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학술 단체마다 제안서 확보가 성공적인 학회의 관건이다. 단체의 성격에 따라 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는 자격이 다르다. Graduate는 석사 과정 재학 이상, Postgraduate는 박사 과정 재학 이상, Junior Researcher는 ABD (All But Dissertation) 이상을 자격 조건으로 둔다. 박사 학위 소지자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단체에서 박사 과정 재학생의 제안서를 받기도 한다. 간혹 지도 교수의 추천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자격 조건을 두는 이유는 당연히 단체가 추구하는 질적 수준을 관리하기 위함이다.

제안서는 제안자의 학술 역량이 담기기 마련이다. 제안서에는 선행 연구에 대한 이해와 문제 제기, 그리고 제안자의 주장 등이 포함된다. 평가자는 단 몇백 글자 내외로 제안자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제안서 마감과 학회 기간 사이에는 몇 달의 차이가 있다. 제안서 평가와 최종 발탁, 제안자의 최종 참석 여부 확인, 학회 일정 조정 등 조율해야 할 작업이 적지 않아서 4개월 정도 간격을 두는 단체가 많아 보임.

제안자는 제안서를 바탕으로 최종 원고를 준비해야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 제안서를 제출하고 원고를 다듬을 때마다 새로운 발상이 계속 떠올라서 발표일에는 적잖은 변화가 반영된다.

간혹 제안서와 발표 원고 사이의 차이를 묻는 참석자가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그 차이가 발생한 이유와 현재 원고가 더 나은 대안인 이유를 설명하면 된다. 제안서와 발표 원고를 일치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제안서를 바탕으로 최선의 원고를 준비하려는 태도가 발표자와 참석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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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과 경쟁력

성찰 2024. 2. 27. 08:30

꿈을 향해 전진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꿈을 성취하는 자들은 제한적이다. 프로 스포츠처럼 연봉과 엔트리 등 제한된 자원으로 운영되는 경쟁 체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전태풍과 하승진을 보면 타고난 재능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 프로 선수로 성공적인 이력을 쌓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태도와 꿈을 향해 노력하고 아직 성장 가능성이 있지만 드래프트에서 미선발 이력이 있는 턴오버 팀원을 보면 '차이'라는 것이 보인다.

한국 교육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현재와 같은 체계를 갖춘 이유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와 관련이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박사 과정 학생들을 지켜봐서 알지만, 그래도 두 국가의 체계는 각자가 설정한 기본은 만들어 준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영국은 그런 게 없다.

내 직간접적인 경험에 의하면, 자율성과 경쟁력은 지대한 관계가 있다.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최상급 경쟁력을 갖춘 이들은 자율성을 최대치로 활용하지만, 그 반대로 극한으로 자신을 틀 안에 가둔다. 내 생각에 영국 박사 과정이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박사 과정 학생에게 요구하는 공식적인 프로그램은 얼마 없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자연 도태되는 환경이다. 고로 본인이 박사 학위를 전제로 미래를 꿈꾸고 있다면, 학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율성을 최대로 활용해서 최대 성과를 내야 한다. 

틈틈이 턴오버 팀원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하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지켜볼까 한다.

경기 후 턴오버 팀원을 향한 하승진의 조언
https://youtu.be/g3DUSr0OP7A?si=VuRyBHSD5Gtb4k4Z&t=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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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시간에 계획된 발표를 지체 없이 진행하려면, 시간제한은 필수 조건이다. 여러 학회의 발표 조건을 살펴보니 보통 발표 시간은 20~25분이고 질의응답은 15~20분이다. 발표자에게 할당된 시간은 최소 30분, 최대 40분이다. 예외적으로 초청 강연자는 더 많은 시간을 할당받는다.

발표 20분을 채우려면 영문 2,000자 정도를 써야 한다. 혹여나 말이 빨라져 시간이 남을 수 있으니 2,200자 정도를 쓰면 안전하다. 20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이다. 설교에 비유하면 15분은 설교자가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촉박한 시간이고, 30분이 넘어가면 청중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원 포인트 설교로 잘 준비된 설교는 20분이 적당하듯이, 발표가 그와 비슷하다.

발표는 개인의 주장 한 가지를 관련된 근거를 잘 정리해서 전달하려는 목표로 진행하면 적당해 보인다. 발표 자체가 선행연구와 차별성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있으므로, 선행연구를 자세히 나열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생각을 세세하게 전달하려고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다. 발표는 비교적 잘 정리된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자리이며, 질의응답을 통해 발표 자료의 단점을 보완하고, 청중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정도가 딱 학회의 목표에 부합한다. 더 자세한 개진은 소논문이나 책 등을 통해 펼치면 된다.

발표 준비를 위해서는 발표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서 자신의 주장과 근거를 간결하지만, 핵심을 짚어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매번 초반에는 채울 내용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뭘 줄일지 고민하는데,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간결한 글쓰기 훈련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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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신학은 곧 나의 신앙 여정과 같다. 성경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자문자답하는 과정에서, 현재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고대 근동,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 신약성경 등을 읽다가 그리스-로마 문헌을 탐구하고 있다. 오랜 시간 성경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그리스-로마 문헌은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내 연구 주제인 탓이겠지만,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 신약 성경을 읽으면 유대인들이 갈구하는 것은 결국 다윗과 같은 왕이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연 다윗처럼, 현시대에 이방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이루고 독자적인 국가를 재건할 새로운 다윗을 갈망한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의 이상은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를 향한 기대마저 더해진다.

그리스-로마 문헌에 관해서는 불과 몇 작품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것도 목자-양 유비와 관련해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고는 대단하다. 허구 인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신화와 역사를 소설로 풀어낸 호메로스의 상상력과 문장력은 현대 문장가에 뒤지지 않는다. 또한 플라톤의 정치 철학은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범하다 못해 그와 견줄만한 인물을 딱히 찾을 수 없겠다 싶다.

극단적인 단순화일 수 있으나, 유대인들의 세계와 그리스-로마 세계에 대한 바울의 지적은 옳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들의 사고는 대체로 다윗으로 상징되는 메시아의 등장에 매몰되어 있으며, 헬라인들은 인간의 지성을 강조하여 신에 의존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이 시대에 예수의 십자가는 당혹스럽다.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연구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그 어떤 문헌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 혹자는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을 말하고, 혹자는 그리스-로마 세계의 고상한 죽음에 관해 말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예수의 죽음과 유사성이 일부 있을 뿐, 기원이라고 단정할 만큼 유사하지는 않다. 나로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유일하다는 결론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연구하다 보면, 결국 예수의 가르침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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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학교에서는 박사 과정 입학 이후 학위 논문과 학회 발표를 동시에 진행하도록 권면하는 경우가 잦다. 첫 번째 이유는 생산성이지 않을까 싶다. 긍정적인 효과로는 학위 논문을 진행하면서 향후 구직 과정에 도움이 될 학회 발표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효과로는 집중력이 분산되어 생산성이 저하될 수 있다. 흔한 기회는 아니지만 학위 발표 자료가 학술지 투고까지 이어지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학회 발표를 통해 발표 자료를 발전시킬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학회 발표에서 질의응답을 거치면, 발표자가 차후에 자신의 연구 방향을 재검토할 수 있게 된다. 청취자 입장에서는 질이 낮은 발표를 들을 확률이 낮지 않다.

세 번째 이유는 발표 훈련을 위해서이다. 박사 과정 학생은 연구자로서 글쓰기 훈련을 받는 동시에 강연자로서 발표 능력을 향상해야 한다. 학회 발표는 이런 훈련을 위한 무대가 된다.

네 번째 이유는 인맥이다. 학회장에서 참석자들끼리 대화할 시간이 중간중간에 있는데, 이 시간을 잘 활용하면 학계 인맥을 구축할 수 있다. 인맥을 잘 활용하여 학자들 간에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사례가 간간이 있다.

다섯 번째 이유는 구직이다. 첫 번째 이유인 생산성에서 다루었는데, 학회에서 교수들이나 출판사 관계자들이 장래 동료/협업자로 눈여겨보기도 한다. 박사 학위 취득의 실질적인 이유는 결국 학계 진입이므로 궁극적인 사유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네 번째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인맥과 구직은 서로 무시할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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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왕 비유의 역사에서는 대표적인 그리스-로마 세계의 저자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이다. 최근 플라톤의 저작을 보고 있으며, 내 관심사가 학계에서는 서양 정치철학에 포함된다. 연구를 위해 몇 가지 자료를 읽었을 뿐 생소한 분야이지만, 내게 익숙한 신학계와 비슷한 현상이 발견된다.

첫 번째는, 대체로 유명한 저작을 위주로 읽고 사고한다.
플라톤을 예시로 하면, 내가 현재 읽고 있는 본문은 『정치가』인데, 주요 논리를 『국가론』에서 끌고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는 두 본문 모두 다뤄야 하지만, 일차 분석은 개별적으로 진행하고 난 후, 플라톤의 사상을 다룰 때 통합할 예정이다.

두 번째는, 주요 논쟁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
내 관심사가 목자-왕 비유이다 보니, 플라톤의 『정치가』에서는 'divine shepherd'를 위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부분이 크로노스 신화와 정치가의 역할이다. 대세는 크로노스 신화가 목자 모형의 폐기를 의도하고 있으며, 정치가는 목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소수가 이에 반박하고 있다. 나로서는 현 주요 논쟁과 대세가 비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고 느끼지만, 특히 대세의 논리, 흥미롭게도 학계에서는 큰 이견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서양 정치 철학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이지만, 나만의 논리로 소수 견해를 주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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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각성

성찰 2023. 11. 29. 13:57

근래 내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꼽는 것 중 하나가 '무지'이다. 요한복음 1장부터 2장의 성전 청결 사건 이전까지 등장한 인물들은, 세례 요한 (1:29~34), 안드레와 시몬 (1:35~42), 빌립과 나다나엘 (1:43~51),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제자 (2:1~12), 전부 예수의 정체를 제대로 몰랐다. 단락별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간략하게 세례 요한을 예시로 들자면, 그는 예수께 세례를 베푸는 현장에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1:31, 33)라고 고백한다. 

요한복음에서 이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이유는 그들의 무지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그들의 전형적인 메시아사상을 넘어서고 있으며, 진정한 깨달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가르치기 위함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신앙을 고백하므로, 요한복음의 시대적 인물이 겪은 오해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고 있다고 예단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요한복음의 동시대 인물들의 무지와 각성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현시대의 사상과 혼합되어 요한복음의 진의에서 벗어난 복음을 증거하는 사례를 보게 된다. 내가 요한복음을 주요 본문으로 삼아서 요한복음을 예로 들었지만, 실상은 성경 전체로 확대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요점은 성경 기록과 편집 당시의 시대를 이해하고, 현시대를 통달해야 성경이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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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20년 가까이 수능이라는 단일 푯대를 위해 달리게 만들고, 그 이후에는 취업과 결혼 등 생계를 위해 시간을 소비하는 구조이다. 한국은 비판적 사고를 위한 토대를 형성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정치는 역사의식과 사회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체로 자신 혹은 부모의 출생지, 학벌, 지연 등과 엮여 결정을 내리는 시민들이 많다. 더 심각하게는 개인의 감정이나 성향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은 대체로 성장 과정에서 특정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종교는 신앙이라는 테제로 덮고 믿어야 하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이단이나 사이비일수록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한다. 종교는 이성이라는 영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역이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 종교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와 종교라는 두 영역에서 맹신이라는 단어가 가정과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정치와 종교는 헛된 이데올로기의 허수아비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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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에게, 이데올로기 비평이란 단어는 껄끄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사람을 통해 기록되고 편집되었다면, 그 매개체의 개입 역시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그 누구도 이 전제 자체를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위정자 혹은 그의 조력자로서 집단을 통치하는 입장이라면 이데올로기 강화는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가령 다윗은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자 예배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시편을 통해 자기 경험을 이스라엘 국가의 이념으로 전파했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해석자로서 성경 저자 혹은 편집자의 이데올로기가 옳다/그르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해석자의 편견을 배제하고 실재 그대로 드러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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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들이 자신을 역사학자로 정의하는 경향과 달리, 나는 스스로를 신학자로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신학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관점과 해석이 특정 신학을 반영하거나 근접할 수 있으나, 본문 자체의 의미를 도출하는 작업에 최우선 순위를 둔다.

내가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을 위해 목자-양 유비를 택한 이유는 관련 용례의 최상위 집합으로 하위 용례들을 선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 관점에 매이지 않고 관련 용례를 분석하려는 의도 역시 갖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특정 사례로 접근할 경우 본문의 의미를 넘어 연구자의 해석을 투영할 가능성이 있다.

앞서 다윗 목자 전승으로 연구한 사례들이 있다. 특정 연구에서는 '다윗' 혹은 '목자'가 따로 등장해도 왕권과 메시아 등 여러 개념과 연동해 버린다.

내 분석에 의하면, 목자 본문이 반드시 다윗 목자 전승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목자가 왕권 사상과 연결될 가능성은 높지만, 그렇다 하여 꼭 메시아사상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 다윗 목자 전승이란 단어나 접근을 채택하지 않았다.

솔직히 내 접근은 매우 광범위한 분석과 작업을 요구한다. 내 박사 과정이 늘어나는 이유라서 솔직히 달갑지 않지만, 훗날 후회하지 않을 결과물을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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