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내 박사 과정 연구 제안서에서 두 번째 질문은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본문은 "내어줌"으로 표현)에 관한 가르침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냐고 묻는다. 본문에 나타나 있듯이 유대인 청중에게 메시아의 죽음은 생소한 개념이다. 더구나 목자-왕 전승에서 목자의 죽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에 익숙한 유대인에게 승리의 구원자라는 개념은 익숙하지만, 메시아의 죽음을 통한 구원이란 개념은 생소하다. 다니엘 보야린은 『유대배경으로 읽는 복음서』에서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해가 이미 통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특히, 212-214쪽), 내가 볼 때 그의 주장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에서나 예수의 죽음이, 더 정확히는 부활 이후에나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없었다면 그의 가르침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의 실제 지시 대상이 역사적 특정 인물이었다는 견해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의 학자가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을 기원으로 본다. 이사야 53장의 빛이 얼마나 강력한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에 관한 해석부터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10장과 12장까지 줄곧 이사야 53장으로 결부된다.

다른 본문이지만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는 이런 경향을 반대한다(상상력의 전환, 68-69). 근거 자료는 모로나 후커(Morna Hooker)의 글을 제시한다. 요한복음 연구 내에서도 다른 견해는 존재하는데 극히 소수이다. 이 부분은 아직 연구가 진행되지 않아서 딱히 말할 내용이 없고, 혹 있어도 보안 사항이다. 지금은 대안 본문이 스가랴 13장 7절이며, 앞으로 나는 이 대안을 두고 씨름할 예정이라는 정도만 밝힐 수 있다.

사실 내가 박사 과정 지원을 위해 여러 교수에게 연구 제안서를 보낼 당시만 해도 나 역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은 이사야 53장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 제안서의 무게가 이 논의에 실려 있지 않아서 별 고민이 없었고 내가 기여할 논의는 딱히 없어 보였다. 반면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신학부 소속 신약학 교수들은 다른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공관복음, 특히 마가복음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샤이블리(Elizabeth E. Shively) 박사는 '요한이 이사야 53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짐으로써 이 부분에 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열어주었다. 내 지도 교수로 내정된 데이비드 모핏(David M. Moffitt) 박사는 자신이 지도한 제자의 책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책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시 기존 견해와 다른 대안에 더 관심을 두고 밑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참고로 그의 박사 지도교수가 바로 리처드 헤이스이다.  이번 기회에 밝히지만,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교수진만큼 내 제안서를 두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교수는 없었다. 내가 이 학교를 최종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오늘 이 논쟁을 풀수 있는 방안을 발견한 기분이 든 탓이다. 내가 목자-왕 전승의 기원에 관한 논쟁을 다룬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거나 기존 견해를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간에, 나는 다양한 해석적 시도를 해볼 수 있는 분위기에서 공부할 예정이고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흥미와 도전 의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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