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에스겔 34는 한 목자의 등장은 다윗 언약의 유효성 선포이며, 이어 화평의 언약 체결을 선포한다 (v. 25). 이와 유사하게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는 한 목자의 등장은 다윗 언약의 성취이자 계명과 관련이 있다. 화평의 언약이 악한 짐승 제거와 양의 평안을 약속한다면, 계명은 양 떼를 위한 영생에 대한 약속이다 (vv. 25–28).

언약과 계명 사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차이가 언약 대신 계명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일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목자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종이자 왕자이다. 하나님과 다윗은 주종의 관계이다. 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와 하나이다. 또한 다윗은 생전에 왕국의 통치라는 의무를 감당하지만, 예수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생이라는 영적 사역을 감당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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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담론에서 내 주요 관심은 유대인의 분쟁(10:19–21)이다. 나는 유대인의 목자-왕 전승에 반하는 선한 목자의 죽음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분쟁의 원인이라고 보고, 목자-양 은유의 역사와 목자의 죽음을 비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내 방향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분쟁의 원인이 선한 목자의 자발적 죽음이라는 이례성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님의 하나됨(oneness)이라는 요한의 기독론, 일부 유대인의 시각에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죄라는 해석으로 바뀌었다. 전후 관계가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연구 범위에서 유대 메시아사상을 아들됨(divine sonship)을 대체한 이유이기로 하다.

예수께서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포하실 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신적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지만, 유대인은 신성모독으로 해석한다. 이 같은 거리감은 결국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지고, 예수의 부활을 통해 기독 공동체의 정당성이 입증된다.

목자-양 은유의 역사와 선한 목자의 죽음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분쟁의 원인에 대한 시각이 변해서 연구 방향이 조정되어야 한다. 연구 범위가 꽤 넓고 깊다고 판단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수습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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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 학위 논문의 주요 질문은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발생한 유대인 무리의 분열(19–21절)이다. 즉 나는 왜 유대인 중에 일부는 예수의 가르침에 반발하고, 일부는 예수의 이적을 근거로 그의 가르침을 수용하는지 묻는다.

나는 선한 목자 담론에서 목자-양 유비를 사용해 선한 목자 자신의 목숨을 내려 놓는다는 그의 구속사적 사역에 관한 선포에 분열의 원인이 있다고 전제한다. 고대 근동, 구약 성경, 제2성전기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에 이르기까지 목자-양 유비는 전통적으로 왕권 사상과 결합하여, 목자의 죽음은 이례적인 가르침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가르침이 내포한 예외성을 아시기 때문에 자신의 신적 권위와 아버지의 계명으로 그 정당성을 설명하신다 (18절).

유대인 군중의 반응은 예수의 담화 이후에 묘사된다 (19-21절). 회중의 반응이 서술된 시점에서 분쟁의 원인을 꼽기에, 분쟁의 발화점이 어디인지 애매하지만, 예수께서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는 내용이 그 지점이라고 봐야 한다. 즉 선한 목자의 죽음이 분열의 원인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하나(oneness)라는 주장이 분열의 원인이다.

내가 연구 제안서에서 '유대 메시아사상' 대신에 '아들됨'(sonship)을 목차에 집어 넣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대 메시아사상은 목자-양 유비와 연결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몇 가지 주제를 개략적으로 포함하면 된다. 그러나 요한복음 해석자로서 요한이 바라본 예수를 온전히 그려내려면, 후자에 더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선한 목자 담론의 흐름에 따라 선한 목자의 죽음이 목자-양 유비에서 예외적이라고 입증해야 후속적으로 아들됨 연구의 적절성을 제시할 수 있다. 내 연구의 범위와 학위 취득 소요 시간을 감안하면, 집중할 수 있는 주제가 한계가 있어서 '아들됨'은 개괄적으로 다루고 박사 학위 취득 이후 집중할 연구 주제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편, 유대 군중의 분열은 유대주의의 분화 혹은 기독교 기원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최소한 요한 공동체의 관점은 그러하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유대교-기독교 관계'(Jewish-Christian Relation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이 반셈족주의(=반유대주의)라는 전제가 만연해 있다. 차후 내 연구는 이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게 되어 있는데, 현재 요한복음이 지극히 유대적이라는 내 관점을 고수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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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담론의 배경으로 에스겔서 34장과 예레미야 23장, 스가랴 11장 등이 가장 많이 언급된다. 여러 구약 본문 중에서도 에스겔서 34장의 영향을 강조하는 견해가 대세이다. 반면 나는 목자-양 은유와 초막절을 근거로 스가랴서 9-14장이 배경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다. 스가랴서 9-14장이 여러 목자 본문 가운데 선한 목자 담론의 위치와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은 목자-양 은유 용례에서 설명할 수 없는데, 예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신다.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이라는 유일무이한 전례는 예수의 아들됨과 하나님의 언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선한 목자의 죽음에 관한 기원을 찾을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에스겔서 34장이 선한 목자 담론의 배경이라는 주장을 수용하고도, 여전히 목자의 죽음을 예수의 아들됨과 하나님의 언약으로 풀 수 있는 연결점을 찾아냈다. 그간 내가 고려했던 요소이었건만, 에스겔서 34장을 배제한 탓에, 두 본문의 유사성보다 차별성에 더 주목한 탓에 놓치고 있었다.

이로써 선행 연구의 대세를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내 독창성을 견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내 결과물이 극복해야 할 저항선이 낮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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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담론(요 10:1-21)에서 목자-양 유비의 배경으로 에스겔서 34장과 예레미야 23장 등 유대 문헌은 언급되지만, 그리스-로마 문헌은 사료로 제시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분석한 문헌에서도 관련된 바가 전혀 없다. 내가 선행 연구에서 못 찾았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실제로 그리스-로마 문헌에서 이 같은 용례가 없었을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에스겔서 34장과 예레미야 23장 등 역시 선한 목자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두 본문을 아무리 열심히 봐도 목자의 죽음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으며, 목자의 보호를 강조할 뿐이다.

내 분석에 의하면, 고대 근동, 구약 성경, 제2성전기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 등 목자-양 유비는 역사적으로 왕권 사상과 관련이 있다. 즉 목자-양 유비는 왕권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통치 수단이다.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은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그의 사역과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관점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이런 강조는 선한 목자 담론에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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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 이후 진행할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신약의 목자 기독론"이다. 근래 이와 관련된 작업을 진행하며 관찰한 일부를 적어본다.

사복음서에서 대표적인(혹은 내가 발견한) 목자-양 은유 본문은 마태복음 9:36–38; 15:21–28; 마가복음 6:30–34; 요한복음 10:1–21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복음서를 공관복음서와 네 번째 복음서로 나누는데, 공관복음서 사이에는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그와 반대로 네 번째 복음서의 독특성이 두드러진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자-양 은유도 둘 사이의 차별성이 나타난다.

1. 마태복음 9:36–38과 마가복음 6:30–34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먼저, 두 목자-양 은유를 살펴보자.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각 본문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마태와 마가의 목자-양 은유는 "목자 없는 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예수의 불쌍히 여기심"이 저자의 관심사이다. 독자가 간과하지 말하야 할 또 다른 저자의 강조점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마태와 마가는 목자-양 은유와 예수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가복음 6:30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1.1. 마태복음 15:21–28에 나타난 목자-양 은유
마태의 다른 용례는 15:24에 나타난다.

마태복음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는 "이스라엘 집의 읽어버린 양"이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앞서 9:36의 "목자 없는 양"과 동일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2. 요한복음 10:1–21
요한의 목자-양 은유는 마태와 마가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의 전형적인 용례에 따라 양 떼를 보호하는 목자의 직무를 강조한다. 하지만 요한은 전통을 벗어나 선한 목자의 자발적인 죽음을 선포한다. 요한은 목자-양 은유를 통해 성도의 영생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라 선한 목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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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3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양의 흩어짐을 야기한 목자의 악행은 심판의 주요 원인이며, 반대로 새 목자는 양을 한데 모은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리의 습격에 삯꾼은 달아나지만,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12절).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과 구약 성경의 대조 기법은 참 목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참 목자의 등장을 고대하도록 한다. 하지만 청중이나 독자가 간과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5절)는 말씀이 유례 없는 용례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어서, 예수의 죽음 예고를 당연시할 수 있지만, 목자와 죽음은 동일 선상에 위치하지 않는 단어 군이다. 더구나 예수는 당신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선한 목자의 죽음 예고 (14-15절)는 유대 사상이나 그리스-로마 문화로 설명할 수 없는 선언이다.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 선언은 하나님의 계명 (18절), 신학적 용어로 ‘구속사’로 해석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계명)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권세)으로 실현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예고하시려고 전통적인 목자 은유를 도입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고대 근동,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 등에서 유례 없는 용례를 목자-양 은유에 구속사를 결합하여 착안하셨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목자-양 유비와 구속사를 분별하여 읽어야 한다. 더하여 우리는 이 본문에서 언약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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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mission as the good shepherd who desires the well-being of the sheep has as its goal the production of life in abundance, already signified in the abundance of wine at the wedding in Cana and the abundance of food left over at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Source] Lincol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John, 300.


요한이 예수의 첫 이적으로 기록한 가나 혼례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해석자들이 많다. 위에 기술한 Lincoln도 그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2: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의 진술은 이같은 해석의 토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요한의 기독론을 중심으로 이 사건을 보면, 가나 혼례 사건은 부정적인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따른 이유가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라는 유대 메시아 사상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요한의 기독론은 자기 부인(=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기반한다.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자기 부인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본문이다. 따라서 나는 Lincoln의 진술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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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은 방법론으로 주제를 관통해 자신만의 주장을 담아된 결과물이다. 방법론이나 주제가 새로울 필요는 없으나 주장은 참신해야 한다. 새로운 방법론으로 익숙한 주제를 다루어도 참신한 접근을 했다는 기여로 학위를 받는 경우도 자주 있다. 자신의 방법론으로 본문을 새롭게 접근하는 참신성은 가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벗어나는 해석이라면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인정을 받아야 할지 의문이 든다. 아래는 Helen C. Orchard 박사의 학위 논문을 토대로 출간한 『Courting Betrayal: Jesus as Victim in the Gospel of John』의 내용이다.

Practically, the Jews are already determined to kill him. There is no possible alternative ending to the Gospel. Hence, the greek that Jesus is referring to is not an ability to change his circumstances―the die is already cast. The only 'power' that he possesses is the ability to become powerless, and this is expressed in the voluntary nature of his sacrifice. He does this by consciously 'laying down' his life, rather than having it taken from him. That he uses authoritative terms to stress his passivity reveals the tension between the voluntary and involuntary narure of his role as the Lamb of God. He uses forceful phrases to qualify his renouncement of power. the allegory of the shepherd and his sheep, threatened by the wolf, contextualizes and aids in the interpretation of his words. When faced with danger, the hireling is able to flee, but the shepherd has no choice but to remain with the sheep, because his very nature is as the good shepherd. He has a relationship with the sheep and it is his duty to protect them―if he did not he would not be the good shpherd. He has no option but to accept the situation―to choose vulnerability in the face of a vicious enemy, to become a victim. (출처: 142―3쪽)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 무리를 요한 공동체로 보는 견해는 가능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 목적과 그 전승을 비틀어 사용한 이유이다. 목자-왕 전승의 대표적인 근거로는 함무라비 법전이 있고, 구약성경 곳곳에 이 전승이 나타난다. 때로는 목자와 왕 사이의 구분 없이 사용되기도 함. 왕은 문자적으로 왕을 배타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지도자를 포괄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중요한 사실은 목자-왕 전승은 목자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한의 예수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여,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외성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무리의 반응을 보면, 이같은 선포가 그들에게 얼마나 생경한지를 알 수 있다(19―20절).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께서는 목자로서 자신의 자발적인 죽음을 선포하신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놓게 된 기적(mirales)과 표적(signs)들을 의지대로 조절하실 수 있었고, 하물며 자신이 죽어야 할 시기를 조절하셨다. 예수의 죽음은 필연성이며, 자신에게 닥칠 수난의 때를 조절하신 이는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시다.

Likewise, Jesus uses the metaphor which caused him anguish in John 10, revealing that laying down his life will mean surrendering to a savage fate, to invoke anguish in Peter. This time there is no mention of the death of Jesus; the context is the death of Peter. The role of shepherd is conjoined with the role of victim. Jesus no longer understands this as his role; it now belongs t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s. Perhaps this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change that has taken place in the resurrected Jesus. He has escaped from the victim-cognizance which characterized his life before 'the hour'. The evidence of his victimization remains―one need look no further than the scars on his body―but there has been a shift in his self-understanding, revealing his own liberation from grief and fear. (출처: 262쪽)

또한, 예수의 죽음은 제자도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강조하듯이, 자신과 제자 사이의 관계도 강조하신다. 베드로에게 목자 은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경험한 죽음이 동일하게 제자인 베드로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반면  베드로와 같이 있었던 자에게는 그러한 죽음이 닥치지 않는다. 

성경 해석을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접근법은 독자에게 참신함을 주지만, 그 방법론을 적용해 본문의 의미를 벗어난다면, 그것이 유익한 연구인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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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해석가들이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도전을 받고 있다.

예수와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역사적으로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받는 종'은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로 성전 재건에 힘썼던 스룹바벨을 지칭한다. 스룹바벨은 귀환 공동체의 지지와 기대 속에서 성전 재건을 도모하지만,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던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약속을 성취할 자로 추앙받지만, 귀환 공동체의 기대와 달리 그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사야의 진술은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리라고 기대를 받은 지도자의 사망에 대한 절망과 탄식 가운데 나온 고백이다.

더구나 이사야 54-66장에서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에도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55:3)을 말하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은 말하지 않는다. 반면 '영원한 언약'(55:3; 61:8)이라는 표현은 몇 차례 나온다. 절망에 빠진 귀환 공동체를 위로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특히 하나님은 귀환 공동체를 향해 '네 남편'(54:5)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등장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해석가들이 새로운 다윗의 등장에 더 주목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메시아/그리스도로 추앙받았으나,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러한 순서는 스룹바벨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자신의 궁극적 지상 사역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스룹바벨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직접 귀환 공동체를 통치하신다고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자신의 방법대로 성취하신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좀더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성경 인용에 관해서는 주의에 주의를 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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