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인공인 에녹은 꿈을 통해 하늘의 계시를 전달받는다. 동물묵시록(1 Enoch 85–90)은 에녹의 두 번째 꿈에 해당하며, 그는 자신이 본 내용을 아들 므두셀라에게 전한다 (85:1). 이 본문에서 에녹의 일생은 언급되지 않는다. 아담부터 셋의 계보(85:1–9)와 노아 일대기의 시작(89:1) 사이에는 천사의 타락과 하늘의 심판(86:1–88:3)을 다룬다. 에녹은 하늘의 심판에 관한 꿈에서 천사로부터 하늘로 들려 올려져 타락한 천사의 심판을 본다(87:2–88:3). 첫 번째 심판의 대상은 타락한 천상적 존재이다(86:1–88:3). 타락한 천상적 존재는 지상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으로 간주된다.
노아의 가족은 모두 흰 황소이다(89:1). 가족 구성원 가운데 노아만 비밀을 전수받으며, 그에게 비밀을 전수한 존재는 네 천사 중 한 명이다(89:1). 노아는 비밀을 듣고 두려움에 전율을 느낀다(89:1). 이어서 그는 황소로 태어났으나 사람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89:1). 그는 자신을 위해 배(편의상 앞으로 방주로 표기)를 만들고 그의 가족이 그 안에 거한다(89:1). 홍수 심판은 지상적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89:2–8). 노아가 흰 황소에서 사람이 되는 시점은 방주를 만들 당시로 보인다(cf. 89:1, 9).
에녹과 노아는 각각 천국의 계시와 비밀을 공유 받지만, 그들은 피심판자들에게 권면이나 회개를 선포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에녹은 하늘의 계시를 자신의 아들 므두셀라에게 가르쳐줄 뿐이다. 노아는 천사가 전해준 비밀을 통해 방주를 만들어서 그의 가족은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지만, 비밀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는다. 홍수 심판의 대상은 지상적 존재이다.
천상적 존재를 위한 일차 심판과 지상적 존재를 위한 이차 심판은 피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다. 두 심판에 대한 에녹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녹은 천상적 존재를 향한 일차 심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상적 존재, 특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에는 고통을 느낀다. 가령 에녹은 환상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당하고 (89:54)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89:55),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한다(89:57).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신다(89:58). 하나님의 침묵은 심판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모세의 역할은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유대 전통에서 모세는 선지자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모세의 선지자 직분에 관해서는 Wayne Meeks의 The Prophet-King: Moses Traditions and Johannine Christology (Leiden: Brill, 1967, 최근 복간본은 Eugene, OR: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7)이 주요한 자료이다. 모세의 선지자 직분에 관해서는 예외적인 적용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유일무이하게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에녹1서는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 듯하다. 양이 높은 바위의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다시 양떼로 돌아온다(89:29). 이후 줄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내산 사건과 흐름이 비슷하다. 동물묵시록에서 주요 인물의 일생을 간략하게 진술하는 특징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시내산 현현은 꽤나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89:29–35). 그러나 시내산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건인 돌판 수령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Nickelsburg는 양떼의 눈이 열리는 현상(89:28)은 계시와 관련이 있고, 이와 반대로 눈멈(blindness)는 배교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1 Enoch, 380–1). 이 주장에 관해서는 면밀한 관찰과 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차후에 다룰 예정이다. 내가 주목하는 특징은 에녹 1서에 모세의 돌판 수령에 관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독대한 사건을 모세의 선지자 직분의 명분으로 삼는 전통은 차치하더라도, 고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된 돌판 수령을 생략한 이유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에녹 1서가 율법주의(legalism)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어쩌면 심판의 필연성은 율법 준수 여부와 무관하다고 믿어서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모세에 관해서 언급해야 할 또다른 특징은 그는 양으로 묘사되지만, 후에 사람이 된다는 진술이다. 여기서 천상적 존재와 구별해야 한다. 천상적 존재는 사람의 형상(heaven [beings] with the appearance of white men, 87:2)을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사람은 아니다.
엘리야(89:52)에 대한 진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 전통을 중요시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통념과 달리 동물묵시록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선지자는 엘리야가 유일하다. 엘리야를 포함한 모든 선지자는 양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사역은 실패로 끝난다(89:51–53). 다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89:51), 유일하게 엘리야는 건짐을 받고 하늘로 올림을 받는다(89:52). 엘리야에 관한 독특한 진술은 승천한 엘리야가 종말의 때에 하강한다는 기록이다(90:31). 하강하는 숫양의 정체에 관해서는 유다 마카비와 엘리야를 두고 논쟁이 있는데, 나는 엘리야가 적합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Nickelsburg가 지적한대로, 유다 마카비는 승천했다는 기록이 없다(1 Enoch, 405). 천상적 존재가 아닌 이상 지상적 존재는 승천이 선행되어야 하강이 가능하다. 이때 엘리야는 숫양으로 묘사된다. 엘리야는 지상에서 양으로 묘사되었다가 하강할 때에는 숫양으로 그려진다. 또한 에녹과 같이 하강하는 인물이라면, 유다 마카비가 아닌 엘리야가 개연성이 크다. 여기서 에녹과 엘리야의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 사이에는 여러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승천을 경험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상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승천이라는 경이로운 경험은 에녹 1서에서 에녹이 계시 수령자가 되는 근거이자, 엘리야가 최후의 날에 숫양으로 하강한다고 묘사되는 이유로 작용한다. 엘리야가 왕국 분열의 종말과 관련된 인물이라서 중요하게 서술되었다는 주장이 있음(Fröhlich, “Symbolical Language,” 630–631. Chae, Jesus as the Eschatological Davidic Shepherd, 99, n.19에서 재인용).
동물묵시록에서 모세의 돌판 수령과 엘리야를 포함한 선지자의 사역에 비중을 두지 않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종말의 때에 닥칠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과 예언을 준수한다고 해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과 예언을 준수한 시기보다 배역한 기간이 더 길다. 이러한 믿음이 모세와 선지자에 관한 진술에 묻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에녹 1서는 율법과 예언의 중요성보다는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의 현실화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녹 1서의 결정론적 관점은 “책”(90:17)의 존재에서 잘 드러난다. 동물묵시록에서 심판이 실행될 때 책이 언급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는 에녹 1서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연구주제 > 에녹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사와 사람의 구분 (0) | 2021.05.14 |
---|---|
동물묵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칭호 (0) | 2021.05.10 |
동물묵시록에 나타난 황소와 숫양의 의미 (0) | 2021.04.28 |
동물묵시록에서 '사람'으로 묘사된 역사적 인물 (0) | 2021.04.22 |
셀류키드 제국를 경험한 고대 유대인들의 유다 마카비을 향한 기대 (0) | 2021.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