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에서 이름을 적시하지 않은 절기는 '유대인의 명절'(5:1)이 유일하다. 난 부림절의 유래와 요한의 절기 사용이 동떨어져 있으므로, 요한이 의도적으로 절기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관련 글: 요한복음 5장의 유대인의 명절과 안식일의 유기적 관계)

그러나 유대인의 정체에 관한 Ruben Zimmermann의 “The Jews”: Unreliable Figures or Unreliable Narration?을 읽으면서, '유대인의 명절'이 '부림절'이라는 해석이 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림절은 하만의 유대인 말살 음모에서 벗어난 기쁨을 기념한 잔치에서 유래한다 (에 9:17-22).

그러나 요한복음 5장은 예수와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갈등의 시작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이유이며 유대인들은 박해로 반응한다 (5:16). 이후 유대인은 예수의 대적자로 묘사되고, 둘 사이의 갈등은 심화하며, 결국 예수의 죽음까지 이르게 된다.

부림절이 유대 민족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예수의 구속사와 맞닿아 있지만, 에스더 시대의 유대인이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났던 것과 달리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했던 유대인들은 영생을 베푸시는 예수를 대적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4)

요한이 부림절을 적시하지 않은 이유는 익명성으로 청중과 독자의 호기심을 북돋우고, 절기의 기원과 예수의 사역에 대적한 유대인의 역설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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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담론에서 절기를 명시하지 않지만, 초막절과 수전절 사이에 있는 이 담론의 배경이 초막절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합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조차 선한 목자 담론에서 초막절의 역할을 제시하지 않는다. 선한 목자 담론에서 초막절을 강조하지 않기도 하지만, 담론 내부에서 초막절을 고려하지 않아도 본문 이해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선한 목자 담론의 배경이 초막절이라는 전제를 수용하며, 이 절기가 그저 배경이 아니라 담론 해석의 중요한 틀이라고 전제한다. 선행 연구와 다른 내 전제는 나 스스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만든다. 나는 선한 목자 담론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하는 이유는 스가랴서 9-14장의 영향이 크다. 스가랴서 9-14장은 목자-양 유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그리며, 14장에서는 목자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이방 국가에 초막절 준수를 명령하신다. 나는 요한복음 7:1[2]-10:21의 배경인 초막절과 선한 목자 담론의 목자-유비가 스가랴서 9-14장과 유사하다고 해석한다. 스가랴서 14장 하나님의 왕 등극과 이방 민족의 초막절 준수를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성취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유대 절기는 단순한 시간 표지(temporal markers)가 아니라 예수의 사역과 정체를 설명하는 보조 장치이자 성전 파괴 이후 요한 공동체의 신앙을 정립하는 수단이라 여겨진다. 정리하자면, 선한 목자 담론에서 초막절을 고려하면, 예수의 왕권과 요한 공동체의 위기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요한의 유대 절기 변형은 유대 기독교인 공동체 내부의 이해 차이를 고려한 결론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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