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신약학 전공자로서 구약에 미약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래서 관련 논쟁은 제외하고, 내 연구 주제인 목자-양 은유로 접근할 때 이사야서는 최소 1~2차례 급진적인 신학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사야는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를 고대한다 (예를 들어, 37:35). 하지만 역사는 그의 믿음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특히 이방 왕 고레스는 다윗 후손의 과업 중 하나인 예루살렘 재건을 실시한다 (44:28). 이러한 과업은 이방 국가와 왕을 우상 숭배와 침략으로 정죄하던 관례와 달리 고레스에게는 "내 목자"(44:28)와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45:1)라는 칭호를 적용하도록 만든다. 

또한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52~53장)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자(특히, 53:4)에서 민족의 죄악을 담당한 의로운 종(53:11)로 달리 생각하게 된다.

이사야는 여전히 다윗 계열의 메시아사상을 유지하지만, 메시아의 과업이 성취되는 방식에 신학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런 변혁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과 후대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재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사상의 변천 과정에서 중요한 본문이고, 예언 전통과 신학의 확장성이라는 주제에서도 깊이 있게 다뤄볼 만한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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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또한 우상숭배는 공의의 부재를 낳는다. 역설적이지만 우상숭배가 팽배하고 부정이 만연한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제사와 절기, 기도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행위를 역겨워하셨다 (1:11–15).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정의라고 외친다 (1:16–17).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정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에서 출발하며 의로운 행실을 가져오며 사회의 정의를 실현한다.

에스겔은 이사야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는 악인과 의인의 대가가 생명/영혼과 관련이 있다고 선포한다 (2:18–21 등). 또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해야 한다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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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서 심판과 축복의 도구로 (강, 비 등 관련 어휘를 포함하여) '물'이 동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판의 도구로서 '물'은 애굽을 향한 예언(19장)이 대표적이다.

5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7 나일 가까운 곳 나일 언덕의 초장과 나일 강 가까운 곡식 밭이 다 말라서 날려가 없어질 것이며
8 어부들은 탄식하며 나일 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마다 슬퍼하며 물 위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이며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문명을 꽃피웠으며 오랜 시간 동안 주변 국가에 영향을 끼친 패권 국가였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외교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곳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집트를 향한 심판은 물, 특히 나일강을 중심으로 선포된다.

축복의 도구로서 '물'은 심판 이후 회복될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35:6; 41:17, 18; 43:19, 20; 49:10; 58:11).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41:17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41:18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43: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스라엘은 물 공급의 영향이 지대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생명과 직결되는 '물'의 공급자로 선포한다. 동일한 이유로 이스라엘에서는 '비'가 매우 중요하다.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축복이 '비'와 연관되는 이유와 초막절이 주요 절기로 자리 잡은 이유 모두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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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 나타난 절기는 총 3번 사용되었다(1:14; 29:1; 33:20).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특히 1:11-15,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를 비교적 성실히 이행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들에게는 진정성이 없었다.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분노하시는 이유는 정의의 부재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서 자행되는 악의 근원을 정의의 부재로 정의한다.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성일(holy day)는 안식일이다(56:6; 58:13[x2]; 66:23).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즐거운 날, 존귀한 날로 구별하셨다 (58:13). 참고로 스가랴에서는 초막절을 명령한다(14:16-19). 또한 이사야는 월삭/초하루(New Moon)에 대해서도 말한다(1:14; 66:23).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66: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정리하자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절기, 안식일, 초하루를 지켜야 한다. 이사야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모세의 율법이 정한 모든 성일을 지키는 이상을 그렸으리라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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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국가 차원의 위기가 역동적으로 그려진 본문은 대표적으로 예레미야서와 이사야서를 꼽을 수 있겠다. 예레미야서는 남유다의 멸망 전후를 예언자 예레미야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의 진술은 서사적이며 역사 기술에 가깝다. 이사야서는 남유다의 멸망과 이방 왕의 통치 등 격변기의 시대를 토대로 이사야의 이해와 해석을 담고 있다. 이사야는 자신의 발화를 “계시”(1:1)라고 말한다. 이사야서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포괄하는 만큼 세계관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이원론, 이방 왕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이 그러하다. 여기에 이 글의 주제인 “야웨의 종”도 포함된다.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레스와 야웨의 종

이방 왕 고레스에 대한 칭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지만, 그가 오랫동안 예언되어 온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을 현실화시킨 왕이라는 사실은, 그가 비록 다윗과 같은 왕 혹은 다윗 계열의 왕(Davidic King)이 아니더라도, “내 목자”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고레스”라는 서술(44:28; 45:1)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고레스 이후에는 전통적인 용례에 따라 Davidic Messianism으로 회귀 되는 경향이 있다(유대 메시아사상에 관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현 단계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사야의 네 번째 노래에 포함된 “야웨의 종”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욱 복잡하다. 정체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이스라엘’이란 국가로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으로 간주하는 해석이다. 각 진영에서도 해석이 분분한데, 그만큼 정체 규명이 어려운 작업임을 보여 준다.

우선, 나는 ‘이스라엘’이란 집단으로 해석하는 경향은 배제한다. 이 진영에 속한 학자들도 ‘이상적인 이스라엘’이란 개념을 사용할 만큼, “야웨의 종”을 집단으로 해석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나는’이상적인 이스라엘’이란 개념부터 성립되지 않으며, 가장 근접한 시기라면 다윗 왕 초중반과 솔로몬 초반을 상정했을 테고 실제로 다윗 왕국의 부활을 꿈꾸는 유대인들이 많았겠지만, 그런데도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는 염연히 조상들과 그들의 죄로 인한 심판이기에 이스라엘이 이방을 위해 속죄한다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이상적인 이스라엘이라도 이방 국가들을 속죄한다는 개념은 존립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으로 해석해도 여전히 그 인물이 누구인지 규명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사야가 뒤늦게 그 “야웨의 종”의 가치와 기여를 깨달았듯이, 대중들이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인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이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가 왕실 혹은 장차 왕으로 봉립될 인물(royal figure)인가 메시아(messianic figure)인지 다뤄야 한다. 이 부분에서 내 견해가 가장 많이 바뀌었는데, 나는 왕이나 메시아와 거리가 멀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현재로서는 ‘예언자’에 가깝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에 대한 무관심과 고난 등은 정치적 군사적인 영역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내가 주목하는 구절 중 하나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53:11)라는 구절인데, 그는 발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했던 사람이다. 이런 활동은 예언자의 영역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중요한 사실은, 이사야가 그 “야웨의 종”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속죄”라는 개념을 흔든다.

This was a new and revolutionary concept that a human sufferer would have the power to be a substitute and atone for human sin (Westermann, Isaiah 40-66, 263).

Westermann의 표현대로, 이렇게 “새롭고 혁명적인 개념은” 변혁의 시대에 발현된다. 포로 귀환 이후 속죄 개념의 발전을 들여다보면, 이사야가 얼마나 변혁적인 예언자인지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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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고정 관념, 혹은 신앙과 전승 등을 뒤집는다는 데 있다. 내가 다루는 주제에 한해서는 ‘고레스’와 ‘야웨의 종’이 그러하고, 이 두 인물은 유대 메시아 사상에서 독특한 궤적을 남긴다.

고레스는 이방 왕이지만,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에 부여될 명칭으로 이 그를 부른다 (44:28; 45:1). 그리고 그의 업적은 마치 멸망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상이 담긴 다윗 왕과 같다. 실제로 포로 공동체는 열방 심판과 이스라엘 재건 명령은 장차 나타날 다윗과 같은 왕의 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일을 행한 인물은 이방 왕이었다. 이사야에게 이같은 모순적인 현실은 그로 하여금 기존 유대 전승을 뒤집어야 하는 도전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사야가 신적 계시에 순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별개로 그는 여전히 청중들로부터 극심한 저항에 마주하게 된다.

고레스 왕의 출현과 유대 포로민들의 저항

고레스와 다윗 계통의 왕

고레스의 등장과 열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


야웨의 종의 정체에 관한 연구들과 각종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논쟁이 가능한 영역으로 보인다. 연구 추세가 ‘종’의 정체를 역사적 인물에서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경향으로 넘어가듯 싶은데, 이런 변화마저 정체를 밝히는 어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현재 나는 그의 정체를 특정 인물로 보고 있으며, 추후 선행연구를 검토하면서 내 견해가 달라질 수 있다. 그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그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 역시 군중들처럼 ‘종’의 정체를 가볍게 여겼지만, 어떤 특정 사건을 통한 유대 공동체의 상황이 변화되면서, ‘종’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이같은 변화 역시 군중들과 불일치를 일으킨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웨의 종'의 정체


이처럼 ’고레스’와 ‘야웨의 종’에 대한 이사야의 시각은 유대 공동체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귀환 공동체의 이스라엘 재건으로 인해 고레스에 대한 이사야의 평가는 후대에 수용되지만, 아마도 ‘야웨의 종’에 대한 인식은 오랫 동안 극히 일부에게 통용되었다고 보여진다. 극적인 변화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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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대에도 각 국가의 상황에 따라 주변 국가들에 대한 인식이 현저하게 다르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듯이, 이스라엘 역시 열국을 대하는 온도차가 존재했다. 더구나 전쟁이라는 실존적 위협이 언제든 발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열국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결정적 사건중 하나가 바로 고레스 왕의 등장이다.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이사야에서 고레스는 "내 목자"로 불리운다.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수호신과 그의 대리자인 왕에게 부여되었으며, 이스라엘도 이런 전통이 적용되었다. 목자는 대체로 이스라엘 왕을 가르쳤으며, 종종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상적인 왕으로 꼽혔던 다윗은 멸망한 이스라엘을 회복할 종말론적 왕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전승이 전해지는 가운데 이방 왕 고레스에게 "내 목자"라는 칭호가 부여되는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성전 재건 명령과 관련이 있다. 이렇듯 귀환 공동체(혹은 소수의 선지자들을 포함한 무리들)가 갖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의미는 남다르다. 성전 재건은 하나님의 예언이었기 때문에, 그 주체가 이방 왕이라 하더라고, 그 명령을 내리고 시행하도록 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목자가 될 수 있다.

또한 고레스는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선지자가 고레스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사건은 실제하지 않았겠지만,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고 담대하게 선포한다. 그 이유는 후술되어 있듯이, 열국을 정복할 왕이 등장할 예언을 성취할 자이기 때문이다. 오랫 동안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남유다의 멸망 이후에는 다윗과 같은 왕이 등장하여 열국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리라는 신앙이 강화되었다(공동체의 신앙과 달리 예언자들의 선포가 강력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처럼 고레스의 등장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을 갖고 있었던 귀환 공동체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자리잡게 된다. 다윗 가문에서 조상에 버금가는 이상을 실현할 메시아가 등장하리라는 믿음을 고수했던 그들에게, 낯선 이방 왕이 그들의 오랜 신원을 성취하였다. 전쟁을 통해 정벌해야 할 대상 국가의 적장이 이스라엘의 열망을 실현시키는 현실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분명 고레스 왕을 향한 칭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례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이 열국을 향한 인식에 대한 변화가 얼마나 될지는 또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학자들이 이사야서의 '네 번째 야웨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워지는 본문을 두고, '종'은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화자'는 '열국'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 처한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척박한 상황을 '고난받는 종'에 투영한 결과로 보인다. 화자의 등장은 처참한 귀환 공동체를 바라보는 열국으로 제3자의 시선으로 처리한다. 앞으로 이사야서를 더 깊이 관찰해야 하므로 아직은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현 내 관점으로는 이러한 입장은 부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내가 고레스의 등장으로 인한 열국을 향한 인식의 변화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역사적으로 고레스 왕처럼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에게 호의적인 지배자는 드물었다. 이스라엘 멸망 이후 현지에 정착한 거주민들에 의해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고 다리오 왕에 의해 다시 공사가 재개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리오 왕을 고레스 왕처럼 묘사하지 않는다. 그만큼 고레스 왕에 대한 이사야의 묘사는 이례적이다.

또한 고레스 왕 이후에도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 이번에는 이스라엘 혈통을 통한 왕의 등장을 고대하는 신앙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다만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한다는 특징이 두드러지는 현상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사야서의 독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열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극히 한정적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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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는 열국 심판과 우상 숭배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있으며,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열국을 일으키지만, 그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심판의 대상이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이 남아 있다(대표적으로, 56:1-7).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반복적으로 심판을 예고하고, 우상 숭배를 금하라고 명령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다. 결국 처참한 심판은 시행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66:16-19).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으며, 공의를 행하지도 않았으며, 우상숭배를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의지로 실현되고 만다(66:22).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은 절망적인 이스라엘을 상황을 역전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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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를 읽다보면 이스라엘이 경고받는 이유는 대개 '우상숭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여기에 이사야서의 특이점은 '정의'에 대한 반복적인 요청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었으나, 그것은 외적인 모습일 뿐 실상은 공허한 예배이었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번제와 제사를 드렸다(1:10-13). 그들은 헌금을 드렸고 절기를 지켰다(1:14).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싫어하셨다(1:14bff).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1:16-17).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번제'를 드리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고(43:23-24),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듣기도 하였다(56:1-7; 58:13).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게 요청한 것은 '공의'이다(특히, 64:5).

64:5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이사야에게 공의는 이스라엘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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