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수많은 해석가들이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도전을 받고 있다.

예수와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역사적으로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받는 종'은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로 성전 재건에 힘썼던 스룹바벨을 지칭한다. 스룹바벨은 귀환 공동체의 지지와 기대 속에서 성전 재건을 도모하지만,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던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약속을 성취할 자로 추앙받지만, 귀환 공동체의 기대와 달리 그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사야의 진술은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리라고 기대를 받은 지도자의 사망에 대한 절망과 탄식 가운데 나온 고백이다.

더구나 이사야 54-66장에서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에도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55:3)을 말하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은 말하지 않는다. 반면 '영원한 언약'(55:3; 61:8)이라는 표현은 몇 차례 나온다. 절망에 빠진 귀환 공동체를 위로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특히 하나님은 귀환 공동체를 향해 '네 남편'(54:5)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등장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해석가들이 새로운 다윗의 등장에 더 주목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메시아/그리스도로 추앙받았으나,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러한 순서는 스룹바벨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자신의 궁극적 지상 사역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스룹바벨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직접 귀환 공동체를 통치하신다고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자신의 방법대로 성취하신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좀더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성경 인용에 관해서는 주의에 주의를 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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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에서 궁극적인 국가의 통치자는 신(god)이며, 왕은 신의 대리자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 위에 왕은 통치자로서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은 목축 사회라는 시대적 토양을 기반한 은유로, 왕의 정당성과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사의 통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왕정 국가라는 통치 체제를 요구한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수용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의 통치는 사울부터 시작되었으나, 그의 실패와 다윗이라는 불세출 영웅의 등장으로 다윗 왕조의 통치 기반은 확고해졌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은 남유다 왕국은 저들의 멸망이 왕국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탓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렸다. 남유다 왕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다 지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행위이다.

남유다 왕국이 주변 정세 변화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처하는 방법은 군사력 증강과 오랫동안 패권을 잡고 있었던 애굽과 외교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남유다는 풍요로웠고 견고한 동맹국을 확보하고 있었다(이러한 실상은 2:6-8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남유다의 우상숭배는 소돔과 고모라에 비할 정도로 심각했다(1:9-10). 무수한 제물을 드렸으나 그들의 마음은 진정성이 없었다(1:11-15).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부터 남유다는 실질적인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이사야가 등장한다. 이사야의 언어는 독특하다. 그중 하나는 "포도원"과 "포도주"(대표적인 사례는 5장을 보라)라는 단어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예언서 시작 부분에 기록된 예언자의 신상 정보를 토대로 활동 지역을 예상하는데(사 1:1; 미 1:1), 역사적 재구성의 어려움으로 인해 그들의 언어가 실질적인 판단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가령 이사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계층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도시인이고, 미가는 목축업이 생활 기반인 시골 지역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해석자들이 많다. 이사야의 거주 지역 혹은 활동 지역에서 포도원이 주된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미가가 활동한 지역은 목축업이 주요 사업이었던 걸로 보인다. 그들의 청중을 고려한 비유를 통해, 예언자의 활동 무대를 추측할 수 있다고 보인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주요 용어는 "포도원"이다(대표적으로 5장). 이사야는 하나님을 포도원의 주인(5장)이나 포도원지기(27:3)로 묘사한다. 반면 타락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포도원을 망가뜨린다(3:14). 또한 타락한 지도자는 포도주에 취해 있다(5:11). 포도주는 지도자의 무책임과 남유다 지역의 풍요로움을 동시에 비꼬는 수단일지 모른다. 

이사야 역시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다(대표적으로 40:11). 그가 여러 차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으로 대표되는 지도자 집단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목자-왕 전승이 이스라엘 전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단지 이사야의 청중이 목자와 양이라는 은유보다 포도원 비유가 더 효과적인 부류이었다고 추정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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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에서 목자-왕 전승은 왕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은유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러한 전통이 있었고, 신약에도 곳곳에 목자-왕 전승이 나타난다.

연구 본문이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이라서 목자-왕 전승은 내 연구의 핵심 주제이다. 그래서 목자-왕 전승에 관한 선행 연구를 제법 검토했는데, 흥미롭게도 이사야를 언급한 연구를 본 적이 없다. (내 기억에만 없을지도 모른다)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가는 목자-왕 전승을 여러 차례 사용한다. 이 둘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나훔도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다(3:18). 이사야 후대에 활동한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도 목자-왕 전승을 아주 중요하게 사용한다.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 선지자들은 이 은유를 통해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들의 방임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심판의 명분이 된다. 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신다. 여기서 내 질문은 시작된다.

'왜 이사야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지 않을까?'

밤늦게 이사야서를 통독하며 정답의 근사치를 얻은 듯하다. 내 질문이 잘못되었다. 내가 이사야서를 읽을 때 목자-왕 전승에 주목하지 않은 탓이지, 이사야는 곳곳에 단서를 남겨 두었다. 정말 흥미로운 건, 이사야의 용례에 특이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선지자들은 대체로 목자-왕 전승으로 심판과 회복 선포라는 공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러한 공식을 자신의 예언에 사용하지 않는다. 목자-왕 전승의 틀을 사용하지만, 그만의 특정 공식이 되기에는 적용 범위가 부분적이다.

대신 이사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공평과 정의가 그것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목자-왕 전승을 은유로 사용하여 시각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지만, 이사야는 공평과 정의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이 부분은 차후 연구로 발전 시켜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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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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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헤이스의 사도 바울과 이사야 53장에 대한 관찰은 나에게 유익한 참고자료를 하나 알려준다.

신약성경의 기독교 해석자들은 때때로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묘사를 바울 기독론을 이해하는 실마리로 보고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비록 이러한 접근 방식이 40여 년 전 후커[Morna Hooker]의 논문, Jesus and the Servant에 의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말입니다).각주4 바울이 이사야 53장을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 읽었을 수 있지만, 이런 주장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울이 이사야서를 명시적으로 사용한 것이 그가 더 일반적으로 구약을 사용한 것처럼 이론의 여지없이 "교회 중심적(ecclesiocentric)"이라고 믿습니다. 그의 이사야서 읽기는 본질적으로 이방인들이 포함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사야서에서 이방인을 향한 그의 사도적 사역에 관한 근거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것에 대한 선지자적 예언을 찾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쿰란의 서약자들(Qumran covenanters)이 성경 본문을 그들 자신의 공동체 생활과 소명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각주4.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이 쓴 저서에서, 우리는 예수와 그 종의 동일시가 사도 바울, 사도 요한, 또는 히브리서 저자의 사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거의 찾을 수 없고, 그들에게 이것이 알려졌다는 증거도 전혀 찾을 수 없다"(M. Hooker, Jesus and the Servant: The Influence of the Servant Concept of Deutero-Isaiah in the New Testament [London: SPCK, 1959], 127). 

[출처] 리처드 B. 헤이스, 상상력의 전환, 68-69.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내어줌'(lay down)의 가르침이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나는 박사 과정에서 이 주장을 검토할 예정으로, 내 연구 제안서의 두 번째 과제로 선정되어 있다. 현재 내 예상으로는 이사야 53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사실 대안을 갖고 있지만 차후 연구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 현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지도교수가 동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모나 후커의 책을 읽어보면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헤이스가 인용한 후커의 글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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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지서에서 다니엘서를 제외하고, 이사야서는 후대에 등장하는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와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다윗의 자손들 특히, 왕 같은 메시야가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왕으로 묘사되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여 다스리시는 온 열방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그가 친히 창조하신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출처] 이승현, 성령, 50-51. 


이 진술에서 이사야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 구원자의 성격. 두 번째, 구원의 대상.

첫 번째, 구원자의 성격.
이사야가 내다본 메시야는 다윗 계열의 왕이 아닌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다. 여러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한다. 회복 이후 이스라엘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서인지, 새 다윗 왕조를 재건한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사야는 이러한 흐름과 달리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라는 전례 없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두 번째, 구원의 대상.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야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신다. 구약은 민족주의적 성경이 강하다. 예언서에 반복되는 '심판'과 '회복'이란 주제는 대부분 이스라엘(북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는 남유다를 중점으로)을 대상으로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을 향해 있어서인지, 구원 역시 온 이스라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은 새로운 다윗 왕조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식과 달리 이사야의 새 창조에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했던 히브리인들에게 열방 구원이라는 개념은 낯설기만 하다.

이러한 독특성은 내게 큰 과제를 안겨준다.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내어줌'(lay down)이란 가르침을 이사야의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연결 짓는 견해가 많은 탓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요한이 이사야를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을 목자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 역시 유의해야 한다. 다윗 계열의 메시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새로운 왕국을 통치한다는 오랜 믿음과 달리 다윗의 후손이 열방을 구원하신다는 개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혀야 한다. 예수의 구원 대상이 유대인으로 한정되지 않고 이방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유의 깊게 관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관련글:
[연구주제/요한복음의 목자 은유] -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그리고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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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법 많다. 내 연구 범위에 한정해도, 에스겔의 예언을 스가랴가 발전시킨 흔적들이 발견된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면 제법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스가랴 1-8장이 에스겔 40-48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9-14장의 묵시적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스가랴 9-14장이 에스겔 34-37장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스가라가 에스겔 전통을 계승한 이유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모두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는데,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이 은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외에 여러 면에서 이사야의 독자적인 위치가 눈에 뛴다.

현재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이사야의 역할이다. 분명 요한은 이사야를 잘 알았고 그의 복음서에 이사야를 연상시키는 본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가르침이 이사야 53장에서 유래했다는 기존 견해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목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나 역시 연구제안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이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다른 대안은 이사야 53장이 아닌 스가랴 9-14장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를 처음 접했을 당시에 나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다. 내 분석에 의하면 스가랴 9-14장 자체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자기 희생과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와 마태의 사례를 통해 그 같은 주장을 개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차후 이 부분에 집중할 계획이다.

쉽게 말하자면 요한복음 10장이 어느 본문의 영향을 받았는지 밝히려면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를 다루면서 세 선지서 중에서 누가 요한복음과 가장 밀접한지 추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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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amilton 교수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요한복음에 대한 이사야의 영향"이란 제목의 글이다. 비판할 내용이 많지만, 참고문헌들은 매우 유용해 보인다.


The Influence of Isaiah on the Gospel of John

https://jimhamilton.info/2007/11/19/the-influence-of-isaiah-on-the-gospel-of-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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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읽는 선지서』 / 에드가 W. 콘래드 / CLC


이 책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라는 세 명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수령하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세 명의 선지자들이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그에 따른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성전과 기록방식 등에서 차이가 난다(대략적인 비교는 19쪽에 표로 정리가 되어 있다). 또한, 저자에게 있어 선지자들의 '보는 것'은 예언의 선행성과 단일저작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떠오르는 생각들이 몇 가지 있다. 첫번째는, 심판의 점진성과 선지자들의 수동성이다. 세 선지자들 모두 다가올 심판을 선포한다. 그런데 그 때가 다가올수록 선포자들의 태도는 점점 더 수동적으로 변한다. 하나님이 각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 수령자가 압도 당하는 강도가 점점 강렬해진다. 이러한 현상은 성전의 부정함과 환상의 신비함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두번째는, 제사장 선지자의 등장이다.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은 엄연하게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사장 선지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추측하건대, 성전과 제사장의 연관성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선지자에게 성전 파괴와 재건축에 대한 예언이 주어질 때, 그 심각성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제사장들이다. 특히, 성전의 재건축 이후 의례를 집행해야 할 사람들 역시 제사장들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제사장 선지자들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새롭게 읽는 선지서
국내도서
저자 : 에드가 W. 콘래드(Edgar W. Conrad) / 장세훈역
출판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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