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에서 초막절이 나타나는 부분은 성전 두루마리(Temple Scroll)이다. 쿰란 공동체에서 초막절을 성전와 연결해 사고했다는 단서이다. 

Cols. 27:10-29:1
초막절 기간 동안 매일 제단에 드려야 할 화제(a fire-sacrifice)를 규정하고 있다.

Col. 42:3–17
절기명과 임시 숙소에 'booth'나 'tabernacle'이 아닌 '오두막'(hut)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오두막을 지어주어야 할 대상을 지정하고 있으며, 매년 그 곳에서 일정 기간 동안 특정 지역에서 지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Col. 44:6–10.
예루살렘 내에서 지파 별로 거주해야 할 구역을 지정한다.

성전 두루마리에서 초막적은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으나, 쿰란 공동체의 이상을 반영하는 유대 절기 중 하나로 나타난다. 초막절의 유래와 기능에 관한 설명은 없고, 실전적인 지침 위주로 명시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

마카비서는 유다 마카비의 그의 후손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 기록이다. 주요 내용은 마카비 가문을 중심으로 한 유대 세력과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의 대결이다. 후에 마카비 가문은 하스몬 왕국 시대를 열게 되고, 그들은 이 기록을 통해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향한 기대(소위 다윗 메시아사상)가 팽배했던 시대에 마카비 가문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1. 마카비서에 나타난 초막절과 수전절

1) 초막절(Sukkot)
마카비서에서 '초막절'/'그 절기'(the Feast)를 지키는 내용이 몇 차례 나온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지킨 절기는 초막절이 아니라 '수전절'(Hanukkah)을 새로 제정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정확히는 숙곳(Sukkoth)에서 초막을 지었고, 예루살렘 정복 이후에는 그 지역에서 초막절을 지켰던 유대인들에게 초막과 성전의 연관성은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마카비 항쟁을 통해 '성전 정화'가 필요했다. 마카비 가문은 새로운 절기를 제정할 의도가 없었고, 기존 유대 절기 중에서 자신의 시대에 필요한 '성전 정화'에 적합한 절기로 초막절을 택했다. 본래 초막절은 티쉬레이(Tishrei, 태양력 9/10월) 십오일부터 지키지만, 실제로 그들이 절기를 실시한 시기는 기슬레우월(Chislev, 태양력 11/12월) 이십오일이다.

2) 수전절(Hanukkah)
성전 정화 이후 그 절기를 포고령으로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 선포한다. 이후에도 마카비서에는 '수전절'이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카비서에 등장하는 초막절은 대부분 수전절로 읽어야 한다.

2.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초막절과 수전절

요한복음에서는 초막절(7:1-10:21)과 수전절(10:22ff)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요한의 예수는 초막절을 배경으로 선한 목자의 죽음을 가르치신다(1-21절). 이후 수전절을 배경으로 선한 목자의 죽음에서 파생된 논쟁에서 예수의 정체에 관한 질문, 즉 그리스도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초막절과 수전절을 예수의 정체성과 연결하는 특징이 있다.

,

1. 희년서와 창세기의 아브라함 언약
희년서(The Book of Jubilees)에서 초막절 본문은 두 구절(16:20–31; 32:4–29)이다. 첫 번째 초막절 본문은 16:20–31으로 이삭의 출생 이후 아브라함이 초막절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초막절 본문은 32:4–29(세부적으로는 4–9절과 16–29절로 나눌 수 있다)이고, 라헬의 베냐민 임신 이후 야곱이 초막절을 지키는 내용이다.

1) 아브라함의 초막절 (16:20–31)
앞 10-19절은 이삭의 출생과 할례를 다룬다. 19절은 이삭을 출생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크나큰 즐거움(they both rejoiced with exceeding great joy)을 서술하고 있다. 

이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짓고 그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움의 축제를 연다(20절). 그는 축제 기간 자신과 하인들을 위한 초막을 짓는데, 이로써 그는 지상에서 초막절을 축하한 첫 사례가 된다 (21절). 이 기간에 아브라함의 즐거움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그는 번제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한다 (22-28절).

28절에서 아브라함이 이 절기를 축하한 이유가 하늘 서판의 증언(the testimony of the heavenly tablet)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하늘 서판이 언급되는데, 29절에서도 그 서판이 이스라엘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절을 매년 지켜야 한다고 진술한다. 두 구절은 희년서 저자가 이 단락의 배경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설정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2) 야곱의 초막절(32:4–9, 16–29)
앞 2절에서 야곱은 14일에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린다. 3절은 라헬이 베냐민을 임신했다고 서술한다.

이어 야곱은 15일에 자신의 서원대로 십일조를 드린다(5절). 그리고 그는 번제를 7일 동안 드린다(6절). 여기서 초막절이란 용어는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본문이 밝히는 시기는 초막절 시간이다.

이 배경이 초막절이라는 사실은 27-29절에서 명확해진다. 야곱은 추가로 하루(another day) 더 번제를 드리는데, 그 추가된 날은 '추가'(Addition)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앞서 초막절을 지칭하는 '그 절기'(The Feast)에 하루가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7절). 이어 이 그 절기(=초막절)의 칠일에 하루를 더해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한다(28절). 다시 그 여덟 번째 날을 '추가'(Addition)라고 부르며, 그 이유는 그 절기 시간 중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9절).

야곱의 초막절(4–9절)과 추가된 하루(27-29절)에 관한 기록 중간에 하늘 서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초막절에 추가된 하루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시고(17절), 하늘 서판에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을 향한 축복을 그에게 상기한 날이다. 이런 이유로 추가된 하루는 초막절의 연장선이며, 32장의 초막절 구절은 넓게 4–29절로 볼 수 있다.


3) 창세기 아브라함 언약 (15, 17장)
앞서 아브라함과 야곱의 초막절 모두 자손의 탄생과 일차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더 나아가 하늘 서판과 관련이 있다. 하늘 서판은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후손을 향한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에서는 15, 17장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흔히 아브라함 언약으로 불린다.


2. 희년서와 사무엘상에 나타난 초막절
희년서에 나타난 초막절은 모두 자녀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사무엘상 1장 1절-2장 26절과 연결된다. 엘가나와 그의 가족은 매년 실로에 방문해 번제를 드렸다. 본문은 이 절기를 직접 밝히지 않으나, 초막절로 보는 견해가 있다. 희년서와 사무엘상에 나타난 초막절이 모두 자녀의 출생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

많은 연구자가 스가랴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내 연구에서는 스가랴 14장의 초막절 준수 명령과 에스겔 45장의 초막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중요하다. 이 부분에서 나는 두 가지 기여를 가정했는데, 첫 번째는 에스겔 45장 25절의 초막절에 대한 강조이고, 두 번째는 초막절을 중심으로 에스겔과 스가랴의 관계를 비교하는 작업이다.

초막절 연구에서 에스겔 45장 25절은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 초막절 연구에 귀중한 업적을 남긴 Jeffery L. Rubenstein은 『The History of Sukkot in the Second Temple and Rabbinic Periods』(Brown Judaic Studies 302; Atlanta: Scholars Press, 2020)에서 에스겔 45장 25절에 등장하는 '명절'이 초막절이라고 밝혔으나 그에 관한 연구는 개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 구절에 대한 관찰로 기여를 할 수 있어 보인다.

스가랴가 에스겔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초막절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껏 두 구절을 비교한 연구는 보지 못했다. 비교가 내 주요 관심사는 아니지만, 에스겔이 스가랴에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기여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오늘 에스겔 45장 25절을 다룬 주석을 살펴보고 있다. 그 주석은 에스겔 45장 25절의 '명절'을 초막절로 보고, 그 구절에 관한 상세한 해석을 남겨두었다. 아래 내용은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다.

에스겔 45장 17절은 군주의 본분을 말한다.

17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여기에서 군주는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고 선포한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족속의 속죄를 강조하고 있다. 바벨론 유수를 겪고 있는 예언자는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후에도 속죄를 지속해야 한다고 여겼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모든 명절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언급한 명절은 유월절(12절)과 초막절(25절)이다.

21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유월절을 칠 일 동안 명절로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25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칠 일 동안 명절을 지켜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지니라

유월절과 초막절은 모두 출애굽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절기이다. 예언자가 이스라엘 귀환을 출애굽과 동일시했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스가랴 14장은 초막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스가랴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초막절이 이방 나라들도 지켜야 할 명절로 규정한다. 또한 초막절 준수와 비를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초막절은 추수 이후 감사제 성격이 뚜렷하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그 해 추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로 비 내림은 여호와의 열방 통치의 증거이며, 초막절은 그의 통치에 대한 인정을 뜻한다.

스가랴는 유월절을 말하지 않는다. 성전 재건 역시 말하지 않는다. 스가랴는 에스겔과 이런 두 가지 차이가 있다.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초막절에 있어서 스가랴는 에스겔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

*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한 자료 조사 과정에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므로 차후 검증이 필요하다.

느헤미야 8장은 귀환 공동체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에 대한 요청으로 시작한다.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헤미야 8장에 기록된 에스라의 강독은 그의 예루살렘 사역이 종료되는 시점이 아닌  시작으로 봐야 하며, 이 기록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역에 관한 절정으로 자리를 잡는다 (Williamson, Ezra, Nehemiah, 285).

에스라는 낭독을 지속하던 중 초막절을 준수하라고 지시한다 (14-17절).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에 집중하고 싶은데, 첫 번째는 초막절 준수에 관한 근거이고, 다른 하나는 초막절의 기능이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초막절을 준수하라고 백성에게 명령했다면, 그 근거는 레위기 23:33-43과 신명기 16:16-17, 두 구절로 압축된다. 

레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신 16: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에스라의 지침(15절)을 고려하면, 헌금 이외에 다른 지침이 없는 신명기 16장보다는 레위기 23장의 영향이 더 두드러진다. 여전히 느헤미야 8장과 레위기 23장 사이의 차이점은 존재한다.

느 8: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레 23: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그러나 에스라가 레위기 23장에 근거해 초막절 준수를 명했다면, 초막절 이전에 언급된 속죄일(레 23:26-32)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 신명기 16장을 선택하면, 속죄일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만, 에스라의 초막절 지침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에스라의 가르침이 신명기 16장의 영향을 받았으나 레위기 23장에 기반한다는 해석이 현실적인 타협점으로 보인다. 레위기 23장과 신명기 16장 사이의 연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다 (Williamson, Ezra, Nehemiah, 295). 만약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모세의 율법책이 서로 다른 형태로 전승되었다고 하더라도, 에스라가 두 본문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추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스라엘 역사를 배우지 않은 유대인들이 많아서 몇 가지가 무시되었다는 주장(Batten, Ezra & Nehemiah, 363)이 있으나, 이스라엘 자손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라고 요청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자손이 모인 시기와 에스라의 초막절 준수 명령이 이스라엘 자손과 에스라 모두 이스라엘 절기에 대해 알고 있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여전히 속죄일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을 고려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유수와 귀환을 통해 죄에 대한 심판과 회복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고대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하는 귀환 공동체에 속죄일은 당시 불필요하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 수 있다. 이 부분은 차후 연구가 필요하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모세의 명령 이후 처음 초막절을 준수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초막절 준수에 관한 기록을 통해 이런 반응은 정당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회중은 스스로 초막절 규정대로 절기를 지킨 첫 사례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스라엘 회중의 모세의 율법에 관한 요청은 앞서 성벽 건축(7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여전히 보수되어야 할 주요 건축물들이 남아 있어 자신의 터전은 건축조차 못 했으나 그들에게 성벽 건축은 남다른 의미로 작용했다고 보인다.

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의 감동과 계보 등록 사업이 그 증거이다.

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초막절 동안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계속 낭독한다 (18절). 따라서 8장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사건은 에스라의 하나님의 율법책 낭독이라 할 수 있다 (Williamson, Ezra, Nehemiah, 280).

,

요한복음에 관심을 둔 지 6년이 되어간다. 10장 선한 목자 담론을 이해하려다보니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현재 선한 목자 담론은 본문 자체 내에서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림. 그러나 요한의 의도를 명쾌하게 파악하려면 1-2장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서사를 아주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그 배경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은 정교한 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1:1-18 요한복음의 서론으로 '로고스' 본문으로 통용되고 있다. 예수의 신적 기원을 선포하는 구절이다. 예수의 정체성과 권위 등 그에 관한 모든 질문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또한 생명을 빛에 비유하고 어둠과 대조하는 이유는 예수를 향한 믿음의 이유를 말한다. 그러나 빛을 거절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1:19-36 세례 요한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자신의 메시아됨(messiahship)을 거절하지만,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선포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식 이후 예수께 임한 성령의 임재는 교회 공동체의 구원과 긴밀한 의미가 있다.

1:37-51 나다니엘의 발언은 유대 메시아사상을 드러낸다. 수많은 해석자가 나다니엘이 예수의 정체를 믿음으로 고백했다고 주장하는데, 내 견해는 오히려 그의 불신앙 혹은 유대 메시아사상의 전형으로 본다.

2:1-12 가나 혼례 사건이다. 이 장면을 종말론적 축복으로 해석하는 해석자들이 다수인데, 나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제자들의 불신앙을 고발하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2:13-25 성전 정화사건이다. 요한의 서사 배치는 역사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성전 정화 사건의 시기에 관한 논의보다는 이러한 배치를 통한 의도를 읽어야 한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교회 공동체 내 유대인들의 성전 중심적 사고를 변화시키기 위한 요한의 의도가 담겨 있다.

박사 학위 이후 진행하고 싶은 연구 주제에 요한복음 1-2장 해석을 추가하려고 한다.

,

예수의 등장을 본 세례 요한이 한 말 중 "하나님의 어린 양"의 기원을 탐구하고 있다. 이 "어린 양"의 정체와 기원에 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지금은 "유월절 양"과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결합이라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유월절 양"이란 견해는 반대 의견이 많은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다리를 꺾지 않은 사건을 두고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19:31–36을 근거로 덧붙여 반박하고 있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지만, 예수의 대리적 죽음과 유사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각자가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둘을 결합해서 요한의 어휘 사용과 신학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을 수식해 그의 사역을 진술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라는 표현에서 "속죄"와 연결한다. 여기서 요한은 직접 "속죄"와 관련된 어휘를 사용하지 않지만 요한 1서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가 현 요한복음 "하나님의 어린 양"에 관한 연구에서 대세를 차지하고 있다.

,

Beth M. Stovell은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난 왕권 사상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하려고, "메시야"(41절), "하나님의 아들"(49절), "이스라엘의 임금"(49절), "인자"(51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여기에 "하나님의 어린 양"(29, 36절)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왕권은 그의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결은 언어학적 분석이 아닌 신학적 분석을 통해서야 가능하다.

,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해 사용한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49절)은 그가 갖고 있던 당시 전형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의 일부를 드러낸다. 나다나엘이 그같은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토대로 고백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언급했기 때문이다(48절). 나다나엘은 유대인들에게 팽배했던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메시아 사상을 갖고 있었다.

요한복음 1장 로고스 (1:1-18)과 세례 요한(19-36절)로 시작하는 이유는, 서두에 예수의 정체를 미리 선언한 이후에 제자부터 시작하여 2장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까지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여 (1-12절), 전통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을 전복하기 위해서이다.

,
Thematically, this chapter is tied to the Feast of Tabernacles (ch. 8) through the explicit reference to Jesus as the light of the world (9:5; cf. 8:12). This chapter portrays what happens when the light shines: some are made to see, like this man born blind, while others, who think they see, turn away, blinded, as it were, by the light (9:39–41). At the same time, this chapter prepares the way for ch. 10, where a sharp contrast is drawn between the good shepherd, who gives his life for his sheep, and other religious leaders, like those in ch. 9, who are nothing but thieves and hirelings.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359.


(My Comment) In the three chapters, however, we need to focus on the Pharisees. In other words, in chapters 8 and 9, there is a common theme of the identity of the Pharisees: they define themselves as Abraham’s descendants (8:33) and the disciples of Moses (9:28). In chapters 9 and 10, the relationship between Jesus and the Jews is highlighted.

Carson은 요한복음 8-10장 사이의 주제적 일관성에 대해 주장한다. 그는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이 8장의 초막절 절기에 행해지는 의례의 비유적 의미와 명백하게 연결되고, 10장을 준비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주제적 일관성에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요한의 절기 사용에서 의례나 상징적 의미 부여는 과도한 해석으로 보고 있다. 아직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으마, 내 관찰에 의하면, 요한은 절기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며, 각 절기에서 간결한 의미를 가져다 쓴다.

더구나 본문에서 8-10장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의 주체는 바리새인들이다.

8-10장이 초막절이란 유대절기를 공통분모로 사용하지만, 주제적 일관성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을 부각시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