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철학에 대해 문외한에 가깝지만, 내 박사 학위 연구과 관련해 플라톤의 저작과 철학에 엮여 버렸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목자-양 유비는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독특한 용례이고, 궁극적으로 파생하는 결과물이 독보적이라서, 내 목적을 위해서라도 목자-양 유비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와 필론(Philo)는 플라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내 관심사에 한정하면, 이성과 감정에 따른 플라톤의 윤리관을 고스란히 두 후대 저자가 사용한다.

목자-양 유비 사상에서 세 저자는 모두 정통적인 용례를 인정한다. 하지만 셋 사이에 차이점도 존재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위해 신적 목자(divine shepherd)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인간 목자의 정치적 역량을 강조한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라톤의 철학과 고대 그리스-로마 목자-양 유비 전통을 전적으로 수용한다. 플라톤과 달리 신적 목자와 인간 목자 사이에 대한 관찰이 없다. 

필론은 그리스-유대 철학자로 플라톤의 철학을 수용하며, 고대 그리스와 유대 전통의 목자-양 유비 사상을 따른다. 다만 유대 전통에 더 근접한다.

플라톤의 영향은 지대하다. 이 말은 플라톤 철학을 차후라도 내 논문에 더 녹여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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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히 필론이 어떤 노선의 플라톤 철학을 계승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 연구 주제인 목자-양 유비에 한정하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은 필론의 저작에서 미비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신(deity)을 목자로 표현하는 신-목자 사상에서 드러난다. 플라톤은 크로노스의 시대는 신적 목자의 시대였으나, 지금은 제우스의 시대로 신적 목자 시대의 종말과 자급자족의 시대를 선언한다. 플라톤은 크로노스 신화적 사화를 버리고 제우스 시대에 걸맞게 이성을 활용해 시민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인식에서 나타나듯이, 신-목자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상적인 지도자 덕목의 변화로 확장된다. 따라서, 플라톤은 국가 운영의 주체로서 정치가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반면 필론은 하나님을 여전히 신적 목자의 가치를 존중하며, 인간의 궁극적 가치 추구는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행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for it is the act of a sober and well-ordered reason to acknowledge God as the Maker and Father of the universe, but the assertion that he himself is the author of everything that concerns the life of man is that of one who is being ruined by drunkenness and sottishness. (Philo, Post.174–176)

(파파고 번역)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자이자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은 냉정하고 질서 정연한 이성의 행위이지만, 그 자신이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의 저자라는 주장은 취함과 취함으로 인해 파멸하고 있는 사람의 주장입니다.


필론은 하나님을 궁극적인 통치자이자 참된 목자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은 목자를 지도자의 원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론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목자의 삶을 살았던 지도자들을 그 예로 제공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와 요셉이다.

After the marriage, Moses took charge of the sheep and tended them, thus receiving his first lesson in command of others; for the shepherd’s business is a training-ground and a preliminary exercise in kingship for one who is destined to command the herd of mankind, the most civilized of herds, just as also hunting is for warlike natures, since those who are trained to generalship practise themselves first in the chase. And thus unreasoning animals are made to subserve as material wherewith to gain practice in government in the emergencies of both peace and war; for the chase of wild animals is a drilling-ground for the general in fighting the enemy, and the care and supervision of tame animals is a schooling for the king in dealing with his subjects, and therefore kings are called “shepherds of their people,” not as a term of reproach but as the highest honour. And my opinion, based not on the opinions of the multitude but on my own inquiry into the truth of the matter, is that the only perfect king (let him laugh who will) is one who is skilled in the knowledge of shepherding, one who has been trained by management of the inferior creatures to manage the superior. For initiation in the lesser mysteries must precede initiation in the greater. (Philo, Mos 1.60–62)

(구글 번역)
결혼 후 모세는 양을 맡아서 돌보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는 첫 번째 수업을 받았다. 목동의 일은 인류의 무리, 가장 문명화된 무리를 지휘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을 위한 훈련장이자 왕권에 대한 예비 훈련이기 때문이다. 사냥도 호전적인 본성을 위한 것과 마찬가지다. 장군으로 훈련받은 자들은 사냥에서 먼저 연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성 없는 동물들은 평화와 전쟁의 비상 상황에서 통치에 대한 연습을 얻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장군이 적과 싸우는 훈련장이 되고, 길들인 동물을 돌보고 감독하는 것은 왕이 신하들을 대하는 훈련이 되므로 왕들은 "백성의 목자"라고 불리는데, 꾸지람의 말이 아니라 최고의 영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의견은 대중의 의견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내 자신의 조사에 근거한 것인데, 유일한 완벽한 왕은 (웃을 사람은 웃게 하라) 양치기에 대한 지식에 능숙한 사람, 하위 생물을 관리함으로써 상위 생물을 관리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입니다. 하위 신비에 대한 입문은 상위 신비에 대한 입문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요셉은 목자로 먼저 훈련되었고 후에 지도자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위인들이다. 따라서 필론은 목자-왕 사상을 이상적인 왕권 사상으로 이해한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은 신적 목자 모형이 시의적절하지 않으므로, 정치가를 목자로 인식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필론은 신적 목자는 여전히 유효하며 정치가는 목자직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상반된 견해를 표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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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ørn Varhaug은 시편 23, 구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스-로마 문헌 등을 토대로 목자 은유가 왕을 지칭하는 목자-왕 사상은 목축 사회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점차 사용 빈도수가 줄어들었으며, 그 용례에 관해 설명한다.

Consequently, it is possible to express the reason why the shepherd metaphor as a standard image for the ruler disappeared in the following three closely related points:
1. From Persian times, the international model monarchs were no longer related by traditions to the trade of shepherding.
2. In the pre-Persian times shepherd-imagery was demonstrated in significant acts of royal self-presentation, as coronation-rituals and royal correspondence. The Persian rulers did not use such imagery.
3. There were established an understanding of the pre-Persian shepherd-kings as abominable, characterized by violence, luxury, sloth and other vices. 

(구글 번역) 따라서 통치자에 대한 표준 이미지로서의 양치기 은유가 사라진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 밀접하게 관련된 요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
1. 페르시아 시대부터 국제적 모범 군주는 전통적으로 양치기 무역과 관련이 없었다.
2. 페르시아 이전 시대에 양치기 이미지는 대관식 의식과 왕실 서신과 같은 왕의 자기 표현의 중요한 행위에서 나타났다. 페르시아 통치자들은 그러한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3. 페르시아 이전 양치기 왕은 폭력, 사치, 게으름 및 기타 악덕을 특징으로 하는 가증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출처] Varhaug, “The Decline of the Shepherd Metaphor as Royal Self-Expression,” 22.


현재 목자-양 은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논문 제출 후 공개될 내용이지만, 내 관찰에 의하면 목자-양 은유는 대체로 목자-왕 사상과 관련이 있고, 고대 근동부터 기원 1세기까지, 그리스-로마 문헌을 포함해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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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Against Apion에서 Hyksos의 이름이 "왕-목자" 혹은 "포로 목자들"이라는 의미이며 (특히, 81-83), 자신이 후자를 지지하는 이유를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84ff).

전자는 목자-양 유비에서 목자-왕 전승으로 활용할 수 있으나, 후자는 효용 가치가 없다. 우선 내 연구 범위에서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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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4서는 3~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에서 목자-양 비유는 단 한 번(5:18) 등장한다.

5:18 Rise up then, and eat bread, and forsake us not, as the shepherd that leaves his flock in the hands of cruel wolves.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는 이유는 목자가 자신의 양 떼를 늑대 무리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목자인 지도자들의 방임은 이방 세력의 침략과 포로기를 가져오게 된다.

이 구절은 늑대가 목자-양 비유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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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성경에서 'ring'이 사용된 사례가 있는지 확인해 야겠으나, 우선은 'rod'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왕의 덕목 중 하나는 '정의'이다. 왕은 자국 백성을 정의롭게 다스려서 불의와 부정이 사라지고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왕은 자신의 통치 권한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정의'를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의 규는 그의 권한을 상징한다. 왕은 정의로운 통치자이며 정의의 수호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고대 근동 문화를 가져와서, 독자적인 전통을 구축했을 텐데, 그중 하나가 왕의 규에 나타난다. 아마도 구약 성경에서 왕의 규 이외에 원을 언급한 사례가 있을지 궁금하다.

The Mesopotamian ‘Rod and Ring’: Icon of Righteous Kingship and Balance of Power between Palace and Temple
https://academic.oup.com/british-academy-scholarship-online/book/21550/chapter/181390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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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부터 고대 이스라엘에서 목자-양 유비의 용례가 대체로 왕권 사상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실제로 이 같은 용어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학술적 용어로 목자-왕 전승이라 칭해도 문제 될 게 없다.

목자-양 유비의 어휘군 중 '생수'(근접한 어휘로는 '물'과 관련된 단어들이 있고, 범위를 넓히면 '비'와 같은 어휘도 포함)에 관해서는 독특한 용례가 발견되어 유의가 필요하다. 목자는 그 자체로 왕(혹은 지도자)을 상징한다. 생수는 목자 혹은 양과 관련되어 사용되는데, 이와 달리 직접적으로 왕과 연결되는 용례가 있다. 우리는 이 용례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내가 웨신 신학 석사 졸업 논문에서 스가랴서 14장에 나타난 '생수'(8절)와 '왕'(9절)을 목자-왕 전승으로 해석했다. 스가랴 9-13장에서 목자가 주요 어휘였다면, 14장에서는 왕의 등극을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목자는 왕권을 상징하는 어휘이므로, 목자와 왕 사이에 언어적 치환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따라서 내 주장은 문제 소지가 없다. (그러니 논문 심사를 통과했겠지)

내가 최근 고민하는 지점은 목자-왕 전승과 별개로 '생수'를 왕권과 연결 짓는 용례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그러하다. 큰 그림에서는 목자-생수-왕을 서로 연결하여 해석되지만, 지엽적으로 왕권, 더 정확히는 야웨 신앙과 밀착한 사례를 설명해야 한다. 결론적으로는 왕권(kingship)과 신앙(divine kingship)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작업이다.

한 발 더 나가면 초막절도 연결되는 사안이라 이 고민을 지혜롭게 해결해야 한다. 목자, 생수, 초막절은 왕권이라는 거대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목자와 생수를 왕권과 연결 짓거나, 생수와 초막절을 왕권과 연결 짓는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요한은 초막절(7-10장)을 배경으로 생수(7장)와 목자(10장)를 연결해서 예수의 왕권을 주장한다. 이런 요한의 신학을 자세히 풀어내려면, 지금은 목자, 생수, 왕권을 한 편의 글에 잘 녹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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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목자'와 '양'이란 어휘를 사용한 선포나 가르침은 언어학적으로 목자-양 은유에 속하지만, 전승사로는 목자-왕 전승으로 분류할 수 있다. 다만 지도 교수는 용어 정의를 중요하게 여겨서 나에게 목자-왕 전승이란 용어가 존재했느냐고 되묻은 적이 있다. 목자-양 비유와 목자-왕 전승은 별개로 구분할 수 있지만, 보통 지도력, 특히 왕권 사상에서 중요한 어휘군으로 사용되었다. 문제는 두 주제를 깊이 있게 연구한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 통념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라고 할까. 내가 해야 할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자-양 은유를 목자-왕 전승으로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작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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