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서재와 냉장고

끄적 2023. 8. 27. 02:28

미국 유학 시절 책을 해외 배송으로 그랜드 래피즈 숙소로 보냈다가 한 상자를 통째로 분실한 적이 있고, 학위 과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 얼마 되지 않지만, 책을 처분하느라 고생해서 영국 유학 기간에는 현지에서 책을 사지 않고 있다. 학생 신분이라 필요한 자료는 대부분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 강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책을 예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사야 할지 모른다. 학생을 배려해 한글 자료를 교재와 참고 자료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학회에서 해외 자료로만 글을 쓰면 지적을 받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서재는 필수 조건이 된다.

미국 유학 시절 첫 해외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박사 과정 진학을 위해 성적과 추천서 등을 잘 갖추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늘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에는 할 수 있는 요리도 얼마 되지 않아서 김치찌개, 된장찌개, 삼겹살 등을 돌려서 먹었다. 식사 중에도 불안감이 있어서 음식을 즐길 여유가 없었고,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또 다른 압박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섭취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몸무게가 많이 늘었다.

지금은 여유를 가지려고, 현지에 가성비 좋은 식당이 없어서, 요리를 취미로 삼고 있다. 공부하지 않는 시간 이외에 심리적으로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서 몸과 머리를 동시에 써야 하는 요리가 제격이다. 운동을 원동력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쪽은 영 잘 안되는 영역이다. 요리하다보면 여러 가지 도구들이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냉장고가 가장 필요하다.

서재와 냉장고 모두 저장소 역할을 한다. 필요한 시기가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잠시 후일 수도 있고, 영영 안 필요하다가 자리만 차지할 수도 있다. 식자재인 경우엔 결국 버려짐.

공부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자신에게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지금 내 책상에도 도서관에서 추리고 추려서 대출한 책이 13권이 있는데, 막상 필요하지 않아서 안 보고 있다. 매주 갱신 안내 이메일이 오고 있어서 반납해야겠다는 생각만 들고 있음.

요리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각 요리에 필요한 식자재들을 정량 혹은 여유분(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 않은 선에서)을 갖고 있어야 한다.

공부든 요리든 자원 관리(resource management) 능력이 필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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