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 기말시험답안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사람이다. 예언은 선지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약에서 예언의 대상은 대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지금으로 보자면, 예언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선포된다. 그렇다면,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철저한 심판을 외쳤다. 회복을 말하긴 하지만, 주된 내용은 죄로 인한 심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났으며, 미슈파트(공평) 츠다카(정의)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대가는 가혹했다. 그래서인지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멸망의 선지자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 예언의 초점이 미래에 맞춰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예언은 현재를 중시하고, 미래는 조건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부지런히 예언하도록 이유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악하기에 지금 당장이라도 돌이키라고 촉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된다고 경고하고자 함이다. 예언은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가가 아닌, 현재의 죄악을 떨쳐버리고 돌이키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자신의 백성들이 고통으로 괴로워하기 보다는 언약에 순종함으로써 복되게 살아가길 원하기에, 현재의 삶에 대한 경고이자 교훈으로 예언이 주어지는 셈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참담한 미래를 향해 치닫고 만다.

여기에서,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중요하다. 선지자는 삶의 현장에서 예언을 선포하며, 선포된 예언은 삶의 현장에서 성취된다. 선지자들은 대체로 미래보다는 현재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예언은 현재와 미래의 긴장을 야기했다. 예언은 전해지는 내용이 아닌 성취여부에 따라 예언과 거짓예언이 판가름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언이 가진 모호함으로 인해 예언의 내용을 해석하고, 성취여부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예언과 역사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예가 바로 이사야서이다.

이사야서는 전반부(1-39), 중반부(40-55), 후반부(56-66) 구성되어 있다. 중반부가 기록된 바벨론 포로기에는 예루살렘의 이사야가 전한 예언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했다. 예루살렘 귀환 후에는 또다시 후반부를 더해야 했다. 역사적 배경이 바뀌었으므로, 상황에 맞는 예언의 재해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선지자는 예언을 해석하는 역할을 했으므로, 동시대를 살고 이사야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누군가가 시대에 맞게 예언을 재해석하여 중반부와 후반부를 각각 기록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예언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며, 현시대적이다.

현재의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다. 예언자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예언에 대한 해석 역시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결론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 현재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미(already)’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뿐만 아니라 미슈파트와 츠다카를 준행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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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2월 12일 최종 수정판


1. 원문의 진정성[각주:1]

 

대다수의 학자들은 7 53-8 11절을 원문으로 여기지 않는다.[각주:2] 외증(외적 증거) 내증(내적 증거)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구절을 원문으로 없는 외적 증거가 여럿 있는데, 근거들은 크게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1) 초기 사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의 품질이 좋지 않다.

(3) 교부와 주석가들이 언급하지 않는다.

 

(1) 초기에 기록된 사본에 발견될수록 기록과 보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일 가능성이 높은데,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베자 사본은 5 세기경에 기록되었다.

(2)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이며, 특히 베자 사본(D) 대표적이다. 소수의 사본이라 할지라도 공관복음에 평행구절을 가지고 있거나, 다중증거(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서방 사본) 경우라면 원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원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원하는 사본이 다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방에 치우쳐 있다. 게다가 베자 사본의 품질이 미치지 못하며, 본문을 담고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다. 구절을 7 36절이나 44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 25 뒤에나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3) 초기 교회 교부들은 내러티브를 생략하고 있으며, 10 세기 이전까지 동방교부들에 의해 인용된 적이 없었다. 12세기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nus) 구절을 검토하긴 했으나, 역시 사본의 품질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내적 증거 역시 원문의 진정성을 지지하지 않는다.

 

(1) 요한 문체가 아니다.

(2) 7:52에서 8:12로 이어지는 연결이 보다 자연스럽다.

 

(1) 문체가 요한 보다는 공관복음의 저자들, 특히 누가에 가깝다.[각주:3] 공관복음이 유사하긴 하지만, 누가는 특히 가난한 , 억압받는 , 사회에서 거절당하는 , 도움 받을 곳이 없는 여인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각주:4] parege,neto(그가 들어갔다) 누가가 27 사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여기뿐이다.[각주:5] pa/j o` lao.j(많은 사람들) 누가는 7 사용하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다.[각주:6] 게다가, 공관복음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같이 언급되지만, 요한의 원문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각주:7]감람산”(to. o;roj tw/n evlaiw/n, 8:1)이라는 장소는 공관복음에서 7 사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에서만 언급된다.[각주:8] kate,krinen(정죄하다) avpo. tou/ nu/n(다시는) 역시 공관복음에서는 사용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렇지 않다.[각주:9] 더욱이,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생”(8:4) 아닌 랍비”(참조 1:38) 규정한다.[각주:10]

 (2) 7:53-8:11 인해 앞뒤 문맥이 부자연스럽고, 이야기의 흐름이 끊긴다.[각주:11] 오히려, 단락은 누가복음 21 38절과 근접하다.[각주:12] 그래서,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한 사본들이 발생했을 것이다.[각주:13]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셨던 상황에 어울린다.[각주:14]

 

따라서, 요한복음 7 53-8 11절은 원문이 아닐 것이다.

 

 

2.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

 

8:2-6a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4). 간음(moiceu,w)이란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각주:15] 간음은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으며( 20:14; 5:18), 어기면 죽는다( 20:10).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인만을 끌고 왔다(3). 여기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번째는 간음한 여인만 끌고 이유이고, 번째는 여인을 죽이지 않고 예수께로 끌고 이유이다.

 

간음이 혼자 짓는 죄가 아님에도, 여자와 함께 남자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각주:16] 추측해보면 범죄현장이 발각되었을 남자 혼자 재빨리 도망쳤다거나, 현장에서 잡아들일 있었는데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었을지도 모른다.[각주:17] 이러한 불공정한 상황은 우리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그녀는 죄인이다.[각주:18] 어쨌든 간에, 고소자들은 공정한 판결 보다는 예수를 딜레마에 빠뜨리는데 관심을 두고 있음은 틀림없다.[각주:19] 죽음으로 죄값을 치러야 하는 죄인이라 하지만, 회당에 끌려와야 했으며(2-3), 한낱 고소거리로 전략해버렸다(6a).

 

간음은 여자가 유부녀이거나 약혼한 처녀일 때에 간음이 성립하며(22:22-24),[각주:20] 고소자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했으니, 여인은 약혼한 처녀일 가능성이 크다.[각주:21] 22-22-24 보면 유부녀는 죽이라고만 했으나, 약혼한 처녀인 경우에는 돌로 죽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쉬나(Sanhedrin 7:4)에서는 유부녀일 경우에는 돌을 던져 죽이도록( 심각한 죄라고 보았기에), 약혼한 처녀일 경우에는 목을 졸라 죽이도록 하였지만, 예수 당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스럽다.[각주:22] 결과적으로, 여인은 약혼한 처녀에 해당한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여인이 유부녀이든 약혼한 처녀이든 간에, 간음죄를 지었다는 것과 처벌로 죽임을 당한다는 점이다.

 

번째 의문은 금새 풀린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십계명대로 처벌하기 보다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6a). 여기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순된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십계명에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20:10)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소거리로 사용했다(6).

 

6b-9

예수께서는 즉시 대답하는 대신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6b). 예수께서는 무엇을 쓰셨을까?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레미야 17 13절로 근거로 해석해왔다.[각주:23]

 

u`pomonh. Israhl ku,rie pa,ntej oi` katalipo,ntej se kataiscunqh,twsan avfesthko,tej evpi. th/j gh/j grafh,twsan o[ti evgkate,lipon phgh.n zwh/j to.n ku,rion ( 17:13)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야훼 당신을 버리는 모든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당신을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야훼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역)

 

구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을 땅에 기록하셨다. 이러한 해석은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을 기록한다고 해서 어떠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각주:24] 이와 다르게 죄명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각주:25] 당시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죄를 선고하기 전에 죄목을 기록해야 했으며, 제논 파피루스(Zenon Papyri) 죄명을 기록하다(κατὰ τούτων καταγέγραφέν σοι)라는 의미로 쓰인 사례가 있다.[각주:26] 예수가 그런 관습을 따라 했다고 단정짓긴 어렵겠지만, 무언가를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니(9)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땅에 쓰시는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다(6). 그리고 고소자들이 주위에 모여든 무리에 의해 과분한 모욕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자 반복적으로 묻는다(7).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다. 율법에 따르면 죄인들을 죽일 때에는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도록 되어 있으나(참조 13:9; 17:7),[각주:27] 예수께서는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것이다.

 

율법

예수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율법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 율법대로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 하시지 않고, “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답하셨을까? 13:9에서 돌을 먼저 던지는 자는 꾀임에 넘어가지 않은 자요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자이다. 17:7에서 돌을 먼저 던지는 자는 범죄현장을 목격한 목격자이다. 구절에서 먼저 돌을 던지는 자의 조건이 다르다고 있지만, 죄를 짓지 않았으며 해당 범죄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해석으로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답하셨다.[각주:28]

 

말을 마치시고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다(8). 여전히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길이 없지만, 이러한 행위가 예수의 답변과 어우러져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없이 물러나도록 했다(9).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없는 라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어른부터 젊은이들까지 명씩 명씩 자리에서 떠나, 예수와 간음한 여인만 남았다!

 

10-11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만 남아 있음을 보시고, 여자에게 너를 고소하던 자들, 너를 정죄한 자들이 하나도 없느냐?” 물으셨다(10). 여인은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신다(11).

여기서 예수의 반응은 다소 의외다. 여인의 간음죄를 처벌하지 않으셨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율법에 대해 해석을 달리 하시긴 했지만) 예수께서는 분명 율법대로 행하라고 답하셨다. 그럼에도,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돌을 던져 악을 제하여야 자들이 자리를 떠나버렸다(9). 그래서 여인을 처벌할 자가 없어졌다(그렇다고 해서 간음죄가 용서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심판자가 되셨다. 고소한 자들이 죄를 처벌하지 않고 모두 떠나버려, 여인을 남겨두고 같으니, 예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공의로운 심판자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답변을 주의하자. 예수께서는 죄가 용서 받았다 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더욱이 앞으로 범죄하지 말라 하셨다. 여인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앞으로는 죄를 반복하지 않고 회개한 자로써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인자하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1. 자세한 내용은 Bruce M. Metzger (ed.),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4), 188-190 George R. Beasley-Murray, John, WBC (Dallas: Word, 2002), 143-144 읽어보라. [본문으로]
  2. Andrew T. Lincol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John (New York: Hendrickson, 2005) 비롯한 몇몇 주석에는 구절을 아예 다루지 않았다. 원문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이로는 Zane Hodges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3. Gerald L. Borchert, John 1-11,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1), ***; Charles H. Talbert , Reading John (Georgia: Smyth & Helwys Publishing, 2005), 152. 보르헤르트는 o;rqroj(아침)라는 단어가 8:2 이외에 Lk 24:1; Acts 5:21에서만 쓰였다고 지적했는데,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빈도수로 따지면, 누가 문체에 가깝다. [본문으로]
  4.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5.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Borchert, John 1-11, ***. 보르헤르트는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8(5:20; 12:38; 23:2, 13, 15, 23, 27,29;참조 의심스러운 본문 7:5 순서가 반대인 15:1), 마가복음에서 1(2:16; 참조 순서가 반대인 7: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이라고 7:1), 누가복음에서 3(5:21; 6:7; 11:53; 참조 순서가 반대인 5:30; 15:2) 쓰였다고 한다. ** 각주 7 확인 필요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chigan: Eermans, 1991), 334. [본문으로]
  8.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9.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10.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1.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12.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본문으로]
  13.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4.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5. moiceu,w 아내를 버리고 장가 들거나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 드는 (마태 5:27; 누가 16:18), 우상숭배( 2:22; 2:22)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6. Borchert, John 1-11, ***;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본문으로]
  17.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카슨이 언급한대로, 고소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문제의 원인을 여자에게 두는 배타적인 남성우월주의자들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보다는 예수를 모함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와 달리 여성들에게 관대했던 예수에게 여자 혼자만 데려와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가능성이 크다. [본문으로]
  18. Ibid. [본문으로]
  19. Ibid. [본문으로]
  20. 유대인들은 약혼한 여인은 약혼자의 아내로 간주하였다(참조 22:23-24). [본문으로]
  21.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5.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본문으로]
  24.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5-336. 카슨의 지적대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이름을 쓴다고 해서 여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본문으로]
  25. Ibid. T. W. Manson 처음으로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6. BDAG, 516. 전문은 다음 페이지를 읽어 보라. Zenon Papyri 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3Atext%3A1999.05.0092&query=head%3D%23141 (검색일: 2007. 11. 1) [본문으로]
  27.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6. 13:9; 17:7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처벌이다. 카슨은 간음죄도 동일하게 처벌했다고 보는 하다. [본문으로]
  28. 예수의 대답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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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e Fraser의 <Lord of Lords>입니다.




"Lord of Lords"

Beholding your beauty is all I long for
To worship You Jesus with my soul's desire
For this very heart you've shaped for your pleasure
The purpose to lift your name high

Hear and surrender in pure adoration
I enter your courts with an offering of praise
I am Your servant come to bring you glory
As is fit for the work of your hands

Chorus:
Now unto the lamb who sits on the throne
Be glory and honor and praise
All of creation resounds with the song
Worship and praise him the Lord of Lords

Verse 2:
The spirit now living and dwelling within me
Keep my eyes fixed ever upon Jesus' face
Let not the things of this world ever sway me
I'll run 'till I finish the race

Chorus 2:
Singing unto the lamb who sits on the throne
Be glory and honor and praise
All of creation resounds with the song
Worship and praise the Lord
Now unto the lamb who sits on the throne
Be glory and honor and praise
All of eternity echoes the song
Worship and praise him the Lord of Lords

Bridge:
Holy Lord
You are Holy
Jesus Christ is the Lord

Chorus 3:
Now unto the lamb who sits on the throne
Be glory and honor and praise
Call all the saints to join in the song
Worship and praise him the Lord of Lords

Ending:
Lord of Lords
Lord of Lords
Lord of L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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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 The World"


Don't want to stand here and shout Your praise
And walk away and forget Your name
I'll stand for you if it's all I do
Cause there is none that compares to You

Cause all I want in this lifetime is You
And all I want in this whole world is you, you, you

Tell the world that Jesus lives
Tell the world that, tell the world that
Tell the world that he died for them
Tell the world that he lives again

No longer I but Christ in me
Cause it's the truth that set me free
How could this world be a better place?
But by thy mercy and by thy grace

C'mon, c'mon we'll tell the world about You
C'mon, c'mon we'll tell the world about You

Tell the world that Jesus lives
Tell the world that, tell the world that
Tell the world that he died for them
Tell the world that he lives again

C'mon, c'mon we'll tell the world about You
Tell the world that
Tell the world that
C'mon, c'mon we'll tell the world about You
Tell the world that
Tell the world
Abou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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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에서는 '메타비평'이라고 하며, 간혹 '상위비평'이라고도 한다. 신학에는 '주석비평'이란 대역어가 적절하다.

'Metacommentary'란 용어는 문학평론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The Ideologies of Theory란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the smallest intelligible unit of the essentially antagonistic collective discourses of social classes."[각주:1]

사회계급들의 근본적인 대립적인 집단의 담론들의 최소 지성 단위.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 용어를 이데올로기와 관련지어 사용했다. 내가 알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다. 난 비평용어로서 알고 싶을 따름이다.
 

비평 자체의 전문 용어나 기본 전제, 논리적 원리, 구조 따위를 주제로 삼는 비평 방법. 예를 들어 어떤 소설이 다른 소설보다 더 훌륭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탐구하는 비평이 이에 속한다. <국어사전>


국어사전에 따르면, "비평을 비평한다"라고 정리된다. 문학동네 2000년 봄 (통권 22호)에 실린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좌담에 관련 내용을 읽어보자.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논의를 담은 메타비평이 모두 비평의 정치학이라는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모든 비평담론을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코드로만 해석하는 태도가 두드러지게된 것이죠. (……) 메타비평의 경우 비평가가 다른 비평이나 문학작품을 비판적으로 논의할 때, 그 사람의 일관된 문학적 태도를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치적인 태도는 잘 알 수 있어요.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밝히고 그런 관점에서 텍스트를 분석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가령 내가 높은 감식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작품은 아니다, 라던가 내가 윤리적으로 우월한데 저 비평은 불순하다는 등의 의미 구조이죠." - 이광호

"… 메타비평은 어디까지나 문제가 되는 어떤 개념, 원리, 범주들을 갖고 있는 가를 찾아내고 분석하고 검토하는 일이지요. 메타비평은 근본적으로 이론비평이에요." - 황종연

여기서도, "메타비평은 비평에 대한 비평이다" 정도로만 들린다. 그럼, 성서학에서는 어떻게 정의되는지 알아보자. 원문이 길어 번역은 하지 않았으며, 주요부분만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참고로, 이 용어를 성서학에 처음으로 응용하여 적용한 학자는 데이빗 J. A. 클린스(David J. A. Clines)[각주:2]이다.
 

It is, if you like, commentary on commentary, or more specifically commentary on the methods of biblical criticism. Let me come at this level by means of a story with which we are no doubt familiar: I happen upon a method, say deconstruction or Marxism, or some archaeological or anthropological discovery, that gives me an insight into a particular text. And so I come to that text, perhaps even a central one like Genesis 1-3, and feel that I have the methodological key that unlocks the secret of that text. “Eureka!” I cry and leap out of the bath and run down the street, excited by my discovery. Implicitly or explicitly, I assume that my method is better than all the others that have been used in the millennia of interpreting this text. So I can quietly dispose of them in some dark alley, occasionally firing off a polemical sentence or two at those now discredited methods. And I can get on with my task of exploiting my new method in order to interpret the text, for my method is, after all, far better than all the other methods that have gone before.[각주:3]


In a word, and .i./metacommentary;tingly, I conclude: Once again, we see that the function of commentary on biblical texts has been to familiarize the Bible, to normalize it to our own cultural standards, to render it as undisturbing as possible, to press it into the service of a different worldview; eventually, the effect will be to write the Bible out of existence. That is what has been happening to the Bible in the church, in my opinion, .i.Clines, D.J.A.; and it is no doubt what happens to the Bible in any culture. I suppose it is what happens to old books anywhere, and it is the task of scholars, taking a step of critical distance as best they can from their own culture and their personal scripts, to bring back into the foreground the .i./otherness ;of the familiarized. .i.Exum, J.C. ;.i.Landy, F. [각주:4]


Metacommentary, what is that? Let me try this formulation: When we write commentary, we read what commentators say. When we write metacommentary, we notice what commentators do.
This plain and symmetrical account of metacommentary seems to collapse, however, the moment it has been formulated. For what do commentators do apart from what they say? Apart from playing squash or lying late in bed, which we do not want to know about, what do commentators do other than what they say?
Well, the main thing they do but don’t say is not say what they don’t say. Not many say, Of course, I am failing to ask this question of the text, or, I am hiding from you, dear reader, my own opinion on the matter, or, I come to this text with a prejudice about what it ought to mean. These are really very interesting matters, for they are being concealed. What is written on the
page is only what the author has chosen to reveal; but to every text there is a subtext, which the author has suppressed, repressed, forgotten, ignored, kept from us—and not even told us that it has been kept from us. We innocent members of the public, who go on laying out good money on commentaries, need protection against these commentators who are failing to tell us what it is they are failing to tell us. So it becomes an urgent public duty to create a neighbourhood watch committee of metacommentators who will investigate for us how we are being shortchanged. [각주:5]



역시나 기본 개념은 동일하며, 그 대상이 주석에 한정된다. 즉, "주석에 대한 비평"이다. 데이빗 J. A. 콜린스는 주석가의 편견으로 인해 잘못 쓰인 주석들을 바로 잡고자 주석비평을 사용한다. 그러한 결과물이 <Reading from Left to Right>이다. 다음 두 글을 읽어보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수 있다.


Reading the Song of Songs as a Classic
http://www.shef.ac.uk/bibs/DJACcurrres/Classic.html

Reading Esther from Left to Right : Contemporary Strategies for Reading a Biblical Text
http://www.shef.ac.uk/bibs/DJACcurrres/Postmodern1/Esther.html


== 관련도서 ==

Fredric Jameson, “Metacommentary,” in The Ideologies of Theory: Essays 1971-1986, vol 1. Minneapolis, Minnesota: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Cheryl Exum, H.G.M. Williamson (eds.), Reading From Right to Left: Essays on the Hebrew Bible in Honor of David J. A. Clines, JSOTSup, 373;. London: Sheffield Academic Pres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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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

추천도서 2007. 11. 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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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예언자란 하나님의 정념에 사로잡힌 자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내면의 본능 보다는 하나님의 정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하나님의 정념이 예언자에게 역사할 때면 자신을 이끄는 주체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된다.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마음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린다. 그래서 예언자는 인간이 느낄 있는 최대한으로 온전하게 느끼고 깨닫게 된다. 순간만큼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오직 하나님과 예언자로서의 자신만 있을 따름이다.

예언자는 외롭다. 하나님의 정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혼자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쳐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신의 간절한 외침에 기울이지 않는다.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정념이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자신은 강렬하게 느끼는 정념을 그들은 느끼지 못한다. 마치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소리와 같다. 그래서 예언자는 외롭다.

예언자는 괴롭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외침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고, 급기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외치고 모진 핍박도 받아야 하기에 괴롭다. 이보다 예언자를 괴롭게 하는 예언에 순종하지 않게 경우 자신의 동족이 앞으로 처할 고난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예언자는 괴롭다.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정의가 현실에서 실현되길 원하신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외치도록 하신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이 공평과 정의를 실현해가길 기대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아니라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사람이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자연스럽게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된다.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길 원하신다. 자신의 백성이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땅에서, 땅을 살지만 실상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공평과 정의를 외쳤다.

 

예언은 현재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지금부터라도 깨닫고 돌이키도록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과거와 미래보다 중요한 현재이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 과거를 통해 현재가 있으며, 현재를 통해 미래가 있게 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돌이킬 없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는 바꿀 있다.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므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언은 현재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통하여 현재의 삶을 변화시킴으로써 처참한 미래가 아닌 화평한 미래를 맞이하길 원하신다. 만약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담고 있을 따름이라면,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를 변화시키든 그대로 살든 나빠지든 예언대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원하신다. 예언은 그에 대한 경고이다. 지금 회개하고 돌이켜라! 그렇지 않으면 처참한 미래가 있다! 여호와는 너희에게 주길 원한다. 그러니 지금 회개하고 돌이켜라!

 

 

좋은

1. 예언자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예언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만 보지 않고, 예언자 자체로 보려고 했다. 다른 사람과 예언자를 구분 짓는 요소가 무엇인지, 무엇이 그를 예언자가 되게 하였는지, 예언자로서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 있는 그대로보려고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저자 자신이 예언자가 되어 대화하듯이 예언자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주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정념으로 사로잡힌 자들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배웠다.

2. 공평과 정의에 대한 이해

<예언과 역사> 대해 배우면서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외치고 고대했던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치가 이뤄지는 현실을 바라보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토록 강력하게 외쳐댔다. 시대에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공평과 정의를 염두에 두며 하나님의 정념에 사로잡혀 두려움 없이 외쳐대리라.

3. 예언과 역사에 대한 이해

동안 예언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언은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미리 전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예언은 성경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예언은 현재를 위해 주어진다. 미래는 현재가 쌓이고 쌓인 결과이다. 예언자들이 이해한 역사에 대한 설명과 예언과 역사에 대한 이해는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4. 2 이사야

저자 자산이 유대인임에도, 2 이사야를 말한다. 이런 때문에 학자로서 성경과 예언자에 대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자 했음을 있었다.

 

아쉬운

1. 유대신학자의 한계

어느 부분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어쩔 없는 유대신학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싶지만, 유심히 읽다 보면 유대교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사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권만으로도 학자적인 탁월함을 느끼게 되지만, 역시 유대신학 안에 갇혀 있다.


업데이크 200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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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의 진정성

 

대다수의 학자들은 7 53-8 11절을 원문으로 여기지 않는다.[각주:1] 이유는 다음 세가지로 요약 가능하다.[각주:2]

 

(1) 초기 사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의 품질이 좋지 않다.

(3) 교부와 주석가들이 언급하지 않는다.

 

초기에 기록된 사본에 발견될수록 기록과 보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베자 사본은 5 세기경에 기록되었다.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이며, 특히 베자 사본(D) 대표적이다. 소수의 사본이라 할지라도 공관복음에 평행구절을 가지고 있거나, 다중증거(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서방 사본) 경우라면 원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원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원하는 사본이 다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방에 치우쳐 있다. 게다가 베자 사본의 품질이 미치지 못하며, 본문을 담고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다. 구절을 7 36절이나 44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 25 뒤에나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초기 교회 교부들은 내러티브를 생략하고 있으며, 10 세기 이전까지 동방교부들에 의해 인용된 적이 없었다. 12세기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nus) 구절을 검토하긴 했으나, 역시 사본의 품질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굳이 여기에 삽입된 이유로는 7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8 15(너희는 육체를 다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설명하려고 했거나, 유대인들의 사악함과 예수의 없으심을 밝히려고 했을 것이다.[각주:3]

 

 

따라서, 요한복음 7 53-8 11절은 원문이 아닐 것이다.

 

 

2.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4). 간음(moiceu,w)이란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각주:4] 간음은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으며( 20:14; 5:18), 어기면 죽는다( 20:10).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인만을 끌고 왔다(3). 여기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번째는 간음한 여인만 끌고 이유이고, 번째는 여인을 죽이지 않고 예수께로 끌고 이유이다.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본문이 간음한 남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걸로 보아 저자의 관심은 간음한 여인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의 관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추측컨데, 혼자 저지르지 않은 (간음은 혼자 지을 수가 없다) 혼자서 치러야 한다는 형평성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각주: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힌 여인은 하나님의 계명이 지킴으로써 공평과 정의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보다는 고소거리로 전략시켜버렸다.

번째 의문은 금새 풀린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십계명대로 처벌하기 보다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6).

 

여기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순된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십계명에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20:10)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소거리로 사용했다(6). 더구나, 예수께서 십계명을 지키시기 위해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했음에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없이 물러갔다(9).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기에 그들이 말없이 물러났을까?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죄를 선고하기 전에 죄목을 기록해야 했다.[각주:6] 예수가 그런 관습을 따라 했다고 단정짓긴 어렵겠지만, 무언가를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니(9) 가능성은 충분하다.

 

예수께서 땅에 쓰시는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다(6). 그리고 집단에 의해 과분한 모욕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범죄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을까?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분은 앞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핵심적인 논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7:24 51, 8:15~16, 26,50절에 이어지는 심판의 주제가 부각되고 있다.[각주: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데, 본문을 통해 진정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드러내고자 함이다.


** 알림 **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 (수정판)

  1. 김동수 박사의 <요한 신학 렌즈로 요한복음>에는 구절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다. 원문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이로는 Zane Hodges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2. 자세한 내용은 Bruce M. Metzger <Textual Commentary> 읽어보라. [본문으로]
  3.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chigan: Eermans, 1991) 334. [본문으로]
  4. moiceu,w 아내를 버리고 장가 들거나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 드는 (마태 5:27; 누가 16:18), 우상숭상숭배( 2:22; 2:22)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5.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7) 178. [본문으로]
  6.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179. [본문으로]
  7.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18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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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7장 1-23절 구조분석과 위치와 기능 과제물


1. 마가복음 7 1-23 구조분석

 

1-13

 

예수와 바리새인, 서기관의 논쟁

 

 

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

A

 

6-13

예수의 대답

B

14-23

 

예수의 가르침

 

 

14-15

무리를 향한 가르침

C

 

17

제자들의 질문

A’

 

18-23

예수의 대답

B’

 

마가복음 7 1-23절은 크게 논쟁 내러티브(1-13) 가르침 내러티브(14-13) 구성되어 있다. 가르침 내러티브는 다시 가르치는 대상에 따라 14-15, 17-23절로 나눠진다. , 내러티브 안에 예수와 바리새인, 서기관의 논쟁(1-13), 예수의 무리를 향한 가르침(14-16), 예수와 제자간의 문답(17-23), 이렇게 단락이 포함되어 있으며, 구분은 예수가 상대하는 대상(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 제자) 따라서 나누어도 결과는 동일하다.

1-13절은 예수와 바리새인, 서기관의 논쟁이며, 14-23절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1-5절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인데, 예수께서는 구약( 29:13; 20:12; 5:16 ) 고르반 사례를 들어 그들에게 반박하시고 나서야, 14-15절에서 무리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신다. 제자들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해 예수께 질문하는데, 이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1-5절과 평행이 되며, 그에 대한 대답인 18-23절은 6-13절과 평행을 이룬다.

1-5절과 17, 6-13절이 18-23절이 질문과 대답으로 평행을 이룸과 동시에, 14-23절의 예수의 가르침을 중점으로 샌드위치 구조(A-B-C-A’-B’) 나타난다. ‘부정한 관한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문제제기를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으로 확대하셨던 예수는 다시 무리를 향한 가르침을 통해 사람을 더럽게 하는 무엇인지 가르치셨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C) 가장 극명하게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덧붙여 문제를 제기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아무런 가르침도 주시지 않으셨고,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가르치셨으며, 제자들에게는 비유의 의미까지 설명하셨음을 보게 된다.

 

2. 위치와 기능

 

마가복음 7 1-23 앞에 위치한 6 53-56절은 게네사렛에서의 치유를 다룬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땅으로 건너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나왔으며, 예수께 손을 대는 자마다 성함을 얻었다.

마가복음 7 1-23 뒤에 위치한 7 24-30절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로,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는 사건을 다룬다. 이방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림으로 인해 유대인이신 예수께로 나아왔다. 예수께서는 이방 여인의 간구를 거절하셨으나, 예수께서 치유하시리라는 믿음과 자신의 딸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미천하게 여김도 꺼리지 않음을 보시고,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본문 앞뒤 구절은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치유와 귀신 쫓음은 회복이라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 앞뒤에서는 회복 다루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게네사렛은 유대 지방이었으므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대체로 유대인이라고 있겠으며,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모두 예수께 나왔으며 회복함을 얻었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4절에서 시장에서 돌아와서 손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부지런히 씻는 규례가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만남 조차도 부정하게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의 자녀는 귀신 쫓음을 받았다. 이는 7 1-23절을 통한 정결규례개혁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렇게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게네사렛에서의 치유 - 정결법 논쟁 -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는 샌드위치 구조라고 있다.

정결규례개혁을 통해, 이제는 이방인들도 예수께로 나올 수가 있다. 1-23절을 통해 정결 규례를 개혁하신 예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자녀를 치유하심으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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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씻기

성서신학/신약 2007. 10. 29. 23:51
* 배경연구 과제물


제사장들은 회막에 들어 때와 사이에 가까이 손을 씻어야 했다( 40:32). , 씻는 규례는 희생제물을 드리기 전에 제사장에게만 요구되었으며[각주:1], 식사와 관련하여 손을 씻으라고 규례는 율법에 없다[각주:2]. 바리새인들과 많은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대로 식사하기 전에 손부터 팔꿈치까지 씻긴 했지만(3), 예수의 제자 사람이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고 했으므로(2), 모든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규례라기 보다는 정결법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인들만의 규례였다고 봐야 한다[각주:3].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처럼 살아야 하고, 모든 유대인의 집은 성전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제사장에게만 적용되었던 규례를 엄격하게 지켰다.[각주:4]

  1. Joel Marcus, Mark 1-8 (NY: Doubleday, 2000) 449. [본문으로]
  2. 신현우, 마가복음 연구 강의안 2007, 63. [본문으로]
  3. Ulrich Luz, Mattew 8-20, trans. James E. Crouch(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2001), 329. [본문으로]
  4. Joel Marcus, Mark 1-8, 44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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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갖고 있었는지 조차도 잊고 있었는데, 물어봐서 찾아들었던 그곡. ^^; 이번에 함께 나눌 곡은 Amy Grant의 <El Shadai>입니다.







"El Shadai"

El Shadai, El Shadai
El elon nai Adonai
Age to age you're still the same
By the power of the name
El Shadai, El Shadai
Erkamka nai Adonai
We will praise and lift you high
El Shadai

Through your love and through the ram
You saved the son of Abraham
Through the power of your hand
You turned the sea into dry land
To the outcast on her knees
You were the God who really sees
And by your might you set your children free

El Shadai, El Shaddai
El elon nai Adonai
Age to age you're still the same
By the power of the name
El Shadai, El Shaddai
Erkamka nai Adonai
We will praise and lift you high
El Shadai

Through the years you made it clear
That the time of Christ was near
Though the people couldn't see
What Messiah ought to be
Though your Word contained the plan
They just could not understand
Your most awesome work was done
In the frailty of your Son

El Shadai, El Shaddai
El Elon nai Adonai
Age to age you're still the same
By the power of the name
El Shadai, El Shaddai
Erkamka nai Adonai
I will praise you till I die
El Shadai

El Shadai, El Shadai
El Elon nia Adonai
Age to age you're still the same
By the power of the name
El Shadai, El Shadai
Erkamka nai Adonai
I will praise you till I die
El Sha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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