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Jörg Frey는 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에서,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은 수동적인 순종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택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요한의 십자가 신학이 바울과 루터처럼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고난과 영광이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예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수난의 복음(a Gospel of the Passion)이라고 할 만하다고 진술한다. 또한 그는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의 조명 아래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재해석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예수의 승천에 관한 의문이 해결된다. 왜 요한은 예수의 승천을 다루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천상적 기원과 복귀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16:28).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의 승천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앞서 "요한복음 1장과 21장: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라는 글에서 “요한복음의 처음과 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같은 관찰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Frey의 주장대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공존한다면, 우리가 흔히 예수의 영광을 상징하는 장면인 승천 기사를 다룰 이유가 사라진다. 이미 십자가 사건으로 충분하다.

요한복음에는 승천 기사만이 아니라 그 이후를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Frey의 주장대로, 요한 공동체가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그 해석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개연성이 높아진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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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울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봐야 한다. Jörg Frey의 요한과 바울의 십자가 신학에 관한 비교는 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236-23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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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30f는 저자가 자율적으로 자료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선택하고 통합했다는 증거이다. 
(2) 'relecture'의 개념은, 후대 편집자들을 고려하더라도, 네 번째 복음서 저자의 생각을 지속하는 데 목적이 있다.
(3) 편집의 흔적은 꽤나 분명하지만, 그보다 신학적 이유가 결정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광범위하게 요한복음 1:1-20:31이 문예적 일치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183-86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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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y는 마틴 루터와 바울의 용어,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요한복음을 오독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177-178).

Käsemann는 참된 theologia crucis의 의미를 위해하기 위해서는, 바울과 루터에게 나타나는 λόγος τοῦ σταυροῦ (십자가의 도, 고전 1:18)에 대한 논쟁적인 성격을 필수적으로 인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78-179). 하지만, Käsemann은 요한복음에서 어느 누구도 더이상 십자가의 신학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179-180). 이에 대해 Frey는 요한 신학이 바울의 기준에 의해 넓게 재고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요한 신학은 바울신학 (그것의 루터적인 해석)을 넘어서 요한복음에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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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y는 요한복음의 예수의 수난사화(Passion narrative)에서 예수는 공관복음과 달리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지적한다(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173-174).

이러한 관찰은 내 연구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에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다"(τίθημι; lays down, vv. 11, 15, 17, 18).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빼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린다고 강조하신다 (18절).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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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 박사 학위 논문과 관련하여, 내 생각을 정리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다.

서론은 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론은 책의 출발점을 제시하며, 전개 방향성을 압축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을 통해 예수의 정체와 사역에 관한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 또한, 예수께서 마주하신 동시대 유대인들의 믿음에 대해 알게 된다. 2장은 1장의 연장선이자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자리한다.

요한복음 1장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1-18 로고스 기독론
1:19-36 세례 요한의 선포와 세례 베품을 통해 예수의 정체가 밝혀지다
1:37-5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다

첫번째 단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1절로,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두번째 단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29절로, 예수의 궁극적인 사역을 밝히고 있다.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번째 단락에서는 48-50절에 등장하는 나다니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니엘을 통해 당시 유대인의 믿음을 유추할 수 있다. 나다니엘의 고백은 예수의 신적 능력에서 출발한다.

요한복음 2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2:1-12 가나 혼례
2:13-25 성전 청결 사건

가나 혼례 사건에서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4절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의 특별함이 그의 지혜인지, 아니면 능력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예수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전제가 있다.

11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그의 기적이다. 여기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라고 하여 제자들의 남다른 믿음을 부각시키는 해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전 청결 사건은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다는 분기점이다. 요한이 성전 청결 사건을 진술하는 방식에 유의하자.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한은 예수의 공식적인 사역, 그가 의도한 첫 사역을 유대인의 유월절과 연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앞서 가나 혼례 사건에서 언급한 "내 때"(4절)을 의미한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성전 청결을 행한 표적을 요구하는데, 이는 예수의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이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빗대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신다. 예수의 사역은 십자가 상에서 당할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 그 사건들이 발생한 이후에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다.

이렇듯 요한복음 1장은 예수의 신적 기원과 지상 사역, 유대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이어서 2장은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믿음을 드러내고, 예수의 첫 공식 사역으로서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 그의 구속사적 사건을 가르치며, 유대인들의 믿음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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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h M. Stovell는 요한복음 1:29-34와 10장을 "왕권"(kingship)으로 설명하면서도, 예수의 죽음이라는 요소를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또한 절기를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추후 내 글에서 그녀의 책을 다루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언급한 책은 『Mapping Metaphorical Discourse in the Fourth Gosp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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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 구상을 정리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으므로 자세한 인용은 생략한다.

요한복음에서 "헬레니즘과 유대주의"과 "반유대주의와 유대주의"는 주요 논쟁에 속한다. 

1. 헬레니즘 논쟁
요한복음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로고스, 이원론(생명과 죽음, 어둠과 빛 등), 시간 등이 있다.

하지만 로고스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그 기원으로 설정할 수 있고, 지혜문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원론은 지혜 문헌이나 기타 유대 문헌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고, 이러한 대조는 인류 보편적 사고이므로 헬레니즘에 종속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야기의 전개가 로마식 시간을 사용한다는 주장은 요한이 강조하는 "Jesus' hour"로 반박이 된다. 대표적인 예는, 가나 혼례식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라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이후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는데 주저하지 않으신다. 또 다른 예로는,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살해 시도에는 물러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음의 시기를 조절하셨다. 내 기준에서는 절기가 요한복음의 유대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2. 반유대주의 논쟁
요한복음이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모세의 율법과 대립되는 양상, 회당 축출(9:22) 등으로 인해 고립된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을 상정한다. 

하지만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자신의 가르침이 어긋나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대표적으로 5:45-46이 그 근거가 된다.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회당 축출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예수의 사후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이 30년 정도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한 상황에서, 회당이 큰 의미를 가질지 의문이다.


3. 요한의 유대주의적 사고
요한복음이 유대주의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는 단서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만 유대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변형적으로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한다는 특수성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과 유대 절기를 예로 다루어본다.

내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이라고 풀어 쓰는 Davidic Messianism은 분열 왕국의 멸망 이후 예수의 지상 생애 당시까지 이어졌다. 요한복음에는 10:1-21과 12:12-16에서 그 사상이 나타난다.

10:1-21은 흔히 '선한 목자 담론'로 불리며, '새로운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을 고대하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했다. 다만 요한은 이 전통적인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왕이 등장한다고 기술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토대로 목자의 희생을 설파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12:12-16도 동시대 유대인들이 Davidic Messianism를 갈망했다는 단서가 된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 중에, 아니면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여 열국을 제압하고 왕으로 추대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믿었다(12-15절). 예수의 제자들도 그렇게 믿었었으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이 예언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16절).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갈망했던 Davidic Messianism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절기는 또다른 유대주의의 증거이다. 요한의 예수는 절기에 맞추어 움직이신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인들로부터 반박을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확고한 두 기둥을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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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에 예수의 첫 표적으로 기록된 가나의 혼례를 유대 메시아 사상에 입각하여 '종말론적 신랑되시는 예수'를 주장하는 해석자들이 있다. 예수는 혼례의 주인공인 신랑이 아니라 참석자이므로, '종말론적 신랑'이라는 주장은 해석자의 신학적 틀을 과도하게 주입한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본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예수의 첫 표적이 갖는 의미에 달려 있다.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와 동행했던 제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본문의 흐름을 따르면, 혼례 이전까지 5명의 제자가 있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제자(1:37). 이 둘 중 하나는 안드레로 밝혀지며,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가 추가된다(1:40-42). 후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더해진다(1:43-51). 여기까지 최소 5명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표적으로 인해 그를 믿었다. 즉 이들은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다.
 
또한, 이 무대에서 잊혀질 수 있는 예수의 어머니를 기억해야 한다(2:1-5).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잉태를 다루지 않았다. 전문 용어로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어머니를 부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구절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를 특별한 존재로 믿고 있었다는 단서로 작용한다.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를 어떤 존재로 믿었는지 명백히 밝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예수가 떨어진 포도주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녀 역시 예수를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로 바라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유대 메시아 사상을 전복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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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이원론을 비롯한 대립적 개념의 사용이다. 하지만 이같은 용례는 요한이 후대에 '복음서'(gospel)라는 장르(genre)로 분류되는 자신의 증언을 위한 기법 중 하나일 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유대기독교인들의 현실 혹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매우 암울하다. 대표적으로 성전파괴(2장), 회당축출(9장), 순교(21장)는 예수의 제자들과 따름이들이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빛과 어둠, 죽음과 영생 등과 같은 대조 기법은 현실의 암울한 상황을 이기게 해주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요한복음이 복음서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동시에 묵시적 성격이 매우 강한 본문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로마황제숭배까지 더해지면 요한계시록과 같이 묵시의 절정에 이르지 않았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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