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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8의 동사 δίδωμι와 ἀποδίδωμι는 삭개오 이야기의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동사를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느냐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삭개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예수의 구원사역에 대한 이해에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누가의 용례를 분석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서에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는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누가의 용례를 분석한 후에 그에 따른 해석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 결과 누가는 미래적 현재와 습관적 현재를 혼합하여 사용하며, 해석방향을 결정하는 요소인 문맥은 미래적 현재가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아마도 삭개오는 세리장이라는 직위를 남용하여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죄인의 집에 머문다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무리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삭개오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결단은 당시의 관례와 비교할 때 다소 파격적인 수준이다. 그만큼 삭개오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대가를 치르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보여준다. 이에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이다. 따라서 삭개오의 고백은 회개로 여길 수 있다. 그리고 구원 선포는 예수의 사명과 관련이 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며 무시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양으로 여기셨다. 예수의 잃어버린 양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 34장과 누가복음 15장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목자의 역할을 하신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를 드러낸다.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의 사역에 의한 결과이다. 본문을 통해 부자 관원과 대조되는 삭개오의 자발적인 모습이 부각되면서도, 예수의 사역이 한층 더 강조된다.오랫동안 삭개오 이야기는 ‘세리의 회개’로 읽혀져 왔다. 즉 토색 행위로 부자가 되었으나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구원 받은 삭개오라는 인물로 그린 이야기로 해석한다. 하지만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더 풍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교회공동체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통해 교회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교회공동체에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소외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사역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또한 부자들은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서 재물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도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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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한 이유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1]예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에스겔 34장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연상시킨다.[2]에스겔 34장은 백성들을 향한 의무를 무책임하게 등져버리고 개인의 탐욕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3]즉 에스겔 34장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이 에스겔 34장과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한다.[4]하지만 에스겔 34장은 새출애굽 모티프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5]특히 ‘찾다’라는 의미의 דרשׁ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목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을 나타낸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겔 34장),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통해 이 약속을 이루신다.[7]또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비유도 연상시킨다(4, 6절).[8] 이 비유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15:4).[9]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더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10]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15:5).[11]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15:6).[12]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셔서 하늘의 관점과 기쁨의 강도를 강조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13]이 구절에서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가 드러난다.[14]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중요한 주제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3:3, 8; 13:1-5; 15:7, 10; 16:30; 17:3-4; 24:47).[15] 그리고 회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닌 구원자에 의해 이뤄지는 경험이다.[16]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의 사명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17] 결국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에서 그의 자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나, 모든 결과는 예수의 사역에 달려있다.[18]예수의 사명과 죄인의 회개에 대한 말씀은 5:31-32를 떠오르게 한다.[19]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5:32).[20] 이 비유에서 건강한 자는 의인과 병든 자는 죄인과 연결된다(5:31-32).[21] 비록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의인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22]오히려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다(특히, 11:37-52).[23]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죄인’ 혹은 ‘악인’과 동의어”로 사용된다.[24]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을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으로 이해했다.[25]따라서 이 비유는 모든 사람들이 치료의 필요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26]물론 여기서 치료는 육체적인 질병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치료이다.[27]삭개오와 그의 집은 ‘잃어버린 것’에 해당한다.[28] 이 비유에서처럼 삭개오와 그의 집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으나, 예수로 인해 회복되었다.[29] 이 이야기는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30]삭개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수군거렸던 무리들과 같은 경향의 집단에게는 예수의 사명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도전하게 된다.[31]부자들에게는 자발적으로 회심한 부자의 사례를 제공한다.[32] 삭개오 이전에도 부자가 예수께로 나온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33]특히, 부자 관원이 그렇다(18:18-30).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로 약속했고 구원을 받는다. 삭개오를 통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 Bock, Luke 9:51-24:53, 1523; Tannehill, Luke, 27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2]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8. [3] Walther Zimmerli, Ezekiel 2: A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Ezekiel Chapters 25:48,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22. [4] Tannehill,Luke, 278. [5] Leslie C. Allen, Ezekiel 20-4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29 (Dallas: Word, 1990) 162. [6] Allen, Ezekiel 20-48, 162. [7] Allen, Ezekiel 20-48, 165; Bock, Luke 9:51-24:53, 1523. [8]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Tannehill, Luke, 278; O’Hanlon,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9] Bock, Luke 9:51-24:53, 1300. [10] Bock, Luke 9:51-24:53, 1300. [11] Bock, Luke 9:51-24:53, 1301. [12] Bock, Luke 9:51-24:53, 1301. [13] Bock, Luke 9:51-24:53, 1302; Tannehill, Luke, 238. [14] Tannehill,Luke, 238. [15] Bock, Luke 1:1-9:50, 499. [16] Tannehill,Luke, 238. [17] Tannehill,Luke, 239. [18] Tannehill,Luke, 278. [19] Bock, Luke 9:51-24:53, 1302. [20] Bock, Luke 1:1-9:50, 498; Bock, Luke 9:51-24:53, 1523. [21] Bock, Luke 1:1-9:50, 498. [22] Bock, Luke 1:1-9:50, 498; Tannehill, Luke, 238. [23] Bock, Luke 1:1-9:50, 499; Tannehill, Luke, 238. [24] Evans, Saint Luke, 664. [25] Bock, Luke 1:1-9:50, 499. [26] Bock, Luke 1:1-9:50, 499. [27] Bock, Luke 1:1-9:50, 498. [2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29]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30] Tannehill,Luke, 278. [31] Tannehill,Luke, 278. [32] Tannehill,Luke, 278-279. [33] Bock, Luke 9:51-24:53, 1523.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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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다짐을 들은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신다.[1]하지만 예수께서는 삭개오와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2]삭개오가 사람들의 불평을 의식하고 있다면(7-8절),[3]예수께서도 이들을 의식하고 계셨을 터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무리들의 반응(7절)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4]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시고, 그 이유가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5]누가복음에서 σωτηρία는 총 3번 사용되었으며(1:69, 71, 77), 이 구절들은 모두 예수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고하는 사가랴의 예언과 관련이 있다.[6]사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맹세에 따라 구원을 베푸신다(1:68-73).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3:8). 그에게 회개는 신학이나 종교의식의 변화가 아닌 삶의 변화이다.[7]그래서 요한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묻는 세리들에게 부과된 세금만 걷으라고 답한다(3:13).[8]결코 직업을 변경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9] 그렇다면 세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정한 세금 징수이다(3:12-13).[10] 따라서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기록이 없어도, 그에 상응하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볼 수 있다(8절 주해).[11] 더 중요한 점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죄와 회개를 연관 짓지만(5:32; 13:2-3; 15:7, 10; 17:3-4), 회개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죄를 용서하신다(5:20-24; 7:47-49).[12] 또한 누가복음은 세리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5:27-30; 7:29, 34; 15:1; 18:9-14).[13]실제로 세리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했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3:12). 그리고 결국에는 요한의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다(7:29).[14]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 역시 의롭게 여겨졌다(8:14). 구원의 대상은 삭개오와 그의 집 전체를 포함하며, 이와 같은 사건은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10:2; 11:14; 16:15, 31; 18:8).[15]
[1] Bock, Luke 9:51-24:53, 1522. [2] Bock, Luke 9:51-24:53, 1522. [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4] Robert C. Tannehill, Luke, Abingdon New Testament Commentarie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278. [5] Evans, Luke, 280. [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7] Evans, Luke, 48.. [8] Bock, Luke 1:1-9:50, 312. [9] Bock, Luke 1:1-9:50, 312. [10] Bock, Luke 1:1-9:50, 312; Double, The Paradox of Salvation, 116. [11]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12]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삭개오가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9-14)를 근거로 삭개오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도가 있다(Evans, Luke, 280). [13] Bock, Luke 1:1-9:50, 310;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4]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5] Bock, Luke 9:51-24:53, 152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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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가 서서 말하는 상황이 분명하지 않다.[1]예수께서 이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는지, 무리들과 떨어져 계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2]다만, 9절의 예수의 말씀을 통해 무리와 떨어져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건 추측할 수 있다.[3]또한, 이러한 반응이 무리들의 수군거림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분명하다.[4]삭개오는 예수를 “주”(κύριος)라 부른다.[5] 소경 역시“주”라 불렀다(18:41). 그리고 소경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18:38, 39). 소경은 예수를 “주”라 부름으로써, 다윗의 자손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6]즉 소경에게 예수는 메시아였다.[7]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는 1:27, 31-33에 언급되어 있다.[8]그렇다고 해서 소경이 예수를 문자 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여겼다고 볼 수는 없다.[9]당시에는 “다윗의 자손”은 회복과 치유를 가져온다고 믿었다.[10] 실제로, 예수께서는 4:17-18에서 이사야 61:1을 인용하시며, 자신의 사역을 밝히신다.[11]그렇지만, 소경의 경우에는 누가가 마가복음 10:51의ῥαββουνί를 κύριε로 수정한 결과이다(참조. 마 20:33).[12] 누가는 셈어적 표현인 ῥαββουνί를 피하고,[13] 19:8과 통일성을 주기 위해 κύριε를 사용하였다.[14] 누가복음에서 소경이 예수를 주라 부른 대가는 구원(18:42)과 병 고침이었다(18:43).삭개오 역시 예수를 주라 불렀으니, 소경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ἰδοὺ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집중해서 듣도록 유도한다.[15]동사 δίδωμι와 ἀποδίδωμι를 습관적 현재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적 현재로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전체적인 해석과 주제가 달라진다.[16]습관적 현재로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으며,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고 있습니다.”로 번역하여 해석해야 하고, 미래적 현재라면 “제 재산의 절반을 주고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로 번역하여 해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두 동사를 미래적 현재로 보고, 삭개오의 회심에 따른 서역으로 해석한다. 즉, 세리장으로서 지금껏 행해온 불법적인 행위들을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올바로 사용하겠다는 다짐으로 해석한다. 이와 달리 동사의 형태가 현재형이므로 습관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7]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고 토색했을 경우 네 배로 갚아 주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재산의 절반(τὰ ἡμίσιά μου τῶν ὑπαρχόντων)은 아마도 일 년 수입의 절반을 의미할 것이다.[18]그렇지 않고 실제로 재산의 절반을 구제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는 부자로 남을 수 없다(2절에서 누가는 삭개오를 부자로 소개한다). ‘만일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εἴ τινός τι ἐσυκοφάντησα)은 세금을 징수하다가 실수가 발생했을 경우로 해석해야 한다. 토색과 네 배 보상의 공존은 어불성설이다. 네 배로 보상하는 삭개오가 의도적으로 토색할 리 없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다른 세리들과 달리 토색 없이 정당한 수입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삭개오는 재산을 아끼지 않고 구제에 힘쓰고 있으며, 직업을 악용하지 않는 윤리적인 사람이다. 삭개오라는 이름대로 의로운 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의로운 행실은 그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게 된다(9절).[19]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7절). 바리새인들이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0]그들은 삭개오의 의로운 행실을 보지 않고, 오직 세리장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취급하였다.[21]바리새인들은 삭개오가 “세리라는 이유로 거부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회복을 도우신다.”[22] 따라서 삭개오의 구원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이자, 누구나 지위에 상관없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23] 이렇듯 이 동사 해석의 두 가지 경향은 본문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누가는 습관적 현재와 미래적 현재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문맥으로 해석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미래적 현재가 더 적합하다.[24]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겼다(7절).세리 요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세리들이 죄인으로 취급받지는 않았으며, 카피토처럼 정당하게 부자가 된 세리도 존재한다(7절 주해). 따라서 세리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기준은 그들의 직업이 아닌 편법행위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삭개오를 소개할 때 느끼게 되는 청중/독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2절 주해).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말한다.[25]삭개오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발언 자체가 다소 충격적이다(토비트 10:10에서 라구엘은 토비아에게 자신의 신부 사라와 재산의 절반을 넘겨준다).[26]삭개오의 자발적인 반응은 부자 관원과 대비된다(18:23).[27] 그리고 토색에 대해서는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보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위기 6:4-5과 민수기5:6-7은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라고 명한다.[28] 미쉬나에 의하면 2배로 보상해주도록 되어 있다(m. Ketub.3:9).[29]양의 경우에는 특별히 네 배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m. B. Qam. 7:1).[30]그럼에도 토색에 대한 네 배 보상은 율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출애굽기 22:1에 따르면 양 한 마리를 훔쳐 죽이거나 팔면 네 마리로 갚아야 한다. 사무엘하 12:6에서 다윗은 양 새끼를 빼앗아 손님에게 대접한 자는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헤롯은 절도에 관한 처벌을 강화하여 도둑은 네 배로 갚도록 했다.[31]그러므로 삭개오의 보상은 적절하다. 더욱이 삭개오는 자신의 지난 잘못을 청산하고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1] Bock, Luke 9:51-24:53, 1519. [2] Bock, Luke 9:51-24:53, 1519. [3]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5. [4]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5]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5. [6] Bock, Luke 9:51-24:53, 1510. [7] Bock, Luke 9:51-24:53, 1507-1508; Evans, Luke, 28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3. [8] Evans, Luke, 282. [9] Evans, Luke, 282. [10] Bock, Luke 9:51-24:53, 1508. [11] Bock, Luke 9:51-24:53, 1508. [12] Evans, Luke, 28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3] Bock, Luke 9:51-24:53, 1510;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4]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16]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는 학자로는 Alfred A. Plummer, Craig A. Evans, Frederick L. Godet, Joseph A. Fitzmyer, Luke T. Johnson이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며, Darrell L. Bock, Robert H. Stein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17] Evans, Luke, 280 [18]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8. [19] Evans, Luke, 280;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Defense," 162. [20] Evans, Luke, 281. [21] Richard C. White, "A Good Word For Zacchaeus? Exegetical Comment on Luke 19:1-10," Lexington Theological Quarterly 14 (1979): 89. [22]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942. [23]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Defense," 162-163. [24] di,dwmi의 용례 분석과 미래적 현재의 해석적 적합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신현우, “부자 삭개오의 구원,” 프로에클레시아 17 (2010): 122-123를 참고하라. [25] Bock, Luke 9:51-24:53, 1521. [26] Bock, Luke 9:51-24:53, 1521. [27] Bock, Luke 9:51-24:53, 1521. [28] Stein, Luke, 468. [29] tr. Dandy,Mishnah, 249. [30] tr. Dandy,Mishnah, 340. [31] Josephus, Jewish Anitiquities Books ⅩⅤ-ⅩⅦ, ⅩⅥ.3.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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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시자 모든 사람이 불평한다.[1]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무시려고 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실제로 불평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πάντες)이 아닌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3]그렇다면, 이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 불평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기 때문이다(5:30; 15:2).[4] 실제로, 동사 διαγογγύζω의 주체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다(15:2).[5]동사 γογγύζω의 주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다(5:30). 그 중에서도 특별히 바리새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실질적인 적대세력은 바리새인이기 때문이다.[6]사실, 누가복음에서 율법학자(γραμματεῖς)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νομοδιδάσκαλος)을 가리킨다.[7]이러한 사실은, 5:17과 5:21의 평행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누가는 자신의 독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다.[8]또한, 사도행전 5:34(ΦαρισαῖοςὀνόματιΓαμαλιήλ νομοδιδάσκαλος)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활동했다는 정보를 준다. 비록 율법을 가르치던 자들이 모두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두 집단이 바리새인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9] 더군다나,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동일하게 여겼다(18:11).[10]바리새인들의 전승을 이어받은 랍비 역시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랍비들은 세리를 도둑과 동일하게 여겼고(m. B. Qam. 10:2),[11] 급기야 살인자와 동등하게 여기기도 했다(m. Nedarim 3.4).[12] 이렇듯 세리는 부정한 존재로 여겨져서, 그들이 들어간 집은 물론 내부에 있는 물건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길 정도였다(m. Ohar. 7:6).[13]이러한 증거에 따르면, 세리를 죄인으로 여긴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14]그러므로, πάντες는 과장법이다.[15] 더구나, 모든 세리들이 죄인 취급 당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가이사랴의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 간의 토지 분쟁이 생겼을 때 유대 유명들과 세리 요한이 함께 플로루스(Florus)에게 중재를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다.[16]또한, 은 8 달란트를 제공하고 중재에 대한 약속을 받아두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지도자들과 요한이 앞장서서 플로루스에게 호소하다가 옥에 갇혔다는 기록도 있다.[17]이 기록에 의하며, 요한은 세리였음에도 지도자들과 함께 분쟁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유대사회에서 부정한 자로 취급 받고 배척 당하는 세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전체가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견해[18]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더구나 누가는 세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3:12; 5:27; 7:29; 15:1; 18:10).[19]그렇다면 세리들은 모두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부자가 되었을까? 유대 지역 세리였던 카피토(Capito)는 세금 행정관(administrator of taxes)으로서, 가난했지만 부자가 되었다.[20]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 역시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리고 지역은 무역 중심지이다.[21] 더구나 그는 세리장이다. 삭개오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은 세리는 토색으로 부자가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준수할수록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유대사회에서 존경을 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세리장이라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22] 이 구절에서는παρὰ ἁμαρτωλῷ가 강조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세리들과 그들의 편법 행위에 대한 감정이 반영되었을 것이다.[23] 동사καταλύω는 문자적으로 “짐 싣는 동물의 장구를 풀어주다”(to unhitch pack animals)라는 의미이다.[24] 9:12에서는“유숙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문맥상 식사교제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의 집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의 죄를 나눈다는 의미이므로, 예수께서 죄인인 삭개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된다.[25] 그러므로 예수의 상식에 어긋난 행동은 이들이 불평하는 원인이 된다.[26] 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의 식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념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죄인들을 환영하신다(참조 7:34).[27]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군의 무리들이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오직 예수만이 죄인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28]
[1] Bock, Luke 9:51-24:53, 1518. [2] 참조.Bock, Luke 9:51-24:53, 1519. [3] Bock, Luke 9:51-24:53, 1519.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Johnson이 언급한 7:34, 39는 동사 γογγύζω 혹은 διαγογγύζω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제외되어야 한다. [5] Bock와Evans는 별다른 설명 없이 바리새인으로 단정 짓지만(Bock, Luke 9:51-24:53, 1519; Evans, Luke, 283), 본문은 분명히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6] Evans, Luke, 91, 97. [7] 참조.Bock, Luke 1:1-9:50, 479; Bovon, Luke 1, 17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212. [8] Bock, Luke 1:1-9:50, 479. Bovon의 지적대로, νομοδιδάσκαλος는5:17에서 한 번 사용되고, 이후로는 줄곧 γραμματεῖς로 사용된다(Luke 1, 178). [9] Bock, Luke 1:1-9:50, 479. [10] Evans, Luke, 282. [11] H. Danby e.d. & tr., The Mishna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346. [12] tr. Danby,Mishnah, 267. [13] tr. Danby,Mishnah, 726. [14] Evans, Luke, 91. [15] Nolland, Luke 18:35-24:53, 905; Stein, Luke, 467. [16] Flavius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Ⅰ-Ⅲ, Vol. Ⅱ,trans. H. St. J. Thackera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Ⅱ. 285-288. [17]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Ⅰ-Ⅲ, Ⅱ.292. [1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19] Bock, Luke 9:51-24:53, 1513 n.2; D.A.S.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JSNT41(1991): 22. [20] Philo, On Embassy to Gaius, Vol. Ⅹ, trans. F. H. Col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199. [21] Evans, Saint Luke, 662. [22]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7. [23] Bock, Luke 9:51-24:53, 1519. [24] Bock, Luke 9:51-24:53, 1518;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4;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940. [2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26]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434. [27] Evans, Luke, 120. [28] David A. Neale, None But The Sinners: Religious Categories in the Gospel of Luke,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Supplement Series 58 (Sheffield: JSOT Press, 1991), 183.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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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는 예수의 명령대로 서둘러 내려왔다.[1]삭개오의 행동은 예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음을 보여준다.[2] 사실 누가는 예수의 명령과 삭개오의 반응에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했는데,[3] 그 의도는 삭개오의 순종을 부각시키는데 있다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 삭개오가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에서 그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4]이와 반대로 부자 관원은 예수의 말씀에 근심하였다(18:23).[5] 또한, 삭개오는 예수를 즐겁게 맞아들인다. 삭개오의 기쁨은 한 개인의 감정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2:10)고 했던 언약이 성취되는 순간임을 드러내주는 표현이다.[6]그러므로, χαίρων은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한다.[7]이러한 삭개오의 반응은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동일하다(καὶ εὑρὼν ἐπιτίθησιν ἐπὶ τοὺς ὤμους αὐτοῦ χαίρων, 15:5).[8] [1] Bock, Luke 9:51-24:53, 1518. [2]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5. [3] Bock, Luke 9:51-24:53, 1518. [4] Bock, Luke 9:51-24:53, 1518; Stein, Luke, 467. [5] Evans, Luke, 283. [6]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5. [7]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5. [8] Alan C.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a Defense,” Biblica 71 (1990): 161.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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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있는 곳과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1]본문은 예수께서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2]누가에게는 그 이유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3] 따라서 예수께서 초월적 지식을 가지셨다고 단정 짓기에는 어렵다.[4] 그렇지만, 예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5]예수께서는 자신의 요청에 주요 단어들을 사용하셨다.[6] σήμερον은 종종 사건의 긴급성 혹은 응답의 필요성을 내포한다(2:11; 4:21; 5:26; 13:32, 33; 22:34; 23:43).[7] 여기에서는 예수의 초청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8]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계획이 성취될 때가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19:9; 참조 2:11).[9]동사 δεῖ는 종종 신적 필연성(divine necessity)을 드러내는데 사용된다(2:49; 4:43; 9:22; 13:16, 33; 15:32; 17:25; 22:37; 24:7, 26, 44).[10] 그래서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에 초점이 맞춰진다.[11] 비록 예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12]그러므로 δεῖ는 여기에서 하나님에 의한 중요한 전환점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13]동사 μένω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역하도록 보내셨을 때 사용했다(9:4; 10:7).[14]특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10:7)고 하셨으므로, 삭개오와의 식사교제를 기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요청은 예수께서 삭개오를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준다.”[15] 삭개오는 선지자를 맞이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된다.[16]누군가의 집에 머무르는 것조차도 주인이 아닌 예수님께 달려 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의 주도권 역시 예수님께 있다.[17] [1]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2] Bock, Luke 9:51-24:53, 151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Stein, Luke, 467. [3] Stein, Luke, 467. [4] Evans, Luke, 283. [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6] Bock, Luke 9:51-24:53, 1518. [7] Bock, Luke 9:51-24:53, 1518. [8] Bock, Luke 9:51-24:53, 1518. [9]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Stein, Luke, 467. [10] Bock, Luke 9:51-24:53, 1518; Stein, Luke, 467. [11] Bock, Luke 9:51-24:53, 1518. [12] Bock, Luke 9:51-24:53, 1518. [13]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1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15] Bock, Luke 9:51-24:53, 1518. [16]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17] Bock, Luke 9:51-24:53, 1517.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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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보고자 했으나 무리들이 앞을 가려 볼 수 없게 되자, 삭개오는 예수가 지나가게 될 곳에 위치한 돌무화과나무(συκομορέα)를 행해 달려가 그 위를 오른다.[1]“이러한 품위 없는 행동은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그 무언가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2] 삭개오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담긴 의미는 단어 배열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εἰς τὸ ἔμπροσθεν은 중복적인 표현이지만,[3]προδραμὼν의 의미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4]즉 중복적인 표현을 통해서 삭개오의 행동을 부각시킨다. 무리에 의해 예수를 볼 수 없었다고 해서,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삭개오의 행동은 앞 단락의 소경을 떠오르게 한다. 소경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고침을 받기 위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으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다(18:37-39).그러나 소경은 더 크게 외쳤고, 예수께서는 소경에게 소원을 물으셨고, 그의 대답을 들으신 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18:42).소경은 예수께로 나왔고, 앞서 가는 자들의 방해에도 예수를 만나 믿음으로 구원(σῴζω) 받았다. 소경과 마찬가지로, 삭개오 역시 예수께로 나왔고 무리들의 방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의 행동은 분명 예상 밖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도 그의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5]예수께서 앞선 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로 나온 소경의 믿음을 보셨듯이, 삭개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σῴζω) 시켜주실 것이다(10절).
[1] Bock, Luke 9:51-24:53, 151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2] Stein, Luke, 467. [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4]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433. [5] Stein, Luke, 467.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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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1] 본문에는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예수에 대한 소문이 삭개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2] 다시 말해, 당시 유명 인사였던 예수에 대해서는 소식들을 통해 익숙히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으므로,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3] 다만, 동사 ζητέω가 10절(ἦλθεν γὰρ ὁ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ζητῆσαι καὶ σῶσαι τὸ ἀπολωλός)에도 사용되었으므로, 누가가 예수의 사역과 관련지어 생각하도록 의도했다고 짐작할 따름이다.[4] 하지만 삭개오는 두 가지 장애물에 부딪힌다: 한 가지는 예수를 둘러싼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작은 키이다.[5] 삭개오는 몰려든 사람들이 자신의 앞을 가리는 바람에 도저히 예수를 볼 수 없었고, 더 큰 장벽은 그의 키가 보통 사람들 보다 작았다는 것이다.[6]여기서 ἡλικία는 실제적인 키를 의미하지만(참조 눅 2:52),[7]죄인 취급을 받았으므로(7절), 삭개오는 “부와 직위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을 지나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작은 자(littleness)”[8]였다고 볼 수 있다. 삭개오의 왜소한 체구와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그를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작은 자로 여기도록 작용했다.[9] 삭개오는 예수와의 거리적 간격만큼이나 소외당했던 인물이었다.[10] 그렇다고, 여기에 모인 무리가 예수를 보려는 삭개오의 시도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11]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므로(5:1, 15, 19; 6:17, 19; 7:9, 11; 8:4, 19, 40, 42, 45; 9:11, 37; 11:14, 27, 29; 12:1; 14:25; 18:36; 19:39; 23:48),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유난히 키가 작았던 삭개오의 시야를 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의 집에 머무르시려는 예수님께 불평까지 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7절). [1] Bock, Luke 9:51-24:53, 1517. [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Stein, Luke, 467. [3] Bock, Luke 9:51-24:53, 1517.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5] Bock, Luke 9:51-24:53, 1517. [6] Stein, Luke, 467; Norval Geldenhuy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9), 470. [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8] Nolland, Luke 18:35-24:53, 907. [9] Green, The Gospel of Luke, 670; Nolland, Luke 18:35-24:53, 907. [10] Bock, Luke 9:51-24:53, 1517. [11] Green은 의도적이라고 본다(The Gospel of Luke, 670).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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καὶ ἰδοὺ는 셈어적 표현으로,[1] 청자/독자의 주의를 끌어들이기 위한 기법이다.[2] 새 글 여는 공식(introduction formula)이기도 하다.[3]καὶ ἰδοὺ ἀνὴρ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5:12; 9:38; 23:50; 행 8:27; 10:30).[4] 여기에서는 삭개오를 등장시키며 세리장이자 부자로 소개하고 있다.[5] 누가복음에서는 ὄνομα 혹은 καλέω + 이름으로 사람을 언급하는데,[6]두 단어를 같이 쓰는 경우는 누가복음 1:13의 καλέσεις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Ἰωάννην와 같이 이름을 지어줄 때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을 소개하는데 ὀνόματι καλούμενος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므로, 중복적인 표현(pleonastic)이라 할 수 있다.[7]이러한 중복적인 표현은 “삭개오의 이름에 특별한 주의를 끌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8] Ζακχαῖος는 의로운 자(Righteous One)라는 의미의זַכַּי에서 유래되었고,[9]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다.[10]직업은 세리장(ἀρχιτελώνης)으로 세리들을 관리하고 여리고 지역의 세금 징수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11]그리고 삭개오는 부자이다. 인칭대명사의 주격은 대조 혹은 강조를 위해 사용되므로,[12]여기에서 αὐτὸς는 삭개오가 세리장이자 부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참조 17:16).[13]이러한 진술은 그가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통해 부자가 되었음을 암시하려는 듯싶다.[14]여리고는 무역중심지이자 지방세무서였으므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로마정부로부터 막대한 수수료(commission)를 받아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15]하지만 세리장이자 부자(καὶ αὐτὸς ἦν ἀρχιτελώνης καὶ αὐτὸς πλούσιος)라는 소개는 삭개오가 자신의 직위를 악용하여 부자가 된 인물로 그려지도록 한다.[16] 실제로 그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7절). 이러한 소개는 그의 이름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17]하지만 세리장인 삭개오의 등장은 청자/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반응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18]예수는 세리들의 친구이기 때문이다(7:34).[19] 더구나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부자 관원에서 제기되었던 질문이 떠오르도록 한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18:26).[20]사실 삭개오에 대한 소개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다. 당시 사람들과는 정반대되는 평가이지만, 누가는 세리를 긍정적으로(3:12; 5:27; 7:29; 15:1; 18:10),[21]부자는 부정적으로 본다(16:22-23; 18:23). 일례로 부자 관원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했으나, 예수의 요청에는 근심할 따름이다(18:21-23).부자 관원에게 있어 부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것이다.[22]또한 부자 관원의 태도(18:21)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9-14)에서의 바리새인과 평행된다.[23]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지만(18:11-12), 예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난하셨다(16:14-15; 18:9-14).[24] 부자 관원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계명은 어려서부터 지켜왔다고 답하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8:20-22).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18:22). 하지만 부자 관원은 예수의 말씀에 근심하였다(18:23). 비록 예수께서 언급한 계명은 다 지켰다고 대답했지만, 재물에 대한 탐욕은 버리지 못한 자이다(18:23).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18;24-25). 그렇다면 세리장이자 부자인 삭개오는 어떻게 될 것인가? [1] BDF §442. [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3] Francois Bovon, Luke 1: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1:1-9:50, trans. Christine M. Thomas, Hermeneia (Minneapolis, MN: Augsburg Fortress, 2002), 173. [4] 이 밖에 καὶ ἰδοὺ ἄνδρες는5:18; 9:30; 24:4; 행 1:10 [5] Bock, Luke 9:51-24:53, 1516. [6] ὄνομα는 8번(1:5, 27; 2:25; 5:27; 8:41; 10:38; 16:20; 23:50), καλέω는 2번(1:60; 10:39) 사용되었다. [7] Nolland, Luke 18:35-24:53, 907;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9] Bock, Luke 9:51-24:53, 1516;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Stein, Luke, 468; O’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Christopher F. Evans, Saint Luke, TPI New Testament Commentaries (London: SCM Press, 1990), 661. [10] Bock, Luke 9:51-24:53, 1517;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2. [11]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12] BDF §277. [13] 17:16에서 누가는 한센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자가 이방인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밝힌다. [14] Bock, Luke 9:51-24:53, 1516; Evans, Luke, 282;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15] Bock, Luke 9:51-24:53, 1516. [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17] Bock, Luke 9:51-24:53, 1516. [1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19]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20] Frederick W.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A Commentary on St. Luke’s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304. [21] Bock, Luke 9:51-24:53, 1513 n.2. [22] Bock, Luke 9:51-24:53, 1483;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4. [23] Bock, Luke 9:51-24:53, 1473. [24] Bock, Luke 9:51-24:53, 1473. '개인논문 > 삭개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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