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선생의 덕목: 아량

끄적 2020. 8. 13. 16:03

나에겐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금기시되는 문화가 있다.

웨신 시절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교수는 자기 생각과 달라도 글로 설득할 수 있다면, 논리적 설득력이 있다면, A+를 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하물며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분과에서도 그랬다. 실제로 합신 출신의 보수 성향의 교수가 그런 말을 했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페이퍼를 썼고, 성적은 A+를 받았다.

내가 게리 버지 박사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그로부터 요한복음 수업과 자율 연구(independent study) 지도를 받았다. 성적은 All A. 내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버지 박사의 입장은 학계의 대세를 지지하는 반면 내 견해는 극소수의 견해, 그마저도 나만의 논리로 풀었음에도, 영어 문법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영어 문법과 같은 실수보다는 학자가 갖추어야 할 창의력과 논리 전개 등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입장과 상관없이 설득력 있는 글은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태도에 반했다. 또한 그는 나를 위해 강력한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런 문화가 처음부터 당연하게 여겨졌던 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본값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부 시절 정말 꼴 같지 않은 교수들을 만나 목사이자 교수라는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웨신 시절에도 갑툭튀 같은 사람들을 만나 배운 것 없이 초라한 성적을 받은 적이 있으며, 칼빈에서도 자만감 가득한 교수를 만나 내상을 심하게 입은 적이 있다.

그래서 뒤늦게야 웨신 시절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주던 교수님들이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버지 교수와 같은 분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고, 그 결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에서 내 최선을 다했고 내 역량을 끌어올리는 기회가 되었다. 내가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분들의 기대와 지지가 큰 힘으로 작용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칼빈 시절에 만난 대부분의 한인 유학생들은 교단 신학과 분위기, 교수 성향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몸을 사린다. 친해지니 하는 말이지만, 주위에서 나에게 무슨 질문이 나오면, 나를 도와준다고 "목사님 그건 사상 검증이에요"라고 웃으면서 말해주곤 했다. 씁쓸하지만, 고의는 아닐 테지만, 습관적으로 이런 태도에 젖어 있는 분들이 있다. 나야 교단에 몸 사릴 이유가 없는 목사라 내 하고 싶은 말하지만, 그리고 스스로 칼빈주의를 택했기 때문에 떳떳하지만, 내가 볼 때 정말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 신경 쓰는 그들이 안타깝게 보였다. 하물며 박사 과정 진학에 특정 학교를 지원하느냐 마냐를 두고 선례가 없다는 둥 정말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대답이 돌아왔다. 나중에야 그들로부터 "생각해보면 학교에 따라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는 거 같아요"라는 답을 듣긴 했지만.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칼빈 시절에 만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내 성격을 잘 알고, 나 역시 그들을 잘 안다. 그래서 이런 글도 망설임 없이 쓴다. 그들에게 상처 주려는 의도가 없다는 걸 그들이 알 거라고 믿기에.

다만 그 정도로 몸 사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은 넓고 익히고 배워야 할 지식은 많다. 유학을 나온 마당에 지적 견문을 좀 넓혀야 하지 않겠나. 무엇보다 우리 같은 한인 유학생은 대체로 보수적이라 진보적이라고 해봐야 여전히 보수 진영에서 머물 확률이 매우 높다.

이제 글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나로서는 공식적인 학업은 박사 과정이 마지막이다. 박사 학위를 하나 더 해야겠다거나 갑자기 타 분과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한 말이다.

앞으로 지도 교수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조심스럽지만, 나는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현 지도 교수로 내정된 데이빗 모빗(David Moffitt) 박사의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그의 따스함과 친절함을 느낀다. 나보다 앞서 그의 지도를 받은 A 박사는 나에게 지도 교수로서 최고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현실적으로 걱정이 앞서지만 기대되는 마음도 크다. 무엇보다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모험을 해야 하는 연구를 선뜻 수용해준 그의 지지에 감사한 마음이다.

정말 한 마디만 하고 마무리하겠다. 

좀 더 과감히 도전해도 괜찮아.

참고로 칼빈 시절 합동과 고신이 비슷한 비율이었다. 각 교단 규모를 고려하면 고신 출신이 많은 거다. 최근 이례적으로 통합 출신 목사님들도 있었다. 웨신 시절 교수진은 대부분 합동 출신이었다. 합신과 고신도 좀 있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 학교에 관해 잘 모르겠지만, 웨신은 개방적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보수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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