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그러한 제안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말과 관련된 유대 전승뿐만 아니라 상호 사랑과 타인에 대한 희생이라는 배경은 다른 언사들에서 영감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쓸데없는 일로 만든다.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53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에 대한 해설.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목자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은 목자-왕 전승에서 유래 없는 사례로 남는다. 또한 21장 베드로에 대한 명령에 목자 비유를 사용하셨고, 그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두 본문 모두 목자 비유는 사용하여 죽음을 암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4)
게다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친구로 재설정하여, 목자의 죽음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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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차후 연구를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례나 근거 제시는 빈약하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21:20)이다. 그는 베드로의 죽음(21:19) 이후에도 살아 남았으며, 예수의 관한 증언을 위해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21:24-25). 

요한복음, 생존자의 증언


저자는 예수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으며(특히, 19:26-30), 베드로와 함께 빈 무덤의 현장에 있었다(특히, 20:2-10). 또한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특히, 21:7, 20).

요한의 증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목격한 자신의 체험이자, 예수의 가르침이 실현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상반되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대조 기법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무리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복음(=예수의 구속사 사역)이 곳곳에 전파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그 사건을 부정하는 무리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유대인의 불신앙은 그들의 견고한 믿음과 사상에 기인한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유대인의 전통에 익숙했으나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깨우셨다. 요한은 유대인의 불신앙과 자신의 증언 사이에 간격을 줄어야 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가장 강력한 위험으로 작용했다고 짐작된다. 요한은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성전 재건축과 맞물려 등장한 유대주의(Judaism), 그리고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Davidic messianism)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즉 요한은 성전 파괴를 율법 준수와 결부시키려는 움직임과 다윗과 같은 메시아의 등장을 고대하는 메시아 사상의 고조를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는 모세에 관한 언급은 유대주의를 비판하는 기능을 하며, 다윗에 관한 언급을 자제하여 메시아 사상의 부상을 누그러뜨린다.

예수의 증언자, 모세

유대인의 믿음과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


여기에 절기는 예루살렘 성전과 긴밀하게 엮여있다. 요한은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치환하며(2장), 절기를 통해 예수의 사역과 연결하여 유대주의를 끊어내는 동시에 예수의 사역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로 결론내린다.

목자-양 은유와 수전절


요한은 더이상 유대주의와 전통적인 메시아 사상을 고수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구속사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 사고를 예수로 대치해야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에 비해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이 영적인 복음서이기 때문이 아니다. 요한이 마주한 현실의 난관을 뚫고 헤쳐나가야 하는 증언자의 책무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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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주제(=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의 영향 탓인지, 요한복음을 분석할 수록 이 복음서가 구전되고 기록되었을 당시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고 그려진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과 '하나님의 아들'(1:34)이라는 모순적 표현이 중첩된다. 특히 요한복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라는 문구를 통해 예수의 죽음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문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저작 연대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본다. 성전 중심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파괴는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하는 중요한 의도가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유대인들은 오랫 동안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 1세기는 헤스모니아 왕조 이후 메시아 사상이 고취되어가던 시기였다. 이때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가르쳤고 실제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메시아 사상의 정점에 닿아 있는 다윗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의 기대를 자극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나는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이 그 정점에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특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21:15-17)고 명령하신 부분이 인상 깊게 남는다. 또한 예수께서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살아남는다. 그는 사도들의 순교에도 살아남아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한다(21:24-25).

예수의 부활을 붙들지 않는다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암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어쩌면 예수의 생애를 공유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와 동일한 좌절감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이런 총체적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설득해야했다. 요한복음 1장이 로고스 기독론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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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의 죽음을 통한 대속 사역을 말하는 동시에 차후 요한공동체에 닥쳐올 (이미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수난을 암시할 수 있다.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과 마찬가지로, 목자의 죽음을 진술하고 있다.

두 구절은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교회, 좁게는 요한복음의 청중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난을 담은 본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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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께서는 일관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셨으나, 청중들은 도무지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도리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이적을 베푸는 메시아에 대한 환상이 커져만 간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구절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된 다윗의 후손, 즉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로 간주했다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사건을 해석하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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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 전공자들은 "신약의 구약 사용" 혹은 "상호본문성"으로 일컬어지는 방법론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신약 전공자들은 고대 근동부터 구약을 거쳐 제2 성전기 문헌을 기본으로 다뤄야 하고, 때로는 다른 신약 본문을 다뤄야 한다.

요한복음 연구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에스겔을 많이 인용했다고 주장한다. 비슬리-머리는 그 중 하나이다.

복음서 기자는 에스겔의 사역을 특징지었던 예언자적인 통찰력이 그 계시자에게 특별히 존재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1:48; 2:23; 11:14; 13:38을 참조).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210.

나는 개인적으로 요한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본문은 스가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재학 시절 요한복음에 관한 두 가지 페이퍼를 제출했다. 하나는 게리 버지(Gary M. Burge) 교수의 "The Gospel of John" 수업 과제물로 제출한 "Reading John 7:37–39 in light of Zechariah 14”이란 페이퍼이다. 다른 하나는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라는 페이퍼로, 버지 교수의 지도로 진행된 Independent Study이다. 내가 관찰한 본문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주류인데, 나는 스가랴의 영향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버지 교수는 본인이 에스겔의 영향을 지지하는 주류에 속하면서도 나에게 모두 "A"를 주었다. 다만 "에스겔 혹은 스가랴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 없이, 요한은 에스겔과 스가랴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고 주장해도 충분하다"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아직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는 박사 과정 학생으로서 요한복음은 예언자 스가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주장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더구나 스가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언자가 에스겔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에스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주장한 들 틀린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 역시 에스겔에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어서 아직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요한복음의 저자가 스가랴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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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도 요한복음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주제들이 모두 '죽음'과 연결이 되고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목자의 죽음을 말하는 특이성(10장)이 그러하고, 성전 청결 사건과 죽음을 연결하는 흐름(2장)이 그러하다.
 
요한복음은 주제적으로 복잡하면서 정교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분석하면서 특이점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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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설명한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대속죄일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 내 추정에는, 예수의 속죄 사역은 대속죄일 날 행해지는 대제세장과 아사셀 중 그 어디와도 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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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를 '로고스'에 초점을 맞춰 헬레니즘 문화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난 성육신을 강조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1장을 보면, 예수의 승천 기사가 없다. 예수의 마지막 행적은 시몬 베드로에게 목양(=전도와 양육)을 명령하시고,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즉, 요한복음 처음과 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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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사(sacrifice)의 궁극적인 기능은 현존(God's presence)이라고 생각한다. 지도교수의 Jewish Sacrifice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내 생각과 동일한 지향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과 성전(Temple) 역시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요한복음은 제사와 초막절, 그리고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성육신으로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이 주장은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가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라는 가정과 맞닿아 있다.
 
큰 틀은 이러한데 세부사항을 채우는 것이 내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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