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선한 목자 담론(요 10:1-21)에서 목자-양 유비의 배경으로 에스겔서 34장과 예레미야 23장 등 유대 문헌은 언급되지만, 그리스-로마 문헌은 사료로 제시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분석한 문헌에서도 관련된 바가 전혀 없다. 내가 선행 연구에서 못 찾았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실제로 그리스-로마 문헌에서 이 같은 용례가 없었을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에스겔서 34장과 예레미야 23장 등 역시 선한 목자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두 본문을 아무리 열심히 봐도 목자의 죽음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으며, 목자의 보호를 강조할 뿐이다.

내 분석에 의하면, 고대 근동, 구약 성경, 제2성전기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 등 목자-양 유비는 역사적으로 왕권 사상과 관련이 있다. 즉 목자-양 유비는 왕권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통치 수단이다.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은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그의 사역과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관점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이런 강조는 선한 목자 담론에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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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ten Claussen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에서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 돌항아리 여섯"(2:6; six stone water jars for the Jewish rites of purification, NRSV)이 간과되고 있으며, 세례 요한이 예수의 정체를 메시아(1:29-36)이자 신랑(3:28-29)으로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Ruben Zimmermann의 고대 유대 문헌에서 "신랑"이 메시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사용하여, 예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이적을 통해 자신을 종말론적 신랑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냈으며, 종말론적 연회(사 26:5)를 성취하셨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신랑 은유는 앞으로 전개될 유대 절기를 성취하실 예수를 기대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Craig A. Evans and David Mishkin, eds., A Handbook on the Jewish Roots of the Gospels (Peabody, MA: Hendrickson, 2021), 156.

내가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1장 세례 요한과 나다나엘, 2장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제대로 몰랐다. 요한복음 서두에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성육신을 선언한 이유,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의 사역을 공표한 이유는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을 청중과 독자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결과이다. 이후 나다나엘을 시작으로,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가 갖고 있는 메시아사상을 들추어낸다. 다시 예수께서는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 자신의 사역을 공표한다. 그러나 또다시 니고데모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전개는 가나 혼인 잔치를 종말론적 성취로 이해할 근거가 없다는 증거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선포한다. 하지만 Claussen의 주장과 달리, 신랑은 예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과 예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비유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는 자이며, 메시아 사역은 예수를 통해 성취된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1:23)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3:28)

따라서, 가나 혼인 잔치에 대한 Claussen과 Zimmermann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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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장에 앞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대속죄일의 과업을 성취하셨다는 주장과 그 근거를 일부 인용한다(인용 표기는 *). 글의 출처는 Gerald O’ Collins and Michael Keenan Jones, Jesus Out Priest: A Christian Approach to the Priesthood of Chris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24–26이다.

*요한복음에서 성전과 제사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대체한다. 요한은 성전 청결 사건(2:13-22)을 초반에 배치하고,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를 통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선포하신다(4:21-24).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주요 절기의 의의를 성취하신다. 그중에서도 유월절은 예수를 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 서두의 세례 요한을 통한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 선포는 예수께서 제사장의 중재직을 감당한다는 진술이다.

역설적으로, 예수의 제사장직과 대속죄일을 주장하는 이들조차 요한이 예수를 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시인한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예수, 전문용어로 기독론을 이해하려면 로고스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간파해야 한다. 요한은 서두부터 예수를 태초의 말씀,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 하나님과 동등한 분, 창조 사역, 생명, 사람들의 빛(1:1-5)으로 묘사한다. 이어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1:34)로 선포한다.

요한복음 기자에게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한에게 예수를 묘사하는 칭호로 "하나님의 아들"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것도 자발적인 순종으로 성취된다고 기술한다.

요한복음의 절기는 매우 독특한 기능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유월절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유월절이 예수를 제사장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을 연상하도록 의도하지만, 동시에 유월절과 일치시키지 않도록 유도한다. 만약 예수의 죽음과 유월절과 일치시킨다면, 내 판단에 의하면 그것은 요한의 의도를 오독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은 유대 절기 중 대속죄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 칭호는 중재자로서 제사장을 연상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이 칭호는 예수의 사역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드러내는 장치이지 예수의 제사장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칭호는 예수의 왕권과 관련이 있다.

결론은, 요한복음은 예수를 제사장으로 묘사하지도, 대속죄일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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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 이후 진행할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신약의 목자 기독론"이다. 근래 이와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며 관찰한 일부를 적어본다.

사복음서에서 대표적인(혹은 내가 발견한) 목자-양 은유 본문은 마태복음 9:36–38; 15:21–28; 마가복음 6:30–34; 요한복음 10:1–21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복음서를 공관복음서와 네 번째 복음서로 나누는데, 공관복음서 사이에는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그와 반대로 네 번째 복음서의 독특성이 두드러진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자-양 은유도 둘 사이의 차별성이 나타난다.

1. 마태복음 9:36–38과 마가복음 6:30–34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먼저, 두 목자-양 은유를 살펴보자.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각 본문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마태와 마가의 목자-양 은유는 "목자 없는 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예수의 불쌍히 여기심"이 저자의 관심사이다. 독자가 간과하지 말하야 할 또 다른 저자의 강조점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마태와 마가는 목자-양 은유와 예수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1.1. 마태복음 15:21–28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마태의 다른 용례는 15:24에 나타난다.

마태복음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는 "이스라엘 집의 읽어버린 양"이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앞서 9:36의 "목자 없는 양"과 동일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2. 요한복음 10:1–21
요한의 목자-양 은유는 마태와 마가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의 전형적인 용례에 따라 양 떼를 보호하는 목자의 직무를 강조한다. 하지만 요한은 전통을 벗어나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을 선포한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를 통해 성도의 영생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라 선한 목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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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초막절은 추수를 완료하고, 모든 백성이 모여 하나님께 한 해 수확을 감사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축제이다. 요한의 예수는 초막절을 대체 혹은 성취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의 사역에서 무엇이 더 이상 초막절을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지 궁금하다.

초막절 내러티브(7:1-10:21)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단어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생명'이다. 예수의 죽음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 이 두 주제가 초막절 내러티브에서 맞물려 있다. 예수의 죽음과 신자의 생명은 성령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초막절 내러티브 초반에 성령이 강조된다.

예수의 죽음과 초막절을 연결 짓는다면, 예수의 죽음은 곧 영혼 추수의 완성에 비견된 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증명해야 할 과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한 목자 담론이 예수의 죽음 선포의 절정이라고 보고 있다. 선한 목자 담론을 끝으로 초막절 내러티브가 매듭 지어지고, 수전절 내러티브로 이어지고, 11장에 나사로의 부활이 배치된 이유는 요한의 의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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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ltimate and incomparable sovereignty of God is the starting point, the working principle, and the ending point of Micah’s entire theology.” - Kevin C. Peacock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비교할 수 없는 주권은 미가 신학 전체의 출발점이요, 작동 원리이며, 종착점이다.”

내 관찰에 의하면 미가서에서 목자-양 은유는 총 네 군데에서 나타난다(2:12–13; 4:6–8; 5:2–9; 7:14–17). 이 중 세 번(2:12–13; 4:6–8; 7:14–17)은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하는 용례(divine shepherd)이며, 나머지 한 번(5:2–9)은 다윗 계열의 통치자를 지칭한다.

미가는 신적 목자(divine shepherd)의 의지와 그를 향한 기대에서(4:11–5:1[4:14]) 인간 목자, 새로운 다윗의 등장으로 전환한다(5:2ff). 새로운 다윗의 통치는 평강으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킬 정도로 번영한다. 미가는 다윗 목자의 등장을 예고하지만, 그의 역할과 비중은 새로운 다윗에 대한 기대(흔히 Davidic Messianism이라고도 하는)에 미치지 못한다. 목자-양 은유라는 특정 관점으로 미가서를 읽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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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3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양의 흩어짐을 야기한 목자의 악행은 심판의 주요 원인이며, 반대로 새 목자는 양을 한데 모은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리의 습격에 삯꾼은 달아나지만,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12절).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과 구약 성경의 대조 기법은 참 목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참 목자의 등장을 고대하도록 한다. 하지만 청중이나 독자가 간과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절)는 말씀이 유례 없는 용례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어서, 예수의 죽음 예고를 당연시할 수 있지만, 목자와 죽음은 동일 선상에 위치하지 않는 단어 군이다. 더구나 예수는 당신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선한 목자의 죽음 예고 (14-15절)는 유대 사상이나 그리스-로마 문화로 설명할 수 없는 선언이다.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 선언은 하나님의 계명 (18절), 신학적 용어로 ‘구속사’로 해석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계명)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권세)으로 실현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예고하시려고 전통적인 목자 은유를 도입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고대 근동,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 등에서 유례 없는 용례를 목자-양 은유에 구속사를 결합하여 착안하셨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목자-양 유비와 구속사를 분별하여 읽어야 한다. 더하여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언약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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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헬라인의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 용어 헬라인은 두 구절에 등장합니다. 첫 구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지 못할 장소로 헬라인들이 흩어져 사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짐작합니다 (7:35). 두 번째 구절은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 헬라인 몇 명에 주목합니다 (12:20).

요한복음의 주요 청중은 헬라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특히 10장에서 예수의 선한 목자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에 반응하는 무리는 유대인입니다. 먼저 분쟁은 유대인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19절).예수를 향한 질문은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24절). 다시 말해 선한 목자 담론에 대한 분쟁은 유대인들의 목자-양 은유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는 암시입니다. 다른 기회에 다루겠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목자-양 은유는 대체로 왕권 사상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정체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높지만, 여기에서는 청중의 구성원을 파악하기 위해 헬라인과 유대인를 살펴보는 선에서 머물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이 헬라인을 간과하지는 않습니다. 헬라인은 단 두 구절에 등장하지만,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흩어져 사는 헬라인들에게 전도하려는가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뒤이어 예수의 죽음과 성령의 임재를 예고하는 7:37-39과 연결해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의 기원으로 여러 구절이 언급되지만, 저는 스가랴서 14장을 배경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가 이뤄지는 시대에 헬라인도 함께 성전에서 예배합니다.

두 번째 구절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다가올 때 헬라인 몇 명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가 예수를 만나고자 청합니다. 이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인도 예수의 영광을 누릴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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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은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권력 구조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고 있다고 진술한다. 그중에서도 왕과 선지자를 향한 강렬한 비판을 표출한다.

예레미야가 목자 은유를 네 집단에, 양 은유는 두 집단에 적용한다. 정리가 쉬운 양 은유부터 설명하면, 예레미야는 이 은유를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에게 적용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로부터 방치되어 고초를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세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다. 두 번째 적용은 예레미야 자신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엄습하는 죽음의 위협을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11:19)에 비유한다.

목자 은유는 네 집단에 적용되는데, 하나님, 이스라엘 지도자, 이방 지도자, 그리고 예레미야 자신이다. 첫 두 집단은 구약성경에 전통적으로 적용되는 관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 이스라엘 지도자는 하나님을 대신해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로서 통치한다. 이방 지도자에게 적용되는 목자 은유는 드물지만, 예루살람 멸망 심판 신탁과 관련해 적용된다. 이방 지도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지만, 결국 그 이방 국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는 자신을 목자로 비유한다. 이스라엘과 열국을 향한 대언자로 자신의 역할을 목자로 비유하는데, 이 용례는 거짓 선지자와 대비되는 역할을 한다.

예레미야의 목자-양 은유에서 가장 독특한 용례는 바로 두 은유를 모두 자신에게 적용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구약성경에서 목자-양 은유를 가장 잘 활용한 이가 바로 예레미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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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서는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계명과 절기 등 준수 명령과 심판 선언이 주어진다. 이후 하나님은 천사에게 창조부터 역사를 진술하도록 명령하신다(1장). 역사 진술은 창조 기사가 제일 먼저 기록된다(2장). 마지막 부분은 유월절(49장)과 안식일(50장)로 끝난다. 희년서는 시작과 마지막이 출애굽/유월절, 안식일이라는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창조와 안식은 창조 세계의 완전한 상태를 드러낸다.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을 향한 홍수 심판은 창조 상태에 근접한 초기화를 상징한다.

홍수 심판 이후 노아에게 주어진 약속은 심판에 관한 내용이다 (6:4-16). 하나님의 명령 중 하나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 포함된다 (6:13). 노아 언약 이후 기록된 사건은 칠칠절 기념이다 (6:17-24). 노아가 칠칠절을 준수한 이유는 명령이나 언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 서판과 관련이 있다 (6:17). 노아는 칠칠절만이 아니라 초실절도 기념하였다 (6:21). 희년서 저자는 노아의 칠칠절과 초실절을 통해 창조 세계의 주인에게 수확물을 바침으로써 그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농경 사회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짐작된다. 노아의 포도주 축제(7:1-6)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아브라함 언약은 노아 언약의 본질이 심판에서 후손을 향한 축복으로 변경되었다는 중요성을 가진다. 언약의 변화는 절기의 변화로 이어진다 (14:20). 이후 아브라함의 절기 준수는 자녀의 탄생과 관련된다.

언약과 절기의 상관관계는 희년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두 상관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정립하는 데 실패한다. Betsy Halpern-Amaru는 칠칠절을 족장의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제사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희년서 저자는 칠칠절은 신명기 16:9–11, 특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v.11)를 재상황화하였다. 그에게 이삭과 에서가 칠칠절을 기념한 사건은 족장의 임의적인 축제이다 (22:1). 또한 초막절은 안전한 여행(16:20; 32:4–7)을 기뻐한 절기로 이해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의 출생 이후 칠칠절/초실절을 기념하고, 이삭의 출생 이후 초막절을 기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후손의 번성을 향한 축복이므로, 두 자녀의 출생을 위한 절기 기념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칠칠절/초칠절 준수는 두 자녀의 화해로서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 언약은 후손의 축복이며, 이스마멜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축복을 받아야 하므로, 이삭을 통해 언약의 계승이 이어진다 하더라도, 이스마엘과 이삭의 화해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이스마엘의 출생을 기념한 칠칠절/초실절을 이삭과 함께 기념한 것은 절기 준수의 의도에 부합하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그 주변에 닥친 기근을 위해 초실절을 기념하는데(44:4), 이때는 위기 상황과 초실절의 의미가 상통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첫 초막절 기념(16:20–31) 이후 야곱이 초막절을 기념한다(32:4–29). 아브라함 언약이 사라가 낳은 자녀를 통해 실현된다는 약속 (15:16)과 이삭을 위한 아브라함의 축복(21장)에 이어 야곱의 초막절 준수는 야곱이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임을 밝힌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연속성은 야곱을 향한 아브라함의 애정과 리브가에게 전한 조언에서 드러난다(19:15-31).

유월절은 아브라함 언약 성취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 출애굽하고 하나의 독립적인 집단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하고 국가를 이룬다는 약속의 성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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