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희년서의 초막절 본문으로 16:20–31와 32:4–29는 이견이 없다. 반면 18:18–19는 절기의 정체에 대한 이견이 있다. 내가 초안 완성을 앞두고, 18:18–19를 초막절 본문으로 분류한 이유는 이 구절과 다른 두 구절이 가진 유사성 때문으로 짐작된다. 나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일부 존재한다.

세 구절 모두 이 절기의 특징으로, 매년 기념되는 절기로 칠 일 동안 기쁨으로 즐겼다고 서술한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The Festival of the Lord, 16:27; 18:18)라고 불렀다는 공통점을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공통점이 두드러져서 셋 모두 초막절로 분류해도 가능해 보인다. 

이와 달리 VanderKam은 달력을 기준으로 무교절(the Festival of Unleavened Bread)이어야 하지만, 아브라함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이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자기 생각을 밝힌다. 그는 "여호와의 절기"라는 명칭은 성경에서 유월절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Jubilees 1, 577). 또한, 중단되었으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사로 드리려고 했던 사건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한다 (Jubilees 1, 578). 하지만, 희년서가 성경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절기는 모세의 명령으로 제정되지만, 희년에서는 칠칠절(The Feast of Weeks)은 노아와 관련이 있고, 초실절(The Feast of Firstfruits)과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은 아브라함의 자녀 이스마엘과 이삭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이 같은 희년서의 독특한 절기 사용으로 인해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초막절의 시작 이래 절기의 이름이 적시되지 않은 점과 절기의 시기를 밝히지 않은 점이 이 절기의 정체가 초막절이라는 주장에 의구심이 들 수 있겠으나, 두 사이의 공통점은 상당히 긴밀하다.

설령 18:18–19이 초막절이 아니라면, 희년서의 저자가 이 절기를 초막절을 연상하도록 의도했다고 해석해야 한다. 초막절이 이삭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면, 이 절기는 이삭의 두 번째 탄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초막절이 아브라함 언약의 실현을 기념했다면, 이 절기는 아브라함 언약을 재확인한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이 절기가 초막절이 아니라고 해도, 내 견해를 일부 수정해도, 내 연구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 분량이 줄어들 뿐 아니라 내가 전에 발견하지 못한 주장을 더 강력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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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서에서 칠칠절(The Feast of Weeks) 제정은 일명 노아 언약과 관련이 있다 (6:17-19). 노아 언약은 매년제(annual feast)로 드려야 하고, 언약 갱신을 목적으로 삼는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의 출생(14:21-24)를 기념해 초실절(The Feast of Firstfruits)을 드린다 (15:1-2). 하나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고, 그는 국가를 이룰 것이라는 일명 아브라함 언약을 선포하신다 (15:3-16). 

아브라함은 초실절에 이삭을 낳고 (16:13),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 을 기념한다 (16:20-31).

초실절과 초막절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 번째, 초실절과 달리 초막절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즐거움이 크다고 밝히고 있다 (16:19). 두 번째, 희년서에서 아브라함 언약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향한 약속으로 설정되어 있음이 명확해진다 (15:21).

아브라함이 죽는 해에, 이삭과 이스마멜이 맹세의 우물 (the Well of the Oath, Beersheba)에서 칠칠절을 기념하는데, 이 절기를 초실절이라고 설명한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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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Q5(11QPsa) Psalm 151 자료를 찾다가 폴란드어 자료를 찾아서 번역기로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중 결론을 옮겨본다.

히브리어 성경 시편 151편의 본문은 시편 11Q5 두루마리에만 나옵니다. 문학적 구조상 세심하게 제작된 작품으로 7행과 8행에 포함된 내용이 보입니다. 이 작품은 1인칭 서술 방식으로 다른 두루마리 작품이나 성서 본문과 구별됩니다. 단수형; 화자(다윗는 전체 구성에서 주제이자 대상이며, 각 행마다 신학적인 사고를 전개합니다. 이새의 막내이자 가장 중요하지 않은 아들인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신학은 성서적 메시아주의 사상의 발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도적 설교에서 그 보완점을 찾습니다. 두루마리 자체는 기원전 1세기의 작품이지만, 시편이 작곡된 연대는 헬레니즘 시대나 그보다 더 이전인 페르시아 시대로 옮겨갑니다. 이 날짜는 당시 작성된 텍스트의 구조, 스타일 및 언어 특성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시편은 원래 신학적인 이유로 원고 저자가 두 부분으로 나눈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작품으로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 151b편의 제목에서 한 단어를 분석하면 랍비 히브리어의 특징인 전체 구성과 완전히 별개의 스타일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가정입니다. (26-27쪽)

Ks. Marcin Biegas, "Postać Dawida w hebrajskiej wersji Psalmu 151 (11Q5)," BibAn 8/1 (2018) 5-28.

저자는 시편 151은 사무엘상 16장을 다윗의 고백으로 서술한 시로 분석하며, 이 구절의 중요성은 메시아사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내 관심사인 목자-양 은유에 관해서는 달리 진술할 내용이 없어서 연구 범위에서 제외할 예정이다. 추후 메시아사상 연구를 위한 자료로 사용할지 모르니 기록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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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 공동체는 요일별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고, 4Q504는 그 일부로 "천체 이야기"(Words of the Luminaries)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쿰란공동체의 기도문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고,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 대한 희망을 하나님께 간구했다고 여겨진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회고는 반성을 위한 회개의 성격을 갖고 있었을 테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취를 고대했다고 봐야 한다. 일례로 4Q504에서 다윗 언약에 대한 언급은, 쿰란 공동체가 다윗 메시아사상을 공동체의 주요 사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을지라도, 제사장 메시아사상도 쿰란 공동체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므로, 다윗 언약의 실현을 요청하며 이스라엘 왕국의 이상이 재현되기를 고대했을 거라는 가정은 가능하다.

결국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대어, 언약의 실현을 고대하며, 이상의 실현을 꿈꾸던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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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Q504에 관한 첫 글이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미래 지향적 해석"이었는데, 후속 글이 견해를 뒤집는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과거 지향적 해석이다.

4Q504 1-2 frag. Col.Ⅳ를 읽으면, 다소 우세한 입장대로 다윗 언약을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볼 수 있지만, 뒷부분인 Col.Ⅴ를 읽으면 다윗 언약은 과거 사실의 역사적 진술이 된다. Col.Ⅴ는 생명수 샘 (Source of living water)의 파괴를 말하는데, 이곳은 Col.Ⅳ에서는 시온이다.

Col.Ⅳ에서 다윗 언약과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을 다루었다면, Col.Ⅴ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기를 다룬다. 다윗 언약은 역사적 진술의 일부에 해당하며, 따라서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 관점에서 생명수 샘은 목자 은유와 깊은 연관성이 있어서 이 부분을 유심히 읽었는데, 덕분에 다윗 언약에 관한 해석의 기조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참고 자료는 앞뒤로 잘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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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는 고대 크레타 섬을 통치했던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된다.

저는 그곳에서 제우스의 빛나는 아들, 미노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앉아서 황금 지팡이를 쥔 채 망자들에게 법도를 알려주고 있었고,
그들은 문도 넓은 하데스의 집에서 그를 둘러싼 채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며 판결을 구하고 있었답니다. (11.568-571)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이준석 역, 아카넷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11권에서 주인공 오뒷세이아는 하데스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지인들을 만나고, 주변을 둘러보니 미노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라본 미노스는 하데스에서 망자들에게 법도를 알려주고 판결을 내려주고 있었다. 이런 역할은 그의 왕의 지위와 그가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묘사한다. 또한 "제우스의 빛나는 아들"이라는 설명은 그가 갖는 위상을 드러내며, "황금 지팡이"는 그의 왕위를 드러낸다.

플라톤의 『미노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왕은 사람의 영혼에 법을 제공하는 사람이며, 미노스를 이상적인 왕이라고 평가한다.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생애에 300~400년의 시간적인 차이는 존재하지만, 미노스에 대한 인식은 동일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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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이 아닌 파편으로 남아 있는 쿰란 문서 해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은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4Q504는 기도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혹자는 4Q504가 기원전 2세기 작품으로는 드물게 패턴화된 기도문이라고 한다. 기도라는 장르는 본문 해석의 방향성에 영향을 준다. 즉 본문은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해석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은 단순히 과거 사실의 반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의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 목자, 백성의 왕자가 되어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통치한다고 진술한다. 또한 열방은 그의 영광을 본다.

이 진술만 보면 역사 진술(과거)로 해석할 수 있지만, 기도라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다윗 목자의 도래를 간구하는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다윗 목자를 왕자라는 단서와 함께 고려하여 에스겔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다수인데, 차후에 특이점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대세를 따라도 무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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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brey E. Buster, "6 - Words of the Luminaries (4Q504–506)," in Remembering the Story of Israel: Historical Summaries and Memory Formation in Second Temple Juda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 250-299. 

6 - Words of the Luminaries (4Q504–506)
https://www.cambridge.org/core/books/remembering-the-story-of-israel/words-of-the-luminaries-4q504506/B35F4084536DF8B13D9885D1589028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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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al Regev, "Sin, Atonement, and Israelite Identity in the Words of the Luminaries in Relation to 1 Enoch's Animal Apocalypse," Hebrew Union College Annual, Vol. 84-85 (2013-2014), pp. 1-23.

Sin, Atonement, and Israelite Identity in the Words of the Luminaries in Relation to 1 Enoch's Animal Apocalypse
https://www.jstor.org/stable/10.15650/hebruniocollannu.8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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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 전공자로서 구약에 미약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래서 관련 논쟁은 제외하고, 내 연구 주제인 목자-양 은유로 접근할 때 이사야서는 최소 1~2차례 급진적인 신학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사야는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를 고대한다 (예를 들어, 37:35). 하지만 역사는 그의 믿음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특히 이방 왕 고레스는 다윗 후손의 과업 중 하나인 예루살렘 재건을 실시한다 (44:28). 이러한 과업은 이방 국가와 왕을 우상 숭배와 침략으로 정죄하던 관례와 달리 고레스에게는 "내 목자"(44:28)와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45:1)라는 칭호를 적용하도록 만든다. 

또한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52~53장)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자(특히, 53:4)에서 민족의 죄악을 담당한 의로운 종(53:11)로 달리 생각하게 된다.

이사야는 여전히 다윗 계열의 메시아사상을 유지하지만, 메시아의 과업이 성취되는 방식에 신학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런 변혁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과 후대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재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사상의 변천 과정에서 중요한 본문이고, 예언 전통과 신학의 확장성이라는 주제에서도 깊이 있게 다뤄볼 만한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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