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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관점이나 고정관념에 의존하는 연구는 별 의미가 없다. 이런 경우 학문은 자기변호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를 해도 불확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나의 경우 신학을 연구할 때 이런 의구심이 두려움으로 돌아온다. 비록 주위에서 호평을 해주더라도, 하나님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나의 모든 가정과 기존 자료들, 그리고 연구 결과 조차도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다. 불확실하더라도 최대한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현재로서는 최선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단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개방성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그리고 정직한 태도라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믿는다. 따라서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옳지 않다. 비록 결론을 도출하는데 모든 전제들을 의심하여 진정성을 도출하는 유익이 있다하더라도,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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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도취되어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 눈이 가리워져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의존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도록 붙잡아 준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만한 상황에서도 불만을 토로할 망정 신뢰를 거두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늘 아래에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련이나 고난이 와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전부이다. 절대적인 믿음은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시편 기자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오랜 시간에 걸친 친밀한 관계를 통해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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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연구방법론을 공부하면서 탁월한 해석에 대한 갈증이 더해졌다. 요한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고, 그의 의도에 따라 본문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한의 묵시적 표현은 남달리 난해함을 더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요한계시록에 대한 그릇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교회들 안에 일련의 선지자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이 구약 예언들이 기울였던 것과 동일한 숙련된 집중력을 가지고 요한의 예언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상세히 설명했을 것이라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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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소명을 통해 야훼와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계획에 대한 고유한 지식을 갖게 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놓고 자신의 신앙과 지성의 전력을 다해 씨름하게 되고, 독특한 신앙관을 구축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소명은 예언자가 독특한 신앙관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들의 선포는 시대정신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시대의 이단아로 낙인 찍히게 되고 처절한 고독을 경험해야 했다.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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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성서학(구약/신약)을 전공할 계획인 나로서는 외국어에 대한 준비가 필수적이다. 어느 전공을 선택하던 영어, 히브리어, 성서 그리스어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문주해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히브리어와 성서 그리스어가 어렵긴 하지만, 각종 도구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다.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도구 자체가 영어로 되어 있고, 참고할 주석들은 전부 영어권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성서연구에 험난한 시험을 주는 건 다름아닌 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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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언약의 성취"를 경험한 자들이 "언약의 불변성"을 확신하며 남긴 기록이다. 성경저자들은 역사적 사건과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언약의 성취가 특정시대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진리라고 확신했기에 언약의 성취를 일회적 사건이 아닌 영원불변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즉 이들에게 언약의 성취는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이들은 청중(혹은 독자)들이 언약의 성취란 단지 역사 속에서 발생했었던 사건이 아니 다시 이뤄질 수 있다고 받아들이길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을 기록할 때 구체적인 시기를 기록하지 않았다. 명확한 시기를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언제 어디서든 적용가능한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성경의 불활실한 정보는 언약의 성취를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모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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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 더남(Maxie Dunnam)의 "설교자의 거룩" 중에서 루르드(Lourdes,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로 성모 마리아의 발현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옮긴이) 마을에 관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이 마을의 나이든 어떤 사제는 신문사 기자로부터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적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기자는 이 사제가 누군가 질병을 안고 루르드 마을을 찾았다가 완전히 고침을 받고 떠난 놀라운 사례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 사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루르드에서 지금까지 내가 목격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전혀 고침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면서도 얼굴에서 밝게 빛나는 체념의 표정을 보았을 때입니다."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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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구심점은 '율법'이었을까? '성전'이었을까?
The Law, not the Temple, united the Jews.—To an impartial observer it might have seemed that Judaism must disappear when the Temple at Jerusalem was destroyed. 1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구심점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가? '교회 건물'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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