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 1-2장은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을 설명한다. 요한은 자신의 독특한 어휘를 사용해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는데, 그 목적은 "예수는 메시야시다"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 3-4장은 유대인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포괄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5장은 갈등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수께서 베데스다에서 행한 이적이 그를 적대하는 무리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5:16)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님의 반응은 유대인에게 극단의 적대감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5:18)


분명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모세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5)


예수께서는 모세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너희를 하나님께 고발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선포는 요한복음의 전개, 그리고 예수를 향한 유대인의 적대감만큼이나 극적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진정한 모세의 후계자라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6)


요한은 유대인들이 직면한 믿음의 장벽을 서술하고 있다. 요한 공동체와 오늘날 신앙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 생존 당시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더구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경험하기 전이다. 

청중/독자는 이러한 전개에 당황할 수 있으나, 이러한 반전은 필연적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선포가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9)


예수와 유대인의 갈등은 예수의 고난을 위한 필연적인 장치이다. 유대인의 적대감은 예수의 죽음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의 부활을 위한 필연적인 선행 과정이므로, 요한은 갈등을 자신의 고유한 수사적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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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저자의 고뇌는 유대주의의 연속성과 성전의 비연속성을 극복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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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에 모세 전승이 나온다는 견해는 검증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반면 1장에 다윗 기독론이 묘사되어 있다는 주장은 세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요한복음 1장에서 모세 전승과 다윗 전승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지금은 차후 연구를 위해 관련 글을 남겨 두는 선에서 만족해야겠다.

요한복음 1장과 모세 기독론
요한복음 1장과 다윗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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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를 모세의 시내산 사건과 연결 짓는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Craig S. Keener는 요한이 "현현의 언어"(the language of theophany)를 사용했다고 서술한다(17쪽). 그는 요한이 모세가 경험한 시내산 현현 사건과 예수의 성육신을 평행 시켜,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도록 의도한다고 진술한다(20쪽, 자세한 내용은 23―25쪽을 보라). 이러한 의도는 요한이 예수를 모세를 능가하는 분으로 묘사하려는 데 있다(21―25쪽).

 

더 자세한 내용은 중요한 내용이라 적절한 시기에 다루려고 한다.

 

참고 자료

Keener, Craig S. "We Behold His Glory!" (John 1:14). In John, Jesus, and History, Vol. 2: Aspects of Historicity in the Fourth Gospel. Paul N. Anderson, Felix Just, S.J., and Tom Thatcher eds. (Atlanta, G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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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새 계명에 담긴 새로움의 의미 / 우성훈 / Canon & Culture 4권 1호 2010-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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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율법과 사랑 / 문우일 / Canon & Culture 7권 1호 2013-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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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차후 연구를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례나 근거 제시는 빈약하다.

요한복음에는 '빛'과 '어둠'처럼 '대조'되는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한때 학계에서는 이 용어들의 기원이 헬레니즘의 '이원론'이라고 주장했으나, 지금은 유대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유대인들이 예언서의 '심판'과 '회복'이라는 주제와 '메시아사상'에 익숙했다는 전제 아래 유대주의 기원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굳이 헬레니즘 문헌을 보지 않아도, 예언서와 묵시문헌에 이분법적 표현이 제법 많이 나타난다.

나는 이 용어들의 기원보다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저자의 의도라도 생각한다. 요한은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명확하게 밝힌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이 구절에서 요한이 '그리스도'란 단어를 사용했다고 헬레니즘의 영향을 주장하는데, 다른 구절에서는 '메시아'라는 단어도 나온다. 요한이 두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여 로마 황제 숭배 사상을 배격하는 동시에 유대주의 메시아사상을 예수에게 적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요한복음의 청중이나 독자가 누구인지 단정 지을 수 없다. 학계에서는 요한공동체라는 용어를 선호하지만, 요한의 저술 의도를 고려한다면 복음 전도의 측면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너희로 ... 믿게 하려 함이요"라는 말은 아직 요한의 가르침을 듣는/읽는 무리 가운데 불신자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녀보면 알겠지만,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교인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다 신자로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요한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다 신자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나는 요한복음이 불신자들을 향한 전도지침서인 동시에 공동체 내부를 위한 신앙교육서로 간주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최근에 초기 유대주의 내 다양한 관점에 관한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경향을 고려해, 우리는 청중/독자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 따르면, 저자는 청중/독자가 가진 선지식을 바꾸려고 한다. 공동체 일원이든 외부인이든 그들의 사상과 신앙에 도전하고 복음에 근거한 믿음을 갖도록 이끌려고 한다. 문학적 기법으로서 대조의 기능은 이러한 의도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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