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역사비평의 유익

성찰 2013. 3. 11. 23:30

역사비평은 저작연대에 따른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는 방법론이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와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독자들은 어휘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도 저자의 의도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시대적 재구성을 필요로 한다. 그 때 유용한 방법론이 바로 역사비평이다. 따라서 역사비평은 성경본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선지식을 갖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모 교수는 마치 역사비평이 저작 연대에 통용했던 의미를 파악하는 역할은 하지만, 현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문맥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듯 말한다. 서사비평의 유익을 설명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렇다고 역사비평이 의미의 고정화를 의미하는듯 가르치면 안되는데 왜 이러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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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신학자

성찰 2012. 3. 29. 15:42

소외된 신학자란 아주 쉽게 정의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그러나 그 자신은 '신자'인 만큼 또한 '회의하는 자'인 그런 전문가이다"라고 반 하뷔(Van Harvey)는 말한다. - 데이비드 F. 웰즈, 기독론, 12.


대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은 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신학자들에게 무관심하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생들에게도 나타난다. 강의시간에 무언가를 배운다는데는 의미를 두나, 그 이상의 진리탐구에는 관심이 없다. 연구자인 신학자에게 관심이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오늘 날 신학생들은 학습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고 선포하는 주체인 신학자들의 가치는 기억되지 못하고, 점차 잊혀져 간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지금 웨신에서 소외된 신학자들을 다시 떠올릴 책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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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과 경건훈련

성찰 2012. 3. 8. 23:19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율법과 구전(Oral Tradition)을 아주 엄격하게 지켰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자신들의 열정과 규율과 다른 이들을 정죄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이웃에 대한 정죄와 같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오늘 날에는 신앙생활에는 열심이지만 이중적인 모습을 사람들을 보이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
. 하지만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바리새인을 욕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최근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서 나타나는 일들을 보면 그들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못하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최소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경건의 모습도 경건의 실제도 없다.

그래서 더욱 신학교육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부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경건훈련에는 소홀히 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경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차후에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양육할 때에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신학적 지식과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능력보다 경건의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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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시대 A.D. 100-451) 이 시기의 사고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두 번째 문제점은 종말론에 관한 작품들의 내용 자체에 내재해 있다. 거의 예외 없이, 그 저술들은 특별한 일관성이 없는데, 심지어 동일한 한 저자의 작품들 속에서도 일관성이 없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런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종말론적 언급이 폭넓은 관점들의 상황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이러한 기독교인들은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조직신학적이 되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 자신들의 목회적인 상황들로부터 찾아오는 문제들에 답하기 위하여 성경의 사상이 지닌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해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어떤 주제들은 후대의 신학이 그 위에 놓이게 되는 기초들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 Robert C. Doyle, 교리 속 종말론, 99.

현장을 떠나 조직적인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고 목회현장에서 총체적인 사고를 했던 교부시대의 정신을 지금 한국교회 역시 실천해야 한다. 상아탑에 갇힌 신학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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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타락하였으나, 한국개신교는 그 반대로 바울의 칭의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지금과 같은 부태에 이르렀다. 구원에 있어 행위와 칭의의 균형을 잡지 못하면 양극단으로 치닫는다는 사실을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는 한국교회가 되자!


"교회 개혁, 삐뚤어진 칭의부터 바르게"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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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한(Ferdinand Hahn)의 종말론과 묵시문학의 관계에 대한 이해(신약성서신학 Ⅱ, 794)가 잘못되어 있다:"종말론의 두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과 관련된 미래표상이 관건이 된다. 다른 한 편으로는 피안(彼岸)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종말론이 상위 개념이고, 묵시문학이 하위개념이다."

종말론과 묵시문학은 각 개념의 범주가 다르다. 종말론은 신학사상의 범주에 속하고, 묵시문학은 문학유형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묵시문학은 종말론의 하위 개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묵시문학의 두드러진 성격인 종말론적 성격을 지칭하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하위 개념으로 종속시켜야 한다. 또한 "묵시적 예언"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아마도 묵시를 예언의 일부로 여기는 듯 싶다. 묵시문학은 예언의 일종이 아니다. 묵시와 예언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주어지지만, 묵시는 계시에 대한 재해석이다. 이와 관련된 책으로는 존 J. 콜린스의 <묵시문학적 상상력>과 왕대일의 <묵시문학과 종말론>에서 잘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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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체험에 "도취"되어 열광주의에 이른 사람들은 현실감각을 잃어 우리가 아직도 죄와 죽음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곧 순간마다 사탄이 종용하는 죄악의 길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주의 영이 종용하는 의의 길을 택할 것이냐의 절실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충동적으로 살게 됩니다. 그들은 죄악의 세력에 대한 심각한 경각심과 건전한 신학적 분별력 없이 충동적으로 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쉽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데, 그리하여 짓게 되는 여러 부도덕적 행위들을 성령에 대한 호소(빙자)로 정당화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순종하도록 하는 영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항상 우리를 사랑과 진리와 의와 화평과 고결의 길로만 인도하시지, 탐욕과 거짓과 불의와 갈등과 음행과 방탕의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 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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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우물 사건(창 26:12-18)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준다. 이삭이 우물을 확보할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삭은 점점 우물을 확보하기 어려운 곳으로 옮겨간다. 블레셋 사람들과 달리 이삭은 우물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삭은 점점 척박한 땅으로 옮겨갔지만, 그 때마다 우물들을 발견했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우물에 집착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척박한 땅에서 우물을 발견하는 삶을 살 것인가. - 김근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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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관점이나 고정관념에 의존하는 연구는 별 의미가 없다. 이런 경우 학문은 자기변호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를 해도 불확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나의 경우 신학을 연구할 때 이런 의구심이 두려움으로 돌아온다. 비록 주위에서 호평을 해주더라도, 하나님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나의 모든 가정과 기존 자료들, 그리고 연구 결과 조차도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다. 불확실하더라도 최대한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현재로서는 최선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단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개방성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그리고 정직한 태도라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믿는다. 따라서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옳지 않다. 비록 결론을 도출하는데 모든 전제들을 의심하여 진정성을 도출하는 유익이 있다하더라도,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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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의 하나님

성찰 2011. 4. 14. 21:16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도취되어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 눈이 가리워져 있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의존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도록 붙잡아 준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만한 상황에서도 불만을 토로할 망정 신뢰를 거두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늘 아래에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련이나 고난이 와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전부이다.

절대적인 믿음은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시편 기자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오랜 시간에 걸친 친밀한 관계를 통해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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