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Jesus’ mission as the good shepherd who desires the well-being of the sheep has as its goal the production of life in abundance, already signified in the abundance of wine at the wedding in Cana and the abundance of food left over at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Source] Lincol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John, 300.


요한이 예수의 첫 이적으로 기록한 가나 혼례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해석자들이 많다. 위에 기술한 Lincoln도 그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2: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의 진술은 이같은 해석의 토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요한의 기독론을 중심으로 이 사건을 보면, 가나 혼례 사건은 부정적인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따른 이유가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라는 유대 메시아 사상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요한의 기독론은 자기 부인(=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기반한다.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자기 부인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본문이다. 따라서 나는 Lincoln의 진술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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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에 관한 가르침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킨다. 이 진술은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인들 사이의 기대가 어긋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고대 문헌에 "목자-왕 전승"(Shepherd-King Tradition)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고대 근동에서 왕을 목자로 표현하는 관례가 있었다는 증거가 존재하고(대표적으로 함무라비 법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같은 전승이 오랫 동안 공유되었다는 증거가 곳곳에 나타난다. 

왕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르둑과 같은 신으로부터 신적 권위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목자와 양 사이의 유비를 통해 왕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기도 한다. 목자가 양을 돌보고 양은 목자를 따르듯이, 왕은 백성을 보살펴야 하고 백성은 왕을 따라야 한다. 즉 목자-왕 전승은 왕권 사상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목자-왕 전승에서 목자가 양을 위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내용은 있어도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놓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례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목자의 "내어놓음"을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Craig S. Keener는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에서 그리스 문헌에 나타난 타인을 위한 고귀한 희생을 말한다. 엄밀히 말해 그는 목자-왕 전승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왕권 사상에서 자기 희생을 말하는 문헌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목자-왕 전승 사이의 차별성은 요한복음 내부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수많은 연구자들은 1:29, 36과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제시한다. 요한의 논리를 따르면 1:29, 36을 살펴봐야 하는데, 대다수 학자들이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양과 연결하고, 이사야 53장을 언급한다. 목자-왕 전승을 통한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려면, '어린 양'의 정체가 유월절 양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그의 죽음이 고난받는 종을 연상시키려는 목적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의 구조는 더 복잡하다. 기존 논의에 더하여 유대 절기(Jewish Festivals)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유대 달력을 비틀면서까지 유월절(Passover) 주기를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서술한 목적을 파악해야만 한다. 선행 연구의 대세적 견해가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는 듯 하지만, 세부적인 면모를 따져보면 이질성들이 발견되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적잖이 있다. 그 모든 원인은 요한이 기존 관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기독론적으로 비틀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에 대해서 말하자면, 대세적인 흐름과 달리  53장의 영향을 부정하는 견해 역시 존재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학자로는 Morna D. Hooker와 Richard B. Hays가 있으며 둘다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이다. Hays의 제자이자 내 지도 교수인 David M. Moffitt는 이사야 53장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흐름에 서있으며, 더 나아가 히브리서에는 '고난받는 종'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Moffitt의 동료인 Elizath E. Shively도 이사야 53장의 영향력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Shively는 이사야 53장의 논쟁에 관해 다루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Michael A. Lyons and Jacob Stromberg, Isaiah’s Servants in Early Judaism and Christianity: The Isaian Servant and the Exegetical Formation of Community Identity, WUNT 2 554 (Tübingen: Mohr Siebeck, 2021)에 실린 "The Servant(s) in the Gospel of Mark"을 보라. 

내년 초부터 논문을 쓰게 되면 내 입장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예상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사야 53장의 영향을 인정하되 기회가 된다면 이질성에 초점을 둔 글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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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은 방법론으로 주제를 관통해 자신만의 주장을 담아된 결과물이다. 방법론이나 주제가 새로울 필요는 없으나 주장은 참신해야 한다. 새로운 방법론으로 익숙한 주제를 다루어도 참신한 접근을 했다는 기여로 학위를 받는 경우도 자주 있다. 자신의 방법론으로 본문을 새롭게 접근하는 참신성은 가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벗어나는 해석이라면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인정을 받아야 할지 의문이 든다. 아래는 Helen C. Orchard 박사의 학위 논문을 토대로 출간한 『Courting Betrayal: Jesus as Victim in the Gospel of John』의 내용이다.

Practically, the Jews are already determined to kill him. There is no possible alternative ending to the Gospel. Hence, the greek that Jesus is referring to is not an ability to change his circumstances―the die is already cast. The only 'power' that he possesses is the ability to become powerless, and this is expressed in the voluntary nature of his sacrifice. He does this by consciously 'laying down' his life, rather than having it taken from him. That he uses authoritative terms to stress his passivity reveals the tension between the voluntary and involuntary narure of his role as the Lamb of God. He uses forceful phrases to qualify his renouncement of power. the allegory of the shepherd and his sheep, threatened by the wolf, contextualizes and aids in the interpretation of his words. When faced with danger, the hireling is able to flee, but the shepherd has no choice but to remain with the sheep, because his very nature is as the good shepherd. He has a relationship with the sheep and it is his duty to protect them―if he did not he would not be the good shpherd. He has no option but to accept the situation―to choose vulnerability in the face of a vicious enemy, to become a victim. (출처: 142―3쪽)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 무리를 요한 공동체로 보는 견해는 가능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 목적과 그 전승을 비틀어 사용한 이유이다. 목자-왕 전승의 대표적인 근거로는 함무라비 법전이 있고, 구약성경 곳곳에 이 전승이 나타난다. 때로는 목자와 왕 사이의 구분 없이 사용되기도 함. 왕은 문자적으로 왕을 배타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지도자를 포괄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중요한 사실은 목자-왕 전승은 목자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한의 예수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여,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외성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무리의 반응을 보면, 이같은 선포가 그들에게 얼마나 생경한지를 알 수 있다(19―20절).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께서는 목자로서 자신의 자발적인 죽음을 선포하신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놓게 된 기적(mirales)과 표적(signs)들을 의지대로 조절하실 수 있었고, 하물며 자신이 죽어야 할 시기를 조절하셨다. 예수의 죽음은 필연성이며, 자신에게 닥칠 수난의 때를 조절하신 이는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시다.

Likewise, Jesus uses the metaphor which caused him anguish in John 10, revealing that laying down his life will mean surrendering to a savage fate, to invoke anguish in Peter. This time there is no mention of the death of Jesus; the context is the death of Peter. The role of shepherd is conjoined with the role of victim. Jesus no longer understands this as his role; it now belongs t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s. Perhaps this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change that has taken place in the resurrected Jesus. He has escaped from the victim-cognizance which characterized his life before 'the hour'. The evidence of his victimization remains―one need look no further than the scars on his body―but there has been a shift in his self-understanding, revealing his own liberation from grief and fear. (출처: 262쪽)

또한, 예수의 죽음은 제자도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강조하듯이, 자신과 제자 사이의 관계도 강조하신다. 베드로에게 목자 은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경험한 죽음이 동일하게 제자인 베드로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반면  베드로와 같이 있었던 자에게는 그러한 죽음이 닥치지 않는다. 

성경 해석을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접근법은 독자에게 참신함을 주지만, 그 방법론을 적용해 본문의 의미를 벗어난다면, 그것이 유익한 연구인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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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들은 이방의 압제 아래 있다 (52:4). 이방 통치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켰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 (52:5). 수치스러운 상황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고자 한다 (52:6).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며 돌아다니는 집단이 있다 (52:7). 그들의 정체는 선지자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파수꾼"이라고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미리 내다보고 선포하는 역할을 적의 침입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파수꾼에 빗대고 있다 (52:8).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은 제사장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표현한다. 제사장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정결"이다 (52:11). 이스라엘 백성의 이동은 마치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상시킨다 (52:12).

하나님의 "종"이 등장한다. 그는 형통하고 받을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된다 (52:13). 하지만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의 모양과 모습은 사람의 기대와 다르다 (52:14). 그런데도 그는 이방 나라와 군주들을 놀라게 만든다 (52:15).

이스라엘 백성은 선포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본문에서는 "여호와의 팔")은 예상 밖의 인물을 통해 나타났다 (53:1). 종의 성장 과정은 보잘 것 없었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했으며, 고통을 받아도 마땅하다 여겨졌다 (53:2-4). 그러나 이사야는 그의 고통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며, 지금의 평화와 치유는 그가 감당한 형벌 덕이라고 말한다 (53:5). "종"의 가치에 대하여 청중과 선지자 사이에 크나큰 인식의 간극이 존재한다. 

선지자는 종의 고난이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와 죄악 때문이라고 다시 말한다 (53:6). 그 종은 곤욕을 당해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53:7). 어쩌면 그의 죄목은 군사적 반란을 위한 정치 선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종의 입장에서는 모든 근원이 하나님이시기에 항변할 수 없다. 종은 곤욕과 심문을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 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53:8). 

그러나 선지자는 종이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의 무덤은 악인들과 함께 있다 (53:9). 이방 통치자들의 고문 사유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의 형벌과 죽음이 그의 범죄 때문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종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받으시고 자신의 뜻을 성취하실 예정이다 (53:10).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라는 문구에서 선지자의 이원론적 사고가 드러난다. 종의 육체는 상함을 받았으므로 율법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속건제물로 가치가 없다. 더구나 사람의 죽음을 통한 속죄라는 개념이 당시에 일반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이러한 전제를 뒤집어 엎는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종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이원론적 사고가 나타나고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의로운 종"이라 일컬어진다. 그가 한 일은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였다.  그는 선지자적 사역을 감당했고, 이방 통치자로부터 선동으로 오해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나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대속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3:11).

그는 나중에 보상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에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해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53:12).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종은 이방의 압제 아래 굴복하며 살아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한 선지자로 볼 수 있다. 유대 포로민들은 그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방 통치자들은 정치 선동으로 받아들여 그를 심문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의 사역과 가치를 뒤집어 놓는다. 이사야의 눈에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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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견해와 달리, 나는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이 갖고 있던 전형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조하라.

가나의 혼례가 갖는 의미

요한복음 1-2장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믿음과 예수의 사역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 또 등장한다. 그는 바로 니고데모이다.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는데, 그 이유를 본인이 직접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밝힌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거듭남"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다시 말해, 유대 메시아 사상을 걷어내지 않으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2:11)과 나다니엘이 예수를 선생으로 보는 이유(3:2) 모두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라는 관념에 기인한다. '어머니'라는 관계 때문에 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리아의 요청에 대한 직각적인 대답에 예수의 태도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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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을 후대 편집으로 간주하고, 1~20장이 원 요한복음이라고 가정하기도 한다(대표적으로 Jörg Frey). 이러한 전제대로 요한복음이 20장으로 충분한 이유와 21장이 추가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유추해볼 수 있다.

예수의 수난 기사에 집중하는 전개와 그의 승천 기사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특이점  등을 고려하면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제자 도마의 사건(20장)을 끝으로 요한복음이 구성되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21장은 베드로의 순교와 요한의 생존에 관한 질문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이 기록을 통해 21장이 베드로의 순교(AD 66)와 요한의 죽음(AD 100) 사이에 추가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두 사도의 죽음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가 이스라엘 거주민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테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주는 충격은 지대했겠지만,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한 죽음과 부활에 관한 가르침(2장)을 통해 물리적인 성전 파괴에 대한 충격은 상쇄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요한복음이 절기를 강조하는 목적, 그리고 성찬식(6:53-55)을 암시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사건(6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은은하게 드러낸다.

여기에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19절)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특히 2장)에 관한 암시, 요한의 미래에 대한 질문(23절) 등은 당시 요한 공동체 내부에 모종의 위기의식에 기반한 임박한 종말론이 항유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요한 공동체의 해답은 '제자도'이다. 죽음이나 생존과 상관없이 공동체 일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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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은 세례 요한의 발화를 통해 처음 예고된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문구는 속죄와 관련해 이사야 53장의 "야웨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세를 이룬다. 53장에서 속죄의 역할과 "어린 양"이란 문구는 이러한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53: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더구나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구절에 의해 해석자들은 이런 경향을 강화한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사야 53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러한 유사성은 예수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사이의 연결에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는 현재 이사야 53장에 언급되는 야웨의 종을 메시아와 연결 짓지 않으며, 속죄는 이사야가 덧붙인 개념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 종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사야조차도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는 종의 고난이 갖는 의미를 깨닫고 난 후 유대인들의 '고난'이라는 관념을 뒤집는다. 1절의 표현은 하나님의 역사, 그의 의지가 군중들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통해 나타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구절에서 중요한 관점은 '예외성'이다.

요한복음 12장도 마찬가지이다. 유대 메시아사상의 스펙트럼이 넓었다고 해도, 예수의 가르침은 절대다수가 신봉했던 사상(들)과 결을 달리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여기서 큰 무리가 모인 이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왕은 다윗과 같은/다윗 계열의 왕(Davidic King)을 가리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다른 행보를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예외성'을 말씀하신다. 선지자 이사야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했던 무리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의 제자들만이 예수의 부활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한복음 12장 38절에 예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하신 이유는 '예외성'이라는 공통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과 자신의 사역을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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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관한 비교 연구가 활발하던 시절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원론을 헬레니즘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지금도 이원론 이외에 몇 가지 요소들을 근거로 요한복음의 배경이 헬레니즘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문학비평이 성서학에 도입되면서 문학 기법 중 ‘역설’(irony)로 요한복음을 해석한 연구들이 제법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의 십자가와 영광이란 주제이다.

요한복음의 대조 기법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는 이원론과 역설은 모두 예수의 구속사와 관련이 있다. 요한복음은 먼저 영생을 강조하고, 이어 심판을 말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심판을 피하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하는 게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하며 심판은 불신의 결과이다. 요한에게 불신(=죄)의 대가는 심판이며, 믿음의 대가는 영생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의 구속사에 기인한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대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셨고, 요한은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예수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성령의 조명 아래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의 이원론과 역설은 요한의 시대적 배경이나 문학적 기교를 넘어서 예수의 구속사, 즉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이원론과 역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기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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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국가 차원의 위기가 역동적으로 그려진 본문은 대표적으로 예레미야서와 이사야서를 꼽을 수 있겠다. 예레미야서는 남유다의 멸망 전후를 예언자 예레미야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의 진술은 서사적이며 역사 기술에 가깝다. 이사야서는 남유다의 멸망과 이방 왕의 통치 등 격변기의 시대를 토대로 이사야의 이해와 해석을 담고 있다. 이사야는 자신의 발화를 “계시”(1:1)라고 말한다. 이사야서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포괄하는 만큼 세계관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이원론, 이방 왕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이 그러하다. 여기에 이 글의 주제인 “야웨의 종”도 포함된다.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레스와 야웨의 종

이방 왕 고레스에 대한 칭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지만, 그가 오랫동안 예언되어 온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을 현실화시킨 왕이라는 사실은, 그가 비록 다윗과 같은 왕 혹은 다윗 계열의 왕(Davidic King)이 아니더라도, “내 목자”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고레스”라는 서술(44:28; 45:1)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고레스 이후에는 전통적인 용례에 따라 Davidic Messianism으로 회귀 되는 경향이 있다(유대 메시아사상에 관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현 단계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사야의 네 번째 노래에 포함된 “야웨의 종”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욱 복잡하다. 정체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이스라엘’이란 국가로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으로 간주하는 해석이다. 각 진영에서도 해석이 분분한데, 그만큼 정체 규명이 어려운 작업임을 보여 준다.

우선, 나는 ‘이스라엘’이란 집단으로 해석하는 경향은 배제한다. 이 진영에 속한 학자들도 ‘이상적인 이스라엘’이란 개념을 사용할 만큼, “야웨의 종”을 집단으로 해석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나는’이상적인 이스라엘’이란 개념부터 성립되지 않으며, 가장 근접한 시기라면 다윗 왕 초중반과 솔로몬 초반을 상정했을 테고 실제로 다윗 왕국의 부활을 꿈꾸는 유대인들이 많았겠지만, 그런데도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는 염연히 조상들과 그들의 죄로 인한 심판이기에 이스라엘이 이방을 위해 속죄한다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이상적인 이스라엘이라도 이방 국가들을 속죄한다는 개념은 존립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으로 해석해도 여전히 그 인물이 누구인지 규명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사야가 뒤늦게 그 “야웨의 종”의 가치와 기여를 깨달았듯이, 대중들이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인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이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가 왕실 혹은 장차 왕으로 봉립될 인물(royal figure)인가 메시아(messianic figure)인지 다뤄야 한다. 이 부분에서 내 견해가 가장 많이 바뀌었는데, 나는 왕이나 메시아와 거리가 멀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현재로서는 ‘예언자’에 가깝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에 대한 무관심과 고난 등은 정치적 군사적인 영역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내가 주목하는 구절 중 하나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53:11)라는 구절인데, 그는 발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했던 사람이다. 이런 활동은 예언자의 영역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중요한 사실은, 이사야가 그 “야웨의 종”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속죄”라는 개념을 흔든다.

This was a new and revolutionary concept that a human sufferer would have the power to be a substitute and atone for human sin (Westermann, Isaiah 40-66, 263).

Westermann의 표현대로, 이렇게 “새롭고 혁명적인 개념은” 변혁의 시대에 발현된다. 포로 귀환 이후 속죄 개념의 발전을 들여다보면, 이사야가 얼마나 변혁적인 예언자인지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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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요한복음이 예수의 승천 기사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예수의 죽음이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공존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로서 승천 기사를 기록해야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으로서 깔끔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지상적 실체이고(1:1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조만간 떠난다고 예고하신다(16장). 예수께서는 자신의 천상 복귀를 말씀하시기 전에 보혜사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14:16ff). 또한 "보냄"에 대해서도 자주 말씀하신다(12:25ff).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빈 무덤 방문(20:1-18), 도마 사건(vv.24-29), 베드로를 향한 명령(21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와 도마를 통해 부활의 역사성을 설파하고, 베드로를 향한 질문과 명령에서는 제자도를 재차 강조하신다.

저자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을 공유한 집단이 성령강림 이후(post-Easter period) 형성된 공동체라는 증거가 곳곳에 배어 있다. 요한이 자신의 증언과 공동체의 현실 사이에 간극을 둔 이유가 무엇일까?

현 단계에서는 추정에 그치는데,
첫 번째, 공동체가 현재 상황을 공통으로 인지하고 있다면, 요한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학계에서는 요한 공동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요한이 소속된 공동체 구성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부터 현재 직면한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요한이 공동체의 우선순위에 집중해 자신의 복음서를 설파했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 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가르침은 제자도와 선교에 있다. 요한 공동체는 성찬을 비롯해 초대 교회에서 발견되는 예전을 향유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강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죄와 심판, 그와 반대되는 영생에 대해 자주 가르침을 주셨는데,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공동체에 요구되는 믿음은 제자도이며, 그 제자도는 선교라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요한이 베드로를 향한 세 번의 질문과 명령은 이를 확증한다(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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