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관한 글을 쓸 만큼 똑똑한 사람은 아니라서 이런 부류의 글을 쓸 때면 '내가 이런 글을 써도 되나?' 싶은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박사 과정 합격 이후 더는 누구도 깔만한 학벌은 아니게 되었지만, 실제로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말 하면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면 나 같은 사람이 뭐가 돼요?"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생각나지만, 나 스스로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나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전제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칼빈 재학 시절, St Andrews 합격 이후, 유튜브 공개 이후 점차 페친 신청이 증가하고 있다. 신청자는 현장 목회를 하는 목사이거나 유학 가고 싶은/현재 유학 중인 목사, 강도사, 전도사이다. 현장 목회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내가 더는 현장 사역자가 아닌 데다가 현장에 유익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아 딱히 할 말이 없다. 다만 나로부터 뭔가 정보를 얻고 싶어 하는 경우라면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글이 거칠 수 있으니 양해해 주시라.
애초에 남에게 조언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고, 평소에 쓰는 글은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일 뿐 누구를 겨냥해서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나는 지금까지 조언을 구하는 사람을 하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나를 직접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언제든 커피를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내 일에 집중하기 위해 평소에 거리를 둘 뿐이다.
그러나 한동안 답답한 마음이 이어지고 있어서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최소한 나는 박사 과정 입학까지는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에 기반해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생, 목회학 석사 (MDiv), 신학 석사 (ThM), 철학 박사(PhD), 학자로서 각 단계마다 공부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내 경우 웨신이라는 독특한 환경에 처한 신학교에서 MDiv와 ThM을 해서, 타 교단 신학교 출신과 다른 경험을 축적하고 있지만, 보통 현실에서는 대학생이나 목회학 석사나 학교에서 교수들이 가르치는대로 열심히 암기하면 중간 이상은 간다. 교단 신학이나 교수의 성향에 어긋남이 없고,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으면 그냥 A 학점이다.
ThM 과정에 들어가면 갑자기 달라지는 수업 방식으로 인해 수많은 학생이 어려움을 겪는다. 유학을 하려면 석사 과정부터 시작하는 게 일종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나라를 선택하던 석사 과정에서 요구하는 공부는 기존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고질적인 한국식 교육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이 시작되는 단계이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ThM 과정에서도 자기 생각을 그대로 흡수하길 바라는 교수들이 간혹 있다. 나는 그들이 신학교와 학계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박사 과정에서는 남다른 주장으로 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학자를 양성하는 훈련을 한다. 여기서 미국식 교육과 유럽식 교육 사이에 차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미국식은 학생이 교수로부터 훈련을 탄탄하게 받아서 그 위로 올라서야 한다는 입장이고, 유럽식은 학생의 역량이 검증되었다 싶으면 그때부터 도제 방식으로 철저하게 특정 수준으로 올라서도록 압박하는 형식이다. 어떤 방식이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어떤 방식이 덜 효과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저마다 교육 철학이 다르고 저마다 장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페친을 신청하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은 유학을 고려하고 있거나 실제 유학 중인 사람들이다. 이 말은 즉 유학을 통해 박사 학위 취득을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박사 학위가 목표면 공부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특히, 국내 박사가 아니라 유학을 고려한다면 더 치열하게 달라져야 한다. 혹시 영국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면, 더욱더 치열하게 달라져야 한다.
박사는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에 통달하고 독창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고 검증된 자에게 부여되는 학위이다. 선행 연구에 통달하는 과정이 힘겹고 벅차지만, 독창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기란 더 어렵다. 수많은 인재들이 박사 과정에서 좌초되는 이유는, 특히나 한국식 교육에 익숙한 유학생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주된 이유는, 남들과 다른 주장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석사 과정은 박사 진학을 위한 관문이기 때문에, 석사 과정부터 교수들이 창의력(creative)을 강조한다. 실제로는 틀(frame)만 잘 갖추어도 좋은 점수를 받지만, 교수들은 석사 과정에서 훈련을 시작하고 박사 과정에서 발현되어야 할 궁극적인 요소는 창의력이라고 전제한다.
페북 타임라인을 보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죄다 똑같은 책 보는 거 같다. 어떤 책을 두고 이 책은 필독서라면서 열심히 추천하는데, 내가 볼 때는 전혀 공감이 안 된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는데, 필독서(Must Read Book) 같은 건 없다. 그냥 좋다고 생각되는 책 열심히 읽어서 소화하고 다른 책 또 열심히 읽으면 된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떤 책이 정말 필요한 책인지 알게 된다. 좀 더 나은 책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책 역시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다른 책으로 보완해야 한다. 무엇보다 개인 연구 주제가 정해지고 나면 남의 관심과 동의에 상관없이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책이 필독서가 되는 거다.
요점은 남들 보는 책 열심히 본다고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책은 있다. 그걸 필독서라고 하면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필독서는 교수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근데 학생 스스로 특정 주장을 개진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잘 안 알려진 책을 보면서 필요한 부분 참고하고 독자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 이 부분이 핵심이다. 비평적 사고와 자립성.
어차피 학계에서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하나도 없다. 박사 학위의 요구 조건이 독창성인데, 똑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을 배출할 이유가 없다.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뭐라도 남다른 주장을 해야 하는 운명은 짊어진 사람들이 바로 학자이다. 같은 신대원에서 교단 성향에 맞는 교수들로부터 배워서 비슷하게 사고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런 부류끼리 어울려서 별 차이를 못 느끼는 환경에서 박사를 공부하겠다고 하면 고생길이 훤히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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