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내가 볼 때 예레미야서는 시대 상황을 가장 현실적으로 묘사한 역사서의 면모를 갖춘 예언서이다. 또한 은유(metaphor)와 같은 언어적 기법을 꽤 많이 사용한 예언서이다. 내 관심사인 목자-양 비유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예레미야의 은유 분석에 관한 책은 Benjamin A. Foreman, Animal Metaphors and the People of Israel in the Book of Jeremiah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이 있다. 비록 내 관심사에 한정해서 Chapter 2: Pastoral Metaphors를 중점적으로 읽고 있으나 이만한 자료는 없다고 여겨진다.

내 판단에 의하면, 그의 책은 최소한 두 가지 제약이 있다. 하나는 목자-양 비유, 그의 언어로는 Pastoral Metaphors의 범위이다. 그가 연구한 범위는 6구절(3:15; 10:21; 23:1-4; 31:10; 50:6-8; 50:17-19)이다. 나는 최소 15구절을 범위로 설정한다. 다른 하나는, Foreman은 제목에 반영되어 있듯이 은유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하지만, 나는 은유를 넘어 문맥 내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Foreman은 구절마다 은유의 진위를 가리고 주변 구절과 인과 관계가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에 열중한다. 이러한 작업은 의미가 있다. 아래 인용은 그 예시이다.

The metaphor, which begins in the first line of verse 17, is comprised of two images: a sheep and several lions. … In verse 18 the leaders of Babylon and Assyria are no longer lions, but regular kings. … The imagery of verse 17, therefore, is not carried over into verse 18 since there are no terms relating to the semantic fields “shepherding” or “lions” in that verse.
- Foreman, Animal Metaphors and the People of Israel in the Book of Jeremiah, 82.

이러한 연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내가 Foreman의 분석에 빚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인 '목자-양 유비'의 어휘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어서, '사자'라는 단어도 때에 따라 유비의 범위에 포함할 수 있다거나, 목자와 왕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내 기준에 언어학적 연구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저자가 인유를 사용하는 목적과 방식을 미세하게 놓치게 된다. Foreman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의 한계가 느껴지는데, 아직 한창 예레미야서의 목자-양 비유를 분석 중이라, 그 한계는 나중에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오늘은 이 책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남기는 선에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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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레미야는 목자-양 비유를 약 17번 정도 사용하였는데, 이 빈도는 성경에서 가장 많은 활용이고, 그 용례는 다양하게 적용된다.

예레미야는 '목자'라는 칭호를 이스라엘 왕 혹은 지도자와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도 사용한다. 목자의 '선함'과 '악함'은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다. 심판이란 주제도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예레미야는 목자-양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지만, 바벨론을 향해서는 철저한 심판을 선포한다. 대표적으로 23:1-8은 전자에 속하고, 50장은 후자에 속한다. 흥미롭게도 목자-양 비유의 빈도는 후자가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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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왕과 이방 왕에게 동일하게 '목자'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이방 왕을 '목자'로 지칭하는 사례는 모두 이스라엘 심판과 관련이 있다(6:3; 12:10).

6:3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고 부르신다(25:9; 43:10).

25:9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3:10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이러한 예시들은 전형적으로 이스라엘 왕에게 사용되었던 '목자'와 '종'이란 칭호가 이방 왕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방 왕들이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이 그 당시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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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목자-양 비유를 살펴보면, 이 비유가 다양한 용례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직분과 위기를 표현할 때 목자-양 비유를 사용하는 사례이다.

이 중 첫 번째로, 예레미야는 자신의 직분을 목자에게 비유한다(17:16).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전통적으로 목자는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자신이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두 번째로,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양에 빗대어 표현한다(11:19; 12:3).

11: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1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이러한 두 용례는 목자-양 비유를 전형적인 목자-왕 전승에 한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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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 사이에서도 계파라고 할 수 없지만, 개인에게 좀 더 영향을 많이 준 선대 예언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일례로, 스가랴는 에스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이 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아마도 미가가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 26:18)

예레미야는 당시 공공의 적이었다. 비참하게도 고향 사람부터(11:21. cf.1:1),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했다(18:18-23; 26:8).

이런 분위기에서 예레미야를 변론하는 무리가 있었다(26:16-24). 흥미롭게도, 예레미야의 선포를 뒷받침하는 예언자로 모레셋 사람 미가가 언급된다(26:18).

학계 선행 연구에서는 영향력의 근원을 찾을 때 대선지서를 언급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면 이사야를 언급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학계의 관행에 따른 예상과 달리, 그 지방의 장로의 일부는 미가를 언급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지방에서는, 최소한 그 지방의 장로들 사이에서는 미가의 예언이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미가와 예레미야 사이에 목자-왕 전승을 대입해 보면 그 개연성은 더 커진다.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예레미야는 목자-왕 전승을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23장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대표적인 목자-왕 전승 본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미가와 예레미야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이 지점에서 이사야 역시 목자-왕 전승을 사용했으나, 그의 관심과 메시지가 갖는 독특한 위치를 강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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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에 앞서 현재 제가 읽고 있는 피터 R. 아크로이드의 『이스라엘의 포로와 회복』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사상과 그와 연관된 전승의 몇몇 측면은 이미 검토되었다. 초기의 예언 자료, 특히 이사야 자료에 대한 수정과 재해석도 재앙을 반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관성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갖고 있는 자료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의 어떤 면은 이미 언급하였다. 


[출처] 피터 R. 아크로이드, 이스라엘의 포로와 회복, 144. 


이 글에 의하면, 저자는 예레미야가 이사야 자료를 수정하고 재해석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일관성이 없으며, 현존 자료의 한계로 인해 예레미야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다고 진술한다.

내가 볼 때 이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 미흡한 선행 연구와 섣부른 가정.

첫 번째, 저자의 선행 연구는 미흡했다. 예레미야의 비교 대상이 이사야에 한정되어 있다. 예레미야에 앞서 남유다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한 예언자들이 있었다. 실제로 예언자의 발화에서 핵심은 '심판'과 '회복'이다. 저자가 비교군을 이사야 활동 시기 전후로 한정했다 해도 스가랴, 미가, 나훔 등이 있다. 마땅히 저자는 이사야 이외에도 세 선지자의 글을 분석하고 예레미야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추적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자의 비교군 축소는 선지자에 국한되지 않고 전승에서도 나타난다. 인용한 부분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저자의 전승 연구는 신명기 사관이 주요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신명기 사관과 예언자의 메시지 사이의 교류를 인정하는데, 그만큼 예언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전승 중 하나로 신명기 사관으로 보고 비교 분석을 하고 있다. 물론, 역대기 사관이나 기타 전승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만, 그 비중은 현저히 낮다.

두 번째, 선행 연구 없이 섣부른 가정으로 결론을 도출했다. 비교군을 협소하게 한정했다는 건, 저자가 예레미야가 이사야의 영향을 받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는 암시일 수 있다. 나는 이런 경향성이 놀랍지 않다. 수많은 구약 연구자들이 대선지서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지금껏 내가 접한 자료는 그랬다.

정리하자면, 저자의 진술과 달리 우리가 가진 자료의 한계성이 문제가 아니다. 저자의 편견(혹은 고정관념)이 문제다. 예레미야는 이사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그의 암묵적 전제가 선행 연구 범위를 축소했고, 필연적으로 부실한 연구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자신의 지식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경우 이러한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연구자는 자신의 가정을 넘어서 선행 연구 범위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자신의 지식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경우 이러한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연구자는 자신의 가정을 넘어서 선행 연구 범위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다룬 주제는 내 관심사와 깊이 관련이 있으며, 다음에 다시 다룰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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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A. Foreman의 연구에 의하면, 예레미야서에서 목자 은유는 총 6번(3:15; 10:21; 23:1–4; 31:10; 50:6–8, 17–19) 나타난다. 이 중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본문은 23장이며, 나는 Foreman와 달리 23:1-8을 범위로 설정한다. 지난 주에 이 구절에 대한 본문해석과 목자 은유의 특징을 분석했고, 어제는 다른 본문들을 대충 살펴봤다. 대략 훑어봐서 단정하긴 어렵지만, 예레미야의 목자 은유에 대한 윤곽이 그려진다.

1. 예레미야서에서 목자 은유의 특징은 23:1-8에서 잘 나타난다.
2. 예레미야의 목자 은유는 고대 이스라엘 목자-왕 전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본에 충실한 형태를 갖고 있다.

박사 과정에서 연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예레미야의 목자 은유를 전부 살펴보고자 한다. 한 달 정도면 기본적인 분석은 마칠 수 있을 듯 하다.

Benjamin A. Foreman, Animal Metaphors and the People of Israel in the Book of Jeremiah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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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서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둘 사이의 침묵 이면을 탐구한다.


Dalit Rom-Shiloni, “Ezekiel and Jeremiah: What Might Stand Behind the Silence?,” Hebrew Bible and Ancient Israel 1 (2012): 203–230. 

https://english.tau.ac.il/sites/tau.ac.il.en/files/media_server/imported/15/files/2012/10/Rom-Shiloni.HeBAI-2-2012203-3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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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특히 예루살렘의 왕들이 더 이상 살아남지 않았음을 기억하며 예레미야는 소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상상한다. 이때 그가 소망을 갖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 이미지 중 하나가 시편 23편의 선한 목자에 관한 것이다. 다윗의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여정은 예레미야에 의해 이스라엘의 여정으로 바뀌고 패배, 파괴, 흩어짐에서의 회복과 귀환의 비전으로 재형성되었다. 선한 목자 서사에서 국가적 이야기로의 이런 개작은 시편을 구성하는 이미지에 몇 가지 극적인 변화와 추가 사항을 도입함으로써 가능했다. - 케네스 E. 베일리, 선한 목자, 95.

요새 미가서의 목자 은유와 예레미야 23편의 목자 은유에 대한 분석하다 보니 여러 발상들이 떠오른다. 그 중 하나는 시편 23편과 예레미야 23편의 관계이다. 현재 내 짐작으로는 베일리의 견해와 다른 주장을 제시할 수 있을듯 하다. 지금 다루고 있는 과제물들을 빨리 완성해야 하는데, 연구주제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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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nant Motif in the Context of Judgment and Salvation in the Book of Jeremiah by Dr. Kenneth D. Mulzac

https://digitalcommons.andrews.edu/dissertations/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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