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There is no universal agreement as to the importance of the Book of Zechariah in the process of formation that lies behind the  messianic ideas reflected in the scrolls. - Jesper Høgenhaven, “The Book of Zechariah at Qumran,” SJOT 27/1 (2013):112.

(구글 번역) 두루마리에 반영된 메시아사상의 배후에 있는 형성 과정에서 스가랴서의 중요성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는 없습니다.


학계에서 스가랴서의 메시아사상은 대부분 11, 13장 목자 은유와 연결되고 있다. 스가랴서 9-14장에 나타난 목자 은유에 대한 내 분석에 의하면, 스가랴서 9-14장은 메시아사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스가랴는 하나님의 통치를 더 강조한다. 혹자는 다윗 왕조가 멸망한 포로기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다윗 메시아사상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더 강조한다는 것인데, 스가랴서가 이 같은 특징을 반영했을 개연성이 있다.

스가랴서가 메시아 사상 혹은 다윗 메시아 갈망이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요한복음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oneness)이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더구나 요한복음의 유대 절기 중 초막절은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그의 아들이신 예수의 왕권을 강조하는 장치가 된다. 내년 하반기쯤에는 더 자세한 내용을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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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Q5(11QPsa) Psalm 151 자료를 찾다가 폴란드어 자료를 찾아서 번역기로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중 결론을 옮겨본다.

히브리어 성경 시편 151편의 본문은 시편 11Q5 두루마리에만 나옵니다. 문학적 구조상 세심하게 제작된 작품으로 7행과 8행에 포함된 내용이 보입니다. 이 작품은 1인칭 서술 방식으로 다른 두루마리 작품이나 성서 본문과 구별됩니다. 단수형; 화자(다윗는 전체 구성에서 주제이자 대상이며, 각 행마다 신학적인 사고를 전개합니다. 이새의 막내이자 가장 중요하지 않은 아들인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신학은 성서적 메시아주의 사상의 발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도적 설교에서 그 보완점을 찾습니다. 두루마리 자체는 기원전 1세기의 작품이지만, 시편이 작곡된 연대는 헬레니즘 시대나 그보다 더 이전인 페르시아 시대로 옮겨갑니다. 이 날짜는 당시 작성된 텍스트의 구조, 스타일 및 언어 특성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시편은 원래 신학적인 이유로 원고 저자가 두 부분으로 나눈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작품으로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 151b편의 제목에서 한 단어를 분석하면 랍비 히브리어의 특징인 전체 구성과 완전히 별개의 스타일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가정입니다. (26-27쪽)

Ks. Marcin Biegas, "Postać Dawida w hebrajskiej wersji Psalmu 151 (11Q5)," BibAn 8/1 (2018) 5-28.

저자는 시편 151은 사무엘상 16장을 다윗의 고백으로 서술한 시로 분석하며, 이 구절의 중요성은 메시아사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내 관심사인 목자-양 은유에 관해서는 달리 진술할 내용이 없어서 연구 범위에서 제외할 예정이다. 추후 메시아사상 연구를 위한 자료로 사용할지 모르니 기록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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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4서에서 '메시아'란 단어는 두 번 사용된다(7:28, 29). 이 메시아 본문에서 저자의 독특한 사상들이 발견된다. 

첫 번째는 메시아의 통치와 죽음이다.

7:28 For MY Son the MessiYah shall be revealed with those that be with Him, and they that remain shall rejoice within four hundred years.
7:29 After these years shall MY son MessiYah die, and all men that have life.

저자는 '메시아'를 '나의 아들'이란 용어와 같이 사용한다. 메시아의 정체는 실제로 야웨의 아들일 수도 있고, 역할에 따른 관계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대 메시아사상과 비교하면, 에스라 4서의 메시아는 종말론적 구원 사역의 주역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야웨의 백성을 백 년 동안 통치하며 그 동안 백성은 메시아를 통해 야웨의 선하심을 보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죽음을 맞이하며, 백성은 생명을 유지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메시아의 죽음 이후 피조세계가 창조의 시작으로 돌아간다고 서술한다.

7:30 And the world shall be turned back to primeval silence the seventh day, as it was at the first beginnings: so that no one shall remain.

저자는 메시아의 통치 이후 참된 평화가 가득한 세상이 도래하며, 창조 세계의 원형을 회복한다는 종말론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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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메시아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모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그리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필로의 저술을 바탕으로 표면적인 해석을 수용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통치라는 그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노출되지 않은 이면의 의도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필로는 메시아라는 정치적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지도자의 덕목을 다루면서 모세를 이상적인 메시아로 제시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필로가 다윗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된다.

요한복음에서 모세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특히 율법의 수여자로서 유대인이 예수를 정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유대인 집단과 갈등이 증폭되지만, 동시에 예수를 선지자이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개인과 집단도 커져간다. 메시아사상을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12장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을 믿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목자-왕 전승 역시 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요한은 끝끝내 다윗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의도가 메시아사상의 반작용을 고려했다고 짐작하고 있으며, 내가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오늘 필로의 메시아 사상에 관한 논증을 통해서,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은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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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Klausner는 메시아 칭호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유대 문헌에서 셀류키드 제국에 맞서 하스모니안 왕조로 일컬어지는 유대 왕국을 재건한 Judah Maccabee는 메시아로 지칭되지 않지만, 로마 제국에 맞섰으나 실패한 지도자 Shimon bar Kosiba는 메시아로 불리는 이유에 관한 것이다.

Matthew V. Novenson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선지서부터 랍비 문헌에 언급된 몇몇 인물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는 Morton Smith의 글을 인용해 메시아 칭호는 특정 인물의 업적에 관한 동시대 사람의 반응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메시아의 등장에 관한 예언을 토대로 다윗 계열의 메시야(Davidic Messianism)와 같은 유대 사회 내 일종의 메시아를 선별하는 기준이 있었다. 첫 번째 기준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어야 하고, 두 번째 기준은 업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동시대 사람들이 특정 인물을 메시아로 인식했느냐 아니냐로 갈린다. Klausner가 의문을 제기한 Judah Maccabee와 Shimon bar Kosiba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메시아의 조건

Marvin A. Sweeney는 『예언서』(대한기독교서회)에서 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될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다윗 계열의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메시아의 조건으로 다윗 혈통을 강조한 이유는 다윗 언약(삼하 7:8-16)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다윗은 이상적인 왕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종말적인 왕의 등장을 고대하는 유대인에게 이상향은 혈통으로는 다윗 가문이고, 업적과 행실은 다윗과 같은 왕이어야 한다.

견고한 신념과 달리 다윗 계열의 메시아에 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특히 예언서에서 메시아의 등장에 관한 본문을 분석해 보면,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는 왕에 대한 묘사에서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내 관찰은 목자-왕 전승에 관한 본문 연구를 토대로 하고 있다. 대다수는 다윗 혈통의 메시아를 공표하지만, 몇몇 예언자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등장한다고 선포하여 다윗 가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후자의 경우 다윗이라는 특정 인물보다는 종말론적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

메시아의 조건에서 업적과 행실에 관한 이견은 없다. 다윗과 같은 목자가 이스라엘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을 이루는 날을 종말론적 구원으로 그린다. 헤롯 대왕이 메시아로 불리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메시아의 조건은 확실히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이다. 영토 회복은 하스모니안 왕조를 적대했다는 측면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고, 헤롯의 혈통적 정당성은 확보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성전 공사를 강행한 헤롯의 야망은 성공적이었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두 번째로 독립국가를 이루한 Judah Maccabee가 메시아로 인식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메시아의 조건은 이스라엘 영토 회복과 성전 재건이며, 더 중요한 변수는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 예수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다윗 혈통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다윗 혈통이어야 한다는 신념에 균열을 내신다. 전문 용어로는 Davidssohnfrage("the messiah cannot be the son of David")이라고 한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예수의 업적은 메시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메시아 공식과 동떨어져 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군중의 반응은 그들이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족보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대뜸 요한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이라고 선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2장에 성전 정화 사건을 배치해 성전되시는 예수를 강조한다.

믿음의 고백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와 예언자들의 선포를 통해 메시아관을 정립했다. 그들의 기준에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다. 지상적 영토와 성전을 갈망하는 유대인과 달리,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늘 성전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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