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필론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히 필론이 어떤 노선의 플라톤 철학을 계승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 연구 주제인 목자-양 유비에 한정하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은 필론의 저작에서 미비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신(deity)을 목자로 표현하는 신-목자 사상에서 드러난다. 플라톤은 크로노스의 시대는 신적 목자의 시대였으나, 지금은 제우스의 시대로 신적 목자 시대의 종말과 자급자족의 시대를 선언한다. 플라톤은 크로노스 신화적 사화를 버리고 제우스 시대에 걸맞게 이성을 활용해 시민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인식에서 나타나듯이, 신-목자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상적인 지도자 덕목의 변화로 확장된다. 따라서, 플라톤은 국가 운영의 주체로서 정치가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반면 필론은 하나님을 여전히 신적 목자의 가치를 존중하며, 인간의 궁극적 가치 추구는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행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for it is the act of a sober and well-ordered reason to acknowledge God as the Maker and Father of the universe, but the assertion that he himself is the author of everything that concerns the life of man is that of one who is being ruined by drunkenness and sottishness. (Philo, Post.174–176)

(파파고 번역)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자이자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은 냉정하고 질서 정연한 이성의 행위이지만, 그 자신이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의 저자라는 주장은 취함과 취함으로 인해 파멸하고 있는 사람의 주장입니다.


필론은 하나님을 궁극적인 통치자이자 참된 목자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은 목자를 지도자의 원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론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목자의 삶을 살았던 지도자들을 그 예로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와 요셉이다.

After the marriage, Moses took charge of the sheep and tended them, thus receiving his first lesson in command of others; for the shepherd’s business is a training-ground and a preliminary exercise in kingship for one who is destined to command the herd of mankind, the most civilized of herds, just as also hunting is for warlike natures, since those who are trained to generalship practise themselves first in the chase. And thus unreasoning animals are made to subserve as material wherewith to gain practice in government in the emergencies of both peace and war; for the chase of wild animals is a drilling-ground for the general in fighting the enemy, and the care and supervision of tame animals is a schooling for the king in dealing with his subjects, and therefore kings are called “shepherds of their people,” not as a term of reproach but as the highest honour. And my opinion, based not on the opinions of the multitude but on my own inquiry into the truth of the matter, is that the only perfect king (let him laugh who will) is one who is skilled in the knowledge of shepherding, one who has been trained by management of the inferior creatures to manage the superior. For initiation in the lesser mysteries must precede initiation in the greater. (Philo, Mos 1.60–62)

(구글 번역)
결혼 후 모세는 양을 맡아서 돌보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는 첫 번째 수업을 받았다. 목동의 일은 인류의 무리, 가장 문명화된 무리를 지휘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을 위한 훈련장이자 왕권에 대한 예비 훈련이기 때문이다. 사냥도 호전적인 본성을 위한 것과 마찬가지다. 장군으로 훈련받은 자들은 사냥에서 먼저 연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성 없는 동물들은 평화와 전쟁의 비상 상황에서 통치에 대한 연습을 얻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장군이 적과 싸우는 훈련장이 되고, 길들인 동물을 돌보고 감독하는 것은 왕이 신하들을 대하는 훈련이 되므로 왕들은 "백성의 목자"라고 불리는데, 꾸지람의 말이 아니라 최고의 영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의견은 대중의 의견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내 자신의 조사에 근거한 것인데, 유일한 완벽한 왕은 (웃을 사람은 웃게 하라) 양치기에 대한 지식에 능숙한 사람, 하위 생물을 관리함으로써 상위 생물을 관리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입니다. 하위 신비에 대한 입문은 상위 신비에 대한 입문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요셉은 목자로 먼저 훈련되었고 후에 지도자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위인들이다. 따라서 필론은 목자-왕 사상을 이상적인 왕권 사상으로 이해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은 신적 목자 모형이 시의적절하지 않으므로, 정치가를 목자로 인식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필론은 신적 목자는 여전히 유효하며 정치가는 목자직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상반된 견해를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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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은 이집트와 로마 제국을 향한 부정적인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두 제국의 권력과 부요 등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의 반제국주의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필론은 『아벨과 카인의 제사』 (De Sacrificiis Abelis et Caini, On the Sacrifices of Abel and Cain)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파라오를 대면하는 장면에서 둘 사이를 대조한다 (Philo. Sacr.48–49).

Thus Jacob’s sons, trained under an all-wise father, may go down into Egypt the passion-loving body, and meet with Pharaoh the disperser of the good, who deems himself the sovereign of the animal and the composite; yet they will not be dazzled by his lavish pomp and splendour, but will confess that they are shepherds of sheep, and not only they, but their fathers also (Gen. xlvii. 3). 

And indeed no one could in power and sovereignty find so lofty a cause for boasting as these can in their office as shepherds. Surely to those who can reason it is a prouder task than kingship to have the strength to rule, as a king in a city or country, over the body and the senses and the belly, and the pleasures whose seat is below the belly, and the other passions and the tongue and in general all our compound being—aye and to rule them with vigour and with a right strong yet ever-gentle hand. For like the charioteer he must sometimes give the rein to his team, sometimes pull them in and draw them back, when they rush too wildly in unreined career towards the world of external things.

(구글 번역)
따라서 전지전능한 아버지 아래에서 훈련받은 야곱의 아들들은 열정을 사랑하는 몸으로 이집트로 내려가 동물과 합성물의 주권자라고 생각하는 선을 분산시키는 파라오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호사스러운 화려함과 화려함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양치기임을 자백할 것이요, 자기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도 양치기임을 자백할 것이니라(창 47:3).

그리고 실제로 권력과 주권에서 목자로서의 직책에서 이 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고상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왕권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이며, 도시나 나라의 왕으로서 몸과 감각과 배와 배 아래에 자리 잡은 쾌락과 다른 정욕과 혀와 일반적으로 우리의 모든 복합적 존재를 다스릴 힘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강하고 강하면서도 항상 부드러운 손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차꾼처럼 그는 때때로 자신의 팀에 고삐를 넘겨야 하고, 때때로 그들을 끌어당기고 다시 끌어내야 합니다. 그들이 외부 사물의 세계를 향해 너무 거칠게 돌진할 때 말입니다.


이와 유사한 대조는 요셉 일화에 잘 서술되어 있다(참조. Philo. Agr.14; Philo. Post.96). 요셉 일화에서는 이집트는 거짓 부요를 추구하는 곳이요 야곱의 아들들이 영원히 거주할 수 없는 곳이라 단언한다.

필론은 로마 제국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인식을 표출한다 (Philo. Sacr.45). 

After hearing this the mind turns away from pleasure and cleaves to virtue, for it apprehends her loveliness, so pure, so simple, so holy to look upon. Then too it becomes a shepherd of the sheep, one who guides the chariot and controls the helm of the unreasoning faculties of the soul, who does not suffer them to be swept away in disorder and discord, without a master or a guide, lest their unbridled instincts come to perdition, when they lack the protection and control of a father’s hand, and help is far away.

(구글 번역)
이것을 듣고 나서 마음은 쾌락에서 벗어나 덕에 집착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아름다움을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단순하고, 너무나 거룩한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또한 양치기가 되어, 전차를 인도하고 영혼의 비이성적인 능력의 키를 조정하며, 그들이 주인이나 안내자 없이 무질서와 불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합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손의 보호와 통제가 부족하고 도움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들의 억제되지 않은 본능이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말입니다.


필론은 호메로스의 '백성의 목자'(shepherd of the people) 칭호를 알고 있다. 필론의 언급은 이 칭호가 당시 로마 목자-왕 사상에서 범용적이었다는 증거이다. 필론은 이 칭호에서 왕권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다. 즉 그는 로마 황제의 행실을 보면, 황제가 목자의 책임보다는 왕의 특혜에 젖어 탐욕에 길들어 있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그는 로마 황제 가이우스를 알현했을 때 그의 무절제함을 목격한 적이 있다 (Philo.Legat.44).

결론적으로, 필론은 이집트와 로마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노출한다. 그는 두 제국의 왕권과 부요에 대한 무절제함을 구전과 목격을 통해 알고 있고, 반제국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유목 생활을 이상적으로 그린다.

관련글: 필론의 목자-양 유비와 목축 사회 이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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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필론의 목자-양 유비 사용이 갖는 특징으로 왕권 사상과 개인 윤리를 특정한다. 더하여 『가인의 추방과 그의 후손』 (De Posteritate Caini, On the Posterity of Cain and His Exile)에서 독특한 특징이 도드라진다.

이 작품에 사용된 용례 두 번 모두 가이다드(Gaidad, 창 4:18)의 의미 "양 떼"와 관련이 있다. 필론은 가이다드와 그의 자녀 마이엘(Maiel, 창 4:18)의 이름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데, 그 이유는 두 인물의 행실과 상관없이 그의 조상 가인에게서 기인한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자발적으로 떠난 사람이다 (창 4:16).

앞에 작성한 글은 이 글과 유사한 논지이지만 논점을 명확히 하려면 다소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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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의 목자-양 유비에 관한 용례를 해설하고 있다. 내가 파악한 주요 특징은 필론이 왕권 사상이라는 전형적인 범주를 계승하면서도, 개인 윤리라는 새로운 범주에 더 빈번하게 사용한다.

또 다른 특징은 목축 환경을 이상향으로 그리는 듯한 그의 인식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목축 사회 이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향후 적절한 용어를 발견하면 대체할 예정. 

필론은 왕권 사상의 주요 기법의 하나인 목자-양 유비를 통해 목자-왕 사상을 사용하며, 이성에 따른 윤리적인 삶이라는 개인 영역에 목자-양 유비를 사용한다. 개인 윤리와 사회 통치라는 두 영역에 목자-양 유비를 사용하는 흔치 않은 용법이 필론의 저작에서 나타난다. 더 나아가 필론은 목축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요셉이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을 바로에게 소개하는 장면이다 (Philo. Agr.14). 형제들은 이집트에서 목자를 경시하는 문화가 있어서 자기 직업을 달리 소개해 달라고 요셉에게 요청하지만, 요셉은 목자직에 대한 부심을 가지고 바로에게 형제의 직업이 목자라고 당당하게 소개한다. 반대로 이집트 사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필론에 의하면, 야곱과 그 후손이 목자로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참된 부요의 길이지만, 이집트는 거짓된 부요의 길이다. 따라서 야곱과 그 후손은 이집트에 정착하지 않는다 (출애굽을 고려한 해석으로 보인다). 이집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가인 후손의 이름과 규율에 관한 진술에서도 나타난다 (Philo.Post.96).

관련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의 De Agricultura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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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은 『가인의 추방과 그의 후손』 (De Posteritate Caini, On the Posterity of Cain and His Exile)의 첫 문장을 창세기 4장 16절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그는 먼저 "가인이 여호와앞을 떠나서"라는 말의 의미를 헤아리고, 나중에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를 살펴본다. 가인의 자발적인 행동과 그 결과는 필연적이다. 필론의 관점은 가인의 후손 이름에 대한 해설에서 도드라진다.

XX. This is why Gaidad is said to have a son Maiel (Gen. iv. 18), whose name translated is “away from the life of God.” For since the flock is without reason, and God is the Fountain of reason, it follows that he that lives an irrational life has been cut off from the life of God. 

(구글 번역) 
XX. 이것이 가이다드가 마이엘이라는 아들을 두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창세기 4장 18절). 마이엘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졌다"로 번역됩니다. 양 떼는 이성이 없고 하나님은 이성의 근원이므로 비이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가인의 후손 중 마이엘이라는 이름을 설명할 때, 목자-양 유비를 사용하여 특징이 보인다. 필론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창 4:16) 얻은 결과가 그의 후손의 이름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필론의 목자 양 유비는 전형적인 왕권 사상을 유지하는 동시에 윤리에 적용한다는 남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필론은 신-목자 (deity-shepherd/divine shepherd)라는 개념을 갖고 하나님을 궁극적인 목자로 지칭하며, 왕을 비롯한 지도자를 목자로 가리킨다. 이 용례에서 필론은 목자-양 유비의 계승자이다. 필론의 독특한 특징은 목자-양 유비를 개인에 적용할 때는 윤리라는 관점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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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은 하나님의 직관과 인간의 이성적 추론을 구분한다. 필론의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송혜경, "필론의 작품에 나타난 신비주의: 그 특징과 배경 연구" 신학논단 174 (2011): 77-112를 보라.

필론의 작품에서 목자-양 유비 용례가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이성과 윤리의 관계성에서 나타난다. 목자-양 유비의 대표적인 용례인 왕권 사상은 왕과 백성 혹은 지도자와 군중 사이의 집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필론은 이러한 집단적 유비를 개인에게 적용하여 윤리적인 삶, 그의 용어로는 도덕적 진보라는 또 다른 용례의 범주를 창출한다.

필론은 하나님의 통치 혹은 하나님의 규율에 순종하는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규정하고, 이성을 통해 본능을 억제하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권면한다.

필론에 의하면 이성이 인간의 능력에서 출발한다면, 직관은 하나님의 능력에서 출발하며, 둘 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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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목자-양 유비는 왕과 백성 혹은 지도자와 군중 사이의 관계를 지도력이라는 관점에서 사용한다. 필론은 이 유비를 개인의 도덕에 적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필론은 인간이 mind (마음), soul (영혼), body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음 혹은 이성이 개인의 도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필론의 인간론(?)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가 필요한 상황임.

관련 글: 필론의 선행과 목자-양 은유, 필론의 선행과 목자-양 은유로 묘사된 야곱

가령, 필론은 De Posteritate Caini (On the Posterity of Cain and His Exile)에서 자기통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성은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기술한다.

자신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비이성적인 능력을 낳아 필연적으로 큰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이 절차를 목자가 없는 양 떼로 설명한다. 필론이 지칭하는 목자와 양 떼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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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기(기원전 516년~서기 70년) 중 기원전 3~2세기 무렵 유대주의에 다양한 분파가 존재했다. 분파마다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키지만, 여러 공통점 가운데 모세의 권위를 강조하고, 분파의 주요 가르침의 기원을 족장 시대로 상정하는 특징이 있다.

내 연구 범위 내에서 예를 들어 보면,

희년서(the Book of Jubiliees)에 따르면,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기록을 전해 받는다 (1장). 이 기록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천사가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권위를 모세를 넘어 하나님에게 부여한다.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물 심판이 없으리라는 약속하셨고, 노아에게 칠칠절(The Feast of Weeks) 준수를 명령하신다 (6:17). 본문은 진술하지 않지만, 노아가 칠칠절을 지킨 이유는 그가 홍수 심판 이후 농업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짐작은 필론의 저작에서 심증을 더한다. 필론(Philo of Alexandria)은 De Agricultura (On Husbandry)에서 노아가 농업을 시작한 사건(창 9:20)을 논거의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필론은 농부(husbandman)와 농인(soil-worker)를 구분하는데, 전자는 단순히 작농하는 자가 아니라 영적 유익을 추구하지만, 후자는 문자 그대로 직업을 자기 소임을 이행하는 자이다. 이 같은 개념이 목자(shepherd)와 사육사(cattle-rearer)에게 적용된다. 희년서의 의도에 따르면, 절기 준수는 모세의 가르침과 족장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두 번째 예시는 필론의 De Josepho (On Joseph)이다. 이 작품에서 필론은 모세의 가르침을 근거로 정치가의 자질을 다루는데, 그 모형이 요셉이다. 필론의 모세는 요셉이 목자의 기술을 먼저 습득했기 때문에 그와 원리가 비슷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내 논문에서 다룬다.

두 사례를 통해 제2성전기 문헌의 특징 중 하나는 분파가 강조하는 가르침의 기원을 모세의 권위에서 찾고, 그 원류를 족장 시대 인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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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ørn Varhaug은 시편 23, 구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스-로마 문헌 등을 토대로 목자 은유가 왕을 지칭하는 목자-왕 사상은 목축 사회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점차 사용 빈도수가 줄어들었으며, 그 용례에 관해 설명한다.

Consequently, it is possible to express the reason why the shepherd metaphor as a standard image for the ruler disappeared in the following three closely related points:
1. From Persian times, the international model monarchs were no longer related by traditions to the trade of shepherding.
2. In the pre-Persian times shepherd-imagery was demonstrated in significant acts of royal self-presentation, as coronation-rituals and royal correspondence. The Persian rulers did not use such imagery.
3. There were established an understanding of the pre-Persian shepherd-kings as abominable, characterized by violence, luxury, sloth and other vices. 

(구글 번역) 따라서 통치자에 대한 표준 이미지로서의 양치기 은유가 사라진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 밀접하게 관련된 요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
1. 페르시아 시대부터 국제적 모범 군주는 전통적으로 양치기 무역과 관련이 없었다.
2. 페르시아 이전 시대에 양치기 이미지는 대관식 의식과 왕실 서신과 같은 왕의 자기 표현의 중요한 행위에서 나타났다. 페르시아 통치자들은 그러한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3. 페르시아 이전 양치기 왕은 폭력, 사치, 게으름 및 기타 악덕을 특징으로 하는 가증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출처] Varhaug, “The Decline of the Shepherd Metaphor as Royal Self-Expression,” 22.


현재 목자-양 은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논문 제출 후 공개될 내용이지만, 내 관찰에 의하면 목자-양 은유는 대체로 목자-왕 사상과 관련이 있고, 고대 근동부터 기원 1세기까지, 그리스-로마 문헌을 포함해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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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에게 야곱과 라반은 목자(a shepherd)와 사육사(a cattle-rearer) 구별을 위한 적합한 예시 중 하나이다. 야곱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협상하여 방목하는 장면(창 30:25ff)에 대한 해석에서, 필론은 야곱은 양 떼를 바람직하게 양육하는 목자이므로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재산을 증식했고, 라반은 탐욕스러운 주인이라서 양 떼를 올바로 양육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Philo, Agr. 10). 

Thus, for Philo, the human being will inevitably be subject to the passions and other evils that beset created beings. Yet God will ‘accomplish the work that is proper to him in proclaiming redemption and liberty to the souls who are his suppliants’ (Her. 272–3). It remains to define how to live in the least imperfect way in the world as it is. One of the most frequent answers to this question is the distinction, made paradigmatically in the De Abrahamo, among three types of men who strive toward the good. The first, Abraham, is characterized by the effort to know; the second, Isaac, by the simple fact of his happy nature; and the third, Jacob, by the practical struggle against everything in human nature that involves the senses and the passions.

(구글 번역) 따라서 필론에 따르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창조된 존재를 괴롭히는 정욕과 다른 악에 굴복할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의 간청자인 영혼에게 구원과 자유를 선포하는 데 있어서 자신에게 합당한 일을 성취할 것이다'(Her. 272-3). 세상에서 가장 불완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는 방법을 정의하는 것이 남았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빈번한 답변 중 하나는 De Abrahamo에서 패러다임적으로 선을 향해 노력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아브라함은 알고자 하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지고, 두 번째 이삭은 행복한 본성이라는 단순한 사실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 야곱은 감각과 정열을 포함하는 인간 본성의 모든 것에 대한 실제적 투쟁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출처 Kamesar, “3. Biblical Interpretation in Philo,” 164–165.


필론은 도덕적 진보와 목자-양 은유를 그리스 철학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한다. 그리스 철학을 사용하지만, 히브리 전승에 더 권위를 부여해서 독자적인 해석을 도출한다. 필론은 목자-양 관계를 통해 도덕적 진보를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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