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오늘도 마찬가지지만 정보 전달자의 존재를 망각하는 실수를 자주 범한다. 사건의 본질은 그 자체가 아닌 그에 관한 해석이 규정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가장 근접한 예로는 언론사를 들 수 있겠다.

오늘날 수많은 독자가 성경을 읽을 때 기록자 혹은 편집자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원저자(혹은 발화자)로부터 현 성경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편집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후대 편집 이론에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그 과정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아마도 성경 편집자는 서기관이란 집단으로 추정되는 모양이다. 편집자의 역할은 현대 독자가 상상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모양이다. 고대 편집자들은 해석자의 역할을 담당했었고, 차후에는 창작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학계에서 신명기사관은 일종의 암묵적 동의로 전제하고 있는 가설로 보인다. 토마스 C. 뢰머(Thomas c. Römer)는 『신명기역사서 연구』에서 신명기사가로 서기관을 지목한다. 왕궁 역사 기록자라는 신분과 글과 작문이 가능한 신분을 고려한 추론이다. 성경에서 중요한 장르 중 하나인 묵시문학의 창시자에 관한 논쟁이 있다. 리처드 호슬리(Richard A. Horsley)는 『서기관들의 반란』의 기원으로 서기관을 지목한다. 이 글에서는 두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 근거가 타당한지 따질 의향이 없다. 다만 둘 다 서기관을 배후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내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독서를 통한 지식 습득과 간접 경험 축적이라는 효과를 볼 수 있는데, 구전이 보편적 소통 기술이던 사회에서 독서와 작문이 가능하다는 장점은 그 자체로 특수 계층으로 분류될 능력이다. 오늘날에도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무게를 고려한다면, 고대 지식인들은 더욱 막중한 책임감과 그에 비례하는 부심을 가질 만 하다. 그러나 신명기사가로 추정되는 개인 혹은 집단에 내재한 한계점은 분명하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기록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의 지분이 큰 이유 중 하나는 상당 부분 편지 덕분이라고 본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는 기록과 증거로 당시 사회를 복원하는 학문이다. 구약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각종 발화를 기억하고 두루마기를 읽을 수 있었으며 글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개인 혹은 집단의 영향이 지대하게 남아 있다. 특히 '심판'과 '회복' 그리고 '언약'이란 주제로 선지서를 읽을 때 이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드는데, 현재로서는 학자들이 내 머릿 속에 심어준 '신명기사관'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후대 편집을 추정하게 만드는 파편들이 느껴진다. 확실한 건, 다윗 메시아사상(Davidic messianism)과 같은 특정 이념에 경도된 개인/집단이 후대 편집을 했다고 볼만한 단서들이 있다.

또한, 계시의 우월성이 느껴진다. 후대 편집의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하더라도 원작 자체에서 위대함을 느낀다. 이사야서는 복수저자설로 워낙 유명한 본문이다. 오늘날 시리즈로 확장되는 영화를 보면 애초에 시리즈로 기획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원작의 시나리오가 기본적으로 탄탄하고 확장성을 갖고 있다. 나는 이사야가 이런 시리즈물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이사야가 이사야서 전체를 기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설령 후대 편집자가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선지자 이사야 본연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후대 편집자가 누구였든 간에 그 역시 특정 이념에 좌우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아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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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유대교의 기원으로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꼽는다. 흥미롭게도 포로기 문학에서도 이 둘의 영향은 지대하다고 한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관료로 아닥사스다 왕을 섬겼다(1:1; 특히 2:1-10). 우리는 그가 유대 포로민 중 엘리트 계층에 속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모세의 율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1:7-9).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출신이다 (7:6-9, 그의 가문에 관해서는 7:1-5를 보라).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7:6)이었고,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7:10)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 모두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성전 재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 관료로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으로 성전 재건을 가능케 하는 공헌을 했고, 에스라는 율법 교사로 귀환 공동체가 성전 재건 이후 야웨 신앙 공동체로 회복되도록 이끈다. 둘 다 모세의 율법에 익숙했었다. 바벨론 유수 이후 로마 제국의 통치 이전까지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정착과 신앙 회복이란 측면에서 이 둘의 공헌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하다.
 
그런데도 이 두 거인의 의도와는 무관한 부정적인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 멸망과 포로민의 바벨론 이주 이후 팔레스타인 거주민을 적대시하는 소위 "텅 빈 땅 신화" 그중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역사 해석에서 신명기사관이 과도하게 영향력을 갖도록 한 것이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스라엘 엘리트 가문 후손이자 바벨론 포로민의 후예라는 출신 성분과 모세의 율법에 익숙했다는 공통점이 바로 이 두 지점에서 한계로 나타난다. 에스라가 "주의 종 선지자들"(9:11)의 말씀을 인용하지만, 그 의도는 이방인으로 인해 예루살렘 땅이 더러워졌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다. 이어서 에스라는 통혼 금지 조치를 취한다.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원인이라고 수없이 말한다. 아마도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후대 신명기사관 편집자는 이 지점에 주목했음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은 신명기사관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은 신명기사관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이 언약을 선포하는 이유이다. 신명기사관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심판은 필연적 결과이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 어디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반대로 언약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신명기사관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래서 나는 신명기사관에 대한 의구심이 들고 있다. 또한 내가 언약 신학의 기능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더하여 신명기 사관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서의 위치는 어디인가? 모세의 율법은 신명기사관으로 요약할 수 있는가?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비롯해서 수많은 후대 해석자들이 신명기사관에 집착하는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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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21, 23장의 다윗 계약에 나타난 다윗 왕조 회복의 소망 / 황선우 / Canon & Culture 6권 1호 2012-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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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의 계약신학 / 김선종(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 Canon & Culture 9권 1호 2015 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search=&searchtxt=&mode=list2&mode=view&idx=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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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차후 연구를 위한 발상을 적어두는 데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관점에는 신명기 사관과 역대기 사관이 있다. 모세의 계명 수령 이후 바벨론 포로기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신명기 사관으로 정립된다. 포로민의 귀환 이후 역대기 사관이 정립된다. 두 사관을 비교한 연구들이 많은데, 언약의 역할에 대한 조명은 어떨지 궁금하다.

 

요새 언약 신학에 관한 책들이 자주 눈에 띈다. 내 관심사 때문에 더 눈에 잘 들어오는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학계에서 언약 신학에 관심이 더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느낌적인 느낌은 현 추세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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