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장동수 교수의 글로 <성경원문연구> 제 7호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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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도한 이유는 떠오른다. 여러가지 기도제목들이 있었는데, 대체로 간구와 감사였다. 원하는 걸 구했고, 응답되면 감사했다. 점차 신앙이 자라면서는 구하는 기도는 줄어들었고, 원대로 되지 않아도 감사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얼마전부터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만한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과 가족, 친척과 가족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들과 조국을 위해 일일이 기도한다면 그만큼 유익이 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만 못하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복음 6장 3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한지를 아신다(31-32절). 하지만 이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그러면 이 모든 걸 더해주신다고 하셨다(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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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인가?

성찰 2008. 4. 30. 21:11

기도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왜 기도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거의 매일 이 문제를 생각해왔다.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는 고민이 한결 깊어졌다. 기도란 게 혹시 자신을 세뇌시키는 신앙 의식이 아닌지 회의하기도 했다. 신학 서적을 읽어보아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분명히 아셔야 할 것들을 되풀이해서 알려드리는 게 기도란 말인가? 당장 결절이 나지는 않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기도란 하나님께 보여드릴 지원물품 요청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질서를 재조정하는 과정이다. 우주를 아우르는 진리를 회복시켜주시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바뀌었다. 산꼭대기로 기어올라가서 저 아래 꼬물거리는 한 점을 내려다보니, 그게 바로 내 자아였다. 별들을 바라모면서 비록 정확히 알지 못할지라도 우주 속에서 내가, 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행위다.[각주:1]



기도는 간구가 전부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란 말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시간이다. 죄악으로 더러워진 자신을 정결하게하는 의식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순종을 결단하는 시간이다.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함을 얻는 시간이다. 밀려드는 회의감을 저 멀리 밀쳐내고 확신으로 채우는 시간이다. 허전한 가슴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시간이다. 슬픔이 기쁨이 되는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경험한다. 인간이란 존재를 떨쳐버리는 시간이란 말이다.

  1. Philip Yancey, 기도, 서울: 청림출판, 2007, p.44-4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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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과학과 신앙이 배타적일까? 합리주의와 성령의 영감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렇다고 답하리라.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과학과 신앙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다. 과학이 이성을 사용하여 규칙을 발견하고 규명해낸 결과를 받아들이듯이, 신앙도 그러하다. 오래 전부터 신앙은 신학으로 체계화되어 왔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으로 신앙이 과학 보다  먼저 이성적으로 규명하고자 시도해온 셈이다.

사실상 과학은 기독교화한 사회의 산물이다. 그리고 수많은 과학 철학자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과학이 본 궤도에 접어든 것은 어떤 특정한 기독교적인 태도가 기독교 이전의 철학에 가미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과학과 근대 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중세주의가 과학 운동의 형성에 기여한 최대의 공헌을 부각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유럽 사상의 특색을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 볼 때, 과학의 기원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합리성을 주장한 중세 사상, 즉 여호와의 인격적 에너지와 한 헬라 철학자의 합리성에 의해 배퇴된 사상으로부터 온 것임에 틀림없다. [자연의] 세칙은 감독 아래 있고 질서 정연한 상태였다. 즉 자연의 탐구는 합리성을 믿는 믿음을 옹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몇몇 개인의 공공연한 믿음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했으면 한다. 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수세기 동안 의심 없이 수용되어 온 신앙이 유럽의 지성에 새겨 놓은 각인(刻印)이다. 나는 단지 말로 된 신조가 아니라 깊이 뿌리박힌 사고의 특색을 이야기하고 있다.[각주:1]
 

 

  1. Oliver Barclay,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1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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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다는 말의 의미란 무엇일까?

성경을 읽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서 혹은 성경을 읽고 난 결과로서 그것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독서가 상호적이 되어야 하고, 몸짓과 말 그리고 그것의 상호 작용이 독서를 삶에 동화되게 하고 삶을 독서에 동화되게 해야 한다. 성경을 읽는 것은 복음을 사는 것과 분리된 활동이 아니라 그것에 꼭 필요한 활동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바로 그 분이 발언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처럼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각주:1]



성경은 '경건한 무관심'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잔인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경건한 무관심'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인 성경을 외면하는 현실을 나타내며, '잔인한 관심'이라 함은 성경의 의도대로 읽히지 못한체 자신의 왜곡된 관점과 계산된 목적하에 읽히는 현실을 나타낸다. 성경읽기는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며, 깨달아지는 만큼 삶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1. Eugene H. Peterson, 이 책을 먹으라, 양혜원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 16-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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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의 변천사를 표로 구분해 설명해 놓았네요.


Passover Symbols
http://www.jewsforjesus.org/judaica/passover/resources/symb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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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번역 절차

** 선행조건 **
1. 대상독자 분석
2. 번역방침 지정

원문복원

번역자들에겐 필수과정이 아니다.

원문

번역할 본문을 적는다.

파싱

파싱한다.

원형

원형을 적는다.

단어의 뜻을 파악한다.

선택어

하나의 의미를 선택한다.

선택이유

해당 의미를 선택한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Interlinear

원문을 직역한다

역본

여러 번역본과 원문을 비교하여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다.
다양한 종류의 역본을 보유하고 있을수록 도움이 많이 된다.

번역

번역방침과 대상독자를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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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Idol 7 상위 8명이 부르는 "Shout To The Lord"입니다.




Shout to the Lord

My Jesus, My Savior,
Lord, There is none like You.
All of my days I want to praise
The wonders of Your mighty love.

My comfort, My shelter,
Tower of refuge and strength
Let every breath, all that I am,
Never cease to worship You.

Shout to the Lord all the earth let us sing.
Power and majesty, praise to the King.
Mountains bow down
And the seas will roar
At the sound of Your name.

I sing for joy at the work of Your hands.
Forever I'll love You, forever I'll stand.
Nothing compares to the promise
I have in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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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과 발전
구약의 전쟁관(삼상 17:47)
    - 진멸의 대상
    - 하나님의 개입
    - 하나님의 심판
신약의 전쟁관
    - 영적 전쟁(윤리적, 비윤리적, 대안적)
    - 종말론적 전쟁
    - 예수 = 사랑과 평화


더 자세한 내용은 Oliver O'Donovan, The Just War Revisited,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을 읽어볼 것.




:: 관련 글
그리스도인은 전쟁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4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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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지식과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둘 모두 신앙에 중요한 요소이지만, 지적 능력에 따라 의존도가 다르다. 교육으로 훈련된 이들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아간다. 지식으로 경험을 해석하느냐, 경험으로 지식을 해석하느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두 방법 모두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매우 유용하다.


기독교 신앙은 교육받은 소수를 위해서는 복잡한 성경과 명확한 신학적 언어로, 다수를 위해서는 이야기와 제의로 표현되었으며, 불합리한 세계 속에 있는 인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켰다.[각주:1]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각 자에게 주신 능력에 따라 자신을 깨닫도록 하신다. 때문에 어느 한 방법을 옳다 혹은 우선이다고 논할 수 없다. 지적인 훈련을 받아서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고 체계적인 신학을 공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1. Joseph. H. Lynch, 중세교회사, 심창섭, 채천석 역 (서울: 솔로몬, 2007), 3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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