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마틴이 진술한 대로, "결국 요한복음 9장을 통일성 있는 드라마로 만들어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사람은 바로 요한 기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성은 요한복음 10장의 중요한 담론을 효과적으로 읽게 만든다"(J. 루이스 마틴, 요한복음의 역사와 신학, 83쪽). 9장과 10장의 관계를 다루기에 앞서,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에서 유대교 내 유대 기독교인의 존재를 다룰 필요가 있다.

 

출교에 대한 위협은 개종자의 흐름을 틀림없이 제한했을 것이다. 맹인의 부모는 비록 아들의 유아적인 신앙에 매력을 느꼈을지라도, 회당 내에 안전하게 머무를 것을 선택한다. 회당의 장로들도 예수를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출교당하기에, 그들은 사회적으로 분리된 벽의 오래된 쪽, 곧 회당에 머무른다. [출처] 앞의 책, 139.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할 때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독립적인 종교이고, 유대 기독교인들은 애초에 유대교에 존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유대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성경 본문과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사이 70년에 걸쳐, 믿음의 방식 혹은 기독교인이 되는 방식을 말하는 선택지, 특히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선택지는 취사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제거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를 믿는 것과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출처] 다니엘 보야린, 유대배경으로 읽는 복음서, 47.

 

기독교의 기원 혹은 유대교와 분리는 바울 서신에서 활발한 주제인데, 요한복음으로 그러한 연구를 시도해 본다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