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초교파신학 과제로 제출한 글을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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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십자가만이 신학의 규범이다: 십자가 신학의 등장

1514-19

 

십자가 신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진술은 명제 19 명제 20에서 발견된다:

 

19.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피조물 안에서 인식될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리어져서는 안된다.

 

20. 그러나 있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보여진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려질 하다.

 

루터에게 있어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참된 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중략) 십자가는 실제로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나 계시는 하나님의 뒷모습(posteria Dei) 대한 것이다. 있는 것이 하나님의 뒷모습이라는 바로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의 간접적인 계시로서 간주되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된 계시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은십자가의 겸손과 수치안에 계시되어 있다.

(1) 십자가 신학은 사변적인 것에 예리하게 대립하여 있는 계시의 신학이다.

(2) 계시는 간접적인 것이며 감추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중략) 계시가 오직 믿음의 눈에 의해서만 인식될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3) 계시는 인간의 도덕적인 활동이나 피조 질서 안에서 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인식되어 있다.

(4) 그의 계시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믿음의 문제이다. (중략) 루터에게 있어서십자가의 신학자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 나타난 그의 계시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현종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진술인참으로 당신은 숨어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진리를 인지할 있는 사람이다. 숨어계신 하나님의 개념이 십자가 신학의 중심에 놓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숨어계심,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안에 살아간다.

(5) 하나님은 특별히 고난을 통하여 알려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언급이지만, 하나의 깊은 영적인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십자가 신학의 근본적인 의도는 단지 하나님이 고난을 통하여 알려진다는 사실(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건 아니면 개인의 고난이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이다. (중략) 어떤 사람이 의롭다 여겨질 있기 위해서는, 그는 먼저 그가 죄인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전에 그는 먼저 완전히 비하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비하시키기도 하시고 의롭게도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행동은 그의 본래의 본성에 속한 행동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신다.’ 낯선 행위는 본래적 행위의 목표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이다. 고난의 중요성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이해되던지 아니면 인간의 시험으로 이해되던지 간에,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그의 본래적 행위를 수행하는 낯선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인트커는 시험에 관한 중요한 연구에서 루터가 하나님 자신을 시험의 원천으로서 간주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그리고 나서 그를 의롭다하기 위해서 인간을 공격하신다. (중략) 마귀는 본래적 행위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낯선 행위를 수행한다. 고난이나 악을 세상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넌센스의 침입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의 신학자 그와 같은 고난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배로서 간주한다. 왜냐하면 살아 계셔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수행하시는 바로 하나님이 정확하게 바로 그와 같은 고난 안에 계시되어 있으며 또한 숨어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의 숨겨진 계시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그것은 그것을 마스터하고자 하는 이성의 시도를 좌절시킨다:십자가의 사변은 오늘날 매우 많이 신비 안에 감추어진 것들을 흘려버린다. (중략)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길들을 이해할 없으며, 따라서 그것 자체를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의 낯선 행위의 경험을 통하여, 죄인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안에서 완전히 흔들려진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을 저주받은 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선 사역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죄인은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을 얻을 있다. 시험의즐거운 절망 경험함으로써 죄인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하여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루터가 언급한 바와 같이, 시험은그것이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남겨둔다: 그것이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는 없으며, 실제로는 오히려 그분을 우리에게 가까이 데려온다. 참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문, 사망, 그리고 지옥의 겪어냄을 통하여서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사람이십자가의 신학자 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중략) ‘살아 있는 , 또는 오히려 죽은 것과 저주받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 신학자를 만들지, 이해하거나 책을 읽거나 사변하는 것은 신학자를 만들지 못한다.’.

 

 

루터의하나님의 발견에 나타난 십자가 신학의 전조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본질(오직 의를 하나님 앞에서 유효한 것으로 이해) 죄인 자신의 전적인 불의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 불려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택한 것을 저주하시고 인간이 저주한 것을 선택하심으로 인간의 심판에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졌다.

 

그리하여 1515 이후로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이성의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데 역사하였던 방식을 이해할 없다는 그의 확신의 결과이며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러한 긴장은 분기점에 이르게 되고, 믿음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사이에는 거의 영구적인 것에 가까운 분리가 결과로 생겨난다. 이성은 십자가에 의해 걸려 넘어진다: 믿음은 기쁨으로 그것을 끌어안는다.

십자가 신학과하나님의 발견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신학적인 언어의 유비적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중략) 십자가 신학은 신학적 언어의 유비적 성격에 대한 프로그램적인 비판을 나타낸다. 십자가 신학과 초기의 신학적 혁파 다에서 본질적인 특징인 역설 아래에 감추어진 것이라는 개념은 지금껏 알려진 신학적 담론에서 유비의 원리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을 나타내며, 그리고 적어도 점에 있어서 20세기 초의 변증법적 신학의 기원과 병행된다. (중략) 한편으로 루터가 모든 신학이 관계되어야만 하는 말씀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남아있게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Crux probat omnia!) 하나님에 대한 책임 있는 모든 기독교적 담론은 십자가에 기초되어야만 하고, 기초에 근거한 비판에 따라 주장되어야 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적 언어의 유비적 성격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은 사람이 어슴푸레한 반편의 진리인 신학적 여명 안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략) 십자가의 말슴은 선개념화된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며, 그리고 사람들에게 만약 그가십자가의 신학자 되고자 한다면 그의 선개념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그리고하나님의 영광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계시되었으나 숨겨져 있다. 그것들은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

 

 

결과적으로 루터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어떤 통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허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찰들은 순전히 인식의 단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격적인 도움을 믿을 있는 어떤 동기유발도 제공하지 않는다. (중략) 루터가 믿음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단계에서 실존적인 단계에로의 이행은 오직 이성의 기초 위에서만은 이루어질 없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 보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지식 안에서 궁극적으로 근거지워진다. 하나님이 감추고 계신 모든 것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알려진 어떠한 기질이나 신적인 표징들이 알려진 것이지, 하나님이 의지하시는 것에 대한 것은 아니다.

 

(1) 숨어계신 하나님은 그의 계시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이다. (중략) 하나의 계시 사건에서 믿음의 눈은 계시되신 하나님을 인식하며, 거기서 감각적인 인식은 오직 숨어계신 하나님만을 발견할 뿐이다.

(2) 숨어계신 하나님은 그이 계시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숨어 계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노예의지에 관하여」에서 루터의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점차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 (중략)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예정의 수수께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거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의 실재를 인정하도록 만든다. (중략) 우리의 연구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반트가최종적인 분석결과로 루터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의 숨겨진 형태 외에 하나님의 다른 숨어계심은 없다 말한 것에 동의할 있다. (중략) 그의 딜레마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며, 노예의지에하여」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실패한 것은 자신의 원리를 포기한 것에 대한 고발이다.

경험적으로 인식되어질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뒷모습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인식될 있는 자체에 기초한 이성은 인식된 상황이 결코 선개념된 상황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현재할 없다고 추론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발이 땅에 남아있지 않도록 십자가 위에 땅으로부터 세워진 것처럼 기독교인의 믿음도 경험 안에 어떤 발목 잡힘도 허락해서는 안된다. (중략) 루터의 믿음의 교리는 감각의 아래에 숨겨져 있는 숨겨진 형이상학적 영역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방법에 관련된 것이며, 그것은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정수를 이루고 집중되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고찰들을 기초로 해서 기독교인의 삶이 믿음과 경험 사이의 끝없는 긴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루터에게 있어서 계시된 진리는 그것의 역설적인 형태 아래에서만이 계시되기 때문에, 경험은 단지 믿음에 대립해서만 있을 있다. 경험된 지각과 숨겨진 게신 사이의 변증법은 불가피하게 일부의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그가 경험한 것과 화해시킬 없음을 발견함에 따라 근본적인 질문과 질문과 의심에로 이끌어간다. 루터 자신의 손으로부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긴장에 대한 최고의 토론은 우리의 연구에 의해 커버되어지는 마지막 시기에 시작되어진 Operationes in Psalmos에서 발견된다. 저작의 내용을 점검하기에 앞서 그것이 쓰여진 맥락의 특징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신학 때문에 죽음의 위협 아래에 있었으며, 그리고 바로 위협 안에서 그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리고 또한 기독교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숨어 계심의 패러다임을 보았다. (중략)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세계의 전적인 무력화는 루터가 그의 신학이 기초로 감고 있는 근거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루터가 시험을 개인의 전적인 주관적인 상태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중략) 시험을 평가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신비로운 사춘기가 이르러서 사라지게 되는 영적인 성장통의 어떤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계속 이어지는 진정한 특징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영적인 삶의 진보를 위하여 계속해서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그리고 이것은 계속되는 시험의 경험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난 사이의 상관관계는 시험 당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보증되어지는데, 분은 시험의 필요성과 궁극적인 목적 다를 드러내신 분이다.

시험의 위기는 어떻게 해결되어지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해결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는데,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바로 그와 동일한 시험으로 고난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다. (중략) 성육신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자신에게 감당시키셔서 우리가 그의 의로움을 소유할 있다는 사실 아래에 놓여있다: 우리 모두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을 통하여, 오직 믿음을 통하여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인식되어지고,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것의 힘이 사유되어질 있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에 대하여 상관을 맺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중략) 첫째로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드는 것이다. (중략) 둘째로 믿음은 신자들과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유대로서, 영적인 결혼 안에서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의 단순히 외적인 또는 법적인 책임전가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6

십자가 신학의 기원과 의미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연구가 세계대전직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략) 여기서 간과할 없는 문제란 문명의 파괴와 유기 가운데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갈보리의 유기 사건에 숨겨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루터의 선언과 십자가에 버려진 그리스도에 대한 루터의 선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할 없는 도처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으로 다가왔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함께 괴르델러에 의해 제기된 중심질문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리터가 주장한 것처럼 시대정신을 포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지금처럼 기독교회의 약함과 어리석음에 절망한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신학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 성결대학교 재학시절 읽은 책이다. 줄곧 개혁신학을 토대로 하는 교회에서 성장해온 내가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에 기반한 신학(특히 조직신학) 배울 어려움을 제법 겪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다져진 기반이 있는데, 그에 상충하는 신학을 배우다 보니 왠지 허공에 떠있는 느낌이었고, 머릿속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태로 얼마간을 보내다가 신학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런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는지 파악하고자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은, 칼빈과 웨슬리를 다룬 책들을 위주로 읽다가, 루터, 종교개혁, 쯔빙글리, 낙스 등으로 범위가 점차 넓어지게 되었고, 책들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간 나를 힘들게 했던 의문들을 해소하고 붙들어야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었다. 물론 와중에도 웨슬리 신학도 소화해내려고 노력했다. 이런 과정을 보내는 가운데 결정적인 깨달음을 책이 바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다.

칼빈의 5 강령이 맞느냐 아니면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웨슬리 신학이 맞느냐로 논쟁을 벌이느라 시간을 헛되이 보낼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복음의 결정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집중하도록 해준 바로 책이다. 책을 통해 그간 얽매여 있었던 내가 자유를 얻었다! 이상 타협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소모적인 논쟁거리로 이상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어졌다! 진정으로 붙들어야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일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가지는 우리는 비교적 중요한 데에 많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빈주의자이든 웨슬리안이든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박혀 죽으셨다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셨다. 신학적 노선(혹은 신학적 견해) 따라 구원을 받는 아니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구원의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모든 부차적이라 있다. 물론, 어떠한 신학적 노선(혹은 신학적 견해) 갖고 있는지도 중요한 사항이 있지만, 복음과 구원에 비한다면야 비중은 새의 깃털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끝까지 붙들어야 진리이며,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있다.

책을 통해 가장 중요한 무엇인지 알게 이후로는 루터가 깨달은 십자가 신학을 최우선시하게 되었고,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신학이든 간에 나에게는 십자가 신학 보다 우선 순위로 자리매김하지 하지 못한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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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씀」[각주:1] 목차정리하면서, "사본을 통해 보는 하나님의 말씀 -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나"라는 글을 보았다. 아래 인용문은 저자가 작성한 글을 인터넷에서 찾아내 주요 내용만 복사하였다.

필자는 사사기 11장에 대한 위의 두 한글 번역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그와 더불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음을 다음의 몇 가지 점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가) 입다가 무모한 서원을 하여 결국 자기 딸을 죽이게 되었다고 보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입다의 부도덕성 내지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사기 11-12장을 자세히 살펴볼 때 입다는 그리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요 오히려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입다가 기생에게서 태어난 서자였다고 해서 (11:1) 그가 부도덕한 사람이었다고 간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는 적자들로부터 학대를 당하여 부당하게 집에서 쫓겨나서 돕이라는 곳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11:2-3).

11장 3절 하반절의 한글판 번역 또한 독자로 하여금 입다가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이를 개역은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고 하였고, 표준 새번역은 "건달패들이 입다에게 모여들어 그를 따라다녔다"로 번역하였다. "잡류" 또는 "건달패"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아나쉼 레이킴'이다. 형용사 '레이크'는 문자적으로 "비어 있는, 텅빈"이라는 뜻인데, 이 용법으로는 삿7:16 ("빈 항아리"); 창37:24; 41:27; 신32:47; 느5:13; 겔24:11; 사29:8; 왕하4:3; 잠12:11; 28:19에 등장한다. 두 번째로 이 문자적인 뜻이 연장되어 "빈털털이의, 천대받는, 경시되는, 경박한"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런 용법은 삿9:4; 11:3; 대하13:7; 삼하6:20 네 곳에 등장한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을 때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여 그와 함께한" 것처럼 (삼상22:1-2), 입다에게 모여든 사람들 역시 "잡류" 또는 "건달패"라기 보다는 일종의 천민 계급이었을 것이다. 입다는 자기에게 모여드는 천민들을 가지고 사병 (私兵) 조직을 구축하였겠고, 이때문에 정규군대 조직이 없었던 당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암몬 자손의 침입을 받았을 때 입다를 통솔자로 초청하였던 것이다 (11:4-11).

입다는 출전에 앞서 암몬 자손의 왕에게로 사신을 보내어 야웨 하나님과 과거의 역사에 호소하면서 평화적 해결책을 종용한다 (11:12-13). 입다의 이러한 태도는 율법의 가르침에 부합된다. 하나님은 암몬, 모압, 에돔을 치지 말라고 명하셨다 (신2:5,9,19). 입다는 과거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간섭을 구체적으로 회고하면서 (11:12-27) 가급적 암몬 자손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시도하였다. 11장 12-27절의 내용을 통하여 볼 때, 입다는 역사 속에 나타난 야웨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입다는 길르앗의 적자들로부터 쫓겨나서 돕 땅에 거하며 "건달패"의 두목이 된 불량배였으며, 따라서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서 입다는 얼마든지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어리석은 서원을 내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하겠다.

나) 이제 입다가 서원한 일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입다가 서원한 바를 (30-31절)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점은 두 가지 문구로 묘사되어 있다. 첫째 문구는 "야웨께 돌린다"는 것이요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는 야웨께 속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둘째 문구는 "번제로 바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구의 결합 형식은 "갑 또는 을"로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의심할 나위없이 "갑 곧 을" 또는 "갑, 다시 말해서, 을"의 형식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자기 집 문에서 맨먼저 나와 영접하는 자를 야웨의 소유로 인정하여 그를 번제로 바치겠다는 것이다.

번제의 히브리어 명사형 '올라'의 어근은 "오르다, 올라가다"를 뜻한다. '올라'에는 어원상 "태우다"라는 뜻이 없지만, 그 용법에 있어서는 거의 예외없이 "온전히 불살라 바치는 제사"를 의미한다. 삿11:31의 "번제로 바치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창22:2) 하신 것과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취한 조처를 통해 볼 때,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이삭을 잡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입다는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번제 명령을 염두해두고 자신의 서원을 발설하였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입다가 의도한 바는 가축이나 애완용 동물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입다의 서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그는 인신 번제를 서원한 셈이 된다.

전쟁에 임하여 급한 나머지 깊은 생각없이 부주의로 인신 번제의 서원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야웨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다"는 기록을 (11:29) 미루어 볼 때, 입다가 언급한 "올라"는 다른 의미를 염두해둔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야웨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고 (삼상1:11), 사무엘을 얻은 후 그대로 실천하였다 (1:28). 자식이 없어 구박받던 한나는 서원대로 아들을 얻자 전혀 망설임이 없이 그 아들을 성소에 바친 것이다. 야웨께 평생 바쳐진 사무엘은 번제물로 죽지도 아니하였고, 그렇다고 평생 총각으로 남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나의 서원대로 "평생 야웨께 바쳐졌다"고 볼 수 있다. 입다와 한나의 서원을 동일한 성격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나의 서원을 통해서 볼 때, 입다의 서원도 어느 정도는 한나의 서원과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바울의 권면을 (롬12:1)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 11:34-40을 통하여 히브리어 원문 또는 각종 고대 번역본에 "죽는다"는 단어가 없다는 점은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큼을 입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입다의 딸과 그녀의 친구들이 애곡한 바는 "그녀의 처녀됨을 위하여"였다. 이 표현을, 그 자체적으로 볼 때,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라고 해석해야 할 근거는 전혀 없다. 입다에게 있어서 무남독녀를 평생 처녀로 보내게 한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딸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별히 39절의 "그는 자기가 서원한 바를 그녀에게 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는 문장 순서를 통해볼 때, 서원을 행한 결과가 바로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시 말해서 입다와 같이 인신 번제를 서원할 경우 번제물로 뽑힌 그 사람을 평생 동정으로 보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출처 : 구약 성경의 맥을 따라서 http://www.biblehome.net/korean/OTIntroduction.htm


이 글에서 나타나듯이, 성경해석과 성경번역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그 중요도만큼이나 연구하고 설교하는 설교자가 드문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며, 그 반면에 사본학을 통한 원문복원작업의 소중함이 한층 더 깊게 다가온다.


사사기 11장 강해[ 입다]사본을 통해 보는 성경도 추가로 알아두자.
  1. 1995년 7월호, p.195~2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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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Works에서 해당 본문을 원어발음으로 듣는 기능을 찾다가 발견한 사이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숙하지 못한 상태라 정확한 발음에 신경 쓰이고 있는데, 반복해서 듣다 보면 학습에 큰 도움이 되겠다.

MP3 audio files for Greek New Testament Audio
https://archive.org/details/AudioNewTestamentEnglish-greekMp3ZipFilesCompliedByAlterna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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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성경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도구로는 단연 BibleWorks가 손꼽힌다. 본격적인 학업과 연구에 매진하려면 BibleWorks 활용에 능숙해야 하기에 관련자료를 찾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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