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시자 모든 사람이 불평한다.[1]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무시려고 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실제로 불평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πάντες)이 아닌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3]그렇다면, 이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 불평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기 때문이다(5:30; 15:2).[4] 실제로, 동사 διαγογγύζω의 주체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다(15:2).[5]동사 γογγύζω의 주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다(5:30). 그 중에서도 특별히 바리새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실질적인 적대세력은 바리새인이기 때문이다.[6]사실, 누가복음에서 율법학자(γραμματεῖς)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νομοδιδάσκαλος)을 가리킨다.[7]이러한 사실은, 5:17 5:21의 평행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누가는 자신의 독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다.[8]또한, 사도행전 5:34(ΦαρισαῖοςὀνόματιΓαμαλιήλ νομοδιδάσκαλος)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활동했다는 정보를 준다. 비록 율법을 가르치던 자들이 모두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두 집단이 바리새인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9] 더군다나,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동일하게 여겼다(18:11).[10]바리새인들의 전승을 이어받은 랍비 역시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랍비들은 세리를 도둑과 동일하게 여겼고(m. B. Qam. 10:2),[11] 급기야 살인자와 동등하게 여기기도 했다(m. Nedarim 3.4).[12] 이렇듯 세리는 부정한 존재로 여겨져서, 그들이 들어간 집은 물론 내부에 있는 물건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길 정도였다(m. Ohar. 7:6).[13]이러한 증거에 따르면, 세리를 죄인으로 여긴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14]그러므로, πάντες는 과장법이다.[15] 더구나, 모든 세리들이 죄인 취급 당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가이사랴의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 간의 토지 분쟁이 생겼을 때 유대 유명들과 세리 요한이 함께 플로루스(Florus)에게 중재를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다.[16]또한, 8 달란트를 제공하고 중재에 대한 약속을 받아두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지도자들과 요한이 앞장서서 플로루스에게 호소하다가 옥에 갇혔다는 기록도 있다.[17]이 기록에 의하며, 요한은 세리였음에도 지도자들과 함께 분쟁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유대사회에서 부정한 자로 취급 받고 배척 당하는 세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전체가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견해[18]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더구나 누가는 세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3:12; 5:27; 7:29; 15:1; 18:10).[19]그렇다면 세리들은 모두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부자가 되었을까? 유대 지역 세리였던 카피토(Capito)는 세금 행정관(administrator of taxes)으로서, 가난했지만 부자가 되었다.[20]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 역시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리고 지역은 무역 중심지이다.[21] 더구나 그는 세리장이다. 삭개오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은 세리는 토색으로 부자가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준수할수록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유대사회에서 존경을 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세리장이라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22] 이 구절에서는παρὰ ἁμαρτωλῷ가 강조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세리들과 그들의 편법 행위에 대한 감정이 반영되었을 것이다.[23] 동사καταλύω는 문자적으로 “짐 싣는 동물의 장구를 풀어주다”(to unhitch pack animals)라는 의미이다.[24] 9:12에서는“유숙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문맥상 식사교제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의 집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의 죄를 나눈다는 의미이므로, 예수께서 죄인인 삭개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된다.[25] 그러므로 예수의 상식에 어긋난 행동은 이들이 불평하는 원인이 된다.[26] 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의 식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념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죄인들을 환영하신다(참조 7:34).[27]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군의 무리들이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오직 예수만이 죄인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28]


[1] Bock, Luke 9:51-24:53, 1518.

[2] 참조.Bock, Luke 9:51-24:53, 1519.

[3] Bock, Luke 9:51-24:53, 1519.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Johnson이 언급한 7:34, 39는 동사 γογγύζω 혹은 διαγογγύζω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제외되어야 한다.

[5] BockEvans는 별다른 설명 없이 바리새인으로 단정 짓지만(Bock, Luke 9:51-24:53, 1519; Evans, Luke, 283), 본문은 분명히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6] Evans, Luke, 91, 97.

[7] 참조.Bock, Luke 1:1-9:50, 479; Bovon, Luke 1, 17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212.

[8] Bock, Luke 1:1-9:50, 479. Bovon의 지적대로, νομοδιδάσκαλος5:17에서 한 번 사용되고, 이후로는 줄곧 γραμματεῖς로 사용된다(Luke 1, 178).

[9] Bock, Luke 1:1-9:50, 479.

[10] Evans, Luke, 282.

[11] H. Danby e.d. & tr., The Mishna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346.

[12] tr. Danby,Mishnah, 267.

[13] tr. Danby,Mishnah, 726.

[14] Evans, Luke, 91.

[15] Nolland, Luke 18:35-24:53, 905; Stein, Luke, 467.

[16] Flavius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 Vol. ,trans. H. St. J. Thackera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 285-288.

[17]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 .292.

[1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19] Bock, Luke 9:51-24:53, 1513 n.2; D.A.S.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JSNT41(1991): 22.

[20] Philo, On Embassy to Gaius, Vol. , trans. F. H. Col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199.

[21] Evans, Saint Luke, 662.

[22]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7.

[23] Bock, Luke 9:51-24:53, 1519.

[24] Bock, Luke 9:51-24:53, 1518;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4;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940.

[2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26]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434.

[27] Evans, Luke, 120.

[28] David A. Neale, None But The Sinners: Religious Categories in the Gospel of Luke,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Supplement Series 58 (Sheffield: JSOT Press, 1991),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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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말씀묵상 2011. 8. 19. 10:34
[매일성경] 사도행전 2:14-36

#1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에 대한 세 가지 반응. (1) 방언의 내용은 알았으나 놀라 당황하며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무리 (2) 새술에 취했다고 조롱한 무리 (3) 선지자 요엘의 말씀의 성취로 여긴 무리.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2
선지자 요엘은 성령을 받으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남종과 여종은 예언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능력은 예수께서 행하신대로 증언을 위해서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

#3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전해야 할 복음은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리라"(36절)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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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최근 바울과 종말론 연구 동향>이다. 처음 출판된 시기가 2007년이고, 번역본은 2011년에 나온 비교적 최신 정보를 담고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울'과 '종말론'에 대한 연구의 최신 경향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터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바울의 '종말론'에 대한 책이다. 게다가 1-3장은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4장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5장은 소망에 대해 다루었다. 저자의 연구범위를 감안해보면, <최근 바울과 종말론 연구 동향>이라는 제목은 과장이라 할만하다.

통합적인 주제로 본문을 다루지 않고 본문의 핵심내용을 중심으로 특정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좀더 성경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하려는 방식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종말론의 연구 범위를 축소시켜버린 느낌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간결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필자로서는 뭔가 아쉽다.

연구 동향을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자들의 견해만 나열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견해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마다 해석경향을 알려주고 적합한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방식을 벗어나서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의 의도가 본문연구를 통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있지 않아서 학자의 견해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면 그 만큼 다양한 사고 과정을 거쳤다는 증거는 될 수 있다.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라도 학계의 연구 동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학자들의 견해는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따름이다. 본문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지 참고할 수 있을 따름이다. 더구나 이러한 연구는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저술목적에 따라 최근에 발표된 학자들의 연구자료들을 통해 그들의 해석 경향을 파악하는 목적을 두어야 한다. 만약 이 책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찾고자 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최종업데이트 201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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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을 연구하면서 관련 도서들을 읽고 있는데,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각 도서들의 내용을 정리하고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결과물로,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의 <바울의 종말론>에 대한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성경의 내용을 다루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진행해야 할 작업은 주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신학서적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본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 토대는 단어연구와 원전주해에 근거해야 한다. 아무리 논리적 개연성이 뛰어나고 설득력이 있어도, 성경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개인의 기준에 따라서는 다소 까다로운 조건일 수도 있으나,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스는 아주 탁월한 학자이다. 그는 바울의 종말론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성서신학적으로 접근했다. 1장의 첫 부분부터 '종말론'이란 단어에 담긴 의미와 용례를 살펴보며 시작한다. 그리고 성경본문을 다루고 자신의 견해를 서술해가는 과정은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 많은 문헌들과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검토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명쾌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하지만(필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지금처럼 성경연구방법론이나 주해방법론이 발전되지 않은 시대에 이와 같은 연구물을 내놓았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프린스턴신학교에 성서신학을 전공으로 개설한 때가 1893년이고, 보스가 처음으로 성서신학교수로 재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는 정말 탁월한 학자이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종말론의 연구범위에 구원론을 포함하고, 종말론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여전히 구원론과 종말론을 구분하여 연구하는 추세에 있는데, 보스는 구원론과 종말론의 연관성에 주목했다. 물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둘 사이의 연관성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아쉽게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포함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종말론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 책은 1979년에 처음 출판된 제법 오래된 책이다. 국내에서는 1989년에 출판되었고 지금은 아쉽게도 절판된 상태이다. 하지만 바울의 종말론을 연구하려면 가장 먼저 읽어봐야 할 책이라 할만 하다. 그래서 영문독해에 지장이 없다면 원서로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이 책의 최대단점은 번역수준이다. 일단 본문을 읽는데 다소 껄끄럽다. 그 이유로는 번역작업의 고단함이 큰 몫을 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익숙한 단어를 낯선 단어로 번역한 사례가 종종 눈에 띈다는 건 번역수준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더구나 유독 괄호와 역자의 보충설명이 많다. 관례적으로 괄호는 번역이 원문을 다 표현하지 못할 때 사용하고, 보충설명은 독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저자가 담지 않았거나 잘못 전달할 경우 추가하는데, 그 빈도가 지나치다.
 

최종업데이트. 201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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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는 예수의 명령대로 서둘러 내려왔다.[1]삭개오의 행동은 예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음을 보여준다.[2] 사실 누가는 예수의 명령과 삭개오의 반응에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했는데,[3] 그 의도는 삭개오의 순종을 부각시키는데 있다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 삭개오가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에서 그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4]이와 반대로 부자 관원은 예수의 말씀에 근심하였다(18:23).[5] 또한, 삭개오는 예수를 즐겁게 맞아들인다. 삭개오의 기쁨은 한 개인의 감정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2:10)고 했던 언약이 성취되는 순간임을 드러내주는 표현이다.[6]그러므로, χαίρων은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한다.[7]이러한 삭개오의 반응은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와 동일하다(καὶ εὑρὼν ἐπιτίθησιν ἐπὶ τοὺς ὤμους αὐτοῦ χαίρων, 15:5).[8]



[1] Bock, Luke 9:51-24:53, 1518.

[2]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5.

[3] Bock, Luke 9:51-24:53, 1518.

[4] Bock, Luke 9:51-24:53, 1518; Stein, Luke, 467.

[5] Evans, Luke, 283.

[6]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5.

[7]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5.

[8] Alan C.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a Defense,Biblica 71 (1990):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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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있는 곳과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1]본문은 예수께서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2]누가에게는 그 이유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3] 따라서 예수께서 초월적 지식을 가지셨다고 단정 짓기에는 어렵다.[4] 그렇지만, 예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5]예수께서는 자신의 요청에 주요 단어들을 사용하셨다.[6] σήμερον은 종종 사건의 긴급성 혹은 응답의 필요성을 내포한다(2:11; 4:21; 5:26; 13:32, 33; 22:34; 23:43).[7] 여기에서는 예수의 초청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8]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계획이 성취될 때가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19:9; 참조 2:11).[9]동사 δεῖ는 종종 신적 필연성(divine necessity)을 드러내는데 사용된다(2:49; 4:43; 9:22; 13:16, 33; 15:32; 17:25; 22:37; 24:7, 26, 44).[10] 그래서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에 초점이 맞춰진다.[11] 비록 예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12]그러므로 δεῖ는 여기에서 하나님에 의한 중요한 전환점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13]동사 μένω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역하도록 보내셨을 때 사용했다(9:4; 10:7).[14]특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10:7)고 하셨으므로, 삭개오와의 식사교제를 기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요청은 예수께서 삭개오를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준다.[15] 삭개오는 선지자를 맞이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된다.[16]누군가의 집에 머무르는 것조차도 주인이 아닌 예수님께 달려 있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의 주도권 역시 예수님께 있다.[17]



[1]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2] Bock, Luke 9:51-24:53, 151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Stein, Luke, 467.

[3] Stein, Luke, 467.

[4] Evans, Luke, 283.

[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6] Bock, Luke 9:51-24:53, 1518.

[7] Bock, Luke 9:51-24:53, 1518.

[8] Bock, Luke 9:51-24:53, 1518.

[9]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Stein, Luke, 467.

[10] Bock, Luke 9:51-24:53, 1518; Stein, Luke, 467.

[11] Bock, Luke 9:51-24:53, 1518.

[12] Bock, Luke 9:51-24:53, 1518.

[13]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1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15] Bock, Luke 9:51-24:53, 1518.

[16]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17] Bock, Luke 9:51-24:5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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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바울신학연구동향: 바울신학의새관점을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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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의 최근 연구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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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새 관점'의 루터에 대한 비판
http://210.101.116.28/W_kiss9/57500955_pv.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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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210.101.116.28/W_kiss9/57500951_pv.pdf

바울에 대한 새 관점적 접근과 개혁신학
http://theology.co.kr/wwwb/CrazyWWWBoard.cgi?db=koreabank&mode=read&num=602&page=1&ftype=6&fval=&backdep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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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추천도서 2011. 8. 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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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성경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따라서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최근 성경을 해석하는데 마카비혁명이 미친 영향력에 대한 강의를 듣고난 후 이 시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읽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가장 탁월하다는 Shaye J. D. Cohen의  <From the Maccabees to the Mishnah>를 읽어보려 했으나, 내 영문독해력의 한계 때문인지 기대보다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다. 반면에 이 책은 간결하면서도 알찬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탁월함은 각 장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술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갖고 읽은 부분은 6-8장(제 6장 바빌론 유수와 귀환: 바빌론에 의한 파괴로부터, 제 7장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더 대왕과 하스모니아 왕국의 흥망, 제 8장 로마의 지배: 유대인 반란과 제2성전의 파괴)인데, 고대 이스라엘 역사서 가운데 제2성전기에 대해서는 이 책이 가장 뛰어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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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시대의 이스라엘  (0) 201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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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보고자 했으나 무리들이 앞을 가려 볼 수 없게 되자, 삭개오는 예수가 지나가게 될 곳에 위치한 돌무화과나무(συκομορέα)를 행해 달려가 그 위를 오른다.[1]“이러한 품위 없는 행동은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그 무언가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2] 삭개오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담긴 의미는 단어 배열을 통해서도 강조된다. εἰς τὸ ἔμπροσθεν은 중복적인 표현이지만,[3]προδραμὼν의 의미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4]즉 중복적인 표현을 통해서 삭개오의 행동을 부각시킨다. 무리에 의해 예수를 볼 수 없었다고 해서,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삭개오의 행동은 앞 단락의 소경을 떠오르게 한다. 소경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고침을 받기 위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으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다(18:37-39).그러나 소경은 더 크게 외쳤고, 예수께서는 소경에게 소원을 물으셨고, 그의 대답을 들으신 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18:42).소경은 예수께로 나왔고, 앞서 가는 자들의 방해에도 예수를 만나 믿음으로 구원(σῴζω) 받았다. 소경과 마찬가지로, 삭개오 역시 예수께로 나왔고 무리들의 방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의 행동은 분명 예상 밖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도 그의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5]예수께서 앞선 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로 나온 소경의 믿음을 보셨듯이, 삭개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σῴζω) 시켜주실 것이다(10).


[1] Bock, Luke 9:51-24:53, 151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2] Stein, Luke, 467.

[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4]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433.

[5] Stein, Luke,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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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1] 본문에는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예수에 대한 소문이 삭개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2] 다시 말해, 당시 유명 인사였던 예수에 대해서는 소식들을 통해 익숙히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으므로,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3] 다만, 동사 ζητέω 10(ἦλθεν γὰρ ὁ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ζητῆσαι καὶ σῶσαι τὸ ἀπολωλός)에도 사용되었으므로, 누가가 예수의 사역과 관련지어 생각하도록 의도했다고 짐작할 따름이다.[4] 하지만 삭개오는 두 가지 장애물에 부딪힌다: 한 가지는 예수를 둘러싼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작은 키이다.[5] 삭개오는 몰려든 사람들이 자신의 앞을 가리는 바람에 도저히 예수를 볼 수 없었고, 더 큰 장벽은 그의 키가 보통 사람들 보다 작았다는 것이다.[6]여기서 ἡλικία는 실제적인 키를 의미하지만(참조 눅 2:52),[7]죄인 취급을 받았으므로(7), 삭개오는 “부와 직위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을 지나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작은 자(littleness)[8]였다고 볼 수 있다. 삭개오의 왜소한 체구와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그를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작은 자로 여기도록 작용했다.[9] 삭개오는 예수와의 거리적 간격만큼이나 소외당했던 인물이었다.[10] 그렇다고, 여기에 모인 무리가 예수를 보려는 삭개오의 시도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11]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므로(5:1, 15, 19; 6:17, 19; 7:9, 11; 8:4, 19, 40, 42, 45; 9:11, 37; 11:14, 27, 29; 12:1; 14:25; 18:36; 19:39; 23:48),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유난히 키가 작았던 삭개오의 시야를 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의 집에 머무르시려는 예수님께 불평까지 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7).



[1] Bock, Luke 9:51-24:53, 1517.

[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Stein, Luke, 467.

[3] Bock, Luke 9:51-24:53, 1517.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5] Bock, Luke 9:51-24:53, 1517.

[6] Stein, Luke, 467; Norval Geldenhuy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9), 470.

[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8] Nolland, Luke 18:35-24:53, 907.

[9] Green, The Gospel of Luke, 670; Nolland, Luke 18:35-24:53, 907.

[10] Bock, Luke 9:51-24:53, 1517.

[11] Green은 의도적이라고 본다(The Gospel of Luke,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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