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현대 성서학에서 '삶의 자리'(독일어: Sitz im Leben)에 대한 연구는 해석의 기초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충실하다고 해서 뒤이은 해석이 정당하지는 않다. 한편 작품 저작 시기와 동시대 인물이라고 해서, 그가 '삶의 자리'에 인식을 공유하고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해석자는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올바른 해석'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현대인의 역사의식과 해석 능력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현 국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과거에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어른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순간들이 많다. 그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그 시대에 대한 올바른 비평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진정한 어른은 단순히 나이와 경험 등이 많아서 어른이 아니라 시대를 읽고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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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친화적 글쓰기

성찰 2024. 10. 11. 06:30

CBA Emerging Scholars Conference 2024 Session 3은 출판사 관계자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시간이었다. Corrine L. Carvalho 박사는 University of St. Thomas 교수이자 CBQ General Editor이기도 하다. 그녀의 조언을 토대로 내 생각을 정리해 본다.

학위 과정을 기준으로 석사 과정까지는 독자(정확히는 평가자)가 과목 담당 교수로 한정되어 있다. 박사 과정에서는 일차적으로는 지도 교수진, 이차적으로는 논문 심사위원들까지 포함된다. 최소 1명에서 최대 5명 내외로 현직 학계에 몸담은 교수진을 대상으로 글쓰기 훈련을 받다가, 학위 논문 출판을 위해 출판사 담당자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자신의 독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을까 싶다.

출판사 담당자들도 박사 학위 소지자로 학계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이지만, 그들의 역할은 학계 친화적인 원고를 독자 친화적으로 변모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만약 일반 대중을 독자층으로 고려한다면, 그 수준에 부합한 수준으로 대화할 수 있는 독자 친화적인 글쓰기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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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즐겨 보는 것 중 하나가 종합격투기(MMA)이다. 판정 이후 선수 인터뷰에 본인 경기력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실력이 경기에서 발휘가 잘 안되었고, 훈련한 기술들이 경기에서 잘 안 나왔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예를 종합격투기로 제시했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는 자주 접할 수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경기에서 발휘된 실력이 그의 현주소이다. 그들이 말하는 훈련 때 발휘되는 실력은 실전에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일 뿐이다. 연습과 실전이 다르다고 하지만, 모든 평가는 실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연습은 실전을 대비한 훈련일 뿐 그 과정에서 발휘되는 능력을 실전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스파링 고트가 탑 랭커가 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스파링 잘 한다고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다면 그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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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인가 올해 초부터인가 CFP(Call For Papers) 공고를 보고 학회 발표 제안서를 열심히 작성해서 지원했다.

채택된 제안서는 총 14개이고, 현재까지 12회 발표를 완료했다. 다음 주 발표로 1회를 채울 예정이고, 남은 1회는 취소할 예정이다. 학회 일정과 비용 등 내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 9월부터는 논문 작성에 집중할 예정이고, 내년 학회 발표를 위한 제안서는 선별적으로 제출할 예정이다.

미채택된 제안서는 총 2개이다. 1개는 제안서 수신 확인 이메일부터 못 받았고, 다른 1개는 발표 제안서는 반려되었으나 respondent 역할을 제안받았다.

최대 10개월 정도 진행하고, 실제 6개월 동안 발표를 진행하면서,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성서학 학회는 웬만큼 다 참여하지 않았나 싶다.

내 기억에 딱 두 곳은 걸렀다. The Annual Conference of the Association for Jewish Studies는 유대학 전공자에게는 좋은 기회였겠으나, 신약학 전공자 입장에서 멤버십과 학회 비용이 부담스러워서 걸렀다. SBL Annual Meeting는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모임이라 딱히 기대가 없어서, 박사 학위 취득 후 강사 자리를 얻고나서 참여할 예정이다.

반려된 두 사례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
A 학회는 제안서 제출 이메일에 원격 발표(a virtual presentation)를 희망한다고 적시했는데, 단체 규모가 큰 곳에서 주관하는 학회라서 제안서 수준과 현장 참여를 고려해 발표자를 선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학회 일정을 보니 원격 발표는 매우 적었다. 사실 이 학회 담당자로부터 답장이 없어서 다른 학회에 지원했는데 그건 또 수락되어 발표까지 마쳤다. 그 학회가 특정 주제로 접근하고 발표자가 대부분 현역 교수 요원들이다. 그러니 제안서 수준이 결정적인 미채택 요인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B 학회는 신진 학자를 위한 학회로 박사 과정 학생과 박사 학위 소지자를 대상으로 한다. 작년 발표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대부분 박사 학위 소지자로 현역에서 강사나 조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고 볼 수 있고, 박사와 박사 과정 학생 사이의 체급 차이를 넘어서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니면 주제별 세션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제안서의 적절한 위치를 못 찾았을 가능성도 있다. 분류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가능성도 있겠다.

내가 작성한 제안서 중에서 미채택으로 활용하지 못한 건 1건인데, 내년 학회에 재활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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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 중인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과 관련하여 구약 성경을 분석하는 작업이 꽤 많다. 구약 성경을 읽고 분석할 때 후대 편집의 영향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적지 않지만, 내 관심사와 방법론으로는 현 구약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인 역사비평 혹은 편집비평은 다루지 않는다.

다만 예언서를 읽을 때 특정 신학의 형성과 발전을 추론하도록 자극하는 지점이 있다. 가령 예언서에 나타난 묵시적 성격이라던가, 다윗 메시아사상의 약화라든가,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시점에 발화되어 발전될 만한 사상이라던가 기존 이념의 발전 혹은 약화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변화는 분명 예언자의 활동 시대를 반영하거나 후대 편집에 의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근래에는 본문 형성 시기마다 신학을 정리하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어제 도서관에서 요한복음 주석 중 이런 시도를 한 자료를 보았음.

성경 연구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최종 형태의 신학과 형성 단계별 신학을 분석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신학 형성사를 추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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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신학

성찰 2024. 8. 7. 06:21

성경의 진의 혹은 본문의 의도에 천착하는 작업을 최우선 순위로 삼는 신학도로서 그 외적인 접근을 부수적으로 간주하는 성향이 짙다. 어쩌면 성서학 전공자 중에서도 내가 그 성향이 강할지 모른다.

트라우마는 내가 외적이라고 여기는 최신 경향 중 하나이다. 이번 Colloquium Biblicum Lovaniense 2024에서 언어별 주제 강연이 이틀에 나누어 진행되었고, 나는 "Métaphores et langage figuratif et la cohérence du livre d’Isaïe"("이사야서의 은유와 비유적 언어, 일관성")를 듣고 싶었으나, 해당 주제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일찍이 포기하고, 영어로 진행되는 "The Book of Isaiah and Trauma/Resilience Studies"에 들어가야 했다.

마빈 스위니 (Marvin Sweeney) 박사와 콘라드 슈미트(Konrad Schmid) 박사도 이 세션에 참석했는데, 현 선지서 학계에서 대세인가 싶었다.

강연을 들으면서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성경 본문에 트라우마와 관련된 본문을 얼마든지, 특히 선지서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스위니 박사가 말하듯이 성경 저자 혹은 편집자의 관심은 신적 심판의 심각성에 있지 청중의 트라우마에 있지 않다. 나도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반면 목회 현장에서 트라우마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강연 후 점심을 스위니 부부와 같은 테이블에서 가졌다. 내 앞에 신경과학(神經科學, neuroscience 또는 뇌신경과학)도 동석했음. 대화 중 스위니 박사가 자신이 트라우마 강연에 참석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그의 수많은 전우가 죽었으나, 자신은 기적적으로 생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전쟁 후유증을 겪어야했다고 말해주었다. 스위니 박사의 가정사를 통해 자신이 트라우마에 관심을 두는 이유와 그럼에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는 이유는 진실로 내 마음에 남았다.

앞으로 신학을 최우선 순위로 삼되, 교회를 위한 실질적인 학문에도 관심을 두고자 한다. 현실은 나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무지렁이 같은 존재지만, 서로 연약한 존재끼리 현실을 이겨내는 곳이 교회 공동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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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죄와 예수의 죽음을 예수의 속죄와 제사장직으로 가장 잘 진술한 성경 본문으로는 히브리서가 꼽힌다. 복음서와 바울서신에 비하면 덜 주목을 받지만, 예수의 속죄와 제사장직을 히브리서보다 더 설명하는 본문은 없을지 모른다.

문제는 각 성경 본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히브리서적 관점으로 예수의 속죄를 설명하고자 할 때 빚어진다. 가령 내 박사 학위 논문의 연구 본문은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이고, 연구 주제는 선한 목자의 죽음이다.

선행 연구를 분석하다 보면 선한 목자의 죽음을 속죄로 설명하고, 간혹 예수의 제사장직으로 풀이한다. 내 관점에 의하면, 이러한 해석은 요한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

더 빈번한 사례는 세례 요한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는 선포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다. 해석자 대부분이 이 구절을 속죄로 해석하며, 일부는 예수의 제사장직을 언급한다. 내 관점에 의하면, 이러한 해석은 요한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기존 해석이 요한복음의 의도가 아닌 이유와 진정한 요한의 의도를 밝혀야 할 의무가 내게 지워진다는 사실이다.

내 지도 교수는 히브리서 전공자이고, 속죄 전문가이다. 내가 박사 과정을 시작한 이후 나와 지도 교수 사이의 이견을 좁히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학위 논문을 적당히 전개할 수 없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내가 학위 논문 원고로 지도 교수를 설득하여 동의를 얻는다면, 나로서는 관련 분야 최고 전문가로부터 요한복음의 독특성을 도출한 공로를 인정받게 된다. 반대로 내가 지도 교수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다면, 나는 학자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내 역량의 문제이지만, 지도 교수는 나에게 양날의 검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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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개론서는 선행 연구를 학계 추세를 반영하여 대세의 입장을 견지하되, 중요한 소수의 주장을 소개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을 잡아 중도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개론서는 말 그대로 특정 주제를 전반적으로 소개해야 하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저자 고유의 관점이 이질감 없이 쏟아내는 방향을 택할 수 있다는 견해에 무게가 조금씩 옮겨지고 있다. 만약 내가 요한복음 개론서를 집필한다면, 내가 견지했던 개론서의 방향이 전자가 아닌 후자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학위 논문을 위해 선행 연구를 섭렵하고 약술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난관이 있고, 나만의 견해가 농축되어 가면서 점점 선행 연구와 차별화되고 있어서, 두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는 더 어려운 과제가 되어 가고 있다. 아마도 내 관점에 일관성을 더하는 작업이 더 쉬워 보인다.

이전에는 선행 연구를 다루지 않고, 저자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개론서를 못마땅히 여겼다. 하지만 막상 내 입장에서 고려해 보니 그 저자와 출판사 관계자들이 많이 고민하지 않았나 싶다.

당장 박사 학위 논문에 매여 있는 입장이지만, 혹여나 개론서를 써야 할 기회가 온다면 꽤 긴 집필 기간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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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신학화와 신학화

성찰 2024. 7. 11. 21:15

개인적으로 성경 본문 분석부터 시작해서 성경 신학을 정립하려는 이상을 갖고 있다. 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지만, 평균치에 대입해서 추정해보면, 내가 가장 먼저 집중할 영역은 요한복음의 신학이다. 요한복음에서 현 박사 학위 논문에서 다루는 목자 은유와 아들됨(divine sonship)을 기반으로 기독론을 더 세밀하게 다룰 예정이고, 유대 절기와 요한의 절기 사용을 비교한 연구를 후속작으로 다룰 예정이다. 요한복음 이외에는 마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의 기독론을 다룰 예정이다. 기독론의 출발점은 목자 은유이다. 그럴 일은 없어 보이지만, 혹여나 바울을 다뤄야 한다면, 시도할 만한 주제를 갖고 있다. 내 연구 여정은 임용과 학교 사정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본문 해석에서 여러 장벽에 부딪히지만, 선행 연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성경 연구자들의 신학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성경 연구자들조차 본문이 아닌 신학을 투영해 본문을 해석하는 일들이 곧잘 발생한다.

현재 집중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대속죄일 혹은 예수의 제사장직에 대한 글을 작성하고 있는데, 관련 글에서 예수의 제사장직이라는 신학을 기반으로 요한복음의 특정 본문을 해석한다. 한편으로는, 요한복음에서 직접적인 단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시인한다.

내 연구가 힘든 이유는 신학을 배제하고 본문의 의미를 도출하려는 시도 떄문이다. 만약 관행대로 신학을 투영해 내 연구를 진행한다면 훨씬 쉽게 결과물을 생성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성경신학자가 되기로 각오하고,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성경 본문 그 자체가 갖는 진의를 드러내는 것이 내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최대한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내 연구가 기반을 다지기 전까지는 상당히 고전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이미 몇 년 동안 경험하고 있는 일이지만,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을 기초로 한 성경신학은 이상적인 말이지만, 현실은 험난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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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많이 쓰는 편이지만, 페이스북이나 블로그를 많이 하지만, 평소 말은 거의 없다. 무관심하거나 화난 거 아니라 딱히 할 말이 없다. 나는 말하는 것보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더 좋다.

대화는 직설적으로 푸는 편이다. 소통 과정에서 내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느끼는 답답함을 직설적인 표현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또한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비슷한 원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드문 일이지만 가끔 내 표현 방식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긴다. 주로 자매들이 그렇다. 내가 수위를 낮춘다고 해도 자매들에게는 예리하게 살을 에리는 언어로 들리나 보다. 특히 남자는 해결책을 여자는 공감을 원하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인해, 내 말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달된다. 다행히 오해는 풀린다.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말의 권위에 대한 조언을 듣곤 했다. 그리고 유학생으로 지내면서 내 말의 권위에 대한 조언을 몇 번 더 들었다. 혹자들은 나에게 인플루엔서라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나는 그런 자각이 없다.

자금까지는 공적인 자리에서 말로 실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박사 학위를 받고 학교에서 강사로 일을 시작할 경우, 또한 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사역할 경우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내 인식과 무관하게 나는 선생이자 목사로 존재한다. 지금과는 말의 무게가 다르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조언을 구하게 될 거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겠지. 또한 내 말의 권위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거다.

왜 내가 만났던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이 말을 그토록 아꼈는지 점점 더 이해된다. 반대로 나에게 진솔하게 자기 생각을 나눠준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은 더해져 간다.

앞으로 내가 조언할 기회가 있어도 지금처럼 직설적인 언어는 쓰지 않으려고 한다. 피조언자는 내 말로 상처받을 일이 없어지겠지만, 내 걱정은 내 직설적인 언어보다 더 살벌한 현실을 인지할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다.

학위 취득 이후에는 소셜미디어에 내 사적인 일들을 남길 일은 적어질 거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바이다. 내 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내 현황을 파악하는 지인들이 있다. 그걸로 족하다. 박사 학위 취득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걸로 내 역할은 충분하다. 내 유학 생활을 통해 잘 살아 있는 내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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