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학생은 돈을 쓰는 직업이다. 재정이 넉넉할수록 학업에 집중할 여건을 만드는 데 용이하다. 유학생들에게 현지인들보다 3-4배 가량의 학자금을 요구하는 영국은 더욱 그러하다. 학자금 이외에 생활비, 도서 구입 비용 등 지갑이 두둑할수록 돈에 메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

자료를 잘 갖추어야 한다. 어떤 자료를 접하느냐에 따라 공부에 필요한 시간이 달라진다. 학생들이 학교에 학자금을 내고 교수들로부터 배우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교수들이 학생들을 학문의 세계로 진입해 성정하는 최적의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교수의 역량과 교수법, 학생의 역량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 그 외에 자신의 관심사에 따른 자료들을 적절한 시기에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자료 구비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신간 출간 현황은 기본으로 파악하고 있고 절판 도서 등 접근이 쉽지 않은 자료를 확보하는 데 노력을 쏟는다. 컴퓨터 프로그램 중에서는 로고스 할인 도서를 매달 초에 확인하고 있다.

나는 좋은 학교일수록 훌륭한 도서관 시설과 방대한 장서량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 미국 Calvin Seminary의 장점 중 하나가 Calvin University의 Hekman Library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 자료 이외에 미시간 주 내 학교 도서관들로부터 자료들을 대출받을 수 있어서 학업에 필요한 자료들을 대부분 활용할 수 있었다. 현재도 학교 도서관을 통해 필요한 자료들은 거의다 확보하고 있다. 학생 시절에 도서관에서 최대한 많은 자료들을 섭렵할 필요가 있다. 

공부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저마다 사정이 달라서 확보 가능한 시간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최소 5-6시간 정도는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유학생이라면 언어적 한계를 감안해서 8-10시간 정도는 확보해야 원어민들을 겨우 따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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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상관 없이 강연자가 자신이 아는 주제를 다룬다면, 상대방이 전개할 흐름을 예측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금방 따라가고 좋은 성적을 받는 이유가 다름아닌 선지식에 달려 있다.

유학생들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다"이다. 더자세히 말하면 "영어가 부족해서"라는 말이 수식어로 붙는다. 실제로 영어 실력이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나는 언어 이외에 배경지식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한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한다고해서 그 학생이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교수자가 한국말로 가르치고 강의 자료는 영어나 독일어를 활용해서 한글로 공부하더라도 결과는 똑같다. 그는 수업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고 말할거다.

이유는 언어와 상관없이 배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부차적이다. 내가 한국에서 석사 과정을 하고, 미국에서 다시 석사 과정을 했을 때 큰 어려움 없이 수업을 따라가고 최종적으로 좋은 성적을 받은 이유는 서로 다른 언어라 해도 석사 과정을 이미 해봤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내 영어는 형편없었다.

영어의 본토인 영국에서 내가 여전히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살아 남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박사 학위 논문과 관련한 배경지식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실제로 관련 연구들을 이미 해두었다. 학생들을 소규모로 뽑고 평가가 객관적이라고 소문난 지도 교수는 나를 믿고 놔두고 있으며, 다른 교수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내게 직접 말해주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평가자인 영어 원어민들에게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당연히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형편 없는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영작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칼빈에서 영작은 대체로 A를 받았고, 이곳 영국에서도 Probationary Review를 두 명의 심사자로부터 단번에 통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어민으로부터 Proofreading을 한번도 받지 않고 12,000자를 조금 넘게 써서 통과했다고 하니 놀라는 사람들이 있긴하다. 더구나 한국에서 distance learning으로 진행했다고 하니 더 놀란다. 실제 내 영어 실력은 상당히 별로 인데,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영작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

지도 교수가 진행하는 박사 과정 세미나에서도 나와 같이 참석하는 동료학생이나 지도 교수가 턱없이 후달리는 내 회화 능력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 없이 3시간씩 진행 할 수 있는 이유는 자료들을 두 번 정도 읽고 참석하기 때문이다. 질의응답과 토론에서 내 표현이 서툴지만, 책과 소논문을 어느 정도 소화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도 교수가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신학 출판계에서 출판 흐름이 바뀐 탓에 영미권과 격차를 줄이고 있다. 지금은 한국어로 배경지식을 탄탄히 갖출 여건이 된다는 말이다.

여전히 영미권에서 공부한다면 영어는 제법 큰 장벽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그 어느때보다 장벽을 극복하기 수월한 시대이다.

[성찰] - 독창적 사고를 위하여 3. 독창적 사고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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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 요구 역량

성찰 2022. 12. 8. 03:26

UStA 신학부 박사 과정 학생들은 입학 후 바로 Probationary Review (PR)를 6개월 동안 진행한다. PR 심사에서 지도 교수를 포함한 두 심사자로부터 만장일치 통과를 받지 못하면, 1번의 수정 기회가 주어지고 재심사받게 된다. 재심사에서 통과를 못 하면 MLitt으로 학위를 받도록 강등된다. 이 과정을 거친 학생들은 보통 UStA 박사 과정에 재진학할 수 없고, 다른 학교의 박사 과정에 진학한다.

PR을 통과하면 바로 Literature Review (LR)를 진행한다. 이 단계에서 지도 교수가 만족하면, 학생과 합의해 논문 작성 일정을 수립하게 된다. 이후에는 일정표에 따라 소논문을 제출하면 된다. 보통 학생들이 일정을 지키지 못해 지도 교수를 피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PR을 통과하면 지도 교수들은 자기 학생들에게 학회 발표와 학술지 출판을 권장한다. 초반에는 PR을 학회 발표에 활용하고, 추후 연구 일정에 따라 제안서를 만들어 학회에 제출한다. 적절한 기회가 닿는다면, 학위 논문 작성을 위한 자극제의 역할을 하고 박사 학위 취득 후 학계 진출을 위한 경력 관리가 동시에 이뤄진다는 장점이 있다. 학위 논문 작성을 마치고 발표와 출판에 집중해도 되지만, 새로운 제안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현재 나는 LR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학회 발표와 학술지 출판에 도전해야 한다. 학위 과정을 마치기 전에 3~4번 정도 발표 이력을 쌓고, 소논문 1~2편 정도 출판하려는 목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목표일 뿐, 나로서는 학위 논문에 모든 역량을 쏟을 예정이다.

최근 학회에 제출할 제안서들에 대한 조언을 지도 교수로부터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PR에 제출한 페이퍼를 활용한 제안서가 가장 강력하단다. 다른 제안서들은 Calvin Seminary 시절 A 학점을 받은 페이퍼들이다. 최근에 쓴 글일수록 학술적 역량이 최고치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내가 봐도 PR을 위해 쓴 글의 수준이 가장 높긴 하다. 

지도 교수의 조언에 따라 제안서 하나를 수정하고,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제안서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다듬어서 다음에 활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야겠다. 아직은 쓸데없는 고민이고 매 과정 성장통을 겪는데, 박사 학위 소지자가 되어도 학계에서 요구하는 역량에 도달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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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생활 3년에, 현재 영국 유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야말로 영미권에서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수학 국가와 기간을 보면 영어를 꽤 잘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원어민들과 대화할 때, 특히 상대방이 내 말을 못 알아듣거나 내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 느끼는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나로서는 신기하게도, 영어에 가장 까다러워야 할 교수들은 정작 나에게 후한 평가를 준다는 사실이다.

Calvin Seminary 시절 교수들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고 independent study로 학점을 이수해도 그들은 점수를 후하게 주었으며, 내가 추천서를 요청할 때마다 지원 학교를 가리지 않고 다 써주었다. 현재 재학 중인 UStA에서는 지도 교수가 내 영어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작년 Probationary Review에서 지도 교수 외 다른 심사자도 내 영어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이 없었다) 매주 교회에서 인사만 해도, 세미나 때 말수가 적어도 서운한 내색이 전혀 없다. 나를 2년 정도 지켜보고 있고 지금은 아직도 Literature Review를 진행하고 있는데, 내가 준비되었을 때 제출하라고 할 정도로 나보다 더 여유롭다. 내 지도 교수를 아는 사람들은 잘 알지만, 그의 웃는 모습과 다르게 평가는 아주 냉정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학생을 엄선해 선발하기로도 유명하다. 내가 그의 프로필을 2년 동안 지켜보니 박사 과정 학생을 4명 넘게 지도한 적이 없다. 현재 4명을 지도하는데, 2명은 본인이 선발한 학생들이고, 다른 2명은 Second Supervisor로 지도한다. 그런 그가 왜 나에게는 좋은 평가를 주고 여유롭게 기다려주는지 내가 궁금할 정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 경쟁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 나는 영어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객관적인 평가 자료인 페이퍼에서 영어에 관한 비판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영어 이외에 요소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볼 수 있다. (구글 번역기와 grammarly의 성능 향상?) 내가 교수들에게 제출해서 좋은 평가를 받은 페이퍼들을 생각해보면, 그 글들은 모두 선행연구의 대세를 따르지 않고 내 나름의 분석과 주장을 담고 있다. 지금도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내 구상과 비슷한 선행연구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여기에 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선행연구를 최대한 많이 읽고 분석하면 내 나름의 견해가 생긴다. 의도하지는 않지만 나는 소수 견해에 가까운 입장에 자주 서게 된다. 아니면 아예 없던 주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교수들은 여기에 흥미를 느끼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 구상을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내곤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해 보인다. 교수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발상을 들고 오는 학생들은 제법 있지만, 막상 글로 써오는 학생들은 드문 모양이다.

교수들의 평가와 내 경험을 버무려 보면, 확실히 나는 영어 이외의 요소로 현재까지 살아남고 있다. 내가 영어를 남들만큼 한다면 내가 영어를 잘하니까 영미권 학교에서 살아남는다고 말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내가 가진 무기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언어 이외의 경쟁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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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신학

성찰 2022. 9. 28. 00:50

신학 전공자들은 몇 가지 언어를 익혀야 한다. 내가 박사 과정 지원을 문의할 때, A 교수는 나에게 입학 전에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현 지도 교수는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독일어 자료를 읽어보라고 말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기본이라 물어보지도 않는다.

요한복음을 주요 본문으로 연구하면서 본문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지 고려해보면, 1세기 유대인들이 사용했을 헬라어나 히브리어 등이 아니라 당시 문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배경 연구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신학이다. 요한복음을 위해 구약을 포함해 다양한 문헌들을 읽어보면,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의  언어나 문화 등을 넘어서는 신학이라는 큰 그림을 파헤쳐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보면, 지역에 따라 특이점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학자들 개개인의 신학이 해석을 좌우한다. 

내게 언어가 필요한 이유는 성경 저자의 신학을 재구성하려는 목적을 위해서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그당시 언어가 갖는 의미를 일차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해석들을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성서학계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영어와 독일어를 사용하므로, 내가 그 언어를 공부할 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의미가 없다. 

언어에 특출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언어는 일차적인 도구일 뿐 의미를 도출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신학은 언어 이면의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학위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성경 해석을 위한 공부라면, 신학적 사고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언어가 사고와 세계관을 지배하는가 [로버트 파우저의 언어의 역사]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8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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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아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세대 차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데, 같은 세대 군에 있어도 사고방식이 꽤 차이나는 경우가 있다.

요한복음이 통용되던 1세기는, 지금만큼은 아니겠지만,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요한복음의 청중과 독자들은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 신앙 등을 가진 개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텐데, 요한의 입장에서는 최대 교집합을 토대로 자신의 사상을 정리했을 개연성이 높다. 나는 요한복음의 유대적 특성들을 근거로 요한 공동체 혹은 요한복음의 대상으로 설정된 집단은 유대교에 익숙한 희심한 기독교인들로 간주한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유대 메시아 사상은 기존 문법과 변형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요한은 오늘 날 우리가 분류하는 구약과 당시 의례였던 절기 등을 최대한 활용하되, 그 전통들을 자신이 이해한 구속사에 근거해 적절히 변형해 사용한다. 그러므로 유대 전통과 요한의 사용 방식 사이에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발견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인간의 인지 능력은 항상 한계에 부딪힌다. 이미 예수의 공생애 시절에 그러했고, 그의 구속 사역 이후에도 여전히 그러한 일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같은 한계에도 요한은 예수의 생애를 모두 기록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남겨두었다(20:30-31; 21:24-25).

이러한 현실에서, 더구나 2000년이라는 세월 사이에 존재하는 각종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석자의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하게 본문을 해석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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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재밌고 성과가 잘 나오는 편이라 이 길을 계속 가고 있다. 그런데 공부가 항상 재밌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재미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지도 교수와 심사 위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써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재미보다는 고단함이 더 겹겹이 쌓아올려진다. 나는 이미 충분히 재밌고 흥미로우며 궁금증이 해소되었지만, 타인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면 기나긴 과정이 필요하다.

내 기분이나 집중력 등과 상관없이 매일같이 라운델에 나와서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그 고단함이야말로 나를 전문가로 만들어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로 주변의 평가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개인의 감정과 별개로 훈련을 통해 늘 평균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야구는 잘 모르지만, 3할대 타자가 늘 3할을 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망치는 경기가 있을 수 있지만, 가끔씩 터져주는 경기들 덕분에 3할이라는 평균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학문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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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 과정을 지속하다 보니 논쟁에 대해 논박과 논증에 익숙해져 있다. 최소한 고등학교 교육까지는 정답 맞추기 교육에 익숙해지다가, 대학에서 비평적 사고를 요구받게 되고, 상위 과정으로 올라갈수록 기존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학생이 고평가를 받게 된다. 학문의 영역에서는 변증가의 자질이 꽤나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내 경험에 한정하면, 교인들은 성경 본문 자체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역할 등 기독교 신앙 전반에 걸친 설명을 성경에 기초해서 듣고 싶어 한다.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려면 목회자는 성경을 본문에 충실해서 전달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본문 해석에 대한 몰이해/반론이 발생할 경우 변증이 필요하겠지만, 비중으로 따지자면 해설자의 역할이 훨씬 더 높다. 이 외에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사항이 더 많겠지만, 학계와 교계에서 필요한 능력의 차이점은 대략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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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는 역사적 기술 가운데 선지자 예레미야의 활동을 기록하여, 당시 삶의 현장에서 선포한 예언들의 성격과 예레미야의 차별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다. 내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갖는 인상들은 아래 글에 담겨 있다.

예언자의 현실 감각

예언자의 자질


이 글에서는 대다수 관료들과 예언자들과 달리 바벨론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 예레미야의 현실 감각에 견주어 이사야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적 진술로 서술된 예레미야서와 달리 이사야서는 예언이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사야의 역사적 단편은 부분적이며,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히스기야 왕과 관련이 있다.

내가 볼때 이사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가장 심하게 겪은 예언자이다. (차후 내 견해가 달라질 수 있음) 많은 예언서들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이라는 주제가 이사야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후반부로 갈수록 이스라엘의 회복, 특히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 전문용어로 Davidic Messianism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유래 없는 진술들이 나온다. 그 중 하나는 고레스 왕에 대한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진술이다.

1. 하나님의 목자, 그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 왕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목자는 대체로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기름부음은 왕과 제사장에 해당하는 특정 계급의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방 왕 고레스에게 전례 없이 이방 왕에게 "내 목자"와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 받은"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방인들을 하대했던 이스라엘의 문화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표현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러한 이례성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 동안 다윗과 같은 메시아적 인물을 통해 성전 재건이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방 왕 고레스를 통해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전승과 믿음을 극복하여 고레스를 다윗과 같은 메시아적 왕에 견줄 만한 인물로 묘사한다.

2. 고난받는 종
선행연구에서 '고난받는 종'의 정체에 관한 견해가 갈린다. 나는 이 용어의 실제 대상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스룹바벨이라고 보고 있다. (차후 내 견해가 달라질 수 있음) 스룹바벨은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성전 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러한 행적은 그로 하여금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이라는 유대 메시아 사상에 충족할 만하다.

그러나 스룹바벨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성전 재건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 인물의 죽음에 감정 이입되어 시적 표현을 남겼다고 여겨진다.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는 급격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인물의 죽음 이후 다윗과 같은 메시아의 등장이라는 기대는 급격하게 누그러진다. 이사야 조차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귀환 공동체의 현실은 더욱 나빠졌다. 이전에는 번제를 열심히 드리는 행위라도 있었건만(1:10-13), 이제는 안식일 조차 지키지 않는다(56:1-7).

이러한 현실에서 이사야는 자력갱신의 가능성이 없는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현실을 지켜보고, 끝내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게 된다(66:22).

이 두 가지는 이사야가 유대 메시아 사상과 관련한 이상과 현실에서 겪은 생소함과 난이함 사이에서 괴리감을 겪게 되고, 그 결과로 오직 이사야서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신학 사상을 도출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통해 새로운 신앙의 눈을 뜨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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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순결

성찰 2022. 5. 24. 11:04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개인의 성품과 행위가 선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주머니가 가벼워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구제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거짓말에 속을망정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아도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귀한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답답하다. 이들은 남들도 나와 같을 거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보다 자신의 이익에 밝은 사람들이 더많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묘하게 거짓말하고, 친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많다. 그들 역시 남들도 나와 같을거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당할 바에는 자신이 남을 이용하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선함을 지키고 교묘한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타인이 자신과 같다는 신념을 버려야 한다.
 
부정함을 모르고 사는 길이 순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더러움을 알고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결단 역시 순결을 지키는 길이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도 이리와 같은 자들이 많이 있다. 신앙의 언어를 빌리지만,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순박한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적잖이 휘둘린다. 수많은 교회가 엉망진창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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