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의 유래와 의미
Zakcai/oj는 히브리어 זַכַּי (Zakkai):에서 유래되었다. 이 사람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히브리어로는 의로운 자(Righteous One)라는 의미이다.
2. 현재형 용법에 따른 해석문제
삭개오는 통념대로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겨온 자인가? 아니면 편견에 시달린 의인인가? 이렇듯 서로 엇갈리는 평가는 동사 di,dwmi(주다)와 avpodi,dwmi(돌려주다)가 “습관적 현재(customary present)” 용법인지, 아니면 “미래적 현재(futuristic present)” 용법으로 쓰였는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용법에 따른 번역
1) 습관적 현재: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으며,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하였다면 네 배로 갚아주고 있습니다.”
2) 미래적 현재: “제 재산의 절반을 주고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습관적 현재일 경우, 9절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삭개오의 회심을 진술한다기 보다는 그의 신앙을 입증으로 해석된다. 반면에, 미래적 현재일 경우에는 예수와의 만남으로 회심하여 결단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3. 대립되는 의견들
1. 습관적 현재로 해석
Alfred A. Plummer, Craig A. Evans, Frederick L. Godet, Joseph A. Fitzmyer 등이 습관적 현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Evans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 Evans
이전 에피소드에서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배척당한 자들의 시력과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예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보았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물리적인 문제가 아닌 직업으로 인한 죄 때문에 배척 당하는 자를 회복하는 또 다른 예를 다루게 된다. 여리고를 지나가기는 동안, 예수께서는 부자이면서 세리장인 삭개오라는 자를 만나신다. 그는 (자신에게는 품위가 떨어지는 행동이지만) 뽕나무에 오를 만큼 예수를 보고자 했다. 놀라게도 예수께서는 군중 중에서 자신을 대접할 사람으로 삭개오를 지목하신다. 이러한 선택에 대한 반응으로 사람들은 불평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죄인의 집에 머물고자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매우 순간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아니면 아마도 저녁 식사 후에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삭개오가 서서 8절에 기록된 대로 말한다: 이제 저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NIV는 삭개오가 마음의 변화를 겪었다는 인상을 준다: 더 이상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며,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번역은 이 에피소드의 전통적인 해석을 확실하게 반영한다 (이러한 해석은 Marshall, pp. 694-99; Ellis, pp.220-21; Tannehill, pp.123-25). 이러한 관점은 삭개오 이야기를 회심 이야기로 본다. 부유한 세리는 그의 방식(물질주의, 부정직, 탐욕)이 잘못되었다고 보고 이제는 뉘우쳤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상당수를 이전에 속인 자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그가 회개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정확하지 않다. NIV에서 동사 give는 here and now로 변경되었는데, 그리스 본문에는 없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삭개오의 진술이 그가 말한 순간 효과가 발생하리라는 인상을 준다. 이제 현재형 진술은 삭개오의 습관으로 이해된다. 관계 없는 단어들이 번역에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동사 will pay back은 전혀 미래가 아니다; 현재형이다. 이 동사의 더욱 문자적인 표현은 “보십시요,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만약 누군가를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줍니다”이다. 문자적인 번역은 삭개오의 진술이 반드시 새로운 행동을 나타낸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삭개오의 진술이 저녁식사 이후에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가리키지 않으며, 예수와 대화 동안 발생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삭개오가 죄를 자백했다는 단서가 없다(18:9-14의 세리의 경우처럼). 8절에 더욱 적절한 해석은 “죄인”인 세리에게 청하시고 그와 식사하려는 예수의 의도에 불평하는 군중(7절)을 향한 삭개오의 진술을 즉각적인 변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삭개오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그의 직업 때문에 죄인이라 불리는 비꼼(sting)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상 그는 다른 세리들이 시민들을 속이고 착취한다지만, 삭개오 자신은 정기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를 하고 있고 (뜻하지 않게) 더 많은 돈을 걷었을 때 마다 (반드시 “토색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항상 네 배로 갚아주고 있다고 변론한다. 이러한 해석이 실제 그리스 본문 대로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다 (참조 Fitzmyer, pp.1220-22).
9절에서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이유는 그의 공정한 행동(3:12-13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세리들을 향한 충고를 떠오르게 한다) 때문으로 이러한 행위는 신실한 마음을 암시하며,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이 입증하듯이,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 (경멸 받는 세리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우리는 추방된 자들과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 때문에 해를 당하는 자들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은 예수를 보게 된다.
1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삭개오 에피소드를 요약하는 것이 아닌 여행 내러티브의 절정에 도달하도록 하고 마무리 짓도록 하는 주제적 진술(thematic statement)로 이해해야 한다. (Fitzmyer [p. 1218]는 눅 19:10이 15장 전체를 반복한다고 지적한다.) 종교적으로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읽어버린 자들을 비난하지 않으시고, 외모(outward appearances)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종교인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회개하도록 부르신다.
2. 미래적 현재로 해석
Darrell L. Bock, Robert H. Stein 등이 미래적 현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Bock과 Stein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 Bock
현재 시제는 삭개오의 현재 행실을 묘사한다(Godet 1875: 2.217; Fitzmyer 1985: 1220, 1225).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삭개오는 선량하고 공정하게 보이므로 죄인으로 취급하길 거부한다. Fitzmyer는 믿음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고 네 배로 되돌려주겠다는 언급 때문에 삭개오가 막 회개했다고 여긴다면, 장래의 토색 행위에 대한 보상을 분명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결과를 가져오는 뜻밖의 장면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Plummer (1896: 435)는 삭개오가 예수께 자신에 대해 자랑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견해는 ὑπαρχόντων (hyparchontōn)을 “자산”의 이례적인 기능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19:8b에 대한 Fitzmyer의 접근은 과거 행위를 되돌아보게 하는 토색 행위를 무시한다(물론 부정과거 ἐσυκοφάντησα, esykophantēsa, 내가 토색했다; 신약에서는 오직 이 구절과 3:14; BAGD 776 §2; BAA 1549 §2; Prov. 14:31; 22:16; 28:3; Nestle 1903). 부정과거를 완료 시제(“만약 제가 누군가의 것을 토색하였다면”)로 이해하고 Fitzmyer의 견해를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동사의 문맥이 더 어색해진다. 완료 동사는 Fitzmyer의 접근을 보다 설득력 있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Danker (1988: 305)는 군중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고 언급했다. 만약 과거에 관용적으로 대했다면, 군중은 그에 대해 수군거리지 않았어야 한다. 그래서, Fitzmyer의 견해는 군중이 틀렸고, 세리의 관행대로 해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예수를 만난 결과로 삭개오의 회개와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동사는 현재 결심의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욱 적당해 보인다(참조. 눅 3:8; Plummer 1896: 435; Arndt 1956: 389; Klostermann 1929: 185; Marshall 1978: 697–98; Creed 1930: 231; Nolland 1993b: 906). 행동이 구체적인 표현에서 믿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행동이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행동은 죄인인 한 여인(7:36–50)의 경우만큼이나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생각나도록 한다. 사실, 19:9-10에서 구원과 잃어 버린 자에 대한 구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사실상 그들이 마음을 바꾸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동사들을 현재의 행위가 아닌 미래의 결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삭개오의 예수와의 만남은 그의 돈을 처리하는 방식을 바꿨다 — 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
문화적 배경은 삭개오의 약속의 한도를 보여준다. 유대사회에서는, 개인 소유의 20 퍼센트를 취하는 게 관례이다. 그 이상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SB 4:546–47; Danker 1988: 306; b. Ketub. 50a; Lachs 1987: 331 n. 6; 18:22의 주해 참조). 토색에 대한 법적 변상은 20%이지만(레 5:16; 민 5:7), 삭개오는 모세의 율법이 도둑에게 부과한 형벌 보다 두 배나 가혹하다(출 22:1 [21:37 MT]; 삼하12:6 [이 구절의 70인경은 “일곱 배”]; 비교 m. Ketub. 3.9). 이러한 의무는, 삭개오의 “변화된 마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의 표현”을 보여준다(Ellis 1974: 221). 또한 네 배로 갚는 관습은 쿰란과 로마 법 관례이다(Mur 19.10, 이혼 서류 일자 a.d. 111 [DJD 2:105]; Creed 1930: 231; SB 2:250; Michel, TDNT 8:105 n. 154; Kerr 1986–87).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ἡμίσια, hēmisia)을 준다(BAGD 348; BAA 705; 이밖에 신약에서는 막 6:23; 계 11:9, 11; 12:14; 그리고 마카비서 상 3:34, 37; 토비서 10:10; BDF §164.5; BDR §164.5). 다른 기준들에 의하면 이러한 행동은 후하다. 부자 관원의 반응(눅 18:23)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이러한 반응은 가난한 자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누가의 경향을 반영한다(Arndt 1956: 388: 예수의 “사랑은 두드러진 승리를 이룬다”). 하지만 삭개오 역시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상을 해야 한다: 만약 그가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그는 네 배(τετραπλοῦν, tetraploun; 신약에서는 여기에서만 쓰였다; BAGD 813; BAA 1622)로 갚아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삭개오가 자신이 무언가를 토색했음을 깨달았음을 시사한다(Ellis 1974: 221; Plummer 1896: 435; 문법 참조 롬 5:17; 골 2:20; 3:1). 삭개오는 토색한 자들에게 변상하는 과제와 세리에 대한 거대한 과제를 꾀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증거인 그의 마음의 변화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신다. 그의 변화된 상태에서, 삭개오는 돈을 아낌 없이 다루는 방법에 대한 예를 보여주게 된다(눅 16:9–13; 딤전 6:6–10, 17–18). 그의 행동은 눅 12:33에서의 권고를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다짐을 결정하는 어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19:8을 삽입으로 여기도록 한다. 이들은 군중의 불평과 선생의 응답 사이의 강요에 주목하여 접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κύριος (kyrios, 주), σταθείς (statheis, 서다), εἶπεν πρός (eipen pros, 그에게 말하다), 그리고 ὑπαρχόντων (hyparchontōn, 재산)과 같은 누가 용어의 사용을 지적한다. 게다가, 동사가 누가의 주제인 회개를 강조하고 이야기의 원래 흐름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Leaney 1958: 241; Fitzmyer 1985: 1219). 하지만 법적 세부사항들의 중요성과 정확성은 이러한 반대들 보다 더 중요하다. Derrett (1970: 278–85)은 법적 세부사항들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문화에서, 부정한 수단으로 이득을 얻은 사람과의 식사는 그를 “공범자”로 만든다. 이러한 인물들을 향한 사회적인 배척은 그들을 방해물로 보기 때문이며(Nolland 1993b: 905), 이러한 사회적인 배척에 힘쓰는 것조차 허용한다(m. Ned. 3.4). 변상은 목자, 세리, 삯을 받는 농부(revenue farmer)들에게 강요된다. 회개에 이르기 쉽지 않음에도 불구에고 목자, 세리, 삯을 받는 농부(Restitution)들도 회복되어야 한다(b. B. Qam. 94b). 세리는 자신들이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지 않으면(m. Ṭohar. 7.6), 돈을 부당하게 취했다고 간주되어 부정한 자로 취급 받는다(m. B. Qam. 10.1–2). (세리에 대해서는 3:12의 주해를 참조하라.) 배상에 대해 약속을 선언하는 19:8이 없다면 왜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원 내러티브(original narrative)에 속한 것이지 삽입이 아니다.
• Stein
(1) 19장 8절에서 두 동사가 미래적 현재로 해석되지 않으면, 삭개오의 자랑으로 표현되어 버린다.
(2) “내 소유”(tw/n u`parco,ntwn)는 “내 수입” 보다는 “줄곧 가지고 있는 소유”(눅 8:3; 11:21; 12:15, 33, 44; 14:33; 16:1; 행 4:32의 경우)로 해석된다.
(3) “저는 항상 사취한 걸 되돌려준다” 보다는 “되돌려주겠다”로 이해해야 가장 바람직하다.
(4) 누가복음에서 부유한 사람이 예수를 만났을 때 자포자기하지 않고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가 있는가?(참조. 눅 6:24; 12:16–21; 16:19–31; 18:18–25.)
(5)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말 그대로라면 삭개오에게 그 날 구원이 임한 듯한 감이 있다. 만약 동사가 미래적 현재라면, 삭개오의 회개와 개종의 표지가 된다. 만약 습관적 현재라면, 왜 “오늘” 구원이 임했는지를 이해할 이유가 없다.
(6) 이전 인용문(18:9–14, 15–17, 18–30, 35–43)은 모두 한 사람이 등장하며 구원 받음과 관련되어 있다.
(7) 마지막 주장은 19장 10절을 포함한다. 이 주장은 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18:9–19:10의 요약을 다룬다. 19:9–10에서 예수의 진술은 삭개오의 개종을 보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의인 삭개오의 결백을 입증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자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리고에 오셨다. 삭개오의 회개가 개별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가는 그의 독자들에게 19:8의 기록을 회개의 열매(3:8)로 보도록 의도하였으며, 그의 믿음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19:4, 6, 8에서는 그의 믿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4. 해석 경향과 과제
(설교자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di,dwmi와 avpodi,dwmi를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여, 이 이야기를 삭개오의 회심과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는 목자이신 예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받아들여져 왔는데, 이제는 세밀한 연구를 통해 삭개오의 정체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Bock, Darrell L., Luke 9:51-24:53,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2,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Evans, Craig A., Luke,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Vol.3, Peabody: Hendrickson, 1990
Stein, Robert H., Luke,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 24,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