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번역자는 해석학을 공부해야 한다.

If one is to translate the Scriptures both correctly and without bias, it is essential to employ a valid exegetical perspective.[각주:1]

성경을 정확하고 편견없이 번역하려면, 타당한 해석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잘못된 해석방법으로 번역하면, 저자의 의도를 벗어난 번역이 된다. 번역을 시도하기 이전에 타당한 해석방법을 훈련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정확한 번역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편견을 없애야 한다.
  1. Eugene A. Nida, Jan de Waard, From One Language To Another, Nashville: Thomas Nelson, 1986, p.17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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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렬적 구조(Paratactic structure) : 절 혹은 문장의 부분이 독립적이고 각각은 동등할 때, 전형적으로 콤마 혹은 “그리고”로 연결된다.

종속적 구조(Hypotactic structure) : 문장의 한 부분이 또 다른 부분에 종속되고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dspace.mit.edu/html/1721.1/34902/21L-004Spring-2003/NR/rdonlyres/Literature/21L-004Major-PoetsSpring2003/61B92E09-5943-4599-BACD-2A7B88C4EEE9/0/terms.pdf를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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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 개혁

역사신학 2008. 5. 19. 01:05

* 중세교회와 한국교회 과제물. 소감과 의문, 두 부분만 올린다. 제목은 <개혁 & 개혁>으로, 지금은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로 출판되고 있다.


소감

점차 높아지는 교회개혁에 대한 목소리. 도대체 교회개혁을 목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교회의 개혁을 말해야 합니까? 가장 첫 번째로 꼽아야 할 원인은 아마도 이 지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완벽한 교회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성경이 제시하는 완전한 교회의 기준을 따라 계속 개혁되어야 합니다.(p.9-10)


지금은 교회내부뿐 아니라 교회외부에서도 교회개혁을 원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외부의 압력이 더욱 강한 듯싶은데, 그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비난을 통한 개신교 정체성에 대한 공격인지, 아니면 참된 교회의 정체성 회복을 장려하기 위한 경고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외부압력의 본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언론과 여론에서 맹공격을 받고 있는 현실은 분명 한국교회가 자성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예전보다 더 활발해져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목소리에 힘주며 문제의 심각성을 들춰내고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런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많은 기독교인들과 문제의식을 향유하고 더욱 강도 높은 비판을 통해, 문제해결을 위해 힘써야 하지 않을까? 교회개혁을 위한 운동이 예전보다 활발하게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행해온 죄악들을 반성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살겠다는 고백이 회개라면,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야말로 회개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어야 할 시점인데, 그런 기미를 감지하지 못하겠으니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듯싶다. 더 심각한 점은 문제요인 당사자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조차 모른다는데 있다. 추악한 짓을 하면서도 반성은커녕 “그까짓 게 뭐가 대수냐?”고 반문하고 있고, 이런 자들이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종교개혁의 후계자로서 ‘종교개혁의 정신’대로 살아가지 않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정신’대로 살아가라고 요구한다면 그야말로 모순이 되겠지. 그렇다고, 개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개혁운동의 물결이 격렬하게 몰아칠까? 도저히 개혁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교회가 타락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시대의 루터를 기다려야 하는가?

암흑시대라 일컬어지는 중세기와 같은 현실이 도래하기 전에 참된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건 가망 없는 희망사항일까...

그렇진 않다. 드물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 회복을 꿈꾸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여전히 희망을 품어본다.


의문

이 책은 각 장 별로 중세 말기 로마 교회의 상황 →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 한국 교회에 대한 적용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을 중세 말기 로마 교회의 상황과 비교하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적용하도록 되어있지만, 개혁을 위한 우선순위를 잘못 매기는 실수를 저질렀다.

21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개혁과 부흥을 이루고자 한다면, 개혁자들의 복음적 교회일치 정신이 반드시 회복되고, 강조되며, 재적용되어야 한다. 분열된 교회는 세상을 향한 복음전도와 선교와 진리 변증의 작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 분열과 분리를 일삼는 교회가 어떻게 복음의 기본 정신인 화해, 일치, 관용 등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시키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색케 하는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p.128-129)


물론 교회 일치 운동이 지금보다 활발하게 일어나야겠지만, 그렇다고 개혁과 부흥을 선행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한 때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그 시기를 제외하면 가톨릭교회는 언제나 하나의 조직이었다. 분파주의에 젖은 한국교회와 비교했을 때, 내부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무리들이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조직으로 단결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중세 말기에는 큰 문제로 작용했다. 그 당시에도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진행되는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존재했지만,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단했다. 하나의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만, 그 어떤 조직이라도 언젠가는 정체하기 마련이다. 중세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인 물에는 이끼가 끼는 법이고 결국엔 썩고 말듯이, 그들도 부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교회가 일치한다고 해서 개혁과 부흥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때문에 무엇이 근본적인지 살펴보아야 보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또한 저자는 현상과 근원을 가려내지 않았다. 줄곧 현상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 그 근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현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행위 없는 믿음’이요, ‘이신칭의에 대한 맹신’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후일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칭의 문제에 비한다면 면죄부에 관한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면죄부에 관한 논제들의 게시가 종교개혁의 시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틴 루터가 그 운동의 주도적 인물이라고 널리 인정받고 있는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운동의 시작이 이러한 논제들을 게시한 그 여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각주:1]


여기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실질적으로 ‘이신칭의’ 교리에서 비롯된다. <95개조 논제>가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의 원동력은 ‘십자가신학’에 있다고 봐야 한다. 논제들의 각 항목은 사실상 ‘십자가신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터의 신학적 변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루터는 수도사 시절에 오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적으로 ‘십자가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신학의 전환’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신의 신학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고 ‘십자가신학’을 발전시키면서, 그 당시의 문제들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었고, 진리를 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의 정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신학의 전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신학적 전환이 필요한가?

마태복음의 구원론은 우리의 행위가 구언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 관건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분명 ‘행위구원’의 교리에 가깝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 행위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응답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의 응답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각주:2]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와 ‘십자가신학’이 중세교회의 ‘행위구원’에서 탈피하도록 지대한 기여를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병패가 만연하다. 오랫동안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고 믿어왔기에, 자신의 행실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상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행위 없는 믿음’이요, ‘이신칭의에 대한 맹신’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강조했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만연해 있는 ‘이신칭의에 대한 맹신’에서 ‘행위가 동반되는 믿음’으로 신학적 전환의 필요성을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 Alister E. McGrath, 루터의 십자가 신학, 정진오, 최대열 역 (서울: 컨콜디아사, 2001), 31. [본문으로]
  2. 권연경, 행위 없는 구원 (서울: SFC, 2006), 3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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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순례자 "마틴루터의 95개조 반박문"


* 한글만 옮깁니다.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깊이 뉘우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

3.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만일 그 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정욕의 여러 가지 억제를 외부로 나오지 않게 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

4. 그런 고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한에는(참 내적 참회) 형벌이 계속할 것이다. 즉 우리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5.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기껏해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을 그가 사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만일 그의 사죄하는 기능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때 사람 받았다는 죄는 확실히 그대로 잔재(殘在)한 것이다.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 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으신다.

8. 참회에 관한 교회 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임종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져서는 안된다.

9. 그러므로 교황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성령께서는 죽음과 곤궁의 경우를 예외로 취급하는 교황의 법령에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행하신다.

10. 임종에 처한 자에게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11. 종교상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라고 보인다(마13,25).

12. 종전의 예로서 종교상의 벌은 진실한 회오(悔悟)의 증거로서 사면(赦免)의 뒤(後)가 아니라 전에 부과되었던 것이다.

13. 임종에 처한 자는 죽음으로써 자유롭게 되며 교회 법령의 여러 요구에 대하여 이미 죽은 것이 되고 그 법령의 형벌에서 정당하게 자유 해방된다.

14.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심령의 불완전한 건강과 사랑은 반드시 큰 공포를 초래할 것인데 그 불완전성이 크면 클수록 더 큰 공포가 따를 것이다.

15. 이 불안 공포만으로도(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치고라도) 연옥의 고통을 구성한다.

16.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다른 점은 절망의 상태와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구원의 확실성과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17. 연옥에 가 있는 영들은 공포의 감소와 사랑의 증가를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18. 이상의 영들이 공적의 상태나 사랑의 증가 상태 밖(外)에 있다는 것은 이성으로나 성서적 근거로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축복의 정확성과 확실성에 관하여서 우리들은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로되 연옥에 있는 영들의 대부분을 위하여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20. 그런고로 교황이 “모든 죄의 완전한 사면”을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모든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자신에 의해서 부과된 죄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교화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3. 만일 누구에게든지 모든 형벌의 전적 사면이 허락된다면, 그러한 사면은 확실히 가장 완전한 사람 즉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제한 되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의하여 드러 내놓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가진 것과 같은 권위를 모든 감독과 특히 교구 목사는 자기의 감독구나 교구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26.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서가 아니고(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이 당치도 않지만), 대도(代禱)의 방법으로 영혼들에게 사죄를 허락한다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代禱)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29. 마치 성 세베린(St. Severin)과 파스칼리스(Paschalis)에 관한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 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그 누가 알 것인가!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 같이 면죄증을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가르쳐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왜냐하면 이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전적인 사죄 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한다거나 고백장(즉 참회師-고백을 받는 신부-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허가)을 사는 사람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 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36. 어떠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증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면죄와 그의 관여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제6논제 참조) 그것은 하나님의 사면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39. 면죄증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박식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41. 사도 계승의 면죄(교황의 사면을 의미함)는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사람의 다른 선한 일(선행)보다 더 중요한 것 같이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42. 면죄증의 속죄를 자선사업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화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하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베푸는 일로써 성장하고 그 인간은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선하게 되지만, 면죄증으로써는 인간이 보다 선하게 되지 못하고 다만 형벌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되는 것뿐이다.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 체 만 체 지나버리고(요3,17 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자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증을 사는 것은(사고 안 사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되어진 것이 아니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오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증은 사람들이 만일 그것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는 일이 있다면 매우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교회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의 교회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 주려고(당연하기는 하나)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 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위탁자가, 아니, 교황 자신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53. 면죄증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아주 잠잠하여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5. 만일 매우 적은 가치만을 지닌 면죄증이 하나의 '방울'과 행렬과 의식으로써 축하하게 된다면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복음은 백개의 방울과 백의 행렬과 의식으로써 찬양해야 된다는 것이 교황의 의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56. 그것으로써 교황이 면죄를 주는 교회의 장보(藏寶)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충분히 표시되어지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57.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면죄증 판매인)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쉽사리 분여(分與)하지 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58. 또 그 장보(藏寶)는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교황의 고움과 전혀 독립적으로 항상 속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고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성 로렌티어스(St. Laurentius)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된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그 장보(藏寶)라고 우리가 말해도 합당할 것이다.

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 관리의 보유사건을 위해서는 교황의 권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62. 교회의 참 장보(藏寶)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렇지만 이 장보(藏寶)가 먼저 된 것을 나중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마19,30 20,16 눅13,30).

64. 그와 반대로 면죄증의 장보(藏寶)가 나중된 것을 먼저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애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그러므로 옛날에 있어서 복음의 장보(藏寶)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었다.

66. 면죄증의 장보(藏寶)는 오늘날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67. 면죄증 설교자들이 '가장 큰 은총'이라고 소리 높이 부르짖는 면죄증은 이익을 증가시키는 한에서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면죄증)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69. 감독들과 교구 교사들은 사도계승의 면죄의 대리자들을 전적인 경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의무를 가지고 있다.

70. 그러나 일층 더 큰 의무는 눈을 활짝 뜨고 귀를 바짝 기울여서 교황의 위임한 것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71. 사도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지어다.

72. 그러나 다른 한편 면죄증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이 있을 지어다.

73. 어떤 방법으로든지 면죄증 판매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교황이 책망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74. 면죄증을 구실 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교황은 한층 더 심한 분노로 임할 것이다.

75. 교황의 면죄증에도 굉장한 능력이 있어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빠진 생각이다.

76. 그와 반대로 교황의 면죄증이 가장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책에 관하여서는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77. 만일 성 베드로가 교황이었다 할지라도 면죄 이상의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나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그와 반대로 현 교황이나 또는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보다 큰 은총 죽 고린도전서 12장에 가르치는 복음과 여러 가지 능력 또는 병 고치는 은사 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은 주장한다.

79. 교황은 팔로 장식된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80. 이와 같은 가르침이 사람들 가운데서 선포되는 것을 묵인하는 감독과 교구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1. 이와 같은 뻔뻔스런 면죄 설교로 비방과 또는 일반 세인의 의심 없는 날카로운 반대로부터 교황에 대한 존경을 수호하기란 제아무리 박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82. 예로서 만일 교황이 베드로 교회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83. 또한 이미 구속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연기제(年忌祭)를 계속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혹은 그것(기부금)의 취소를 허락하지 않는가?

84. 또한 돈 때문에 불 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받는 경건한 영혼을 구하도록 허락하면서, 그 경건한 영혼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구해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황의 어떤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되었는데 왜 아직 돈으로 인한 면죄증 부여를 통하여 구속해 내는 것 같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86.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7. 또한 완전한 참회로 충분한 사면과 속죄에 대한 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적 은혜에 참여를 주려는가?

88. 또한 교황이 각 신자에게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 주는 것을 만일 하루에 백번 준다고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겠는가?

89. 만일 교황이 면죄증으로써 돈보다도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였다고 본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오래 전부터 주어 오던 증거나 면죄증을 정지하는가? 똑같은 효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지 않는가?

90. 일반 세인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그리스도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만일 면죄증이 교황의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선전된다면, 이 모든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겔13,10 16 렘6,14 8,11 살전5,3)

9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사실)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그리스도인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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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높아지는 교회개혁에 대한 목소리. 도대체 교회개혁을 목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교회의 개혁을 말해야 합니까? 가장 첫 번째로 꼽아야 할 원인은 아마도 이 지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완벽한 교회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성경이 제시하는 완전한 교회의 기준을 따라 계속 개혁되어야 합니다.[각주:1]


지금은 교회내부뿐 아니라 교회외부에서도 교회개혁을 원하고 있다. 언론과 여론에서 맹공격을 받고 있는 현실은 분명 한국교회가 자성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예전보다 더 활발해져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회개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듯싶다. 더 심각한 점은 문제요인 당사자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조차 모른다는데 있다.

어떻게 해야 교회개혁운동의 물결이 격렬하게 몰아칠까? 도저히 개혁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교회가 타락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시대의 루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암흑시대라 일컬어지는 중세기와 같은 현실이 도래하기 전에 참된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건 가망 없는 희망사항일까...
 
그렇진 않다. 드물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 회복을 꿈꾸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여전히 희망을 품어본다.


"한번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ecclesia reformanda; the church once reformed is a church which must always be reforming itself)
  1. 정성욱, 개혁&개혁, 서울: 부흥과개혁사, 1999, p.9-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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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eness Strategies에는 Bald on record, Negative politeness, Positive politeness, Off-record(indirect strategy)이 있다. 다음은 브라운과 레빈슨이 제시한 전략 목록이다.


List of Politeness Strategies by Brown and Levison

Positive Politeness
Strategy 1:  Notice, attend to H (his interests, wants, needs, goods)
Strategy 2:  Exaggerate (interest, approval, sympathy with H)
Strategy 3:  Intensify interest to H
Strategy 4:  Use in-group identity markers
Strategy 5:  Seek agreement
Strategy 6:  Avoid disagreement
Strategy 7:  Presuppose/raise/assert common ground
Strategy 8:  Joke
Strategy 9:  Assert or presuppose S's knowledge of and concern for H's wants
Strategy 10:  Offer, promise
Strategy 11:  Be optimistic
Strategy 12:  Include both S and H in the activity
Strategy 13:  Give (or ask for) reasons
Strategy 14:  Assume or assert reciprocity
Strategy 15:  Give gifts to H (goods, sympathy, understanding, cooperation)

Negative Politeness
Strategy 1:  Be conventionally indirect
Strategy 2:  Question, hedge
Strategy 3:  Be pessimistic
Strategy 4:  Minimize the imposition, Rx
Strategy 5:  Give deference
Strategy 6:  Apologize
Strategy 7:  Impersonalize S and H
Strategy 8:  State the FTA as a general rule
Strategy 9:  Nominalize
Strategy 10:  Go on record as incurring a debt, or as not indebting H

Off-Record
Strategy 1:  Give hints
Strategy 2:  Give association clues
Strategy 3:  Presuppose
Strategy 4:  Understate
Strategy 5:  Overstate
Strategy 6:  Use tautologies
Strategy 7:  Use contradictions
Strategy 8:  Be ironic
Strategy 9:  Use metaphors
Strategy 10:  Use rhetorical questions
Strategy 11:  Be ambiguous
Strategy 12:  Be vague
Strategy 13:  Over-generalize
Strategy 14:  Displace H
Strategy 15:  Be incomplete, use ellip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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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 15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개역)라고 말씀하셨다. 원하고 원하였노라(evpiqumi,a| evpequ,mhsa)는 동일한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강조하였으므로 그 의미를 살려 열렬히 갈망해왔다고 해야 한다.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이토록 강렬하게 원하셨을까?

단순히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사랑하는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저녁식사 가운데 행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으시기에 그토록 열렬히 갈망해 오셨다. 그 일이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찬식 규례 제정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규례를 지키심과 동시에 새로운 규례, 즉 성찬식을 제정하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을 찾지 못하기에 치러야만 하는 아픔과 그 아픔만큼이나 우리를 사랑하심을 드러내시는 십자가. 그렇기에 이 땅에 온 목적이자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고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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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그리스어 문법책을 Textkit에서 제공하고 있네요. 확인해보니 저작권에 위배되지 않는 책들입니다. (^ㅡ^)

A Greek Gram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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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수동태는 중요도 만큼이나 잘못 이해되고 있는 개념이므로 주의하도록 하자.

Scholarly speculation is that direct reference to God was avoided out of reverence and respect, although the relatively frequent mention of God in the Gospels minimizes this rationale.[각주:1]

학술적인 견해는 경외와 존중의 표현으로 하나님를 직접 언급하지 않기 위함으로, 복음서에서는 비교적 자주 언급되고 있으나 최소화를 원칙으로 한다.



Porter 역시 <Biblical Greek>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니 더 자세한 내용은 Maximilian Zerwick, Biblical Greek (Rome: Scripta Pontificii Instituti Biblici, 1963), 76을 읽어보라. 다음은 장동수 교수의 번역이다.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 또는 passivum divinum) 혹은 신학적 수동태(theological passive)란 하나님을 동사의 행위자로 직접 거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행위자(agent)가 생략된 채 사용되는 수동태를 말한다.


<신적 수동태 구절 소고>를 읽어보도록 한다.


Questions about "divine passive" (Rev 13)
http://lists.ibiblio.org/pipermail/b-greek/2004-December/032292.html

Divine passives
http://lists.ibiblio.org/pipermail/b-greek/1999-April/005109.html

  1. S. E. Porter, Idioms of the Greek New Testament (Sheffield: JSOT, 1999), 6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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