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이삭의 우물 사건(창 26:12-18)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준다. 이삭이 우물을 확보할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삭은 점점 우물을 확보하기 어려운 곳으로 옮겨간다. 블레셋 사람들과 달리 이삭은 우물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삭은 점점 척박한 땅으로 옮겨갔지만, 그 때마다 우물들을 발견했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우물에 집착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척박한 땅에서 우물을 발견하는 삶을 살 것인가. - 김근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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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관점이나 고정관념에 의존하는 연구는 별 의미가 없다. 이런 경우 학문은 자기변호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를 해도 불확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나의 경우 신학을 연구할 때 이런 의구심이 두려움으로 돌아온다. 비록 주위에서 호평을 해주더라도, 하나님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나의 모든 가정과 기존 자료들, 그리고 연구 결과 조차도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다. 불확실하더라도 최대한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현재로서는 최선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단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개방성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그리고 정직한 태도라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믿는다. 따라서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옳지 않다. 비록 결론을 도출하는데 모든 전제들을 의심하여 진정성을 도출하는 유익이 있다하더라도,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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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의 하나님

성찰 2011. 4. 14. 21:16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도취되어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 눈이 가리워져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의존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도록 붙잡아 준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만한 상황에서도 불만을 토로할 망정 신뢰를 거두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늘 아래에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련이나 고난이 와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전부이다.

절대적인 믿음은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시편 기자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오랜 시간에 걸친 친밀한 관계를 통해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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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연구방법론을 공부하면서 탁월한 해석에 대한 갈증이 더해졌다. 요한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고, 그의 의도에 따라 본문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한의 묵시적 표현은 남달리 난해함을 더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요한계시록에 대한 그릇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교회들 안에 일련의 선지자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이 구약 예언들이 기울였던 것과 동일한 숙련된 집중력을 가지고 요한의 예언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상세히 설명했을 것이라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각주:1]


하지만 요한이 살았던 시대에는 각 교회 안에 선지자들이 있어서 요한의 기록들을 신중하게 연구하고 해석해서 성도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었기에 요한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지자 집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교회와 세상은 오랜 시간 동안 문자주의적 해석으로 인해 몸살을 겪어야 했다.

그러므로 성서학자들은 선지자적 소명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역할이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1세기 교회공동체에 존재했던 선지자들처럼 성도들의 올바른 이해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사라져 버린 이 세대를 기억하시고 선지자적 사명을 가진 성서학자들을 사용하실 터이다. 그들을 통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교회공동체와 유익을 더하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실터이다.

  1. 리챠드 보쿰, 이필찬 역, 요한계시록 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0) p.3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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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상황이 변하면 그에 맞추어 사고방식도 변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까지 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바꾸어야 할 대상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적용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현실적 상황에 따른 신앙의 변화를 지탄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역자들이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있다. 교회성장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권력과 물질적 안정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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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소명을 통해 야훼와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계획에 대한 고유한 지식을 갖게 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놓고 자신의 신앙과 지성의 전력을 다해 씨름하게 되고, 독특한 신앙관을 구축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소명은 예언자가 독특한 신앙관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들의 선포는 시대정신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시대의 이단아로 낙인 찍히게 되고 처절한 고독을 경험해야 했다.

신학교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곳이다. 목회자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건강한 교회'가 아닌 '성장하는 교회'에 열중한다. 궁극적으로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성장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는 아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가 공개적으로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나 상담 등을 통해 신자들이 신앙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이러한 책임을 수행하려면 예언자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목회자는 예언자가 아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에는 예언자적 사명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예언자적 사고는 목회자의 자질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에게서 예언자적 사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자신에게 예언자적 소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러한 의식의 부재는 예언자적 사고의 종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현실에서 예언자적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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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성서학(구약/신약)을 전공할 계획인 나로서는 외국어에 대한 준비가 필수적이다. 어느 전공을 선택하던 영어, 히브리어, 성서 그리스어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문주해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히브리어와 성서 그리스어가 어렵긴 하지만, 각종 도구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다.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도구 자체가 영어로 되어 있고, 참고할 주석들은 전부 영어권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성서연구에 험난한 시험을 주는 건 다름아닌 영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주석번역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영어의 부담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달갑지 않다. 한글판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글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떠한 형태로든 본문연구란 다양한 주석을 통해 새로운 결과물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러니 기존 주석에 얽매여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독해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도 그 본문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연구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올바른 주해에 있고, 주석독해는 주해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단지 독해과정을 도와주기 위해 주석번역을 추진하는 건 달가운 일만은 아니다.

내 관점의 연장선에서 보면, 주석비평(metacommentary)이라는 분야는 그 존재자체가 의문점이다.[각주:1] 그렇다고해서 의도조차 무시하는 건 아니다. 올바른 주해를 위해서는 주석에 대한 비평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주석비평이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석비평을 하지 않아도 올바른 비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주석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더구나 주석은 번역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성서학자에 의한 번역은 더 반대한다. 그 시간에 개인연구물을 출판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엉뚱한 소리를 할거라면 번역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만.

오히려  나는 주석번역 보다는 주석집필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 주석을 집필할 만한 저자들을 확보하려는 노력하기 보다는 번역이 더 수월하겠지만, 한국교회를 위해서는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일이다.

  1. 주석비평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 내의 "Metacommentary"란 글을 읽어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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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언약의 성취"를 경험한 자들이 "언약의 불변성"을 확신하며 남긴 기록이다. 성경저자들은 역사적 사건과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언약의 성취가 특정시대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진리라고 확신했기에 언약의 성취를 일회적 사건이 아닌 영원불변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즉 이들에게 언약의 성취는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이들은 청중(혹은 독자)들이 언약의 성취란 단지 역사 속에서 발생했었던 사건이 아니 다시 이뤄질 수 있다고 받아들이길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을 기록할 때 구체적인 시기를 기록하지 않았다. 명확한 시기를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언제 어디서든 적용가능한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성경의 불활실한 정보는 언약의 성취를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모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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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기부인

성찰 2008. 8. 29. 12:17

맥시 더남(Maxie Dunnam)의 "설교자의 거룩" 중에서

루르드(Lourdes,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로 성모 마리아의 발현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옮긴이) 마을에 관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이 마을의 나이든 어떤 사제는 신문사 기자로부터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적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기자는 이 사제가 누군가 질병을 안고 루르드 마을을 찾았다가 완전히 고침을 받고 떠난 놀라운 사례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 사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루르드에서 지금까지 내가 목격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전혀 고침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면서도 얼굴에서 밝게 빛나는 체념의 표정을 보았을 때입니다."

- 유진 피터슨, 마르바 던 외, 영혼을 살리는 설교, 이승진 역 (서울: 좋은씨앗, 2008), 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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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구심점은 '율법'이었을까? '성전'이었을까?

The Law, not the Temple, united the Jews.—To an impartial observer it might have seemed that Judaism must disappear when the Temple at Jerusalem was destroyed.[각주:1]

율법은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성전이 아니다).
— 만약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전이라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주의가 사라졌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구심점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가? '교회 건물'이어야 하는가?
  1. F. J. Foakes Jackson, Josephus and the Jews: The Religion and History of the Jews as Explained by Flavius Josephu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7), 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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