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희년서는 출애굽 이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가르치신다고 진술한다 (1:1-4).이스라엘이 징벌받고 포로로 끌려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 언약의 절기, 안식일 등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여호와의 언약의 절기"(the festivals of My covenent)는 절기의 특성을 잘 함축하고 있다. 절기는 여호와의 언약을 상기하는 목적을 가진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사유가 반복적으로 명시된다 (1:13). 이스라엘은 달력(정확히는 초승달[new moons]을 기준으로 삼은 달력), 안식일, 절기, 희년을,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 하나님의 성소에 그가 머무실 때, 이스라엘은 진리와 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1: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와 의이다.

희년서에서 가장 먼저 제정되는 휴일(holidays)은 안식일(Sabbath)이다. 2장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일을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 이후 안식하셨고, 인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서 준수의 의무가 지워진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신 이후 다시는 이와 같이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노아에게 하셨고 (6:16), 그 이유로 칠칠절(The Feast of Weeks) 준수 명령이 주어진다 (6:17). 칠칠절은 희년서에서 가장 먼저 제정되는 절기이며, 달력의 셋째달(참조. 1절)에 언약 갱신을 위해 매년 기념해야 한다. 칠칠절 준수 명령은 당시 농경 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저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 자녀들이 칠칠절을 지켰으나, 그 후손은 이 절기를 다시 기념하기 전까지 잊고 있었다 (6:19). 칠칠절은 초실절(the Feast of firstfruits)과 동일시하는 이유가 이 절기의 이중적 특성 때문이라고 밝힌다 (6:21). 후술하겠으나 절기의 특성으로 기쁨(joy)이 언급되지 않았음을 기억하자. 또한 노아 언약은 홍수 심판과 관련이 있으며, 노아 후손의 번영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언약의 절기(the feasts of the covenant)를 잊어버리고, 이방인의 절기(the feasts of the Gentiles)를 따른다 (6:35).

노아는 포도나무를 방주가 방치된 곳에 심고, 일곱 번째 달에 거두었다 (7:1). 노아는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고 15년 첫 달 첫날까지 보관하였다 (7:2). 그리고 그는 이를 기쁨으로 이 절기의 날을 기념하였다 (7:3). 이곳에서는 절기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는 노아의 언약이 맺어진 달과 같은 때이며, 아브람은 그 절기를 갱신한다 (14:20). 아브람의 절기 갱신은 뒷부분에 기술된다. 아브람 언약은 그 자손의 번영에 대한 약속이다 (14:18).

아브람은 자신을 향한 언약을 인간의 방법으로, 정확히는 사래의 권유로, 성취하고자 한다 (16:22ff).

아브람은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낳고 (14:24), 초실절(The Feast of Firstfruits)을 기념한다 (15:1). 초실절은 희년서에서 칠칠절에 이어 두 번째로 이름이 명시된 절기이며, 득남 이후 실시된 절기라는 특징이 있다. 이스마엘의 출생과 초실적 기념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한번 언약을 선포하신다 (15:3-4). 이로부터 아브람의 이름은 아브라함으로 바뀐다 (15:7). 아브라함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마엘을 통해 실현되리라 기대하지만 (15:18),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으로 지으라고 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시신다고 말씀하신다 (15:19, 21).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이유에 달려 있지 않으며, 그는 이스라엘과 그의 자손을 선택하셨다 (15:30).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사라는 셋째 달에 아들을 낳는데, 저자는 이 시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16:13). 이삭은 셋째 달 중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때, 초실절을 드리는 때에 태어난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할례를 실시하고 (16:14), 기쁨의 절기(a festival of joy)를 드리는데, 이 절기가 바로 초막절이다 (16:20-31). 저자는 아브라함이 지상에서 처음으로 초막절을 드렸다고 기록한다 (16:21). 아브라함을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제"(the festival of the Lord, a joy acceptable to the Most High God)라고 일컫는다(16:2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셔서, 아브라함은 순종하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사를 멈추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상기시키신다 (18:1-16). 아브라함과 그의 어린 아들들이 맹세의 우물에 머물면서 이 절기를 기념하고, "여호와의 절기"(the festival of the Lord)라고 부르며, 기쁨의 절기(joy of festival)로 드린다 (18:17-19). 이 절기의 특정 이름은 지정되지 않는다. 또한 초막절과 유사성이 있지만, 둘이 동일한 절기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삭이 르브가로부터 야곱과 에서를 낳는다 (19:12). 아브라함 언약이 이삭을 통해 성취된다는 약속이지만, 이삭의 자녀 출생에서는 언약과 절기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그의 열두 아들, 그리고 이삭과 그의 두 아들, 케투라(아브라함의 셋째 부인)의 여섯 아들과 그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20:1-10). 그리고 이스마엘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케투라의 아들들에게 선물을 주고, 이삭과 그의 아들로부터 떠나게 하고, 이삭에게는 자신의 전부를 준다 (20:11). 

아브라함의 죽음을 앞두고 이삭과 이스마엘이 맹세의 우물에서 아브라함을 위해 칠칠절, 즉 초실절을 기념하고, 아브라함은 두 아들로 인해 기뻐한다 (22:1). 칠칠절 혹은 초실절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출생을 기념한 절기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불화를 해소하기에 적합한 절기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죽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축복하시고, 이삭은 환상의 우물(the Well of the Vision)에서 머무른다 (24:1). 아브라함의 맹세의 우물과 이삭의 환상의 우물은 이름에서 언약의 기능을 연상시키는 듯하다.

이삭이 열네 번째 날에 십일조를 드렸고, 라헬이 베냐민을 임신한다 (32:2-3). 이삭은 열다섯 번째 날에 제사를 드리는데 (32:4-31), 이 제사의 시작일 (32:4)와 설명(32:27-29)은 이 절기가 초막절로 밝혀지게 한다. 절기 동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 언약과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32:18-19). 아브라함이 이삭의 출생을 기념한 절기가 초막절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언약이 이삭을 통해 성취된다고 말씀하셨기에, 이삭이 초막절을 지키고 아브라함 언약과 동일한 말씀을 듣는 것은 그가 언약의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꿈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성소를 짖지 말라는 명령을 듣는다 (32:22). 다윗의 성전 건축과 유사한 기록인데, 초막과 성소 그리고 성전의 유사성을 의도하는 듯하다. 이삭은 자기가 본 꿈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하루를 더 기념하여 제사를 드리는데, 결과적으로 이레 동안 기념하는 절기에 하루가 더 추가된다 (32:26-27).

이스라엘은 이집트로 여행 중에 기근이 극심한 가나안 지역과 기근을 위해 묵은 곡식으로 초실절을 기념한다 (44:4). 여기서 초실절은 절기의 본연적 기능을 위해 기념된다.

희년서의 마지막 두 장(chs. 49-50)은 각각 유월절과 안식일을 다룬다. 49장에서는 유월절과 무교절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다. 유월절은 밤에 시작되는데, 기쁨의 시작이라고 설명한다 (49:2). 기쁨은 유월절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희년서에서 절기는 "기쁨"이라는 특징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달리 말해 기쁨이라는 특징으로 절기의 특성을 구별할 수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절기 가운데 초막절이 유독 기쁨과 연관되는 사례가 많다. 그래서 이름이 적시되지 않은 절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기쁨이 포함되기도 한다. 희년서도 초막절의 특징으로 기쁨이 강조되지만, 다른 절기에 동일하게 적용되므로 독특한 특징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희년서에서 절기는 기명과 무기명으로 일차 구분이 가능하다. 기명 절기로는 칠칠절과 초실절, 초막절, 유월절이 있다. 무기명 절기로는 노아가 포도주를 만들고 기념한 절기와 일명 이삭의 희생 사건을 기념한 절기가 있다.

칠칠절, 초실절, 초막절은 농경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절기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 출생과 관련이 있다. 칠칠절과 초실절은 이스마엘, 초막절은 이삭의 출생 이후 아브라함이 기념한 절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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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서에서 절기/명절은 총  네번 사용되었다(36:38; 45:17–25; 46:9, 11). 첫 번째 사례인 36:38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을 표현하는 비유이므로 실질적으로는 절기에 관한 구절이 아니다. 두 번째 사례인 45:17–25에서는 ‘명절’에 포함되는 실례로 유월절(21–24절)과 초막절(25절)에 관한 규정을 선포한다. 여기서 ‘초막절’이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절기의 시기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세 번째 사례인 46:9는 절기에 백성이 출입해야 할 문에 관한 규정을 선포한다. 네 번째 사례인 46:11에서는 ‘명절’이란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소제에 관한 규정이 진술되어 있다. 에스겔서 40-48장에서 새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에서 절기에 관한 에스겔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은 차지하고 있다.

반면 에스겔은 안식일에 더 관심을 둔다(20:13, 20, 21; 22:26; 23:38; 45:17; 46:1, 4–5). 에스겔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을 군주의 주도로 준수되어야 하며(45:17), 관련된 지침을 제시한다(45:18–25; 4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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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 나타난 절기는 총 3번 사용되었다(1:14; 29:1; 33:20).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특히 1:11-15,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를 비교적 성실히 이행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들에게는 진정성이 없었다.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분노하시는 이유는 정의의 부재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서 자행되는 악의 근원을 정의의 부재로 정의한다.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성일(holy day)는 안식일이다(56:6; 58:13[x2]; 66:23).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즐거운 날, 존귀한 날로 구별하셨다 (58:13). 참고로 스가랴에서는 초막절을 명령한다(14:16-19). 또한 이사야는 월삭/초하루(New Moon)에 대해서도 말한다(1:14; 66:23).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66: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정리하자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절기, 안식일, 초하루를 지켜야 한다. 이사야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모세의 율법이 정한 모든 성일을 지키는 이상을 그렸으리라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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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절기 사용을 분석하다 보면, 안식일이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5장에서 '유대인의 명절'(혹은 '익명의 절기', 1절)에 언급된, 베네스다 치유 사건 이후 안식일 논쟁이 이어진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요한이 유월절을 중심으로 절기 순서를 배열하고, 자신의 신학을 녹여내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같은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에스겔 45장 17절이 중요한 단서로 보인다.

17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이 구절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행하는 날에 명절과 안식일이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이같은 유대 관습에 주목하는 동시에 안식일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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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유대인의 명절’(5:1)을 부림절로 보는 해석자들이 대세라고 한다. John Bowman의 “Identity and Date of Unnamed Feast”는 그 중 하나이다. 영역본에 따라 이 절기를 ‘익명의 절기’라고 하는데, 저자가 특정 절기를 밝히지 않으므로 갖는 효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중/독자로 하여금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못하는 효과가 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총 여섯 차례나 절기를 언급하는데, 예외적으로 이 명절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청중/독자가 그 절기를 추적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에는 개연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절기의 특성을 연상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면, 요한이 절기를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요한은 굳이 절기를 언급한다. 그 이유는 요한이 의도하는 두 번째 효과라고 불수 있다. 요한은 청중/독자이 어떤 절기인지 바로 알 수 없어도, 절기라는 시기를 염두케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명절의 특성과 동떨어진, 그러나 요한이 반드시 서술하고 싶은 사건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대다수의 견해대로 저 절기가 부림절이라고 한다면, 요한에게 부림절이라는 다른 절기에 비해 큰 비중을 갖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절기 중에 일어난 베네스다 사건은 꼭 전하고 싶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은 절기와 그에 맞닿은 사건이 아주 중요한 해석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요한은 절기의 의미를 살려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유월절, 초막절, 수전절), 반대로 절기의 의미를 퇴색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도 한다(유대인의 명절). 현재 이 부분을 틈틈이 살펴보고 있고, 일부 내 박사 학위 논문에 포함되겠지만, 세부 사항은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난 이후 진행될 연구 과제로 넘길 예정이다.

부림절은 하만의 유대인 말살 정책로부터 구제된 민족적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만약 요한이 이 절기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면, 5장은 민족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5장은 베네스다의 행각 중 한 곳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볼 때 요한의 절기 사용 중 절기의 유래와 의미와 동떨어진 사건 진술은 이 곳이 유일하다. 그래서 나는 요한이 부림절이란 절기를 명시하지 않았다고 본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은 그 자체로 은혜롭다. 주변에 도와주는 이가 없어 서른여덟 해 동안 고통받은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의 긍휼하심은 분명 기억될 만하지만, 요한의 절기 사용과는 이질감이 있다.

오히려 요한은 이 치유 사건을 안식일과 연결시킨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강조하신다. 예수는 안식일을 초월하는 존재이시다. 그러나 예수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접하는 청중/독자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에 요한은 예수께서 절기를 준수하시며, 그때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유대 절기를 준수하는 분이시다. 또한 요한은 안식일이라는 규범은 그에게 족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Craig S. Keener는 자신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5-10장이 재판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는데(634-662쪽),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과 안식일 논쟁은 연속되는 이야기이며, 각각 베네스 치유사건은 유대인의 명절,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이라는 유대인들의 규범과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절기 사용과 예수의 정체성이라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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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절기가 바로 '유대인의 명절'(5:1)이다. 요한은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본문에서는 절기의 이름을 적시하고 있다. 절기의 이름은 청중/독자들로 하여금 그 절기의 특성과 규례 등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절기의 이름을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 그 명절의 특징과 의식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라는 수식어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예수께서는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거하셨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4장에서 중요한 구절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1) 

청중/독자들은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절기를 알고 있지만, 그 명칭을 통해서 연상되는 대상이나 의식 등은 애매모호하다. 그에 비해 요한복음은 베데스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안식일 논쟁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의도를 통해 요한은 명절은 아니지만, 그만큼 실생활에서 지켜지고 있던 안식일이라는 규범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법 (참조.  출 20:8-11; 35:1-3)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한 법 (참조. 레 24:1-8)이다. 유대인들의 인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베데스다에서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일을 하셨고,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한 답변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17-47절). 후일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소하게 되는 그 답변 중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 그의 대리인으로서 일하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은 구속사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안식일의 제약을 뛰어넘으신다.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한다.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유대 절기를 성취하신 분으로 예수를 묘사하려고 일부러 특정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하며 안식일 논쟁을 주요 사건으로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익명의 절기'라고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유대인'을 강조하는 특성은 사라지겠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는 절기라는 특성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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