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Daniel A. Foxvog 교수가 공개한 수메르 문법서와 기초 어휘집입니다.
http://home.comcast.net/~foxv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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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linear Scripture Analyzer (ISA)는 원문의 음역과 의미를 분석해주는 도구로, 원문을 연구하는데 유용합니다.

http://www.scripture4al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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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인터뷰]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김종일 PD"


"하고싶은 이야기 30% 만 소화..그래도 만족"

"
기독교 모태신앙
..그러나 성역은 없다"

"기독교가 모태신앙입니다. 하지만 PD로서 성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 의문을 던진 SBS TV 4부작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을 연출한 김종일 PD는 지난 3주 큰 홍역을 치렀지만 무척 담담한 모습이었다.

지난달 29일 다큐의 1부 방송을 앞두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방송 취소를 요구하고 나서고 목동 SBS 사옥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한기총의 반론 보도 요구를 거절한 SBS가 우여곡절 끝에 13일 마지막 4부 방송을 몇시간 앞두고 반론 보도 요구를 수용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일단락됐다.

15일 오후 목동 SBS에서 만난 김 PD는 "방송이 다 끝나 속시원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방송이 끝났다. 소감이 어떤가.

▲솔직히 이 다큐를 기획하고 만들 때는 이런 반발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회를 겨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견이 있어도 반발이 심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프로그램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나.

▲30% 정도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있지만 이 정도면큰 상처없이 방송을 마친 것이기 때문에 만족한다.

--다큐의 기획 동기는 무엇인가.

▲기독교가 모태신앙이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기독교와 교회를 접하며 자랐다.

사춘기 시절부터 의문이 생겼다. 교회 안팎의 삶이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 시골 작은 교회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 등을 보며 잘은 모르지만 뭔가 왜곡돼있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PD가 된 후 언젠가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002년 티모시 프리크의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읽은 후 그 생각이 더 구체화됐다. 지난해 5월 내부에 기획안을 올렸지만 통과가 안되다가 아프간 피랍 사태가 발생하자 종교간소통과 화해를 모색하자는 취지로 기획안을 좀 수정하면서 제작 승인을 받았다. '신들의 고향을 가보자'는 취지로 기획했다.

--취재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뭔가.

▲이란에 가보니 이슬람 시아파와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여러가지가 비슷했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선교가 금지돼있고 거기서 개종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들은 그런 이란에 선교를 하러 간다.

그런데 선교하러 나서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이슬람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해봤더니 60%가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남의 종교를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선교하러 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있나. 다큐의 2부에서는 선교를 하려면 그들의 종교를 알고 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신의 신과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가야하는 것 아닌가.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의 믿음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제기하는 것처럼 논리가 크게 소용없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종교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다. 종교적 문제가 사회와 연결돼 있다. 개인의 문제, 개인의 신앙에 머물면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프간 사태 후에도 이슬람 지역으로 선교 활동을 나간다.

종교에 대해서는 성역 운운하는데 21세기에 성역이 어디있나. 읽지 말아야하고,보지 말아야할 것이 어디있나. 가치 판단은 시청자의 몫 아니겠는가.

--한기총의 반론 수용을 거부하다 마지막에 받아들였다.

▲내부 PD들 대상으로 시사회를 했더니 '반론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또 종교간 소통을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한기총의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고, SBS 앞으로 몰려든 선량한 신도들의 신앙도 존중해야한다고 판단했다. 또 한기총이 반론을 보도하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왔기 때문에 마지막 4부에 그들의 반론을 수용했다.

--영국에서 교회가 사라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등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선도 제기했다.

▲영국 세속주의협회장이 "종교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옮겨갈 뿐이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의 전자 오락 열풍을 종교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게임을 통해 자기를 초월한 어떤 존재를 꿈꾸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종교간 화해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프로그램에 소개한 개신교 원로 김경재 목사(삭개오 작은교회)의 말씀에 공감한다. 세상에는 유일신이 존재하는데 모든 종교는 그 유일신으로 가는 여러갈래의 길이라는 것이다. 길은 다르지만 그들이 섬기는 신은 똑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갈래의 길을 인정해야 다른 종교와 상생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중동에서 보는 태양이나 한국에서 보는 태양이나 다 같은 태양이라는 얘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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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의 유래와 의미

Zakcai/oj는 히브리어 זַכַּי (Zakkai):에서 유래되었다. 이 사람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히브리어로는 의로운 자(Righteous One)라는 의미이다.

 

2. 현재형 용법에 따른 해석문제

삭개오는 통념대로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겨온 자인가? 아니면 편견에 시달린 의인인가? 이렇듯 서로 엇갈리는 평가는 동사 di,dwmi(주다)avpodi,dwmi(돌려주다)습관적 현재(customary present) 용법인지, 아니면 미래적 현재(futuristic present) 용법으로 쓰였는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용법에 따른 번역

1) 습관적 현재: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으며,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하였다면 네 배로 갚아주고 있습니다.

2) 미래적 현재: 제 재산의 절반을 주고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습관적 현재일 경우, 9절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삭개오의 회심을 진술한다기 보다는 그의 신앙을 입증으로 해석된다. 반면에, 미래적 현재일 경우에는 예수와의 만남으로 회심하여 결단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3. 대립되는 의견들

 

1. 습관적 현재로 해석

Alfred A. Plummer, Craig A. Evans, Frederick L. Godet, Joseph A. Fitzmyer 등이 습관적 현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Evans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Evans
이전 에피소드에서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배척당한 자들의 시력과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예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보았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물리적인 문제가 아닌 직업으로 인한 죄 때문에 배척 당하는 자를 회복하는 또 다른 예를 다루게 된다. 여리고를 지나가기는 동안, 예수께서는 부자이면서 세리장삭개오라는 자를 만나신다. 그는 (자신에게는 품위가 떨어지는 행동이지만) 뽕나무에 오를 만큼 예수를 보고자 했다. 놀라게도 예수께서는 군중 중에서 자신을 대접할 사람으로 삭개오를 지목하신다. 이러한 선택에 대한 반응으로 사람들불평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죄인의 집에 머물고자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매우 순간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아니면 아마도 저녁 식사 후에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삭개오가 서서 8절에 기록된 대로 말한다: 이제 저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NIV는 삭개오가 마음의 변화를 겪었다는 인상을 준다: 더 이상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며,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번역은 이 에피소드의 전통적인 해석을 확실하게 반영한다 (이러한 해석은 Marshall, pp. 694-99; Ellis, pp.220-21; Tannehill, pp.123-25). 이러한 관점은 삭개오 이야기를 회심 이야기로 본다. 부유한 세리는 그의 방식(물질주의, 부정직, 탐욕)이 잘못되었다고 보고 이제는 뉘우쳤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상당수를 이전에 속인 자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그가 회개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정확하지 않다. NIV에서 동사 givehere and now로 변경되었는데, 그리스 본문에는 없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삭개오의 진술이 그가 말한 순간 효과가 발생하리라는 인상을 준다. 이제 현재형 진술은 삭개오의 습관으로 이해된다. 관계 없는 단어들이 번역에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동사 will pay back은 전혀 미래가 아니다; 현재형이다. 이 동사의 더욱 문자적인 표현은 보십시요,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만약 누군가를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줍니다이다. 문자적인 번역은 삭개오의 진술이 반드시 새로운 행동을 나타낸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삭개오의 진술이 저녁식사 이후에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가리키지 않으며, 예수와 대화 동안 발생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삭개오가 죄를 자백했다는 단서가 없다(18:9-14의 세리의 경우처럼). 8절에 더욱 적절한 해석은 죄인인 세리에게 청하시고 그와 식사하려는 예수의 의도에 불평하는 군중(7)을 향한 삭개오의 진술을 즉각적인 변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삭개오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그의 직업 때문에 죄인이라 불리는 비꼼(sting)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상 그는 다른 세리들이 시민들을 속이고 착취한다지만, 삭개오 자신은 정기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를 하고 있고 (뜻하지 않게) 더 많은 돈을 걷었을 때 마다 (반드시 토색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항상 네 배로 갚아주고 있다고 변론한다. 이러한 해석이 실제 그리스 본문 대로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다 (참조 Fitzmyer, pp.1220-22).

9절에서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이유는 그의 공정한 행동(3:12-13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세리들을 향한 충고를 떠오르게 한다) 때문으로 이러한 행위는 신실한 마음을 암시하며,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이 입증하듯이,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 (경멸 받는 세리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우리는 추방된 자들과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 때문에 해를 당하는 자들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은 예수를 보게 된다.

1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삭개오 에피소드를 요약하는 것이 아닌 여행 내러티브의 절정에 도달하도록 하고 마무리 짓도록 하는 주제적 진술(thematic statement)로 이해해야 한다. (Fitzmyer [p. 1218]는 눅 19:10 15장 전체를 반복한다고 지적한다.) 종교적으로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읽어버린 자들을 비난하지 않으시고, 외모(outward appearances)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종교인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회개하도록 부르신다.

 

2. 미래적 현재로 해석

Darrell L. Bock, Robert H. Stein 등이 미래적 현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Bock Stein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자.

 

Bock
현재 시제는 삭개오의 현재 행실을 묘사한다(Godet 1875: 2.217; Fitzmyer 1985: 1220, 1225).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삭개오는 선량하고 공정하게 보이므로 죄인으로 취급하길 거부한다. Fitzmyer는 믿음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고 네 배로 되돌려주겠다는 언급 때문에 삭개오가 막 회개했다고 여긴다면, 장래의 토색 행위에 대한 보상을 분명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결과를 가져오는 뜻밖의 장면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Plummer (1896: 435)는 삭개오가 예수께 자신에 대해 자랑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견해는 παρχόντων (hyparchontōn)자산의 이례적인 기능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19:8b에 대한 Fitzmyer의 접근은 과거 행위를 되돌아보게 하는 토색 행위를 무시한다(물론 부정과거 συκοφάντησα, esykophantēsa, 내가 토색했다; 신약에서는 오직 이 구절과 3:14; BAGD 776 §2; BAA 1549 §2; Prov. 14:31; 22:16; 28:3; Nestle 1903). 부정과거를 완료 시제(만약 제가 누군가의 것을 토색하였다면)로 이해하고 Fitzmyer의 견해를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동사의 문맥이 더 어색해진다. 완료 동사는 Fitzmyer의 접근을 보다 설득력 있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Danker (1988: 305)는 군중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고 언급했다. 만약 과거에 관용적으로 대했다면, 군중은 그에 대해 수군거리지 않았어야 한다. 그래서, Fitzmyer의 견해는 군중이 틀렸고, 세리의 관행대로 해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예수를 만난 결과로 삭개오의 회개와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동사는 현재 결심의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욱 적당해 보인다(참조. 3:8; Plummer 1896: 435; Arndt 1956: 389; Klostermann 1929: 185; Marshall 1978: 69798; Creed 1930: 231; Nolland 1993b: 906). 행동이 구체적인 표현에서 믿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행동이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행동은 죄인인 한 여인(7:3650)의 경우만큼이나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생각나도록 한다. 사실, 19:9-10에서 구원과 잃어 버린 자에 대한 구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사실상 그들이 마음을 바꾸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동사들을 현재의 행위가 아닌 미래의 결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삭개오의 예수와의 만남은 그의 돈을 처리하는 방식을 바꿨다 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

문화적 배경은 삭개오의 약속의 한도를 보여준다. 유대사회에서는, 개인 소유의 20 퍼센트를 취하는 게 관례이다. 그 이상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SB 4:54647; Danker 1988: 306; b. Ketub. 50a; Lachs 1987: 331 n. 6; 18:22의 주해 참조). 토색에 대한 법적 변상은 20%이지만( 5:16; 5:7), 삭개오는 모세의 율법이 도둑에게 부과한 형벌 보다 두 배나 가혹하다( 22:1 [21:37 MT]; 삼하12:6 [이 구절의 70인경은 일곱 배]; 비교 m. Ketub. 3.9). 이러한 의무는, 삭개오의 변화된 마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의 표현을 보여준다(Ellis 1974: 221). 또한 네 배로 갚는 관습은 쿰란과 로마 법 관례이다(Mur 19.10, 이혼 서류 일자 a.d. 111 [DJD 2:105]; Creed 1930: 231; SB 2:250; Michel, TDNT 8:105 n. 154; Kerr 198687).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μίσια, hēmisia)을 준다(BAGD 348; BAA 705; 이밖에 신약에서는 막 6:23; 11:9, 11; 12:14; 그리고 마카비서 상 3:34, 37; 토비서 10:10; BDF §164.5; BDR §164.5). 다른 기준들에 의하면 이러한 행동은 후하다. 부자 관원의 반응( 18:23)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이러한 반응은 가난한 자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누가의 경향을 반영한다(Arndt 1956: 388: 예수의 사랑은 두드러진 승리를 이룬다). 하지만 삭개오 역시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상을 해야 한다: 만약 그가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그는 네 배(τετραπλον, tetraploun; 신약에서는 여기에서만 쓰였다; BAGD 813; BAA 1622)로 갚아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삭개오가 자신이 무언가를 토색했음을 깨달았음을 시사한다(Ellis 1974: 221; Plummer 1896: 435; 문법 참조 롬 5:17; 2:20; 3:1). 삭개오는 토색한 자들에게 변상하는 과제와 세리에 대한 거대한 과제를 꾀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증거인 그의 마음의 변화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신다. 그의 변화된 상태에서, 삭개오는 돈을 아낌 없이 다루는 방법에 대한 예를 보여주게 된다( 16:913; 딤전 6:610, 1718). 그의 행동은 눅 12:33에서의 권고를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다짐을 결정하는 어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19:8을 삽입으로 여기도록 한다. 이들은 군중의 불평과 선생의 응답 사이의 강요에 주목하여 접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κύριος (kyrios, ), σταθείς (statheis, 서다), επεν πρός (eipen pros, 그에게 말하다), 그리고 παρχόντων (hyparchontōn, 재산)과 같은 누가 용어의 사용을 지적한다. 게다가, 동사가 누가의 주제인 회개를 강조하고 이야기의 원래 흐름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Leaney 1958: 241; Fitzmyer 1985: 1219). 하지만 법적 세부사항들의 중요성과 정확성은 이러한 반대들 보다 더 중요하다. Derrett (1970: 27885)은 법적 세부사항들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문화에서, 부정한 수단으로 이득을 얻은 사람과의 식사는 그를 공범자로 만든다. 이러한 인물들을 향한 사회적인 배척은 그들을 방해물로 보기 때문이며(Nolland 1993b: 905), 이러한 사회적인 배척에 힘쓰는 것조차 허용한다(m. Ned. 3.4). 변상은 목자, 세리, 삯을 받는 농부(revenue farmer)들에게 강요된다. 회개에 이르기 쉽지 않음에도 불구에고 목자, 세리, 삯을 받는 농부(Restitution)들도 회복되어야 한다(b. B. Qam. 94b). 세리는 자신들이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지 않으면(m. ohar. 7.6), 돈을 부당하게 취했다고 간주되어 부정한 자로 취급 받는다(m. B. Qam. 10.12). (세리에 대해서는 3:12의 주해를 참조하라.) 배상에 대해 약속을 선언하는 19:8이 없다면 왜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원 내러티브(original narrative)에 속한 것이지 삽입이 아니다.

 

Stein

(1) 19 8절에서 두 동사가 미래적 현재로 해석되지 않으면, 삭개오의 자랑으로 표현되어 버린다.

(2) 내 소유(tw/n u`parco,ntwn)내 수입 보다는 줄곧 가지고 있는 소유( 8:3; 11:21; 12:15, 33, 44; 14:33; 16:1; 4:32의 경우)로 해석된다.

(3) 저는 항상 사취한 걸 되돌려준다 보다는 되돌려주겠다로 이해해야 가장 바람직하다.

(4) 누가복음에서 부유한 사람이 예수를 만났을 때 자포자기하지 않고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가 있는가?(참조. 6:24; 12:1621; 16:1931; 18:1825.)

(5)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말 그대로라면 삭개오에게 그 날 구원이 임한 듯한 감이 있다. 만약 동사가 미래적 현재라면, 삭개오의 회개와 개종의 표지가 된다. 만약 습관적 현재라면, 오늘 구원이 임했는지를 이해할 이유가 없다.

(6) 이전 인용문(18:914, 1517, 1830, 3543)은 모두 한 사람이 등장하며 구원 받음과 관련되어 있다.

(7) 마지막 주장은 19 10절을 포함한다. 이 주장은 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18:919:10의 요약을 다룬다. 19:910에서 예수의 진술은 삭개오의 개종을 보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의인 삭개오의 결백을 입증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은 자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리고에 오셨다. 삭개오의 회개가 개별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가는 그의 독자들에게 19:8의 기록을 회개의 열매(3:8)로 보도록 의도하였으며, 그의 믿음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19:4, 6, 8에서는 그의 믿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4. 해석 경향과 과제

(설교자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di,dwmiavpodi,dwmi를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여, 이 이야기를 삭개오의 회심과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는 목자이신 예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받아들여져 왔는데, 이제는 세밀한 연구를 통해 삭개오의 정체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Bock, Darrell L., Luke 9:51-24:53,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2,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Evans, Craig A., Luke,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Vol.3, Peabody: Hendrickson, 1990

Stein, Robert H., Luke,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 24,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2


** 최종 업데이트 2008년 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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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제자도

추천도서 2008. 7. 19. 21:03

특정 사건을 시점으로 개신교를 향한 비난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본다면 작금의 비난은 별 일 아니겠지만,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위기상황이다. 교회성장의 정체와 갈수록 더하가는 불신과 비난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정리되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행동과 신앙의 불일치, 즉 가식이다. 이러한 가식을 불신시키기 위해서는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제자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입니다.

하인리히 아놀드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노력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 깨닫고, 삶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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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성경원문연구 제 5호 "이유·근거·증거·증명을 뜻하는 접속사의 번역"


헬라어에서 접속사의 번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움이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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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약성경과 고대근동 "“가브리엘 묵시록”과 SBS의 “신의 길 인간의 길.”"


예수 그리스도와 오시리스


왼쪽의 여인은 이시스, 중앙 인물은 오시리스


SBS의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때문에 요즘 한국 기독교가 바짝 긴장하는 듯하다. 기독교의 복음을 구성하는 주요 사건, 즉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세례, 고난, 죽음,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오시리스-디오니수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아류 신화에 불과하다는주장은 비록 새로운 것도 진지한 학계의 의견도 아닌 황당한 가설에 불과하지만 한기총과 같은 단체가 SBS 사옥에서 단식 농성을 벌일만큼 일반 기독교인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SBS 스페셜을 챙겨보지는 못했으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Frekke와 Gandy가 공저한 The Jesus Mysteries의 주장을 그대로 재탕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를 이집트 신화의 아류로 보는 관점은 제대로된 학문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의 심정적 동의를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장 근사한 예가 Zeitgeistmovie.com로 대표되는 운동이다. 그러나 오시리스 신화를 자세히 살펴 보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지는 유사성은 기껏해야 피상적임을 알 수 있고, 설사 그 둘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발견된다해도 그 유사성이 인과적 영향 관계를 보장하지 않음은 학계의 상식이다.

 

피상적 유사성이라는 의미을 부연하기위해 오시리스가 예수님처럼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예수의 신비>의 저자 프레케(Freke)와 갠디(Gandy)의 주장을 예로 들어보자(The Jesus Mysteries, p 5). 첫째 오시리스의 어머니는 누트라 불리는 여신인데 누트가 처녀였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처녀라는 호칭은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에게 주어졌다. 오시리스는 어머니 누트(Nut)와 아버지인 게브(Geb)의 성관계를 통해 잉태된다둘째, 고대 근동 여신이 처녀라는 호칭을 가졌을 때 그것은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것, 즉 남자의 도움없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처녀라는 호칭은 남자없이 아이를 임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늙지 않은 미모를 가진다는 의미로, 이 호칭은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에게도 붙었고 바알의 아내이자 누이인 아나트(Anat)에게도 붙었다. 나아가 이 호칭을 가진 여신들은 보통 넘치는 성욕을 가지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자녀도 거느린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동정녀 잉태의 개념과는 너무나 다르다.

 

이런 비교의 피상성 이회에도 오시리스 신화의 수많은 버전들 중 어떤 것이 복음서 저자들에게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은 오시리스 신화와 복음서 간의 비교를 매우 어렵게 만든다.  다양한 버전의 신화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 각각의 생성 연도 또한 전혀 알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오시리스 신화를 플루타르크의 보고에 근거해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무작위로 비교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며 의미있는 비교가 전혀 될 수 었다. SBS의 다큐멘타리의 유일한 순기능은 일반인들 사이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높였다는 것이다.


가브리엘 묵시록


주전 1세기 토판, 사해 동쪽 지역에서 발견, 빨간 잉크로 기록
 

지금 미국에서 다른 이유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일반인 사이에 높아지고 있다. 가브리엘의 환상 (Vision of Gabriel) 혹은 가브리엘의 묵시록(Gabriel’s Revelation)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문서는 사해문서 유일하게 양피지가 아닌 가로 30센티미터 세로 60센티미터의 토판에 빨강 잉크로 기록되었다. 토판은 이미 10여년 전에 발견되어 스위스의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보관되었으나 본격적인 언론과 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야르데니(Yardeni) 엘리쭈어(Elitzur) 사해토판의 연구 번역을가브리엘의 환상”(Vision of Gabriel)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이다. (히브리어 원문과 영문 번역은 Biblical Archaeology Review홈페이지에서 있다).

 

학자들은 가브리엘 묵시록 기록된 때를 기독교 생성 이전인 주전 1세기로 본다. 히브리대학의 성서학 교수인 이스라엘 (Israel Knohl) <종교 저널>(The Journal of Religion) 봄호에서 묵시록이 고난받아 죽은 삼일만에 부활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예수님 바로 이전 시대(2성전기) 유대인들에게는 죽고 부활하는 메시아 개념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종종 증거로서 인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부학자들은 기독교의 핵심을형성하는 죽고 부활하는 메시아 이미지가 (이방 신화의 영향을 받은) 후대 기독교인들의 조작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수에 따르면 가브리엘 묵시록 고난받고 부활하는 메시아 사상이 기독교 생성 이전에 이미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해준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의 묵시록에는 정치적 메시아의 상징인 다윗 이외에 고난받는 메시아의 상징으로서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이 등장한다. 시카고대학 교수인 피쉬배인(Fishbane) 따르면 예레미야 3:18, 호세아 11:1-9절에도 고난받는 메시아의 상징으로 에브라함이 사용된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 묘사되는 점과도 연결된다. 또한 요셉 자신도 고난받는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사실은 2성전기 문서인 벤자민의 증언”(Testament of Benjamin 5:8)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곳에서 야곱은 요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흠없는 자가 무법자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죄없는 자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대신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 너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고난받고 죽는 메시아는 가브리엘로부터 부활을 명령 받는다. 교수는 가브리엘의 묵시록 80-81열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삼일 만에 부활하라!’ 가브리엘은 왕중의 , 너에게 명령한다.”

 

물론 교수의 해석이 학자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몇가지 해결되어야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문서가 골동품 상인에 의해발굴되어 발굴당시의 상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 토판에 글이 새겨진 것이 아니라 빨간 잉크로 기록된 등은 사해 토판 자체의 진위 논쟁을 불러일으킬 있다. 또한 교수의 해석은 마모된 본문의 재구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묵시록 기독교의 핵심, 고난받고 부활하는 메시아가 유대교적 뿌리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증거를 제시한다. SBS “신의 인간의 지닌 치명적 약점이 기독교가 가진 유대교적 뿌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가브리엘 묵시록 기독교의 유대교적 뿌리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가브리엘 묵시록을 보고 기독교복음의 독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있겠지만, 신앙인들에게 가브리엘 묵시록은 SBS ‘신의길 인간의 혹은 짜이트가이스트무비(www.Zeitgeistmovie.com) 대표되는 노선, 기독교가 이집트 신화의 아류라는 주장을 넘어서는 도구가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가브리엘 묵시록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 주어진 메시아 사건임을 상기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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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앤조이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은 표절"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반기독교 소설류인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그대로 베낀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 4부작 중 첫 편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가 6월 29일 밤 11시 20분부터 한 시간 동안 방영됐다.

불공정한 내용을 케이블이 아니라 그것도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방영하였다는 사실은 2000년을 이어온 기독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는 검증되지 않은 자료 제시와 그 논리전개 방식의 문제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적되어 이미 학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허구 소설류인데, 이번에 SBS 스페셜이 전적으로 거기에만 의존하다시피 하면서 특집방송을 만든 것은 공익방송으로서 스스로 그 위상을 격하시킨 부끄러운 사건이며 동시에 정통 기독교에 대한 무책임한 폭거이다.

그러면 필자가 이번 방영된 SBS 스페셜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집트 신화인 ‘오시리스 신화’에 관해 살펴보자. 오시리스 신화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서기 40~7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크에 의해서다. 다시 말해, 단군신화가 일연에 의해 조선시대에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 그 유래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플루타르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후 10년 내지 40년이 경과한 때에 출생한 인물이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집대성한 사도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을 다 기록한 이후 비로소 활동하기 시작한 철학자이다. 플루타르크가 오시리스 신화에 관한 글을 쓴 때를 아무리 빨리 잡아도 70~80년경이므로, 이미 그때는 신약성서의 기록이 거의 마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오시리스 신화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시기가 맞아 떨이지지 않는다.

둘째, 티모시 프리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시리스 신화를 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티모시 프리크가 플루타르크의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관하여”라는 책을 표절한 것이다. 오시리스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이집트인에게 농사를 짓는 법과 여러 신들에게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오시리스의 동생인 세트는 이것을 시기하여 자기 형인 오시리스를 잡으려고 교묘하게 수작을 꾸며서 자신이 만든 관 속에 눕히게 된다. 후에 오시리스는 세트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14개로 토막이 나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리스처럼 이시스와 근친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오시리스가 이집트를 28년간 통치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통치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면서 당대에 정치적 메시아만을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와 그 주권을 온 인류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었다.

셋째,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시리스 신화와 같은 고대 이민족들의 신화가 간직하고 있는 다신론적인 내용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이 말은 티모시 프리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다신론적인 신화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신화는 무엇인가? 그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오시리스 신화에는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플루타르크는 이집트 신들의 이름 대신에 로마 신들의 이름으로 대체하여 오시리스 신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다신론적인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사상에 철저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다신론적인 신화를 배격하고, 죄에 빠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가 보여주는 표현 방식도 플루타르크가 오시리스 신화를 소개하는 것과 같은 신화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들의 진술로 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역사는 신화와 달리 사건이 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 의미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사역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구원과 은혜와 평강이다.

넷째, SBS 스페셜이 티모시 프리크를 인터뷰 전면에 내세워서 그의 주장들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 것은 한국의 청취자들을 우롱한 처사이다. 더구나 SBS 스페셜 제작진이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단지 방송 초두에 책 표지만을 보여주고 이미 내용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이나 인용 제시어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가져다가 마치 자기들이 학문적으로 신약성서와 비교를 한 것과 같이 청취자들을 현혹시킨 것은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 검증되지 않은 망상을 무단으로 사용한 일이므로 너무나도 중대한 표절행위이다.

과연 SBS는 티모시 프리크와 특히 그 책의 공저자인 피터 캔디에게 허락을 받았는가? 이는 마치 SBS 스페셜 제작진이 무슨 학자라도 된 듯이 착각하고 청취자들을 기만한 행동이 아닌가? 필자는 이러한 SBS 스페셜의 표절 행위에 대해서 마땅히 그 담당자들에게 엄한 책임을 물어야 공적 기관이 취할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SBS 스페셜의 기획의도에 의하면, “본 프로그램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의 기원을 <예수는 신화다>라는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의 저서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청취자들에게 심어주었다.

결론적으로,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라는 저서가 이미 서구와 국내 학계에서 그 학문적 가치가 없는 일종의 기독교 비하 소설류로 결론이 난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이번에 특집 프로그램을  만든 SBS는 공익 방송으로서 그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뼈저리게 져야한다. 물론 일부 네티즌들이 이번 SBS 스페셜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 혹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반 기독교적인 정서의 표출이며 또한 제대로 실상을 알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의 치기인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줄 아는 공인이라면 스스로 자중 자해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SBS는 이번 스페셜 방송 파행과 관련하여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단순하게 무마하고 해명만을 할 것이 아니라, 차후에 유사한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청취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제기를 SBS 스페셜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소개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 이번에 “예수는 신화다”라는 저서를 표절하고 더 나아가서 공정하지 못하게 특집 방송을 만든 담당자들을 엄히 문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후에 기독교계가 SBS에 대하여 법적으로 그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소기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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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와 제 4 부 평론"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와 제 4 부 평론>


정치적 근본주의를 넘어서 참된 본질의 회복의 길로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는 제국주의와 함께 전파된 영국의 기독교가 선교지에서 어떠한 반응을 낳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원주민 문화에 관한 이해가 없이 유럽 문화의 절대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제국주의적 선교는 바누아투의 타나 섬에서처럼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선교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병행되어 힘에 의한 강압이 이루어질 때에는 오히려 원주민의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문화 코드에 둔감한 영국의 기독교는 타 문화권 선교에만 실패한 것이 아님을 이 방영물은 잘 보여주었다. 영국의 기독교는 영국 내에서 다음 세대를 선교하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기독교가 한 시대의 문화에 적응한 후 그 시대의 문화와 기독교를 동일시하게 되면 전통을 싫어하는 젊은 세대는 기독교를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며 거부하게 되어 있다. 이 방영물은 미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현대 문화 코드에 잘 적응한 측면이 있음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기독교 역시 한 시대의 문화와 결합하여 화석화된다면 타문화권에서는 물론 미국의 다음 세대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 방영물은 기독교가 왕성한 미국 사회에 범죄율이 매우 높은 것은 양극화 현상 때문인 것으로 진단한다. 미국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미국 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심하다. 즉 미국 사회는 아직 기독교적인 사회는 아니다. 한편 유럽의 경우에는 기독교인들이 감소하고 있지만 유럽 사회는 그 동안 성경에 담긴 약자 보호의 정신을 꾸준히 체화하여 왔다. 그리하여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고 범죄율도 낮다.


한국 기독교의 문화 적응은 미국의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영국처럼 전통 문화와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현대 문화에 완전히 개방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수적으로 감소하겠지만 영국처럼 급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한국 기독교가 계속 성장하려면 과거 교회 전통의 틀을 과감하게 개혁하여야 한다. 교회 문화와 복음을 혼동하지 말고 복음은 유지하되 전통 교회 문화는 얼마든지 개혁하고 새로운 문화 코드에 개방되어야 한다. 개혁과 개방은 한국 기독교가 더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성장이 한국 사회를 참으로 발전시키려면 한국에서 성장하는 기독교가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성경적 기독교여야 한다. 미국식 기독교는 자본주의처럼 경쟁과 성장에 익숙한 기독교이지만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기독교가 아니다. 유럽식 기독교는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는 정신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정신을 한국에서 실천할 만한 영향력을 가질 만큼 성장할 수 없는 기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면서도 성장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에 한국 기독교에 주어진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개혁과 개방이 필요하다. 그런데 양극화 현상의 해소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성서에 담긴 핵심 메시지에 관한 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가난한 자들, 자유가 없는 자들, 힘이 없는 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자들이 발생하지 않는 장치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이 제7년에 가난한 자의 빚을 탕감하는 빚탕감법, 6년 동안 종을 부린 후에는 풀어주는 노예해방법, 대토지소유를 금지하는 토지법 등이다. 이러한 법의 정신이 체화되는 사회 속에는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이러한 법의 정신을 더 철저화한다. 예수께서는 대토지를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신다(마가복음 10:21).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11:4)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이 기획물 제 4 부 “길 위의 인간”은 자신이 선 교리적 입장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이와 다른 입장을 모두 부정하는 근본주의적인 사고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빈 라덴이나 조지 부시나 모두 이러한 근본주의자들로서 자신이 선 자리를 절대적인 선의 자리로 여기고 적이 선 자리를 절대적인 악의 자리로 여기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정치적으로 쉽게 이용이 되는 약점을 보이는데, 미국의 경우 근본주의자들은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복지정책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지적된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따른다는 근본주의자들이 어떻게 성경의 정신에 정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 본문의 문맥이나 본문의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으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세상을 선한 편과 악한 편으로 단순하게 나누고 자기가 속한 편을 무조건 선한 편이라고 여기는 미성숙한 세계관과 만나 기독교를 천박하게 타락시킨다.


이 방영물의 제4부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사탄, 종말, 천국의 개념이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며 세 종교를 모두 상대화한다. 화해와 소통을 위해 방해가 되는 근본주의를 극복하고자 이 모든 종교들에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상대주의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각 종교들을 피상적으로 비교하여 발견된 유사성을 토대로 이 종교들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고유한 것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근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를 권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문자주의적 이해를 극복하기 위해 본문을 독자가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없음과 같다.


근본주의를 극복하려면 각 종교인들이 각자의 종교의 본래적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종교를 문자주의적으로 왜곡하여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한 시대의 문화와 결합하고 그 문화를 정통 교리인 것처럼 고집하는 근본주의 기독교는 성서에 담긴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예수교로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거듭나지 않고 성서의 정신과 관계없이 성장하는 기독교는 예수와 무관하며 성서와도 관계없다. 본질의 회복은 개혁과 개방보다 먼저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본질이 회복되지 않은 기독교는 성장할 필요가 없으나, 본질이 회복된 예수교는 그 생명력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할 것이다.


미국 못지않게 양극화된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책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세력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이러한 선택은 단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 선택이며 선교적 선택이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권력과 재물을 택하는 잘못을 범한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젊은 세대를 선교하지 못할 것이며 유럽의 기독교처럼 쇠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의 편에 서지 말고 권력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기독교가 권력과 재물의 길을 택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예수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인간의 길을 하나님의 길과 병행하려고 하는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길 위에서 근본주의라는 가면이 우상숭배적 상대주의라는 실상과 만나는 모습이 진리를 믿지 않는 거짓 종교인들의 정체이다.


근본주의를 하려면 정치적 의도 없는 순수한 근본주의를 취해야 하며, 상대주의를 하려면 종교의 탈을 벗어버려야 한다. 대개의 신앙인들은 대개 근본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은 다른 모양의 폭력이다. 참으로 비판받아야 할 자들은 양처럼 순수한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이용하는 이리떼들이다. 그들은 근본주의의 탈을 쓴 상대주의자들로서 자기들도 믿거나 따르지 않는 근본주의 교리를 가르치며 권력과 재물을 취하며 명예마저도 누리고자 한다. 자기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항상 적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이 정치적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화해와 소통을 가로막는 장본인들이다.


이 정치적 근본주의자들 못지않게 화해와 소통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 경전을 모독하며,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독한다. 또한 예수의 역사성과 신성을 부정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폄훼하는 데 지극히 열심이다. 이들은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왜곡하는 일본인들 못지않게 이웃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고 남이 믿는 신앙을 짓밟으려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종교에 빠져 있는 셈이다. 진정으로 의심하려면 자신들의 불신앙의 절대성마저도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방영물은 방송 초기(제 1 부)에 반기독교적 성향을 보인다. 이것은 방송의 흥행을 위해 반기독교적 탈을 쓴 것이므로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근본주의의 탈을 쓴 정치적 근본주의와 유사한 모습이다. 또한, 특정 종교의 신앙의 폄훼하는 것은 종교들 간의 화해와 소통을 위한 이 기획물의 목적에 맞지 않으므로 이 기획물은 자기모순을 범한 셈이다. 결국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은 이러한 자기모순을 통하여서라도 흥행하려는 “인간의 길”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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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두전치사(prefixed preposition)란 접두사 역할을 하는 전치사이다. S. E. Porter, Idioms of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 Sheffield: JSOT Press, 1999, p.140에 나오는 용어.

* 학계에서는 전치사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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