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성서신학'에 해당되는 글 170건

  1. 2007.10.10 qal wa-chomer
  2. 2007.10.04 Kedusha
  3. 2007.10.04 trisagion
  4. 2007.08.30 수미상관
  5. 2007.08.23 파라샤트 발락(Parasha Balak)
  6. 2007.07.23 고르반
  7. 2007.07.05 Ma Tovu
  8. 2007.07.04 Parasha
  9. 2007.05.21 70인역 연구
  10. 2007.05.07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나 1

rmxw lq


히브리어 음역은 qal wa-chomer 또는 qal wahomer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는 "from the less important to the more important"이다. 즉, "덜 중요함에서 더욱 중요함"으로 점차 강조하는 용법이다. 라틴어로 a minori ad maius 와 a fortiori 라고도 한다. 신현우 교수는 "더더구나" 논법이라고 하며, 이외의 대역어로는 "점증적 논법", "점강논법" 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본래 의미를 잘 담고 있는 "더더구나" 논법을 택했다.


The qal wahomer principle is used to argue that if A is true (as proven by the Bible), being more difficult than B, then B can also be inferred to be true with all the more reason (as in John 10:35-36)[각주:1] 

"더더구나" 논법은 A가 진실(성경에 의해 증명되었기 때문에)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용되며, B 보다 더 어려워서, B는 더욱 더 진실을 의미하게 된다(요한복음 10장 35-36절에서처럼

더 구체적인 설명은 ELEVENTH SUNDAY OF THE YEAR의 일부를 읽어보도록 한다.
Christ’s blood had the power to justify (vs. 9), i.e. to set humankind in right relationship with God and provided the basis for the believers hope for salvation. Paul underscored the certainty of this hope (vss. 9-10) by using a style of argumentation popular among Jewish scholars. Known as qal wahomer (Hebrew), this “how much more then” argument exemplifies the first exegetical rule of Rabbi Hillel. A contemporary of Jesus, the Babylonian born Rabbi Hillel had an academy (House of Hillel) in Israel and at one time was the leader of the Sanhedrin (Jewish high court). His first rule of exegesis, the qal wahomer was an a fortiori logical assertion which proceeded as follows: If A is true, then how much more does B. follow. Paul’s A-statement, “now that we have been justified by his blood” (vs. 9a) finds its logical conclusion in his B-statement: “It is all the more certain that we shall be saved by him” (vs. 9b).

그리스도의 보혈은 의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인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을 향한 신자들의 소망을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을 유대 학자들 가운데 유명한 논증 형식을 사용하게 확실하게 드러냈다. qal wahomer(히브리어)로 알려진, 이 "더더구나[각주:2]" 논법은  랍비 힐렐의 첫번째 해석 규칙을 예시한다. 예수 당시, 바벨론에서 태어난 랍비 힐렐은 이스라엘에서 학파(힐렐 파)를 이루고 있었고, 동시에 산헤드린(유대 고등법원)의 지도자였다. 그의 첫번째 해석 규칙, qal wahomer은 다음처럼 처리되는 a fortiori 논리적인 주장이다. 만약 A가 진실이면, B는 더욱 더 그렇다. 바울의 A 진술,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9a)은 그의 B 진술에서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b)라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다.


:: 추가자료
Talmudical Hermeneutics
http://en.wikipedia.org/wiki/Talmudical_hermeneutics


  1. http://www.nazarenekabbalah.net/lesson7.pdf [본문으로]
  2. how much more then은 "하물며", "더욱더"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더더구나"가 그 의미를 더욱 잘 나타내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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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dusha

성서신학/용어정리 2007. 10. 4. 00:19
하루에 세 번 드리는 기도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읽어보라.
http://en.wikipedia.org/wiki/Kedu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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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장 3절에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룩하다"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를 전문용어로 trisagion이라고 한다. 대역어로는 대체로 '삼성송(三聖頌)'이 쓰이고 있으며, 한철하 박사의 「고대기독교사상」에서는  '삼위성가'으로 번역했다.

삼성송 가사는 이렇다.

Αγιος ο Θεός, άγιος ισχυρός, άγιος αθάνατος, ελέησον ημάς


더 자세한 내용은 http://en.wikipedia.org/wiki/Sanctus를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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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이사야서」를 읽다가, '인클루지오'라는 낯선 용어를 보았다. 이 단어는 inclusio의 음역으로, 신학에서는 수미상관[각주:1]구조 혹은 포위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래는 수미상관법에 대한 설명이다.

수미상관법[각주:2]이란 처음(머리:首)과 끝(고리:尾)이 서로관계가 있게 하는 문학적 '구성방법'으로 주로 詩에서 많이 쓰나 소설, 수필, 음악, 영화 등 모든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는 구성방법입니다.

예를들면 '유치환'의에서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 라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되어 마지막 행에서 다시'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다시 다짐하며 끝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시는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수미상관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소월詩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나 '모란이 피기까지는...'조지훈의 중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등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특히 최근들어 수필(隨筆)에서 주제감과 문학성을 위하여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암시(暗示)를 주고 끝마무리를 할 때는 앞의 암시와 관계가 있는 끝맺음(결론)으로 문학성을 추구하는 구성방법을 말합니다.


출처 : 유미자님의 문학서재 "
수미상관법이란"


개인적으로는 '포위구조'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위키피디아 설명은 다음 링크를 읽어보면 되겠다. http://en.wikipedia.org/wiki/Inclusio

  1. '수미상응', '수미쌍관'란 동의어도 있다. [본문으로]
  2. 수미일치법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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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문화원에 영문번역 자원봉사로 제공한 글입니다.

출처 : 이스라엘문화원  "랍비가 들려주는 Torah 말씀 민수기 22장2절-25장9절"


미디안의 위대한 마법사 빌람이 "이 어리석은 암나귀!"라고 외쳤다.    
"이런 몹쓸 짓을 한 게 벌써 세 번째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런 네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겠다." 지팡이로 암나귀를 세차게 때리며 소리쳤다.
한편, 빌람을 안내하던 모압의 위대한 왕 발락의 사절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빌람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실은 이 암나귀를 평소에 타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말을 잠시 못 타게 되어, 최근에 이 나귀를 타기 시작했는데 가끔 문제를 일으키곤합니다”

갑자기, 뜻밖에도, 나귀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당신은 나를 세 번씩이나 때립니까?"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기적이로다! 당나귀가 말을 하다니!"
빌람은 녹음 메시지에 대답하듯이 암나귀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나를 조롱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지금 내가 너를 죽였을 것이다!"  나귀가 빌람에게 말했다. "말해보세요, 빌람. 나는 당신이 오늘날까지 탄 당신의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빌람은 진리를 수용하도록 강요받았다. 그가 말했다. “없었다!” 그는 암나귀와의 논쟁에 졌다! (미드라쉬 – 민수기 22:28)

이 주의 내용은, 위대한 마법사 빌람이 유대 민족을 저주하는 대신 그들을 축복하는 모압 땅의 장면이다.

* * *
선지자 빌람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비유대인을 주셨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실패하면 용서하지 않았다. 마침내 빌람은 그 무렵 이미 음란했던 백성들로 하여금 더욱 음란에 빠지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놀랍게도, 빌람은 유대 선지자들이 했던 것보다 더 유대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였다! 사실, 유대인이 회당에 들어가면서 암송하는 첫 번째 기도인 "마 토브(Ma Tovu)"는 다름 아닌 빌람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역주] 마토브 : 아침에 회당에 들어가며 읊조리는 회당에 대한 존경의 기도

* * *
발락 왕

토라에서 후에 발락이라 이름 지어진 파라샤의 구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가치(유대인들을 저주하도록 의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의 빼어난 후손(모압인 룻과 결국에는 다윗 왕까지)들의 가치는 그를 잘 나타낸다.
발락은 백성의 두려움과 백성들이 왕을 신뢰하지 않음을 보았기에, 그 자신이 행동해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청년기의 모세를 알고 있는 미디안의 장로들의 충고대로  "모세의 힘은 그의 입에 있다." (영성 의미)라고  발락은 공언했다. "이번 경우에는 불에는 불로 맞서 싸워야만 하고, 그와 견줄 만한 영적인 사람을 찾아야 한다."
모압과 위대한 왕 시혼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서 “빌람의 저주”는 시혼을 전쟁에서 이기게 만들고 빌람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발락은 빌람에게 전갈을 보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이 민족(유대인들)을 저주하고 그들로 중동 지역에서 떠나게 하라."

* * *
빌람의 비전

하나님이 빌람에게 나타나시고 물으셨다.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 이 말의 목적은 대화를 여는데 있으며, 하나님의 유명한 질문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또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와 유사하다. 빌람은 일신론자이지만, 여전히 주위로부터 우상 숭배의 영향을 받았고, 하나님이 인간적인 특징을 가졌다는 그릇된 신앙을 가졌다. "그는 모든 걸 알지 못한다. 그가 보지 않을 때 내가 그들을 저주할 수 있을거다.”라고  빌람은 생각했다. 빌람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크고 명백했다. "그 백성을 저주하지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민수기 22장 12절)

빌람이 정직했더라면, 그는 발락의 사절들에게 메시지를 전했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저주하려 하거나 괴롭히려고 하지마시요. 그 반대로 그들을 환대하시요.” 하지만, 빌람은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만 말했다 – 이것은 그 사절단들이 노력을 들일만큼 충분히 "높은 계급"이 아님을 내포한다.
발락이 그 다음에는 더 높은 계급의 사절단을 보냈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빌람에게 대답하시기를, "이번 모험에서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찌니라." 이 말은 곧 "나는 네게 그들을 축복하라고 말한다."라는 의미이다.
빌람이 이 메시지를 전했더라면, 발락은 아마도 "그 모든 걸 잊어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빌람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호의를 위한 경쟁자로 보았으므로, 두려움으로 인해 동기가 주어진 발락 보다 더 유대인들을 증오했다.
빌람은 유대인들을 완전히 멸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했는데,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목적이었다.

* * *
천사와 마주하다

빌람은 일찍 일어나 자신의 나귀에 안장을 얹히고(나귀를 때린 아브라함과 경쟁), 말 없이 발락의 사람들과 떠나갔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바꾸신걸로 사절단은 잘못 간주하였다(몇몇 주요 종교에서 실수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공통적인 인류의 실수).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릇된 생각 때문에 자기의 길을 가는 빌람에게 진노하셨고(그에게 허락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멈추게 하기 위해 자비의 천사를 보내셨다.
당나귀는 천사를 알아봤지만, 빌람은 그렇지 못했다. 빌람은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시기까지 당나귀를 때렸고, 나귀와의 논쟁에서 지고 나서야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마침내, 빌람은 그의 임무를 취소시키기 위해 준비된 천사를 보고 절했다. 천사가 깨닫게 하려고 물었다. "너는 왜 당나귀를 때렸느냐?"

질문: 빌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러 가는차에, 그를 멈추게 하려고 보내진 천사는 빌람이 당나귀를 때린 것을 나무랍니다.
왜 그럴까요?

대답: 천사는 "네가 징조를 보았을 때 깨닫지 못하였느냐? 이 메시지는 전적으로 하늘에서 왔다. 만약 계속 가려고 억지를 부렸더라면, 너는 여전히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로 의도되어 있다. 현인들은 가르치기를 "삶의 길에서 사람이 선택하는 데로, 이끌림을 받는다!"라고 했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찌니라."라고 말한 것을 염두에 두십시요. 또한 삶에서, 우리는 오직 당나귀만 인식하고 천사를 보는 데는 실패하는 상황에 처해지는 우리 자신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랍비 Shlomo Wolbe)

주석자들은 당나귀 사건의 목적은 사람의 말(그리고 당나귀를 통한 말)이 하나님 손에 달려있음을 빌람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목할 또 다른 사항은 빌람이 유대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기 위해 전능자의 대변인이 되려는 시점이라는 점이다. 그는 매우 자만심이 강하고 육체적인 쾌락(“호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은과 금으로 가득 찬 궁전으로 이뤄져 있다!)에 사로잡혀 있었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겸손이라는 주요덕목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나귀와의 논쟁에서 진 “비천한 경험”은 빌람에게는 결코 쉽게 잊지 못할 일이었다.


* * *
제단을 쌓다

빌람은 하나님께서 발락의 요청을 들어주시도록 제단을 쌓고 제물을 가져다 주도록 발락에게 요구했다. 제단의 수는 유대 족장들이 이전에 지었던 모든 제단 수와 같았다. 빌람은 그가 우리의 조상들과 경쟁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빌람이 신성한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할 때 갑작스럽게 하나님꼐서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세 번씩이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함으로써 발락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 * *
빌람의 축복

(1) 저주하지 않음: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랴?" (민수기 23장 8절) 그들이 저주를 받을 만 할 때 조차도(야곱이 아버지를 속였을 때, 혹은 세겜의 모든 고을 사람들을 시몬과 레위가 죽인 것에 야곱이 격앙되었을 때처럼), 그들은 저주를 받지 않았다. 이삭은 "그 역시 축복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야곱은 단지 그들의 노여움을 저주했다.
빌람이 말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 (여족장들과 족장들을 암시),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판단됨), 그리고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들과 같기를 바라도다!" 빌람은 유대인 같이 죽기를 원했다 – 비록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정말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2) 하나님은 완전하심: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도다. 그는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유대인들이 거하시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고 그들 가운데 왕의 친밀함이 있으시도다. 그들은 마법사나 마술사들이 아니며, 다만 전능자와 활기찬 관계이로다. 그들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서 그들의 적들을 밟아 누르기 전까지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민수기 23장19절)
현인들은 유대인들이 아침에 일어나 “탈릿과 테필린”을 걸치고 기도하며, 저녁에는 침상에서 쉐마를 암송하는 이런 토라를 지키는 모습에서 적을 이기는 공덕을 보았다고 말한다.

[역주] 탈릿(Tallit):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서 어깨까지 두르는 찌찌트가 달려있는 보자기 모양의 쇼올
[역주] 테필린(Tefillin) : 기도할 때 이마와 팔에 두르는 가죽끈으로 된 작은 상자들을 가리키며 성물이다.

(3) 마지막 축복: 빌람은 오직 모세만 도달했던 예언의 단계에 도달하였고, 자신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금 송아지의 죄에서 그들을 일깨울 수단으로 유대인들의 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침내, 빌람은 유대인들의 조심성에 매우 감명을 받아서(모든 텐트의 문이 다른 방향으로 향해있어서 아무도 자신들의 이웃의 집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빌람은 그들이 자신들의 적들을 완전히 멸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마지막엔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로다!" (민수기 24장 9절)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제 더 이상 빌람이 그들을 저주하지 않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발락은 미래를 예언하는데 응한 빌람을 매우 못마땅해 했고, 몇 가지 치명적인 충고도 들었다. 그 후에 빌람은 초라하게 떠났다.

질문: 왜 하나님께서는 비 유대인 선지자에 의해 유대인의 본질이 명확하게 표현되길 원하셨을까?
대답: 빌람의 예언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울려 퍼졌다. 유대선지자들은 유대인들이 더욱 고귀해지도록 하는데 돕기 위해 건설적인 비판을 자주하였고, 유대인들을 격려하는데 더 적은 시간을 보냈다. 빌람은 유대인들의 고귀함과 그들의 전능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만방에 영원히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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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반

성서신학/신약 2007. 7. 23. 22:23

* 배경연구 과제로 제출한 내용으로 업데이트.


제물
이란 의미의
!B"ßr>q 음역된 단어로, 70인역에는 dw/ron으로 번역되었다[각주:1]. 구약에서는 제물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지만, 1 세기에는 서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각주:2] 마가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11), 예수 당시에는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여 십계명에서 명한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는데 악용되고 있었다(11-12). , 특정 인물들이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고르반이 사용되었다[각주:3]. 더구나, 고르반 서원은 취소 가능한데, 장로들의 유전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12). 제사장 역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사람들을 위해 쓰려는 목적으로는 취소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각주:4], 남자는 50 세겔, 여자는 30 세겔을 내면 취소 가능했으며, 너무 가난하여 지정된 금액을 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제사장이 적절한 금액을 정해주었다(Josephus, Ant. 4.73)[각주:5].

  1.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he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chigan:Eerdmans, 2002) 286. 직접 확인해 보니 !B"ßr>q 구약에서 28( 1:2;2:1,4,12,13;6:13;7:14;9:7, 15;17:4;23:14,27:9, 11; 7:17,23,29,35,41,47,53,59,65,71,77,83;9:7,13,31:50) 쓰였고, LXT에서 모두 dw/ron으로 바뀌었다. [본문으로]
  2. Robert A. Guelich, Mark 1-8:26 Word Biblical Commentary 34A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89), 368. [본문으로]
  3.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286. [본문으로]
  4. James 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2002) 210. [본문으로]
  5. 샌더스는 필로의 Hypothetica 7.5 근거로 하여 제사장이 봉헌된 재산을 거절하거나 대제사장이나 왕과 같이 권위가 높은 자가 봉헌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합법적으로 선언하여 서원을 무를 있다(E. P. Sanders, Jewish Law from Jesus to the Mishnah, 54) 하지만, 확인해본 결과 Hypothetica 7.5 고르반은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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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Joï-hm;

랍비 시몬스의 대답[각주:1]http://judaism.about.com/library/3_askrabbi_o/bl_simmons_matovu.htm'>에 따르면

"Ma Tovu"는 아침에 회당에 들어가면서 읊는 (민수기 24장 5절에서 시편들까지의) 운문 묶음이다.  성전을 대신하는 회당에 대한 찬양과 존경의 표현이다. (출처: "Seder Amram Gaon" Tefillot U'Bekashot, "Siddur Kol Yacov" - Artscroll).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에서 찾았다.

Ma Tovu(히브리어로 "오 얼마나 좋은지" 혹은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뜻)는 회당과 다른 예배 처소를 향한 존경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유대교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민수기 24장 5절에서 유래되었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저주하려고 보낸 발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인들의 예배당에 압도되었다. 찬양의 첫 줄은 발람의 축복이며, 비 유대인에 의해 쓰여져서 유대인 예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기도이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예배당으로의 입장과 그 이상의 기도(시편 5편 8절, 26편 8절, 95편 6절, 69편 14절)를 준비하는데 관련있는 시편의 악절에서 끌어왔다. 이 문맥에서는 유대인들이 회당에 들어가면서 암송하는 기도이다.


그 이상의 내용은 http://en.wikipedia.org/wiki/Ma_Tovu 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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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서 정의를 따르면,


파라샤는 타낙(히브리 성경)의 마소라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en.wikipedia.org/wiki/Parsha 를 참고하도록 한다. Jewish Torah Audio[각주:1]에는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파라샤는 "조각"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의 한 부분을 유월절마다 읽는다. 수천년을 거스러 올라갈 수 있는 일상적인 관습이다.  유대인들이 일주일 동안 한 주간 분량을 공부하는 전통이다. 매 주마다, 전 세계에서 그 주의 파라샤 강좌을 들으러 간다.

모세오경은 54 조각으로 나눠져 있다.

파라샤 강좌는 http://613.org/parasha.html 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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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M 과정의 '70인역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흥미로움을 느꼈다. 참고해야 할 자료가 많겠지만, 우선 Septuagint-Korea김정훈의 향기있는 집을 참조하도록 하자.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in Greek. Additional Notes.
http://www.ccel.org/ccel/swete/greekot.titlepage.html

NETS(New English Translation of the Septuagint)
http://ccat.sas.upenn.edu/nets/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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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각주:1] 목차정리하면서, "사본을 통해 보는 하나님의 말씀 -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나"라는 글을 보았다. 아래 인용문은 저자가 작성한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내 주요 내용만 복사하였다.

필자는 사사기 11장에 대한 위의 두 한글 번역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그와 더불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음을 다음의 몇 가지 점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가) 입다가 무모한 서원을 하여 결국 자기 딸을 죽이게 되었다고 보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입다의 부도덕성 내지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사기 11-12장을 자세히 살펴볼 때 입다는 그리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요 오히려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입다가 기생에게서 태어난 서자였다고 해서 (11:1) 그가 부도덕한 사람이었다고 간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적자들로부터 학대를 당하여 부당하게 집에서 쫓겨나서 돕이라는 곳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11:2-3).

11장 3절 하반절의 한글판 번역 또한 독자로 하여금 입다가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이를 개역은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고 하였고, 표준 새번역은 "건달패들이 입다에게 모여들어 그를 따라다녔다"로 번역하였다. "잡류" 또는 "건달패"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아나쉼 레이킴'이다. 형용사 '레이크'는 문자적으로 "비어 있는, 텅빈"이라는 뜻인데, 이 용법으로는 삿7:16 ("빈 항아리"); 창37:24; 41:27; 신32:47; 느5:13; 겔24:11; 사29:8; 왕하4:3; 잠12:11; 28:19에 등장한다. 두 번째로 이 문자적인 뜻이 연장되어 "빈털털이의, 천대받는, 경시되는, 경박한"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런 용법은 삿9:4; 11:3; 대하13:7; 삼하6:20 네 곳에 등장한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을 때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여 그와 함께한" 것처럼 (삼상22:1-2), 입다에게 모여든 사람들 역시 "잡류" 또는 "건달패"라기 보다는 일종의 천민 계급이었을 것이다. 입다는 자기에게 모여드는 천민들을 가지고 사병 (私兵) 조직을 구축하였겠고, 이때문에 정규군대 조직이 없었던 당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암몬 자손의 침입을 받았을 때 입다를 통솔자로 초청하였던 것이다 (11:4-11).

입다는 출전에 앞서 암몬 자손의 왕에게로 사신을 보내어 야웨 하나님과 과거의 역사에 호소하면서 평화적 해결책을 종용한다 (11:12-13). 입다의 이러한 태도는 율법의 가르침에 부합된다. 하나님은 암몬, 모압, 에돔을 치지 말라고 명하셨다 (신2:5,9,19). 입다는 과거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간섭을 구체적으로 회고하면서 (11:12-27) 가급적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시도하였다. 11장 12-27절의 내용을 통하여 볼 때, 입다는 역사 속에 나타난 야웨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입다는 길르앗의 적자들로부터 쫓겨나서 돕 땅에 거하며 "건달패"의 두목이 된 불량배였으며, 따라서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서 입다는 얼마든지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어리석은 서원을 내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하겠다.

나) 이제 입다가 서원한 일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입다가 서원한 바를 (30-31절)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점은 두 가지 문구로 묘사되어 있다. 첫째 문구는 "야웨께 돌린다"는 것이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는 야웨께 속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둘째 문구는 "번제로 바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구의 결합 형식은 "갑 또는 을"로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의심할 나위없이 "갑 곧 을" 또는 "갑, 다시 말해서, 을"의 형식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자기 집 문에서 맨먼저 나와 영접하는 자를 야웨의 소유로 인정하여 그를 번제로 바치겠다는 것이다.

번제의 히브리어 명사형 '올라'의 어근은 "오르다, 올라가다"를 뜻한다. '올라'에는 어원상 "태우다"라는 뜻이 없지만, 그 용법에 있어서는 거의 예외없이 "온전히 불살라 바치는 제사"를 의미한다. 삿11:31의 "번제로 바치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창22:2) 하신 것과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취한 조처를 통해 볼 때,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이삭을 잡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입다는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번제 명령을 염두해두고 자신의 서원을 발설하였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입다가 의도한 바는 가축이나 애완용 동물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입다의 서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그는 인신 번제를 서원한 셈이 된다.

전쟁에 임하여 급한 나머지 깊은 생각없이 부주의로 인신 번제의 서원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야웨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다"는 기록을 (11:29) 미루어 볼 때, 입다가 언급한 "올라"는 다른 의미를 염두해둔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야웨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고 (삼상1:11), 사무엘을 얻은 후 그대로 실천하였다 (1:28). 자식이 없어 구박받던 한나는 서원대로 아들을 얻자 전혀 망설임이 없이 그 아들을 성소에 바친 것이다. 야웨께 평생 바쳐진 사무엘은 번제물로 죽지도 아니하였고, 그렇다고 평생 총각으로 남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나의 서원대로 "평생 야웨께 바쳐졌다"고 볼 수 있다. 입다와 한나의 서원을 동일한 성격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나의 서원을 통해서 볼 때, 입다의 서원도 어느 정도는 한나의 서원과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바울의 권면을 (롬12:1)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 11:34-40을 통하여 히브리어 원문 또는 각종 고대 번역본에 "죽는다"는 단어가 없다는 점은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큼을 입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입다의 딸과 그녀의 친구들이 애곡한 바는 "그녀의 처녀됨을 위하여"였다. 이 표현을, 그 자체적으로 볼 때,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라고 해석해야 할 근거는 전혀 없다. 입다에게 있어서 무남독녀를 평생 처녀로 보내게 한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딸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별히 39절의 "그는 자기가 서원한 바를 그녀에게 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는 문장 순서를 통해볼 때, 서원을 행한 결과가 바로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시 말해서 입다와 같이 인신 번제를 서원할 경우 번제물로 뽑힌 그 사람을 평생 동정으로 보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출처 : 구약 성경의 맥을 따라서 http://www.biblehome.net/korean/OTIntroduction.htm


이 글에서 나타나듯이, 성경해석과 성경번역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그 중요도만큼이나 연구하고 설교하는 설교자가 드문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며, 그 반면에 사본학을 통한 원문복원작업의 소중함이 한층 더 깊게 다가온다.


사사기 11장 강해[ 입다]사본을 통해 보는 성경도 추가로 알아두자.
  1. 1995년 7월호, p.195~2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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