문제제기가 되어서 남편이 여인을 데려온 경우이고, 두 번째는 남편의 의심이 문제제기가 되어 일어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만약 여인의 죄가 무죄로 판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상, 이미 남편과의 무너진 신뢰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지, 레위기 2:1에 나오는 소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의 본문에는 소제의 재료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남편이 그 감정상 드리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드리는 소제가 아니었는가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성을 보호하고 있는 차원이 아니라 남성 우월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본문이 아닌가 하는 점을 문제제기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비록 성결법전에서는 남자의 간음 규정에 대해서 제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본문에서는 남성의 간음규정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제물에서 언급하기를 이 본문은 양성(兩性)에 있어서 간음규정의 차별을 두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점에 있어서 더욱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질문2 : 고대 사회에 있어서, 여성은 남자에 귀속된 재산의 일부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고, 여성의 가장 큰 역할은 생산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고대의 여성적 상황들도 이스라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결'이나 '열녀', 그리고 '은장도' 등을 강조하는 남성에 비해 여성에 대한 열등성을 나타내는 사회적 상황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재판의 경우, 이러한 재판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그 여성이 당하는 피해는 재판의 결과에 상관없이 그 여성에게는 상당한 피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재판에 대한 과정들이 여성 차별에 대한 새로운 모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답변 : 성서는 어떠한 해석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결론은 정반대로 나올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제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모든 것이, 법 아닌 것이라도 모든 것이 여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차별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차별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이런 문제 제기가 오늘날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공부할 때, 그 당시 사회 속에서는 오늘날의 시각 속에서 보면 성차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을까? 왜 이스라엘의 사회 속에서 이게 합법화되고 정당화되었을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얼까? 그 당시의 사회구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이러한 질문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것이 성차별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이러한 질문으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성서를 해석할 때는 물론 성서를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해석하면 안 되죠. 그러나 가능하다면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 지를 찾는 해석학이 보다 더 생산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본문도 성차별로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공동체로부터의 소문을 들은 것과 남편이 의심하는 것과는 구별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전혀 공동체로부터의 소문을 안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편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진짜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의심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봤거나, 희미했거나, 무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편 스스로 자의적으로 판단을 해서 여인을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자칫 잘못하면 소위 의처증 내지는 여자를 그런 쪽으로 몰아가지고 이혼의 구실을 만들려는 저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가능성을 말씀드렸고, 그러기 때문에 남편이 의심한 동기는 외부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고, 외부적인 이유나 내부적인 이유를 모두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재판의 과정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재판의 공개 여부는 성서에 나타나 있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사건을 제사장 앞에 갖고 나오고, 그럼으로써 심의가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제의로 볼 수 있습니다. 제의라는 것은 혼자서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제의라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제단이 있는 곳에서 베풀어지는 것으로서 공동체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제의로서의 재판은 공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판은 종교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3 : 저는 세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지금 민수기를 인용하면서 마치 이 재판의 절차와 종교적인, 주술적인 어떤 재판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거나, 여성을 보호하려는 정책으로 부각시키고 싶어하시는 남성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저는 이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이라는 시대 자체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시대에 기록되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법이나 다른 것들 속에는 여성을 재산으로 생각했고, 그러한 것 자체에서 이미 박 박사님이 지적했던 실존적인 탄원의 맥락에서 볼 때 여성의 인권이라는 것은 땅에 떨어져있었던 것으로서 보호받을 수 없는 그러한 사회적인 장치 속에 있는데, 이 재판 속에서 결과가 흐지부지 났다고 해서 거룩한 결과인 것처럼 해석해서 여성에게 은혜로운 율법의 재판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또한 두 번째로 조금 전에도 강조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의 시점에서 그 당시의 이러한 재판과정이 너무 성 차별적이라고 토론해서 뭐하냐고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사회진화의 관점으로 볼 때, 구약이나 신약성서라는 우리가 의존하는 권위가 오늘날의 삶의 맥락에서 문자적으로 이해 될 수 있는 가부장적인 거룩한 성경이기 때문에 우리를 억압할 수 있는 도구로 다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시점이야말로 진정 해석학의 결정적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재판을 생명보호장치로까지 끌고 가시는데, 여기에서 생명은 너무 심한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의 혈통을 보전하려고 하는 데 남성혈통에 오점이 되니까 어떻게든 의심을 풀어야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답변 :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건 성서를 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이 본문은 충분히 여성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철저히 성 차별적인 것이고 배격되어야 될, 오늘날의 입장으로 본다면 정말 인권 존중이라든가 이런 차원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할 그야말로 새롭게 해석되어야할 본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새로운 흐름을 역행하는 듯한 해석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히 이 글을 여성 운동이라는가 여성학자들의 시각과 오늘의 우리가 풀어가야 할 성 차별적인 것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서를 대할 때는 우리의 현실을 먼저 생각하고 성서를 보게되죠. 많은 사람들이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많은 성서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의 본문이라는 것은 본문에서 출발해서 그 본문의 의미를 먼저 알고, 그 다음에 그것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오늘에서 풀어가야 할까하는 것이 과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성 차별적인 여성억압으로 그 사람들이 생각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했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할 것은 과감히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판단의 기준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성서의 정황, 그것이 탄생된 정황을 간과할 수 있게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우리의 목적의식이 앞설 때, 성서의 의무를 간과할 수 있습니다.

질문4 : 교수님이 언급을 저는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궁금한 것을 질문하겠습니다. 간음이라는 문제가 현재의 크리스챤들에게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습니까?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교수님이 아주 짧게 간음은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만약 어떤 남편이 아내가 모르게 간음을 했거나, 아니면 아내가 남편 모르게 했다 합시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우리 교회는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저는 구약이 예전에 쓰여졌지만 여전히 현재적인 효력을 갖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삶의 자리를 반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혹시 오늘의 본문이 교수님이 말씀한 대로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간음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어 국회의원들은 법을 정하고 법을 어깁니다.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알면 오히려 죄를 짓습니다.

답변 :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반드시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결론을 잘못 내리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간음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다'라고 하였잖아요. 그것은 결론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 글의 흐름을 읽어야 합니다.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흐름은 법이 어떻게 실존적인 상황 속에서 적용되었는가? 실존적인 삶 가운데에서는 법대로 안 된다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계속 이 법대로 할거냐 말거냐를 묻고 계시는 거죠. 여전히 당위성을 묻고 있습니다. 이게 저를 당황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간음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어요. 죽이라고 했는데 안 죽일 수도 있습니다.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판단하기 어려운 정말 인간활동 중에서 판단하기 어려운, 실제 정죄하기 어려운 그 문제입니다. 저는 그 말은 차마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현실의 적용문제에서, 예를 들어서 두 부부가 살았는데, 서로 간음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용서할 것인지, 아닌지를 묻기 전에 '왜(why)'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왜(why)라고 물었을 때는 용납할거냐 말거냐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냐하면, 이것 역시 목회상담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무슨 죄를 저질렀어요. 교리적으로나 기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분명히 어떠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비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 속에서 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목회 경험 속에는 반드시 그러한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목회자들이 이것을 너무 신앙적으로 정죄해 버리면 그 환경에 처한 사람은 전혀 위로를 못 받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뭔가 위로 받고 돌파구를 만들려고 하는데, '당신은 틀렸어. 잘못되었어. 간음하면 안돼' 라고 이렇게 하면 안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MT를 갔는데, 술을 잔뜩 먹고 저에게 와서는,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 울면서 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모는 이혼을 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왜 낳았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아버지, 어머니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또한 그 분들의 인생이 반드시 너를 위해 있으라는 법이 있을까? 지금까지 키워준 것에 감사하고, 또 그분들의 어떤 미래와 자녀를 위해서 네가 이렇게 기도해 줄 수는 없을까라고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간음의 문제라는 것도 이스라엘의 법에 있어서 이렇게 다양하게 적용되는 것을 제가 보고, 아! 그네들도 절실히 느끼는 것은 법대로 안 되는구나! 법대로 안될 때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거냐 하는 그네들의 실존적인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상황윤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회를 하던지 신학을 하던지 간에 이런 문제, 소위 가부간에 결정을 하지 못하지만, 뭔가 우리가 해야되는 소위 실존적인 정황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신다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겠어요. 정답을 얻으려고 하지 마세요.

질문5 :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족장사에 대한 관한 질문입니다. 이삭은 일부일처제의 삶을 살았는데, 그 많은 족장들 중에서 그가 일부일처제의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그 당시의 상황이 가부장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이 불가한 것인지, 아니면 마땅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의거했던 것이지 그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 :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미국인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당시 설교를 할 때 제일 힘든 것이 이혼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대부분이 이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지도교수 역시 결혼을 대여섯 번하신 분이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돌려보내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떤 규정된 틀에 우리 인간의 행위를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하는 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일종의 약속이지 그 약속이 우리 인간을 얽어매는 절대적인 구속력은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수를 위한 일시적인 약속으로 봐야합니다. 족장시대를 말할 때는 상당히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족장시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위 성서 외적인 또는 내적인 정황으로 볼 때, 그 역사의 역사성을 언급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삭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의해서 참으로 이상적으로(ideal) 선택된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상적인 이삭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후손인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자는 모범을 주는 것이지, 그 사람은 그러했는데, 왜 다른 사람은 왜 그러지 않았는가를 질문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어떤 사회적인 정황을 굉장히 구체화시키게 된다는 점입니다.

질문6 :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브라함을 족장으로서 볼 수도 있겠지만 한 개인으로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멜과 호세아의 관계도 실제 한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경우 이삭은 일부 다처사회를 배격하고 일부일처를 따랐던 사람으로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다.

답변 : 족장시대의 삶은 누지문헌이라든가, 메소포타미아의 풍속과도 많이 비교합니다. 고고학자들은 그 연대를 가리켜서 기원전 18세기 상황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얘기한다든가, 누이라도 얼마든지 결혼한 케이스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족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적으로 봤을 때 약 천년후대에서 기록 된 것입니다. 실제 기록될 때의 상황의 정서에 맞게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경우와 야곱의 경우와 이삭의 경우를 구별해서 이삭의 경우가 일부일처제를 따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에 대해서 저는 그렇게 볼 수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일부일처제를 아이디얼하게 본 후대의 사가의 견해든지 진짜 일부일처제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삭이 능력이 없어서 아내 한 명만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7 : 저는 이러한 내용을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서 읽으면 어떨까 생각을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신랑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거든요. 인류를 신부로 볼 수 있다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계명을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로 간주해서, 인류가 하나님에 대한 간음을 했을 경우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7계명에 대한 판례보다는 6계명에 대한 판례가 더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구요. 그리고 여기서 남편이 아내를 대신해서 소제물을 드린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먼저 예언한 것, 즉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미리 예언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다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나중에 저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미리 예언적으로 보이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답변 : 우리가 성서를 이해할 때 사실은 문자적인 것보다 비유적이고도 상징적인 방법으로 많이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게 훨씬 은혜스럽거나, 문제점이 잘 해결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영적이고 은혜스러운 사실이 실제적으로 분석하면 문제가 안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반역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예수님과의 관계도 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유비적인 관계로 이해한다고 볼 때, 간음하는 어떤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것을 존중하는 제1계명에 대한 거역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해석은 너무도 넓고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자의적입니다. 제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비유를 할까? 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가 부부간의 관계, 남녀간의 건전한 성 관계가 공동체의 기초가 되었고, 그리고 이것은 너무너무 귀중한 관계였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과의 유비적인 관계로 적용 시켰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예언자들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비유가 오늘날에도 적용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별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독신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러한 유비적인 생각은 오늘날에는 조금은 변화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질문8 :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우리 현대의 삶 속에 다양하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규정하는 백과사전적인 문헌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삶의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는 그런 문헌이지, 세세한 부분까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규정을 해서, 오늘날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해석해 주는 백과사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간음이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흥미진진한 주제입니다. 제자신도 학위논문을 작성할 때 신약성서를 윤리적인 관점으로 보면서 해석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간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간음을 이해할 때는 기본적으로 결혼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해서 이해하여야합니다. 결혼의 맥락을 떠나면 간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이해 될 수 없습니다. 이야기든 신학이든 간에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도대체 구약성경에서 결혼과 간음의 관계도 우리가 좀 상세하게 논의해야할 시점입니다. 정말 일부일처제나 일부다처제나 이런 문제라는 것이 매우 다양한 결혼문제와 밀접하게 연관해서만 간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전 질문자가 말했듯이, 도대체 목회선상에서 간음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고 할 때, 저는 신약학을 전공한 목사로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음욕을 품고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 다른 남자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 간음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에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간음한 사람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목회자는 늘 그런 자세를 가지고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도 사실은 간음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가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법전서를 쳐다보고 그 사람이 간음죄를 저질렀다 안 저질렀다 하는 것을 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우리들이 모든 문제를 논의할 때 한사람의 목사로서,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모든 문제를 판단하고 목회를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책임적으로 생명을 보존하고 삶을 풍성하게 할 것이냐는 차원에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지, 성경은 무슨 율법전서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 또 간음이라고 할 때, 여기 현대적인 의미를 갖고 보면은 정상적인 합법적인 부부간에도 간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 왕 박사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간음이란 무어냐? 비합법적인 성 관계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비합법적인 성 관계란 무어냐? 그럼 합법적인 성 관계는 전혀 간음이 아닐 수 있느냐? 합법적인 성 관계는 간음이 아니냐? 예를 들면 합법적이다 비합법적이다 할 때 법이란 무엇이냐? 구약성서 안의 율법을 말하는데 과연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냐? 예수님에 의하면 구약성경 안에 있는 율법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율법 중에는 하나님의 뜻도 있고 뜻이 아닌 것도 있어요. 따라서 이러한 개념이 분명하게 서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한가지, 제가 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성(性)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이게 남성 여성 우리가 여성 신학적 입장에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할말이 많습니다만 시간이 없어서 생략을 하겠습니다. 도대체 성(性)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또 혹은 성적인 쾌락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성을 종족보존의 수단으로만 구약성경이 보고 있는지, 구약성서학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성에 대한 쾌락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구약성경의 어떠한 한 부분은 없는지,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궁금합니다. (박종수: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가서 같은 것) 성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성(性)까지 창조하셨어요. 그런데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거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性)을 단순히 종족을 퍼트리기 위한 창조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인간이 쾌락을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도 긍정적으로 그러한 측면에서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관심거리 중에 하나였습니다.

답변 : 저는 아가서를 그렇게 봅니다. 정말 남녀간의 성의 쾌락을 인간 행복의 가장 극치로 보는 성서가 아가서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그 동안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유비적인 관계로 아가서를 해석했는데 원래 아가서에 나왔던 삶의 자리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원래 아가서의 삶의 자리는 남녀간의 지극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보는 것이었지,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 결혼 축가라든가 이런 데서 많이 활용이 되었다고 학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한 아가서에서 나오는 그런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단일한 스토리가 아니고 여러 개가 결합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한번 시편을 강의하다가 중국의 시경과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중국의 시경을 보면은 남녀간의 애정시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남녀간의 애정시가 거의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굉장히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아가서가 하나 있어서 성경의 참여를 유지해 주었습니다. 남녀간의 지극한 육적인 사랑 특별히, 이것이 지극히 승화되어서 하나님께 오히려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랑으로 승화된 것이 아가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미 욥기에서도 결혼하기 전에 일을 저지르잖아요.(질문자8: 아가서는 누구와 누구와의 사랑으로 언급되었습니까?) 솔로몬하고 이슬람여인이라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그것이 여러 가지 이야기가 결합된 것 단편적인 여럿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람은 아닙니다.

질문자8 : 술람미 여인하고 솔로몬과의 육적인 관계를 그렇게 찬양을 했다면 솔로몬의 술람미가 정실부인인지, 아니면 술람미가 정실 부인이 아닌 관계에서 정말 그것이 육적인 성적인 쾌락을 찬양하는 시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유대적인 관계를 통해서 오히려 비합법적이거나 혹은 우리가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이루어진 성 관계를 찬양해 버릴 수 있는 그럴 위험성도 있지 않나요?

답변 :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솔로몬을 언급해야 정경에 들지 않겠습니까? 아가서가 정경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솔로몬을 언급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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