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진의 혹은 본문의 의도에 천착하는 작업을 최우선 순위로 삼는 신학도로서 그 외적인 접근을 부수적으로 간주하는 성향이 짙다. 어쩌면 성서학 전공자 중에서도 내가 그 성향이 강할지 모른다.
트라우마는 내가 외적이라고 여기는 최신 경향 중 하나이다. 이번 Colloquium Biblicum Lovaniense 2024에서 언어별 주제 강연이 이틀에 나누어 진행되었고, 나는 "Métaphores et langage figuratif et la cohérence du livre d’Isaïe"("이사야서의 은유와 비유적 언어, 일관성")를 듣고 싶었으나, 해당 주제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일찍이 포기하고, 영어로 진행되는 "The Book of Isaiah and Trauma/Resilience Studies"에 들어가야 했다.
마빈 스위니 (Marvin Sweeney) 박사와 콘라드 슈미트(Konrad Schmid) 박사도 이 세션에 참석했는데, 현 선지서 학계에서 대세인가 싶었다.
강연을 들으면서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성경 본문에 트라우마와 관련된 본문을 얼마든지, 특히 선지서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스위니 박사가 말하듯이 성경 저자 혹은 편집자의 관심은 신적 심판의 심각성에 있지 청중의 트라우마에 있지 않다. 나도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반면 목회 현장에서 트라우마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강연 후 점심을 스위니 부부와 같은 테이블에서 가졌다. 내 앞에 신경과학(神經科學, neuroscience 또는 뇌신경과학)도 동석했음. 대화 중 스위니 박사가 자신이 트라우마 강연에 참석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그의 수많은 전우가 죽었으나, 자신은 기적적으로 생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전쟁 후유증을 겪어야했다고 말해주었다. 스위니 박사의 가정사를 통해 자신이 트라우마에 관심을 두는 이유와 그럼에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는 이유는 진실로 내 마음에 남았다.
앞으로 신학을 최우선 순위로 삼되, 교회를 위한 실질적인 학문에도 관심을 두고자 한다. 현실은 나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무지렁이 같은 존재지만, 서로 연약한 존재끼리 현실을 이겨내는 곳이 교회 공동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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